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이자는 검성의 길을 걷는 것 같습니다-127화 (127/287)

〈 127화 〉 16. 각성 (3)

* * *

네 다리로 지면을 딛고 선 파비아가 허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내리라는 신호였다. 파비아의 위에 거의 축 늘어진 상태로 매달려 있던 연금술사가 스르륵 굴러서 떨어진다.

그녀는 낙법도 제대로 취하지 못했다.

"선생님……"

"예상대로…… 꼴이 말이 아니네……."

나 자신도 내 다리로 서 있지 못할 만큼 몸이 망가진 상태였지만, 연금술사의 안색도 만만찮게 좋지 않았다.

다크서클이 짙게 내린 그녀의 시선이 팔이 떨어져 나간 왼쪽 어깨에 머물렀다가 멀어진다.

짧은 순간 그녀의 얼굴에서 수많은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저 녀석의 봉인을 해제한 거예요……? 저 녀석더러, 싸우게 하려고?"

그녀와 나의 마력은 완전히 동일하다.

내 손으로 채운 봉인을 해제하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그녀는 이런 짓을 한 거지……? 난 그게 의문이다.

확실히 파비아는 강하다. 마력의 출력은 특급 모험가에 버금가는 수준이고 본능적인 검술에서는 일류의 품격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겨우 일류의 실력으로는 검은 존재에게 도달할 수 없다.

놈의 기량은 백신아의 기량과 거의 동일했다.

내가 아는 파비아의 실력이라면 전혀 승산이 없다.

검은 존재 앞에 쓰러질 산 제물이 하나 늘었을 뿐.

연금술사는 파비아를 고기 방패로 검은 존재 앞에 세울 생각인건가.

내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 연금술사는 마치 내 마음을 읽어낸 듯 아직 나오지 않은 질문에 대한 대답을 했다.

"알아.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지."

그녀는 나와 마찬가지로 바닥에 쓰러진 상태로 꿈틀거리던 중이다.

쓰러진 그녀의 시선과 나의 시선이 부딪친다.

"하지만 아니야. 나는, 우리는…… 지금 이곳에 이기기 위해서 온 거니까."

"그건…… 도대체……?"

그녀의 눈빛은 죽지 않았다.

오히려 강하게 빛을 내고 있다.

내게는 그것이 승리의 여신이 내뿜는 광채처럼 느껴졌다.

"사, 사, 사사, 사……"

그때, 쓰러진 나의 머리 위로 낮은 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의 것이지만 눈에 띄게 낮고 거친 허스키한 음색.

거의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임에도 묘하게 익숙했다. 당연했다.

내 머리 위에서 들려온 것은 파비아의 목소리였음으로.

처음인 것 같았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명확한 의지를 느끼게 된 것은.

"사, 사제에…… 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사제?

지금, 그녀가 사제??라고 말했나?

내가 잘못 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순간, 그녀의 목소리에서 제대로 된 이성을 느낀 것은 틀림없다.

네 개의 다리로 지면에 선 파비아가 나를 돌아본 채 말을 걸고 있었다.

"나, 나는…… 보, 보기보다 훨씬 강하니까……."

파비아의 말은 그게 전부였다.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든 그녀는 그 검자루 부분을 그대로 이빨로 물었다. 짐승종의 강력한 윗니와 어금니가 검을 단단하게 고정했다.

나와 그녀가 이전에 한 번 격돌했을 때는 보지 못했던 현상이다.

자세히는 모르겠다. 하지만 파비아가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힘을 끌어내기 시작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검자루를 강하게 입에 문 그때 그녀의 투기가 크기를 배로 늘렸다.

이것이…… 파비아의 진정한 실력인가?

바닥을 딛은 파비아의 손과 발에 마력이 휘어감긴다. 그 마력의 형태는 발톱이 세 개 달린 사족 보행 짐승의 다리 같았다.

파비아가 딛고 있는 지면이 쩍 소리와 함께 갈라진다.

그것이 출발의 신호였다.

치직, 하는 소리와 함께 파비아의 몸은 한 줄기 벼락이 되었다.

초고속의 공방이 시작된다.

'기술의 질이 완전히 달라졌어. 이전의 검술과는 차원이 다르다.'

마력의 총량 자체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아 보이지만, 그것을 다루는 기술의 수준이 너무나도 높다.

한정된 출력을 낭비하지 않고, 최고최대의 효율로 발산한다.

