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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이자는 검성의 길을 걷는 것 같습니다-133화 (133/287)

〈 133화 〉 16. 각성 (9)

* * *

눈을 감은 채, 검왕검의 내부 공간으로 돌입했다.

백신아는 늘 있던 그 자리에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신아야."

대답을 들을 때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주 천천히 백신아가 돌아선다.

"네, 검주."

"잠시 이야기 좀 하자."

백신아를 그 자리에 앉게 한 뒤 나도 그 옆에 앉는다.

우리는 지금, 나란히 앉아서 같은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분은 어때? 좀 풀렸어?"

"풀리다뇨……. 애초에 제가 꽁해 있을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요? 오히려 검주야 말로 괜찮으신지?"

백신아는 분위기를 풀고 싶었는지 익살 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표정은 전혀 풀리지 않았다. 과장된 행동을 취하는 이유도 표정을 숨기기 위해서이다.

연극적인 목소리 아래에 여전히 굳어 있는 얼굴이 있다.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야 뭐, 괜찮지는 않지. 아마 오늘밤에도 악몽을 꿀 걸."

애초에 하루 이틀 정도로 잊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극복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릴 듯 싶다.

"하지만 제대로 매듭을 짓고 싶어서 왔어."

"매듭……, 이요?"

"응."

나는 백신아가 잘못 듣거나 다른 의미로 이해하지 못하도록, 일부러 힘을 주고 말했다.

"넌 잘못하지 않았어."

"이전에도 그런 말씀을 하셨죠."

"맞아, 사실이니까. 난 그런 게 되게 싫거든. 잘못하지 않은 사람이 스스로 잘못했다고 생각하면서 삽질 하는 거."

언제부터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아마도 매우 사소한 계기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느 순간부터 내 몸과 마음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된 사고방식이다.

"죄책감을 품고 괴로워해야 하는 건 그런 일이 벌어지도록 설계한 녀석들이어야 해. 아무것도 몰랐던 데다가, 그 순간 나를 지켜냈던 네가 품어야 할 감정은 아냐."

"그럼 검주께서는 검왕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응."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외에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말이 좋아서 검왕을 초월하는 검사를 만들겠다는 거지, 사실상 지뢰를 설치한 거나 마찬가지잖아. 검은 검사는 그 때문에 인생이 망가졌고, 나도 자칫 잘못하면 완전히 육체를 빼앗길 수 있었어. 그런 인간을 좋게 볼 수는 없지."

내가 검은 검사에게 품고 있는 적의와는 별개다.

그와 나의 차이는 이겨낼 수 있었느냐 이겨내지 못했느냐에 지나지 않으니까.

나는 아주 솔직하게 속마음을 드러냈다.

백신아는 여전히 하얀 공간 너머의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많이 혼란스러워요."

녀석의 입술이 열렸다.

매우 힘겹게 떼어낸 첫 마디였다.

"전 지금까지 제가 도구라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검주에게 유용하게 쓰이고, 제가 가지고 있는 모든 기능을 다하는 것이 저의 사명이라고 믿고 있었어요."

하지만, 하고 백신아는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검주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전 제가 도구라는 사실에 전혀 불만을 가지고 있지 않아요. 오히려 도구로서 태어나, 주인의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긍지를 가지고 있었죠. 검주가 이해할 수 있는 비유로 표현하면 '직업의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백신아는 내가 공감할 수 있는 표현을 골라서 입에 담았다.

직업의식.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 만들어진 물건이 그 역할을 올바르게 완수하는 모습에서 사람은 기능미를 느끼게 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책임감을 가지는 인간은 아름답다.

"그렇지만 저를 제작한 검왕은 검주를 속이고 함정에 빠트리려 하였죠. 그래서…… 혼란스러운 거예요."

백신아의 입에서 짙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검왕의 목적은 명확해요. 쓸만한 재목을 찾아낸 뒤, 시험을 통해서 걸러낸 뒤 조건에 미달하면 몸을 빼앗는 식이죠. 시험에 합격하면 검주. 탈락하면 검은 검사가 되는 거예요."

"아마도. 그런 거겠지."

"그리고 제 생각에, 이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아마 검은 존재 이상의 위협적인 시련이 계속해서 검주의 앞에 나타나겠죠."

