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 16. 각성 (4)
* * *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루이스는 백신아의 목소리를 들었다.
달라진 눈빛, 위화감이 느껴지는 목소리.
백신현의 얼굴과 목소리에서 전혀 다른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백신아……, 혹시 너야……?"
"네……, 저예요. 루이스 아씨."
불현듯 불길이 흔들리면서 빛의 각도가 달라졌다. 그리고 그때가 되어서야 루이스는 불길 속의 백신현이 투명한 막으로 지켜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초고열의 마력 속에서 백신현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저 막 때문이다.
루이스는 이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검은 존재가 무너지면서 백신아도 검왕검의 제어권을 되찾았다.
그 짧은 사이에 백신현이 팔을 뻗어서 검왕검을 쥐었는지, 아니면 검왕검이 스스로 다가와서 손에 달라붙었는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폭발 직전에 검왕검과 백신현의 오른손이 아슬아슬하게 이어졌고, 그것을 통해 백신아가 육체의 주도권을 넘겨받았다는 사실이다.
폭발의 규모를 한계까지 억제하는 것과 동시에 육체를 지키는 막을 펼쳐 충격으로부터 몸을 보호했다.
불길 속을 헤치며 백신현이 다가온다.
"루이스 아씨. 검주의 몸을 보호해주세요."
"너…… 이제 괜찮은 거지?"
"네, 아마도요."
한참을 비틀거리며 나아간 끝에 백신현의 몸이 폭발의 중심지에서 빠져나왔다.
가까운 위치에서 보면 육체가 걸레짝처럼 망가져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특히 화상이 심하다. 즉사는 막아냈지만, 걸어다니는 시체라고 해도 모자랄 정도로 수많은 상처가 보였다.
"그런 것보다도……, 검주의 몸을 부탁해요. 저는 이제 더 이상 검주의 몸을 움직일 수 없어요. 제가 잘못 움직이면…… 그대로 부서질지도 몰라요. 그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예요."
"알았어."
"전 제한 시간이 끝나기 전까지 검주의 몸을 최대한 회복시켜 보겠습니다.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을 거예요."
아마 제한 시간하고는 전혀 관계 없는 문제일 것이다.
백신현의 육체가 지나치게 망가진 탓에 움직이고 싶어도 움직일 수 없다는 의미이다.
루이스는 천천히 심호흡을 한 뒤, 죽은 나무처럼 서 있는 백신현의 육체를 천천히 양손으로 감싸안았다.
백신현의 육체는 피부라는 얇은 거죽 한 장으로 이어져 있을 뿐, 안쪽은 이미 갈기갈기 찢어진 상태였다. 차라리 다진 고기 같은 감촉이다.
잘못 쥐면 부서질 것 같다.
"루이스……. 신현이는?"
"살아 있어요. 상당히 위험한 상태지만."
가까이 다가온 연금술사의 표정이 좋지 않다.
축 늘어진 백신현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있었다.
심장 소리도 약해져서, 꼭 시체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 생명의 고동을 느낄 수 있다.
루이스는 고개를 들고, 없는 기운을 쥐어 짜내듯 입을 열었다.
"돌아가죠, 이제."
* * *
이상한 꿈을 꿨다.
발목을 붙잡힌 채 깊은 바닷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꿈이다.
숨은 막히고, 수압이 가하는 압력에 갑갑해서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지만, 신기하게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마치 부모의 품속처럼 편안하고 잔잔한 압박이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에 눈앞이 몽롱했다.
이대로 눈을 감으면 그대로 푹 잠들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바로 그때 누군가가 나의 손을 덮석 잡고 물위로 끌어당겼다.
그건.
나를 물위로 끌어 당긴 그 사람은……
"……꿈."
잘 아는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매번 신세를 지는 연금술사의 침실이다.
눈을 뜨자마자 전신이 지끈거리는 걸 보면 아무래도 살아 있는 모양이다.
