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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이자는 검성의 길을 걷는 것 같습니다-129화 (129/287)

〈 129화 〉 16. 각성 (5)

* * *

검을 쥐고 늘 하듯이 조용히 집중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육체에서 의식만 따로 떨어져 나온 채, 검왕검의 내부로 돌입할 수 있었다.

보름만에 다시 찾은 검왕검의 내부는 내가 기억하던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아, 하지만 근래 여기에서 쭉 보이던 그 '검은 실루엣' 같은 게 보이지 않는다.

해신을 쓰러트린 후 지속적으로 검왕검의 내부에 모습을 드러내던 수상쩍은 시꺼먼 그림자 같은 게 하나 있었는데, 지금은 그 모습을 코빼기도 찾을 수 없다.

혹시 그 그림자 같은 게 검은 존재의 정체였나?

그 녀석을 쓰러트렸기 때문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건가.

마음속으로 의문을 곱씹으며 새하얀 공간 속을 걸었다.

백신아.

백신아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현실의 감각이 이 공간에 고스란히 적용되는 탓일까. 이 공간 안에서도 나는 왼팔이 없는 외팔이었다.

몹시 생소한 감각이라 나도 모르게 오른손을 연신 꼼지락거리게 된다.

새하얀 공간 속을 한참을 걸어나간 끝에 간신히 찾고 있던 사람을 발견했다.

새하얀 공간의 저편에서, 백신아는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백발을 멀리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백신아."

이름을 부른다.

백신아는 몸을 살짝 떨었지만, 돌아보지는 않았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서, 다시 한 번 이름을 부른다.

"신아야."

"검주……."

녀석이 돌아본다.

나를 돌아본 백신아의 얼굴은…… 젖어 있었다.

"보름만이네요. 무사히 의식을 차리셔서…… 정말 다행이예요."

"너도 무사해서 다행이다. 제대로 주도권을 되찾았네."

"네,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었거든요."

"알고 있어."

내가 그때 검왕검의 잠식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건 백신아가 마지막 순간까지 침식을 늦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도움이 없었다면 나도 검왕검의 침식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거라고 확신할 수 없다.

루이스에게 왼팔을 잘라달라고 소리칠 여력조차 없었으니까.

"하지만 검주도 참 대단하세요. 그 검은 존재는 저의 능력을 흡수해서 저와 거의 동일한 수준의 검술을 발휘하고 있었는데…… 그걸 이기신 거잖아요."

"여러 가지 요소가 겹친 덕이지. 파비아가 전위에서 대부분의 공격을 걷어내준 탓에 나도 준비하는 게 편했어."

어느 정도 준비를 거듭한 나는 최종적으로 검은 존재와 거의 동일한 속도로 맞서 싸울 수 있었지만, 일대일의 대결이었다면 준비할 틈도 없이 단숨에 목이 날아가고 말았을 것이다.

파비아가 나타나서 검은 존재와의 전투를 이끌어준 덕에 나도 혼란스러운 전황 속에서 내게 유리한 방향으로 마력을 끌어올 수 있었다.

백신아가 검은 존재의 침식에 맞서 싸우고, 파비아가 나타나고…… 여러 가지 변수가 발생한 끝에 살아남은 싸움이었다.

"그래서……, 몸은 좀 괜찮아? 표정이 영 어두워서 걱정되는데."

"네, 괜찮아요. 검주. 보다시피, 아주 말짱하답니다."

녀석이 살짝 웃는다.

생기가 영 느껴지지 않는 탓에 마치 밀랍인형처럼 보인다.

말라 비틀어진 미소가 끝에서부터 무너진다.

그리고 그 사실을 백신아 자신도 알고 있다. 녀석은 팔을 마구 휘두르며 무너진 표정을 숨기려 들었다.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한다.

"죄송……, 죄송해요 검주……. 도무지 감정 조절이 잘 안 되네요……."

가슴에 양손을 포개어 얹은 백신아가 상반신을 앞으로 숙이며 신음한다.

전형적인 과호흡 증세였다.

헉, 헉, 헉, 헉, 호흡과 호흡 사이의 간격이 짧아질수록 백신아의 안색이 거무죽죽하게 변해간다.