"파비아도 그런 말을 했었지. 검은 검사도."

차라리 여기에서 죽는 편이 더 나을 지도 모른다고.

지금 들어도 어이가 없는 말이지만, 그 말이 뜻하는 건 하나다.

그 정도로 무시무시한 시련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저는 도구예요. 그리고 제가 충성을 다 해야 하는 존재는 둘이죠. 검왕, 그리고 검주."

제작자와 사용자.

스스로를 도구로 인식하는 백신아에게 있어서는 어느 쪽도 주인이라고 할 수 있다.

제작자와 사용자의 의지가 일치한다고 믿고 있었을 때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제작자와 사용자의 의지가 서로 충돌하고 있는 지금, 백신아는 도대체 누구의 의지를 따르면 되는 것일까.

그것이 지금 백신아를 괴롭히는 고민인 것 같았다.

나는 백신아의 말을 천천히 들은 후, 가벼운 대답이 나오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 문제를 고민했다.

백신아의 고민을 들은 순간 내 안에서는 이미 결론이 나왔다. 하지만 그 결론이 과연 가벼운 것은 아닐까. 백신아가 들었을 때 상처 입을 대답은 아닐까. 그 점을 고민하느라 생각이 길어졌다.

내 안에서 확신이 서고 나서야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당연히…… 내게 충성 해야지."

"검주가 그런 결론을 내리신 이유를 듣고 싶어요."

백신아가 투명한 눈동자로 질문했다.

정말로 궁금해서 물어보는 얼굴이다.

녀석의 눈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진지해져 있었다.

"검사가 제대로 된 검을 골라야 하는 것처럼, 검 역시 제대로 된 주인을 골라야 해. 그리고 난, 내가 검왕보다 훨씬 더 제대로 된 주인이라고 생각하거든."

충성, 직업의식.

이런 건 제대로 된 주인이나 조직에서나 할 수 있는 말이다.

제대로 되먹지 못한 주인에게 충성한들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다.

이건 백신아 개인의 충성심이나 긍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문제다.

아무리 주인에게 충성을 하고, 직업의식을 똑바로 가진다고 해도 그걸 받아주는 상대가 엉망이면 의미가 없으니까.

손뼉도 서로 손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다.

일방적인 충성심, 일방적인 신뢰로는 아무것도 해낼 수 없다.

"검주는 검왕을 실제로 본 적이 있는 것도 아닌데, 무척 자신 있게 말하시네요."

"척하면 척이지. 내가 이번에 겪은 일만 봐도 대충 견적이 보이는데."

내가 보기에 검왕은 사이코패스 내지 고기능 소시오패스쯤 되어 보이는 인격이다.

그러니까 제자인 파비아도 학을 떼면서 방식에 반발하는 거지.

"그래서 네 생각은 어때? 검왕하고 나, 어느 쪽이 더 훌륭한 주인 같아?"

"저는……,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나는 짐짓 실망한 티를 내지 않고 어깨만 으쓱였다.

안 그래도 피폐한 상태인 백신아를 더 갈등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전 도구인 주제에 검주를 크게 다치게 만들었어요. 그 사실에 죄책감도 가지고 있죠. 하지만…… 검왕은 저를 이 세상에 나오게 해주신 분입니다. 그 분을 완전히 부정하는 건…… 제겐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에요……."

"그건 네 잘못이 아니라니까."

허 참.

고개가 옆으로 픽 숙여졌다.

"전, 이래도 되는 걸까요? 검왕이 잘못되었고, 검주가 올바르다는 건 저도 알고 있어요. 검왕은 검주에게 큰 피해를 입혔고, 검주가 오로지 피해자의 입장에 서 있다는 것도 알죠. ……그걸 다 알면서도 검왕을 포기하지 못하는 제가, 나쁘게 보이지 않으세요?"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너도 꽤 고민이 심하게 되는가보다?"

"……네, 검주는 참 훌륭한 주인이니까요."

쭉 힘이 없던 백신아의 입에서, 가장 힘 있게 나온 말이었다.

그것만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는 듯.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검주는 검왕과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훌륭한 주인이에요. 오히려 이건…… 속 시원하게 검주가 최고라고 말하지 못하는 제가 못된……"

"괜찮아.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내가 최고라고 말하게 되는 날이 오겠지."