한 번에 몰려오는 고통 때문에 다시 기절할 뻔 했다.
"아윽……, 크어……"
잘못하면 쇼크사로 즉사할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의 고통이다.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깁스와 부목으로 몸이 고정되어 있는 상태여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지금쯤 내 몸은 불판 위의 오징어처럼 베베 꼬이고 있었을 거다.
눈에 핏발이 올라올 거 같다. 머리털이 몽땅 뽑혀나가는 듯한 느낌이다.
"가만히 있어……. 아직 나으려면 한참 남았으니까……."
내가 고통 속에서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을 때, 아주 가까운 위치에서 연금술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나와 같은 이불을 덮은 채 나의 곁에서 모로 누워 있었다.
초록색 눈동자가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나를 바라본다.
나는 어색한 목소리로 떠듬떠듬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응, 안녕. 신현아."
"혹시, 제가 얼마나 잠들어 있었어요?"
"보름이야."
"네?"
내가 지금 뭘 잘못 들었나.
연금술사는 미간에 주름이 잡힐 정도로 표정을 찡그리더니, 진한 한숨 소리와 함께 다시 한 번 말했다.
"보름 동안 꼬박 잠들어 있었어. 참고로 네 몸은 아직도 덜 고쳐진 상태야."
"허."
"전신골절에, 근육손상, 혈관파열, 전신화상…… 진짜 시체도 너보다는 덜 망가져 있었을 걸."
곁에 있는 연금술사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그녀는 살짝 화가 난 목소리로 내게 불만을 표하고 있었다.
"네 몸에 손을 댄 게 내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공방을 나서기 전에 미리 올리비아에게 부탁해서 준비를 해두지 않았더라면, 넌 죽지는 않더라도 평생 후유증이 남을 정도로 큰 장애에 시달리게 되었을 거야."
"……."
"하지만 네가 무리하지 않았더라면 초신성이 발사됐을 거고, 너는 물론이고 그 직선상에 있던 나도 죽었겠지. 그러니까 나도 참아주는 거야. 무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조금 신기한 기분이다.
혼나고 있는데, 오히려 안심이 된다고 해야 하나.
나한테 그런 취향은 없을 텐데.
"어, 근데 저 언제쯤 일어날 수 있을까요?"
보름 동안 누워 있었다면 그만큼 근육을 쓰지 않아서 줄어들었을 거다.
고통도 고통이지만 근손실이 무섭다.
한 번 잃으면 복구하는데 서너 배 가까이 걸리니까.
"걷는 것 자체는 당장이라도 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근육이 많이 굳어 있을 테니까…… 내가 지금 좀 풀어줄게."
연금술사가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드러난 내 모습을 보니, 진짜 꼴이 가관이다.
미라도 이 정도로 철저하게 붕대를 감아두진 않을 거다.
나는 자리에 누운 상태로 천천히 몸의 감각을 되짚기 시작했다. 오른쪽 다리 오케이. 왼쪽 다리 이상 없음. 오른팔도 정상 작동.
그런데…… 왜 왼팔이 자리에 없지?
어디에 간 거야?
"선생님, 제 왼팔은 어디에 갔죠?"
절단면이 깔끔해서, 그래도 접합할 수 있는 범위 내라고 생각했는데.
연금술사 실력이면 못해서 안한 건 아닐텐데.
"네 왼팔은…… 일단, 나중에 보여줄게. 지금은 근육부터."
"아, 네."
유실되거나 못 쓰게 된 건 아닌 거 같다.
그런 말투는 아니었다.
연금술사는 내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양손으로 굳어있는 근육을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체구도 작고, 힘도 그다지 세지 않은 탓에 양손으로 힘을 주며 눌러대는 게 조금 사랑스럽다.
"어, 그리고 루이스랑, 백신아랑. 다른 사람들은……"
"질문은 하나씩. 그리고, 자세한 건 나중에 말해줄게. 지금은 근육부터 풀어야 해."