검은 존재는 검은 검사와 다르게 아직 주변의 마력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해도 마력을 끌어들여서 상처를 회복하고, 자유자재로 분해와 재구성을 반복하던 검은 검사와 비교하면 아직 완성되지 못한 느낌이 있다.

나는 녀석의 육체가 검자루 틈새에서 터져 나온 검은 마력이 발생한 이후 생성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 사실을 눈치챘다.

그 점을 고려하더라도 검술의 수준이 너무나도 높아서 검은 검사의 전투력을 아득히 능가하고 있지만, 한계와 약점은 명확히 제시되어 있다.

파비아도 그 틈을 파고들고 있는 것 같았다.

위력은 낮지만 확실하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공격을 써서 조금씩 깎아나가는 방식으로 맞서 싸우고 있다.

사족보행으로 내달리는 파비아는 최고 속력은 루이스와 란즈 가주보다 빠르다. 최고 속력에서 최저 속력 사이의 변환 속도나 방향을 전환하는 속도도 마찬가지다.

이 짧은 공방의 사이, 검은 존재에게는 루이스와 란즈 가주의 숨통을 끊을 수 있는 기회가 다섯 번은 있었지만 그 모든 공격이 파비아의 견제 앞에서 가로막혔다.

분신한 것처럼 늘어난 수십 자루의 칼날이 검은 존재를 중심에 두고 원형으로 퍼진다.

그러나 파비아는 검은 존재의 주변을 빠르게 한 바퀴 도는 것만으로도 그 모든 칼날을 튕겨내고 말았다.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사족 보행의 개과 수인에게만 허용된 초고속 이동 능력.

파비아의 갈색 눈동자에서 푸른 번갯불이 튀는 것 같았다.

루이스와 란즈 가주는 갑작스레 나타난 파비아의 모습에 많이 놀란 표정이었지만, 여유롭게 상황을 파악하기에는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 일단 파비아를 아군으로 판정하고 싸움에 나설 작정이다.

둘에서 셋. 파비아가 더해진 것만으로도 눈에 띄게 기울어져 있던 힘의 균형이 어느 정도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물론, 검은 존재에게는 아직 긁힌 상처 하나 존재하지 않는 상태다.

"……."

그녀의 분전은 놀라운 수준에 가깝다.

설령 스페트로가 저 자리에 있었더라도 파비아 만큼 싸우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검은 존재에게는 닿지 못한다.

실력의 차이가 보인다.

파비아와 검은 존재의 차이는 3:7 정도. 거기에 루이스와 란즈 가주가 더해져서 간신히 4:6 정도의 차이로 승부를 이어 나가고 있다.

아직도 승리를 논하기에는 갈 길이 멀다.

"가아아우!!"

그때, 삐죽삐죽 뻗어 있던 파비아의 머리카락에 눈에 띄는 변화가 발생했다. 갈색 머리카락의 색채가 한 순간에 달라진다.

그렇지 않아도 상당한 수준으로 가속해 있던 파비아의 속도에 한층 더 다릿심이 더해진다.

다음 순간 파비아의 머리카락은 붉은색과 흰색의 투톤 컬러로 변해 있었다.

어느새 송곳니로 물고 있던 검의 위치도 달라졌다. 파비아의 양날검은 세로로 쪼개져서 양 손등에 하나씩 결합되었다. 파비아의 양 손등에는 이제 정면으로 날이 선 외날검이 붙어있다.

질풍?風.

파비아의 뒷모습에서 그 단어가 불현듯 떠올랐다.

재재가속된 파비아의 모습은 이제 그 누구도 쫓을 수 없다. 검날이 붙은 위치의 특성상 힘을 제대로 싣기는 어려워졌지만 그 만큼 다리가 날래게 변했다.

조금 전의 전술을 조금 더 심화시킨 듯한 형태다.

큰 데미지를 입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종횡무진 움직이면서 조금씩 상처를 입혀 나갈 생각이다.

파비아와 검은 존재는 그 짧은 사이에도 수없이 많은 충돌을 일으켰다. 그 소리는 빠르게 회전하는 톱날처럼 거칠고 날카롭다.

서로가 부딪칠 때마다 피어난 불씨는 지나치게 짧은 사이에 무수히 발생한 탓에 발생한 순서대로 터지지 않고 한꺼번에 사방팔방으로 터져 나가게 되었다.