백신아는 이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신아야!!"

"괜찮아요……. 이, 이 공간의 성질을 아시잖아요……. 여기에서는 아무리 큰 부상을 입더라도 금방 회복할 수 있어요. 검주의 팔처럼…… 바깥에서 떨어져 나간 부위는 회복하기 어렵지만……, 저는…………."

가까이 다가가려던 나를 백신아가 멈춰세웠다. 녀석은 오른손을 들어서 나의 접근을 필사적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죄송해요, 검주. 원래 제가 이러면 안 되는 거죠. 함정에 속아서 왼팔을 잘라내야 했던 건 검주인데…… 제가, 여기에서 이러면 꼭 제가 피해자처럼 보이니까요……."

"무슨 소리야. 그런 걸로 따지면 너도……"

"아뇨. 그렇지 않아요. 저는……, 저는…… 검 실격이예요……. 제게도 도구로서의 긍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 검주를 제대로 지키지도 못했고, 오히려 검주에게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남기고 말았어요……."

내가 한 걸음 다가가면, 백신아는 그만큼 물러섰다.

거리를 좁히고 싶지 않다는 듯, 계속해서 멀어진다.

도대체 이게 뭐하는 짓이지.

싸움은 끝났고, 우리는 다시 자유를 되찾았다.

그런데 왜 이런 문제 가지고 감정이 상해야 하는 거냐고.

하지만 백신아를 위로해주기 위해서 나는 도대체 무슨 말을 꺼내면 되는 걸까.

뭘 해도 입바른 소리처럼 들리게 될 텐데.

바로 그때, 고통이 느껴지지 않아야 했을 왼팔에서 고통이 느껴졌다. 이것은 나 자신의 심리적 고통인 듯하였다.

한쪽 무릎이 덜컥 무너진다.

왼팔이 떨어져 나간 탓에 균형을 제대로 잡기 어려웠다. 비틀거리며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는다.

"검주. 절 버리고 싶다면, 버리셔도 전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너……, 그게 무슨 소리……!!"

"제게도 도구로서의, 검으로서의 긍지라는 게 있었어요. 그리고 그것은 제 주인인 검주을 최선을 다해서 보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윽, 젠장……."

그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백신아에게 문제가 벌어진 걸까, 그게 아니면 나 자신의 문제일까.

다음 순간 나의 의식은 검왕검의 내부에서 튕겨나와, 다시 현실의 몸으로 돌아와 있었다.

"……윽!"

"무슨 일이야. 잘 안 됐어?"

연금술사는 바로 옆에서 나를 지켜보는 중이다. 하지만 나는 한동안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고 거친 호흡만 몰아쉬고 있었다.

생각보다 이번 전투의 후유증이 크다.

나 스스로가 약해졌다는 사실을 느낀다.

몸도, 그리고 정신도.

호흡을 다잡으며 무너진 컨디션을 천천히 수습했다.

나의 오른손에는 여전히 검왕검이 들려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튕겨 나오고 말았지만, 검왕검 자체가 나를 거부하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다시 들어가려고 마음을 먹으면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다시 들어간다고 해서 내가 백신아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있을까.

물론 하고 싶은 말은 많다. 네가 스스로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너도 검은 존재의 침식에 맞서서 나를 구해준 거 아니냐, 뭐 그런 말들.

사실이기도 하고.

하지만 지금의 내가 그런 의도를 온전히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백신아도 그렇지만 지금의 나도 정신적으로 완전한 상태는 아니니까.

입에 발린 말 한두 마디로 설득될 만큼 백신아의 상태가 가볍지도 않고.

지금은 서로 지쳐 있는 상태다.

조금, 시간이 필요한 걸지도 모른다.

"……."

검을 쥔 손을 천천히 풀고, 다시 한 번 강하게 쥐었다.

"하지만……, 넌…… 잘못하지 않았어."

그 한 마디만을 남기고 검을 상자에 돌려놓았다.

이중 삼중으로 다시 한 번 봉인한다.

* * *

"살이 많이 빠졌네요."

전신 거울 앞에 앉아서, 하나 뿐인 손으로 턱을 주무른다.

