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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이자는 검성의 길을 걷는 것 같습니다-126화 (126/287)

〈 126화 〉 16. 각성 (2)

* * *

"조심하게, 느낌이 심상치 않아."

란즈 가주가 하나 밖에 없는 팔을 움직이며 입을 열었다.

"겉모습은 자네를 닮았으나, 느껴지는 투기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군. 내 몸이 멋대로 떨리고 있어……."

나의 왼팔을 취한 검게 덩어리진 그것은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서 있었다.

그저 그뿐인 행위임에도 두 사람의 특급 모험가는 그 존재에서 도저히 눈을 떼지 못했다.

잠시라도 시선을 떼어내는 순간 즉사할 거라는 사실을 직감한 것처럼.

"내가 아는 존재 중 저만한 투기를 발산할 수 있는 존재는 딱 하나밖에 없었네."

그의 한쪽 눈이 나의 얼굴을 흘끔 훔쳤다.

"바로 내가 선대 스페트로에게 지배 당하고 있었을 때, 자네의 몸을 써서 나와 5분 간 맞서 싸웠던 그 괴물 같은 검사. 그 존재 뿐이었어. 기억은 희미하지만, 그 존재의 실력을 내 몸이 기억하고 있네."

한쪽 팔이 달려있지 않은 그의 어깨가 움찔하고 떨렸다.

그 순간을 떠올린 것만으로도 상처가 쑤시는 모양이다.

"즉, 어쩌면 저 존재는…… 껍데기만 자네의 것을 흉내내고 있을 뿐. 그 내용물은 전혀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

"피차 호흡은 안 맞을 테니까. 그냥 연계는 생각하지도 말죠."

루이스는 란즈 가주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하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최소한 서로의 손발이 안 꼬이는 정도로만 투로를 짜서, 좌우로 파고드는 게 좋겠어요."

"음, 알겠네. 현 상태에서는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겠지."

란즈 가주가 고개를 끄덕인다.

두 특급은 검은 존재에서 시선을 떼어내지 않은 채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이동해서 검은 존재의 좌우를 점했다.

검은 존재는 그때까지도 가만히 서 있었지만, 두 사람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았다.

그 침묵이 좋은 징조가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어쩌면 놈에게도 시간이 필요한 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가만히 침묵한 이 상황을 내버려두고만 있을 수는 없다.

파고든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검은 존재가 조용히 얼굴을 들었다. 백신현의 것과 거의 동일한 얼굴이 좌우의 특급 모험가를 한 번씩 포착한 후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은 존재 중에서 유일하게 살색으로 남아있는 건 백신현에게서 떨어져 나온 왼팔 뿐이다.

그 왼팔로 검왕검을 쥐고 한 번 휘둘렀을 뿐이다.

그저 그뿐인 행위에 두 특급의 이동 방향이 꺾여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튕겨 나갔다.

"……칫!"

데미지는 거의 없었지만 루이스는 적잖이 당황한듯 거칠게 혀를 찼다. 비틀린 방향을 바로 잡은 후 다시 한 번 돌격.

그 직전의 짧은 찰나에 수도 없이 방향을 꺾어서 최대한 상대방을 현혹시킨다. 흙바닥에 헤아릴 수조차 없을 만큼 수많은 발자국이 찍혔다.

수많은 페이크를 구사한 끝에 내지른 한 수는 제대로 꽂힌 순간 검은 존재가 서 있는 발밑을 비롯한 그 등뒤의 풍경까지 한 번에 밀어버렸다.

잔디가 눕듯 등뒤의 모든 것이 뒤로 넘어갔다. 바닥이 깨지고 풀이 들썩이고 나무가 뿌리째 뽑혀 나간다.

하지만 충격파가 퍼졌다는 것은 운동 에너지가 한 점에 집중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루이스의 일격은 주변의 모든 지형지물에 영향을 끼쳤지만, 제일 중요한 검은 존재에게는 긁힌 상처 하나 만들지 못했다.

모조리 분산되었다.

란즈 가주의 공격 역시 다르지 않다. 특급 모험가의 출력에서 뿜어져 나오는 찌르기는 그 하나 하나가 폭풍을 동반할 정도로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지만 곧게 나아가던 궤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순식간에 힘의 방향이 왜곡되고 틀어지게 되었다.

찌르기가 꽂힌 지면은 즉시 터져나가며 수 미터 규모의 크레이터가 발생했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표적에는 단 하나의 상처조차 찾을 수 없다.

아니 그 이전에…… 녀석은 불과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았다.

검은 존재의 행동은 지극히 단순하다.

공격이 들어오면 한쪽 발을 축으로 삼은 채, 다른 한쪽의 다리를 움직여서 무게 중심을 잡는다.

그 상태로 공격을 받아낸다. 그저 그 뿐.

그러나 충격을 분산시키는 능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영역에 도달해 있다.

한 걸음.

단 한 걸음을 물러나게 하는 것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다.

서로 다른 방향에서 쏟아지는 두 사람의 특급 모험가의 공격이 전혀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그야말로…… 차원이 다르다.