마치, 꽃이 잔뜩 피어난 화원을 보고 있는 것 같다.

"……."

이로써 간신히 전투는 대등한 태세를 이루게 되었다.

파비아 혼자로는 부족할지 모르지만 그 차이를 두 사람의 특급 모험가의 힘이 더해져서 좁히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파비아는 물론이고 다른 두 사람의 표정도 좋지 않다.

그것을 지켜보는 나의 표정 또한 마찬가지다.

파비아의 힘이 더해짐으로서 절망적인 차이를 좁히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하지만 고작 거기까지가 한계다.

검은 존재의 검술은 천변무궁류의 흐름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다.

지금의 전황이 간신히 백중세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검은 존재는 이제 막 눈을 떴을 뿐더러, 흐름을 장악하기 시작한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아직 천변무궁류의 시동이 전혀 걸리지 않은 상태다.

그럼에도 호각.

이것이 어떠한 의미인지 나는 알고 있다.

간신히 만들어낸 지금의 균형은 과연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까. 10초 뒤? 아니면 100초 뒤?

확실한 건 언제 균형이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 뿐이다.

이 균형이 무너지기 전에 끝을 보기 위해서는 루이스와 란즈 가주, 그리고 파비아 위에 또 하나의 '힘'을 추가로 얹을 수밖에 없다.

지금의 내게 검은 없다. 하지만 검집은 여기에 있다.

마력을 전달할 수 있는 매개체가 있다면 나는 아직 천변무궁류의 검사로서 싸울 수 있다.

나는 바지 주머니에서 두꺼운 양피지를 한 장 꺼내서 피로 마법진을 그린 후 왼쪽 어깨의 절반부에 접착했다. 미리 지혈을 해둔 덕일까. 양피지에 묻어나온 피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양피지에 그린 것과 완전히 동일한 진을 연금술사의 손바닥에 그린 후, 그녀에게 힘을 주고 말했다.

"지금부터 심장을 펌프질해서 혈액 순환을 가속시킬 생각이예요. 하지만 이 상태로는 아마 심박수를 높이는 순간 왼쪽 어깨의 절단부를 통해서 혈액이 터져 나올 가능성이 높아요."

지혈은 해두었지만 임시방편일 뿐이다.

혈류의 속도가 높아지면 그 즉시 다시 피가 터져 나올 것이다.

"그러니까 선생님이 제 피가 흘러나오지 않게, 마력으로 잡아 주세요."

어깨의 양피지와 연금술사의 손바닥에 같은 진을 그린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녀가 도와준다면 나도 안심하고 혈류를 가속시킬 수 있다.

"알았어."

연금술사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나서 몸을 일으킨다.

아직 내 몸뚱이에 남아있는 한줌의 마력을 수습한다. 그것을 한 점에 집중시켜서 명확한 형태를 띄게 만들었다.

이 마력을 그대로 심장을 움직이는데 사용했다. 마치 심장 마사지를 하는 것처럼 스스로 펌프질을 해서 혈류의 속도를 빠르게 한다.

혈류의 흐름이 빨라지면 혈액을 타고 흐르는 산소도 빠르게 움직인다. 자연스레 호흡도 가빠지기 시작한다.

동시에 뇌에 공급되는 산소의 양이 갑작스레 늘어난 것을 느낀다.

혈액을 잃어버린 만큼 머리에 산소가 돌지 않아서 의식이 몽롱했는데, 지금은 마치 안개가 걷힌 것처럼 머릿속이 맑다.

고통도 다시 느껴지기 시작했지만…… 지금은 감수할 수밖에 없다.

왼쪽 어깨를 통해서 유출되는 혈액은 없다. 연금술사가 제대로, 단단히 잡아주고 있다.

그 상태에서, 나는 이상한 방향으로 꺾여 있던 오른팔을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뼈는 부서졌지만 근육은 살아있다. 여기에 마력의 보조가 더해지면 아예 못 쓰게 되기 전까지는 계속 움직일 수 있을 것 같다.

거리낌 없이 힘을 쓸 수 있다.

질풍이 분다.

천변무궁류의 제일검이 시작된다.

검은 존재와의 싸움은 강력한 기술 하나로 끝을 볼 수 있을 만큼 단순한 상황이 아니다. 검은 존재는 견고하기 그지없어, 한 번의 공격으로 파고드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애초에 내 기량으로는 깊숙히 파고드는 것도 어렵다. 실력 자체도 검은 존재에게 뒤지는 데다, 한쪽 팔까지 잃어버린 상태이니까.