안 그래도 날카로운 편이었던 얼굴은 더 얇아졌고, 몸의 실루엣도 전체적으로 많이 가늘어진 편이다.

최소한 10kg은 빠진 거 같다.

빠진 걸 감안하더라도 현재 체중은 95kg 전후. 일반인에 비하면 상당히 건장한 체격이지만 헤비급의 평균이었던 얼마 전과 비교하면 영 못 미덥게 느껴진다.

거기에 혈액을 왕창 잃어버린 탓에 혈색도 안 좋고.

"꼭 흡혈귀 백작 같네."

"농담하지 마요."

"하지만, 비슷한 느낌인걸."

의자의 등받이에 팔을 기대고 있던 연금술사가 내 뺨에 검지를 대고 빙글빙글 돌려냈다.

"살이 빠진 것도 괜찮네. 스키니한 느낌이고."

"너무 말라 보이지 않아요? 제 키를 생각하면."

생각외로 연금술사의 반응이 나쁘지 않다.

여자들이 마른 근육을 선호한다는 게 진짠가?

하지만 줄어든 근육 만큼 다시 채워 넣을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징글빙글하다.

이번에는 얼마나 걸릴까.

벌써부터 개고생할 생각에 표정 관리도 못하고 의자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문이 열렸다.

온통 땀으로 젖은 루이스가 지친 표정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면서 들어온다.

"선생님. 저 욕실 좀 쓰고 갈게요."

"아, 마음대로."

"그리고…… 어, 배, 백신현?"

루이스는 드물게도 말을 더듬으며 내 이름을 불렀다.

녀석의 발소리가 분주해진다. 한 달음에 내 곁으로 와서, 양손으로 내 어깨를 콱 잡는다.

"너, 그, 깨……, 깨어…… 났네……."

"넌 계속 훈련하고 있었다며?"

"아, 그, 그게, 뭐, 그랬지. 어차피 네 상태 봐주는 건 선생님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이잖아. 나야 뭐…… 근처를 돌면서 훈련하고…… 경계도 돌고……"

얘가 갑자기 이러니까 무슨 10대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네.

나이를 먹어 가면서, 루이스가 이 정도로 허둥대는 일은 많이 줄어들었는데.

"아."

루이스가 내 어깨에서 손을 떼어낸 뒤 천천히 양팔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하지만 양 손가락은 아직도 꼼지락거리고 있다. 꼭 달군 불판 위의 오징어 같다.

심호흡.

한참 동안 호흡을 조절해가면서 루이스는 간신히 평소의 목소리 톤을 되찾았다. 후우, 하아, 무슨 라마즈 호흡 같다.

"보름이야. 보름 동안 잠들어 있었다는 거, 선생님한테 들었어?"

"어, 조금 전에."

"많이 말랐네. 원래 체중으로 돌아갈 때까지 한참 걸리겠다."

루이스가 혀를 차며 내 몸을 천천히 훑어본다. 여전히 일반인보다는 상당히 좋은 몸이지만, 예전의 나와 비교하면 많이 힘이 부족해 보일 거다.

그러다 루이스는 문득 눈치챈듯 턱을 타고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으며 말했다.

"아, 미안. 나 잠시 샤워 좀 하고 와도 돼?"

루이스는 정확히 20분 뒤에 욕실에서 나왔다. 그리고 편한 차림으로 갈아입은 뒤 그대로 침대 위에 쓰러졌다.

그 옆에는 이미 내가 누워 있었지만, 루이스는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연금술사는 침실과 분리되어있는 공작 테이블 앞에 앉아있다. "문, 닫아줄까?" 그녀는 농담으로 말했지만 루이스는 급하게 팔을 휘둘러대며 "필요 없어욧!" 하고 소리쳤다.

기운도 좋다.

넓은 침대 위에 천방지축처럼 누운 우리는 서로 머리를 맞댄 채 천장을 보고 있었다.

"아, 지친다."

"훈련이 힘들었어?"

"그런 것도 있는데…… 생각보다 발전이 없는 거 같아서."

루이스가 천장을 보며 말했다.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대답이다.

"그런 것치고는 마력의 기운이 심상찮은데?"