"네."
연금술사가 조곤조곤 타이르는 목소리에는 사람을 진정하게 하는 묘한 힘이 있었다.
아, 혹시 이거 언령인가?
뭔가 마음이 편해지는 느낌이다.
"일단 한 가지 미리 말해두자면, 모두 크게 다친 구석 없이 무사해. 루이스도, 그리고 신아도."
그건 알고 있었다.
희미하긴 하지만 나도 기억하고 있다.
초신성의 폭발을 앞에 둔 그때, 스스로 내 손으로 날아와서 달라붙은 검왕검의 모습을.
검은 존재가 쓰러지면서 백신아도 정상적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그런데 정작 검왕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연금술사가 따로 보관하고 있는 것일까.
"루이스는 잠시 외출 중이고, 올리비아는 호텔을 잡아서 숙박 중이야. 마지막에 발생한 마력의 폭발에 의해서 교회가 아예 싹 쓸려나가고 말았거든."
"아."
하긴, 충분히 그럴만한 화력과 범위였다.
폭발 직전 백신아가 주도권을 가져가서 방어하지 않았더라면 나 역시 새까맣게 타버렸을 것이다.
"잡담은 여기까지 하고, 이제 다시 진행할게. 그래도 말은 잘 하는거 보니까 많이 아프진 않은 거 같네."
"그게 아니라…… 너무 아파서 대화라도 하고 싶은 거예요."
솔직히 말해서 지금도 죽을 맛이다.
매 순간 순간마다 피를 토하는 심정이다.
"그래? 그렇다면, 계속 말해봐. 나도 들어줄게."
오늘따라 연금술사가 묘하게 부드럽게 느껴진다.
사람이 평소에 잘 하지 않는 짓을 하면 의심하게 되는데,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 정도로 내가 심하게 다쳐서 그런가?
"후우."
연금술사는 땀을 흘려가면서 완력과 마력으로 내 근육을 부드럽게 이완시켰다. 그 후에는 내 팔과 다리를 손에 쥐고 접었다 펴는 걸 반복하면서 기능을 체크.
몸이 굳은 탓에 유연성도 심하게 떨어졌다. 뚜득, 뚜득, 뚜득, 하고 관절에서 소리가 난다.
"가볍게 걸어다니는 정도는 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아서 또 무리하면 벌어질 테니까…… 무조건 절대 안정. 알아 들었지?"
"알아 들었어요……."
근육도 많이 약해졌고, 그 이전에 몸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서 일어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연금술사의 손을 쥐고, 도움을 받아서 간신히 몸을 일으킨다.
왼팔이 없는 탓일까 균형을 잡는 게 묘하게 빡세다.
휘청휘청하다.
연금술사와 함께 침실을 나와서 몇 걸음을 걸어본다. 한 번 걸을 때마다 조금씩 위화감이 사라지고 자연스럽게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가우우우."
거실에는 네 다리로 앉은 파비아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다.
내가 마지막 순간에 봤던, 나를 사제라고 부르던 모습과는 영 딴판이다.
지금이 골든 리트리버라면 그때의 파비아는 늑대개 같았었는데, 어떻게 된 걸까.
연금술사를 돌아보자 그녀가 가볍게 코를 훌쩍거렸다.
"애초에, 지금 깨어날 예정이 아니었다고 했어."
"그건 무슨 소리예요?"
'깨어났다'?
거 상당히 이상한 표현인데.
그렇게 말하면 지금의 파비아는 꼭 잠들어 있는 것처럼 들리잖아.
"네가 싸우고 있었을 때, 나는 네 코어의 피드백을 직격으로 받는 바람에 쓰러진 상태였어. 그런데 갑자기 저 아이가 말을 걸어온 거야. 코어에 걸린 봉인을 풀어달라고. 잔뜩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파비아의 봉인을 푼 건 연금술사의 독단이 아니었던 건가.
하지만 설마, 파비아 쪽에서 직접 요청을 했을 줄이야…….