그러니까 나는 일단, 파비아의 공격에 정신이 팔린 검은 존재의 빈틈을 파고드는 방식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검은 존재와 파비아 사이의 거리는 불과 60cm도 되지 않는다. 그 짧은 공간 사이로 무수히 많은 검로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마치, 쇠로 된 실로 감은 둥근 실타레 같다. 그 정도로 수많은 검로가, 서로 겹치지 않고 무수하게 펼쳐져 있다.

하지만 틈은 있다. 루이스와 란즈 가주, 두 명의 특급 모험가는 그 빈틈에 날을 끼어넣고 밀어붙이는 식으로 검은 존재를 견제하는 중이다. 그를 통해 파비아에게 가해지는 부담을 크게 줄이고 있다.

내가 천변무궁류의 제일검을 통해 파고든 것도 그러한 틈새 중 하나다. 유성의 초고속 이동을 통해 그 틈새를 세게 후려치고, 그 기세 그대로 검은 존재의 측면을 스치듯이 지나친다.

"……."

『…….』

흐드러지는 칼날.

실타레처럼 복잡하게 얽힌 검로.

그 틈새로 나와 검은 존재의 시선이 한 순간 부딪친다.

치이이이익!! 검은 존재의 옆을 스치고 지나간 직후, 신발 밑창을 바닥에 마찰시키면서 정지한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더, 간다.

'천변무궁류…… 제일검.'

하얀 유성.

바득, 하고 이빨을 세게 악물었다. 질주하던 방향이 한 순간에 틀어져서, 다시 한 번 검은 존재를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또 다른 틈을 노리고 검집을 휘두른다. 하지만 그때마다 오히려 튕겨 나가는 건 내 쪽이다.

초고속으로 회전하는 톱날처럼, 검은 존재의 검로가 자아낸 결계는 나의 침입을 전혀 허용하지 않았다.

제대로 부딪친 것도 아니고 스쳐 지나가면서 가볍게 툭 건드린 것만으로도 검을 휘두른 손가락, 손목, 팔꿈치, 어깨가 한꺼번에 찢겨 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충격이 찌릿찌릿 올라온다.

치이이이익!! 다시 한 번 신발을 바닥에 긁어대다시피 하며 멈춰선다. 또 다시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해 뛴다. 천변무궁류의 제일검이 시동한다.

파직! 파직! 파직! 파직!!

지금의 공방에서, 나는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다. 파비아가 검은 존재의 7할을 상대하고 있고 나머지 셋이 각각 1할씩을 맡아서 맞서 싸우는 상황이니까.

검은 존재의 견고한 방어를 돌파하기에는 아직 힘이 모자라다.

그렇다면 좀 더 빠르게, 무겁게.

쉬지 않고 제일검을 연달아 펼쳐 나간다. 관성을 무시한 초고속의 연속 이동.

어느 시점부터 나의 몸뚱이는 무리한 운동의 충격을 견뎌내지 못하고 조금씩 깎여 나가고 있었다.

관성을 버티는 발목은 관절째 뽑혀 나갈 것 같고, 몸의 심지에 위치한 등뼈가 삐걱삐걱 떨린다.

고통이 심하다.

하지만 그 고통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잊어버리게 될 만큼, 나는 나의 전신을 타고 흐르는 힘과 속도에 황홀해하고 있었다.

제일검을 한 번 쓸 때마다 조금씩 전신에 힘과 속도가 더해지기 시작한다.

검은 검사와의 충돌에서는 미처 쓰지 못했던 기술이다.

지금도 아직 완성이라고 부르기에는 멀지만, 검은 검사와의 싸움에서 사용했던 것과 비교해서 조금 더 빠르고 세련되게 변한 것은 사실이다.

처음 사용했을 때보다 속도의 상승세가 빠르다.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빠르고 무거워진다.

나는 피를 토하며 소리쳤다.

"오아아아아아아앗!!"

『……!!』

언제부터인가 나는 이 공방에서 거의 파비아와 비슷한 수준의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파비아가 짊어지고 있던 부담을 상당수 덜어냄으로써 그녀의 공격에도 활력이 돈다.