천재의 하루는 하루이면서도 하루가 아니라는 말이 있다.

같은 시간을 살아가더라도 천재가 습득하는 속도는 일반인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고작 보름.

하지만 루이스는 그 보름 동안 또 다시 벽을 깨고 한 단계 성장한 것 같았다.

"겨우 그 정도로는 안 되잖아. 신아나 파비아의 경지에 도달하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다구."

"그거야 수준 차이가 너무 심하게 나니까."

"나는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힘이 필요한데. 거기에 비해서 발전 속도가 너무 더뎌서 그래. 특급 모험가 정도면 충분할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잖아."

루이스가 머리를 움직여서 내 머리에 약하게 부딪쳤다.

"최근 들어서 센 놈들이 우후죽순 튀어나오니까……. 뭔가 좀, 힘들어서."

루이스는 천재다.

그건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루이스가 검을 쥔 건 스무 살 때의 일이다. 그렇게 먼 과거도 아니다. 그 전까지의 루이스는 온갖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열심히 살아가던, 평범한 몰락귀족에 불과했었다.

스무 살에 난생 처음으로 검을 쥔 이후, 다른 사람들보다도 훨씬 넓은 보폭으로 성큼성큼 나아갔다.

검을 쥐고 불과 2년 만에 특급 모험가의 영역에 도달한 귀재.

루이스 파르네제.

하지만 그런 루이스의 천재성과는 별개로, 현재의 루이스가 도무지 상대할 수 없는 적이 잔뜩 모습을 드러냈다.

보이드, 스페트로, 검은 존재.

타고난 천재성으로 무의 경지를 끊임없이 높여가던 루이스에게 있어선 기존의 세계관이 크게 무너지는 듯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세상은 넓고, 강자는 많다.

그 사실을 골수에 새겨질 만큼 뼈저리게 느꼈다.

"……."

무슨 말을 해도 위로가 되기 어려운 상태라는 걸 안다. 그래서 나는 루이스에게 뻔히 보이는 위로를 하기보다도, 그냥 손을 뻗어 루이스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루이스는 의외로 얌전하게 있었다. 오히려 머리를 살짝 내쪽으로 가까이 움직인 듯한 느낌도 든다.

"내가 너무 세월을 허비한 건가? 내가 10년……, 아니 5년만 일찍 검을 잡았다면 좀 더 싸움을 잘 풀어나갈 수 있지 않았을까……?"

"네가 5년 더 일찍 검을 잡았더라면…… 지금쯤 저 위에 있는 마그누스나 스텔라 같은 최상위권의 특급 모험가와 드잡이질을 하고 있었을 거야."

그 정도로 루이스의 자질은 가공할 만한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자질도 충분한 수련 기간이 없다면 마음껏 펼칠 수 없다.

루이스는 검을 늦게 잡은 탓에 타고난 자질을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는 걸 후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튼……, 그래서 늦게라도 좀 제대로 해보려구. 물론 지금까지도 열심히 하고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좀 더 제대로."

루이스가 이를 바득바득 간다. 열린 입술 사이로는 "분하드아……" 하고 툴툴거리는 말이 나온다.

그 모습에 나도 새삼 각오를 다잡게 된다.

살짝 몸을 루이스 쪽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나도 몸이 나으면 그때는……"

"……."

말을 하던 중, 불현듯 시선이 마주쳤다.

그것만으로도 서로가 뭘 원하는지 알아 버렸다.

그리고 나는.

* * *

"사제. 잠시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으신가요?"

그때, 침대 아래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렸다.

연금술사의 아래에서 잠들어 있던 파비아가 어느 새 침대 가까이 다가와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밥 달라는 개처럼 위로 눈을 치켜뜬 채로.

하지만 그 목소리는 지금까지의 파비아와 달랐다.

검은 존재와 싸울 때 딱 한 번 들었던, 그때의 파비아가 떠오른다.

나를 부르는 호칭도 같다.

사제??.

"파비아……?"

고개를 돌려서 다시 파비아를 돌아본다.

그녀는 정말로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다시 한 번 내 이름을 불렀다.

"네, 백신현 사제. 파비아 사저랍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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