"검주……."

나는 최대한 대수롭지 않게 들리도록 목소리에 힘을 썼다.

백신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아무리 부모가 막장이라고 해도 속 시원하게 부모를 욕하고 돌아설 수 있는 사람은 드문 법이다.

백신아에게 있어서 검왕과 명공은 부모나 다름 없었다.

녀석이 크게 내적갈등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 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에 나는 백신아의 대답에 서운함을 느낄지언정 크게 분노하지는 않았다.

이해할 수 있고, 납득할 수 있는 범위의 대답이었으니까.

"신아도 말했지만, 사람의 감정이라는 게 쉽게 변하는 게 아니잖아. 언젠가는 네가, 나를 최고라고 말하는 날이 올 거라고 믿어."

나는 왼팔이 떨어져 나간 어깨를 슬쩍 들어보이며 말했다.

"어차피 앞으로도 계속 같이 일할 거잖아?"

"같이…… 검주는 괜찮으시겠어요? 많이 찝찝하지 않을까요? 그 왼팔의 고통을 아직 잊지 못하셨을텐데……"

"가장 큰 원흉은 일단 제거했고, 네 가상 공간에도 그 검은 존재는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어. 그거면 충분하지. 나머지는 시간이, 천천히 고통을 잊게 해줄 거야."

사실 내가 고통에 더 이상 신음할 이유는 없다.

가장 큰 원흉은 쓰러졌고, 더 이상 나의 몸을 빼앗으려 하지도 않을 테니까.

남은 것은 내 정신 문제인데 이것도 차차 극복해 나가리라 믿는다.

"오히려 지금 이 상황에서 도망치려 할수록 극복하는 건 더 늦어질거야. 보름 동안 기절하고, 삼일 동안 끙끙 앓았으면 이제 충분하지. 난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그리고."

난 백신아 쪽으로 천천히 돌아앉은 뒤, 큼지막한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넌 내가 상처 입은 이야기만 하고 있는데…… 사실 크게 다친 건 너도 마찬가지지. 갑자기 검왕검의 주도권을 빼앗긴 데다가 긍지에도 크게 상처를 입었잖아."

내가 얻은 것이 몸의 상처라면 백신아가 얻은 것은 긍지의 상처다.

어느 쪽도 쉽게 아물지 않는 것이다.

나와 백신아가 입은 상처의 고통은 거의 동일하다.

"너도 나도 모두 크게 상처 입은 상태야. 같이 입은 상처니까, 같이 극복 해야지."

"검주……"

"손상된 정신과 상처 입은 긍지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도망치는 게 아니라 고통과 마주보고, 맞서 싸울 수밖에 없어. 그리고 그건 우리 두 사람이 함께 해야 하는 일이야."

오른손을 앞으로 내민다.

그대로 잡으라는 듯, 힘을 빼며 손바닥을 보인다.

"그러니까 함께 싸우자. 계속."

"……."

백신아는 고개를 숙인 채, 잠시 심호흡을 반복한 뒤 천천히 나의 손을 잡았다.

나도 백신아의 손을 강하게 쥔다. 그 상태에서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다.

"면목이 없네요."

"그래?"

"주인에게 오히려 도움을 받는 도구라니. 부끄러울 따름이예요."

"너무 신경 쓰지 마. 살다 보면 그럴 때도 있는 거지."

난 백신아를 보며 살짝 웃었다.

이내 백신아의 입가에도 천천히 미소가 감돌았다.

* * *

"우선 전 뭘 어떻게 하면 될까요? 늘 하던대로, 수행을 보조하면 되겠습니까?"

"그것도 괜찮지만, 네가 생각보다 기운이 없어 보여서."

"그건…… 그런데요오……. 너무 신경 써주시는 것도 전 살짝 불편……"

"알아, 알아. 하지만 이번에는 네가 기운을 좀 회복하는 게 먼저인 거 같으니까. 이거부터 할 거야."

"도대체 뭘 하실 생각인지, 좀 여쭤봐도 될까요?"

나는 짐짓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일단 네 스트레스부터 좀 풀자. 지하 투기장으로 가서, 널 신나게 날뛰게 해주는 게 내 첫 번째 계획이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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