지금의 나는 일시적이나마 그녀와 대등한 힘과 속도로 공방에 임할 수 있다.

쿵!! 거의 동시에 휘둘러진 나와 파비아의 일격이 검은 존재를 멀리 밀어낸다.

검은 존재가 딛고 있는 대지째 깎여 나가며 드극드극 그의 몸이 쭉 미끄러진다.

곧바로 추격하려다───, 나는 순간적으로 멈춰섰다.

한계까지 뇌가 팽팽 돌아간 상태였기에 감지할 수 있었던 한 순간의 위화감이 나의 다리에 제동을 걸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러지 못했다.

이것은 순전히 천변무궁류의 검사와 그렇지 않은 자들의 차이였다.

파비아조차, 그 위화감은 통찰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나는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애초에 그럴 틈도 없었다.

파직!!

마치 순간적으로 시간이 삭제된 것 같았다. 돌아가는 필름의 중간 부분을 잘라낸 것처럼 자세한 수순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눈도 깜박하지 않았는데 다음 순간에는 세 사람의 몸뚱이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가 떨어져 있었다.

'늦었나……!!'

검은 존재의 검술 또한 천변무궁류의 흐름에 기초하고 있다.

시간을 끌수록 강력한 기술이 펼쳐지는 건 당연한 이치다.

그 전에 쓰러트리는 것이 지상과제였지만 역시, 검은 존재에게 지나치게 시간을 줘 버린 듯 싶었다.

다행히 나가 떨어진 세 사람은 모두 살아있다. 애초에 그들을 날려 버린 것은 천변무궁류의 기술이 아니라…… 그것이 펼쳐지기 전에 발생한 준비 과정에 불과했으니까.

그리고 지금부터 펼쳐지는 것이 바로 놈의 진정한 기술이다.

머리 위로 치켜든 검왕검을 중심으로 강맹한 마력이 맺히기 시작한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규모로, 상상할 수 없는 열기를 품은 채.

천변무궁류?????

일식필살검一?必??

무無

초신성???

모든 천변무궁류의 기술 중에서도 그 범위와 위력은 최강을 자랑하는 필살검이다.

현재의 나로서는 아무리 준비를 해도 쓸 수 없는 기술이기도 하고.

그 위력은 산을 찢고, 바다를 가르며, 하늘을 부순다.

아마 회피는 불가능하다. 공격의 범위가 터무니없이 넓은 탓에 회피하려고 해도 그대로 휩쓸리기만 할 거다.

방어 또한 불가능.

조금이라도 접촉한 순간, 나의 육체는 부서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증발하게 될 것이다.

란즈 가주의 팔이 초신성이 조금 스친 것만으로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처럼.

그렇다면 돌파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

공격이 오기 전에 부술 뿐.

천변무궁류의 제일검은 검을 휘두르는 움직임에 따라 모여든 마력의 기류를 일점에 집중시킨 끝에 탄생하는 기술이다.

지금의 나는 그 제일검을 수도 없이 반복하는 것을 통해 더 많은 마력을 더 높은 압력으로 집중시켜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고 날카로운 기류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기류가 한 방향으로 집중된다.

달려 나간다.

그에 비해서 검은 존재의 행동은 간단하다.

머리 위로 치켜든 검을 앞으로 휘두르기만 해도 족하다.

그저 그뿐인 행위로 천변무궁류의 필살검은 완성된다.

앞으로 뻗은 검집이 공간을 찢으며 쭉 나아간다. 검과 검집, 처음부터 하나였던 두 존재가 최후의 충돌에 들어간다.

하지만…… 부족했다.

아주 조금이지만 검집의 속도가 부족하다. 찌르는 자세로 나아간 검집은 검은 존재와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히겠지만 그 동안 검은 이미 다 휘둘러지고도 남을 것이다.

잠시 뒤의 미래가 머릿속에 그려진다.

검집은 도달하지 못한 채, 천변무궁류의 필살검이 쏘아지는 풍경이다.

'그렇다면……!!'

나는 바닥을 강하게 내딛으며 급하게 브레이크를 걸었다. 절대적인 일격 앞에서 갑작스런 정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면, 나는 조금이라도 승산이 있는 쪽에 건다.

승리를 붙잡기 위해서.