"그때 저 아이한테 들은 얘기야. 해신이 쓰러진 이후, 계속 인격을 회복하고 있었다고. 원래는 좀 더 긴 시간을 들여서 인격을 회복해야 하지만 워낙 급한 상황이라 억지로 인격을 겉으로 드러낸거래."
내가 파비아를 돌아보자 녀석은 곧바로 적의를 표하며 소파 뒤로 숨어버렸다.
검은 존재와 맞서 싸우던 파비아와 비교하면 차이가 크다.
단순한데다가 겁이 많다.
"인격이 아직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눈을 뜬 거라 금방 또 잠들어버린 거야. 지금의 이 아이는……, 보다시피 평범한 개과 수인에 불과해."
"가우우우."
네 발로 앉은 파비아가 늘어져라 하품을 한다.
느긋하고, 한심한데다, 멍청해 보인다.
검은 존재와 검을 부딪치던 그때의 모습과 전혀 매치 되지 않아서 머리가 살짝 혼란스럽다.
물어보고 싶은 게 많이 있었는데, 다음 기회를 기다릴 수밖에 없나.
"자, 그럼 다음. 네 왼팔을 보여줄게."
"아, 네."
말하는 걸 들어보면 가져오긴 한 모양인데, 도대체 왜 아직도 접합이 안 되어있는 걸까.
그리고 연금술사는 공방의 테이블에서 투명한 유리병 같은 것을 가져왔다. 그 크기는 매우 크고 길다. 유리병 안에서는 투명한 용액이 넘실거리는 중이다.
내 왼팔은 그 용액 안에 온갖 전극을 붙인 채 둥둥 떠 있었다.
그런데 색깔이 좀 이상하다.
"색깔이 좀…… 어두운 거 같은데요."
"응. 왼팔의 혈관에 시꺼먼 용액 같은 게 유입되었어. 그거 때문에 어두운 톤으로 보이는 거야."
"그건 혹시."
"네 생각대로, 그 검은 존재와 직접 연결되어서 왼팔로 쓰인 영향일 거라고 생각해. 그래서 일단 접합하지 않고 따로 떼어서 보관 중이야. 네게 무슨 영향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으니까."
연금술사가 유리관의 표면에 검지를 대고 주욱 미끄러트린다.
"그래도 음, 일단 용액이 유입된 건 혈관 뿐이니까…….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야. 예를 들어 주기적으로 네 피를 이 왼팔에 주사해서 검은색 용액을 밀어내는 방법도 있고."
연금술사가 내 손을 살짝 잡았다.
"어제까지는 네가 의식불명인 상황이라 그러지 못했지만, 몸이 회복되고 나서 안정기에 들어가면 그때부터 시작하면 돼."
불편하지만 참을 수밖에 없나.
잘못 붙였다가 지금까지 피터지게 싸운 게 모두 도로아미타불이 될 가능성도 있다.
조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통증이 느껴질 리 없는 왼팔에서 따끔한 고통이 올라왔다.
* * *
"참, 그런데 신아는요?"
"여기에 있어. 본인의 부탁으로 지금은 봉인용 부적을 감아둔 상태야."
전례를 생각하면 아마 의미가 없을 가능성이 높다.
백신아는 그걸 알면서도 지금의 처치를 부탁한 걸까.
연금술사가 이중 삼중으로 자물쇠를 걸어둔 상자를 열어서 부적이 칭칭 감긴 검을 들어 올렸다.
한숨을 한 번 쉬고, 왼쪽 어깨에서 올라오는 통증을 무시하며 말을 걸었다.
"신아야."
대답이 없다.
다시 한 번 불러본다.
"백신아."
녀석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몇 번을 불러봐도, 여전히.
하지만 소리는 들렸다.
과호흡 증세가 살짝 느껴지는…… 어둡고, 축축하고, 한탄 섞인 호흡 소리.
백신아의 목소리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