내딛은 바닥이 부서지면서 사방팔방으로 흙먼지를 흩뿌린다. 바닥을 내딛은 오른쪽 다리에 수많은 균열이 내달린다. 아마 제대로 금이 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고통조차도 잠시 잊어버렸다. 유성에 의한 초가속. 그리고 그 속도를 모조리 오른손에 실어서, 나는 그대로 검집을 앞으로 집어던졌다.

마치 투포환의 선수처럼 전신의 운동 에너지를 검집에 실었다.

이른바 투검??.

파직! 파직! 검집이 손끝에서 쏘아지기 직전, 푸르게 휘어감긴 마력에 의해 검집의 두께가 어마어마하게 증폭되었다. 천변무궁류의 제삼검의 원리이다.

너비와 두께를 증폭시킨 이유는 지금 이 순간에도 등뒤에서 검집을 밀어내고 있는 마력의 기류를 조금이라도 더 많이 받게 하기 위해서다.

파직! 파직! 파직! 파직!!

천변무궁류의 흐름 위에 올라탄 검집이 소리 없이 날았다. 그 속도는 검은 존재의 초신성보다도 빠르다. 검은 검사의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 명중시킬 수 있다.

그리고.

───검집이 허공을 찢었다.

* * *

고작 한 걸음.

검은 존재는 오른발을 축으로 두고 몸을 살짝 옆으로 틀어서 백신현의 검집을 가볍게 피해냈다. 복잡한 원리나 기술은 쓰이지도 않았다. 그저 눈에 보이는 공격을 눈에 보이는대로 회피했을 뿐이니까.

검집을 사용한 투검은 빠르기는 했어도 궤도가 단순했다. 피하는 것 자체는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혼신의 기책은 그저 완성된 초신성을 아주 조금 늦게 휘둘러지게 하는 정도에 그치고 말았다.

초신성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고.

검은 존재는 언제라도 필살검을 휘두를 수 있다.

예고된 종언이 찾아오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직전, 루이스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어째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루이스는 지금까지 한 순간도 눈을 깜박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검은 존재는 투검을 견제하기 위해서 검을 휘두르는 대신 회피에 아주 조금 시간을 썼다. 그 부분까지는 이해했다.

하지만 도대체, 어떠한 원리로 백신현이 검은 존재의 곁에 도달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루이스의 오감은 눈앞의 현실이 환상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검은 존재와 백신현의 거리는 10미터에 달해 있었다. 그리고 검은 존재는 백신현이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보다 빠르게 초신성을 휘두를 수 있었다.

10미터의 거리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백신현은 직접 타격을 포기하고 검집을 투척했다. 루이스는 그렇게 보고 있었다.

백신현은 투검을 위해서 그 자리에 멈춰섰고, 검집은 날았고, 검은 존재는 피해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백신현은 이미 검은 존재의 눈앞에 전신의 근육을 웅크린 채 도달해 있었다.

루이스에게는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일지 모른다.

하지만 천변무궁류의 검사는 마력의 흐름을 본다. 원리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기체나 액체, 그리고 마력 등의 유체?? 속을 물체가 초고속으로 통과하면 정면의 유체는 모조리 밀려나가고 지나간 자리에는 진공이 남는다. 그리고 주변의 유체가 이 진공을 채우기 위해 유입되면서 먼저 앞서 나간 물체의 뒤를 쫓게 된다.

이 세계에 슬립 스트림이라는 용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물리법칙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백신현의 검집이 이때 밀어낸 유체는 검은 존재와 백신현의 사이에 존재하는 마력의 기류였다.

천변무궁류의 제일검은 시동과 동시에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마력의 기류를 통해 공기 저항을 차단시킨다.

이 원리에 의해 제일검은 상상을 초월한 속도를 발휘할 수 있게 되지만 정작 이 마력의 기류 또한 공기 저항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저항을 발생시킨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공기 저항은 마력으로 차단할 수 있다.

하지만 마력에 의해서 발생하는 저항을 차단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백신현이 선택한 방법이 바로 이것이다.

검집을 최대한 빠르게 투검해서 전방에 존재하는 모든 마력 저항을 제거한 뒤, 등 뒤에서 불어오는 마력의 흐름에 올라타 그 뒤를 빠르게 쫓아가는 것.

투검한 검집에 제삼검의 원리를 접목해 면적을 넓혔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검집이 넓으면 넓을수록 밀려나가는 마력의 기류도 늘어난다.

밀려나간 마력의 기류가 늘어날수록 그 뒤를 쫓는 백신현의 속도도 높아진다.

그 점을 고려해서 선택한 기술이었다.

"이걸로…… 네 정신을 차리게 해주마."

주먹을 쥔다.

고개를 든다.

이제 백신현에게는 검도 검집도 없었다. 하지만 바위처럼 틀어쥔 오른손의 안에는 그가 가진 최후의 무기가 남아있다.

검왕검이나 천변무궁류 같은 것이 아닌, 그가 이 세상에 떨어진 그 순간부터 쭉 휘둘러온 무기가.

검은 존재의 필살검은 때를 맞추지 못했다.

쿵!! 그의 검이 움직이는 것보다 먼저, 백신현의 오른쪽 주먹이 검은 존재의 가슴팍에 직격했다.

백신현의 주먹도 무사하진 못했다. 아무리 마력으로 강화되었다고는 해도 한계 이상으로 가속된 천변무궁류의 부담을 견뎌낼 수 있는 수준은 되지 못했으니까.

굳게 틀어쥔 다섯 손가락이 천방지축처럼 부러지고 꺾여 나갔다.

팔뚝은 피부가 날아가서 근육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고, 어깨의 모양은 쥐어 뜯은 것처럼 형태가 이상하다.

하지만 그 주먹은 틀림없이 검은 존재의 가슴을 뚫고 그 너머로 나아가 있었다.

"윽……, 하아……."

깊게 들어갔던 주먹을 천천히 뽑아낸다. 중추를 파괴당한 검은 존재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힘을 잃은 머리가 아래로 픽 꺾였다.

중추가 파괴되고 두뇌가 정지함으로써 검왕검에 맺혀 있던 마력이 제어를 잃고 흩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초신성의 발생을 위해서 집속된 마력은 너무나도 양이 많고, 또한 고밀도로 뭉쳐 있었다.

제대로 휘두르면 산을 찢고, 바다를 가르고, 하늘을 부술 수 있는 고밀도의 마력 덩어리다.

그들을 묶어두고 있던 힘이 한 순간에 제어를 잃고 흩어지면 과연 어떠한 일이 벌어지게 될까.

당연히 고열을 동반한 폭발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백신현이 그 폭발의 범위에서 벗어나기에는 너무나도 시간이 부족했다.

검왕검에서 발생한 폭발은 마그마처럼 주변의 지형지물을 용해시키면서 시작되었다.

열파, 분진, 그리고 폭음.

주변 수 킬로미터의 공간이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했다.

"……우."

늦지 않게 방벽을 친 루이스는 흙먼지를 뒤집어쓴 상태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지나친 폭음 탓일까. 귀의 상태가 좋지 않다. 삐이이이이이 하고 이명이 들린다.

마력이 무분별하게 퍼져 나간 데다가 폭발 지점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 쓰러져 있었던 덕에 피해는 크지 않다. 그럼에도 루이스는 정신을 제대로 차리는데 꽤 오랜 시간을 소모해야 했다.

란즈 가주도, 파비아도 무사하다. 연금술사의 경우 아예 제일 후방에 쓰러져 있었던 탓에 피해 자체가 크지 않았다.

하지만 백신현은 다르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검왕검이 있는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폭발의 중심지는 불타다 못해 용암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모든 힘을 소진한 백신현에게는 지나치게 가혹한 환경이다.

"백신현……!!"

축 늘어진 오른팔을 움켜쥔 채 루이스가 몸을 일으킨다.

그런데 상황이 조금 이상하다.

용암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폭발의 중심지에서 우뚝 서 있는 인간의 실루엣을 발견했다.

백신현은 어느 새 부서진 다섯 손가락으로 검왕검의 자루를 쥐고 있었다.

그 짧은 사이에 검왕검을 쥐고 폭발을 억제한 것일까. 루이스는 순간적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사실은 조금 다르다.

사람의 인상을 결정짓는데 있어 눈의 역할은 아주 크다.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도 눈빛이 다르면 위화감을 느끼게 된다.

지금의 백신현이 정확히 그런 꼴이었다.

차갑고 고요한 눈동자가 루이스를 향해 깜박인다.

"한심해……."

열린 입술 사이로 짙은 탈력이 흘러넘친다.

백신현에게는 어울리지 않은 목소리였다.

"난……, 검 실격이야……."

백신현의 낮은 목소리 사이로…… 백신아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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