"……."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전의가 깎여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천변무궁류의 계산은 완벽하게 해내고 있다. 그것을 현실에 펼쳐내는 것 또한 크게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다르다.

지금까지 내가 휘둘러왔던, 그 무엇보다도 신뢰해온 검술이 승리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나무토막처럼 느껴졌다.

넘쳐흐르는 투기에,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다.

지금 이 앞에 걸려 있는 건 나의 목숨이 아니니까.

『───』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검은 존재의 왼손이 순간 움직이는가 싶었던 바로 그때, 루이스의 목이 예고도 없이 몸통에서 절단되어 하늘을 날았다.

"흐읍!!"

하지만 아니다. 그것은 루이스가 아니라, 천변무궁류의 제사검을 통해서 발생시킨 질량을 가진 잔상.

검은 잃었지만 아직 내게는 이 오른손과, 검집이 남아있다.

팔을 움직일 힘이 있고 합당한 매개체가 있다면 나는 아직 천변무궁류를 휘두를 수 있다.

천변무궁류는 범위 내에 장악한 모든 마력의 흐름을 제어하는 검술.

그 대상을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부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물론 나 자신이 기본좌표로 설정되어 있는 탓에 어느 정도 응용이 필요하긴 하지만,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범위다.

그 덕에 루이스는 아슬아슬하게 절명을 피했지만 칼끝이 걸린 건지 목에 붉은 실선이 그어져 있었다.

다음은 란즈 가주다. 머리, 명치, 허리를 차례로 찌르는 매서운 삼단 찌르기. 란즈 가주는 셋 중 하나도 쳐내지 못하고 꼼짝 없이 절명할 위기였다.

"큭!!"

검집 끝에 걸린 마력을 총동원한다. 이번에는 천변무궁류의 제일검이다. 사용자를 앞으로 분사시키는 효과를 역방향으로 사용했다.

그의 몸을 뒤로 날려보내서 물리적으로 검이 닿지 않는 범위까지 회피하게 만들었다.

피할 수 없었던 절명을 아슬아슬하게 회피시켰다.

하지만 그 대가는 크다. 검은 존재의 시선이 스윽 돌아선다. 녀석의 눈동자는 이제 나를 고정하고 있었다.

그 시선에서, 나는 매우 익숙한 기시감을 느끼고 있었다.

저 얼굴은 분명 나의 것이다. 하지만 그 눈빛은 다르다. 내 것은 아니지만 내가 자주 보아온 시선이었다.

새하얀 가상 공간 속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부딪쳐온, 나의 파트너이자 반신과도 같은 존재의 눈빛이다.

그 눈동자에서 나는 백신아의 존재를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지금 이제까지 우리가 쓰러트려온 적들의 입장을 체험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나의 얼굴과, 백신아의 눈빛.

그리고 흘러넘치는 투기까지.

'그들도 이런 기분이었나.'

지금껏 우리와 싸워온 적을 조금 존경하게 될 거 같다.

이런……, 이런 말도 안 되는 상대 앞에서 투지를 잃지 않고 싸우는 게 가능하기는 한 일인가?

그들은 이런 공포스러운 존재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았단 말인가?

어쩌면 우리가 쓰러트려온 적들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더 대단한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끔찍하리만치 강하다, 라는 표현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검은 존재는 이미 내 앞에 있었다.

기척이나 전조도 없었다. 그저 한 순간 몸이 비틀거리며 흔들리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에는 이미 내 앞에 서 있었다.

나는 한 순간도 견뎌내지 못했다.

타이밍을 맞춰서 천변무궁류의 제일검에 들어갔지만, 검을 살짝 비튼 것만으로도 제일검이 아예 무력화되었다.

나의 흐름에 간섭해서 강제로 천변무궁류를 정지시켰다고 볼 수 있다.

검은 검사도 이러지는 못했다.

수준 차이가 심하게 나지 않으면 시도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까다로운 기법이다.

쿵!!

나는 일격에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윽……!!"

물론, 포기한 건 아니다.

포기한 건 아니지만…… 이 순간까지도 마땅한 방법을 떠올리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다.

포기하지 않는다는 표현조차 흔들리는 정신을 붙잡기 위한 자기합리화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전력 차이가 심하게 난다.

나는 설령 내 목이 날아가는 그 순간까지도 포기하지 않고 두뇌를 회전시키겠지만, 지금의 상황이 그런 것으로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일까.

이 짧은 순간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해결책은 모두 합쳐 28가지.

하지만 그 모든 해결책을, 떠올린 순간 나 스스로가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파기해버리고 만다.

그리고 아마 그 판단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격이,

차원이 다르다.

우리가 지금까지 쓰러트려온 적들의 얼굴이 하나둘씩 나타났다가 사라져간다.

지금 생각해도 용케 쓰러트렸다 싶을 정도로 무지막지한 놈들이었지만, 솔직히 절망감은 그다지 느끼지 못한 것 같다.

그들은 강했지만, 내가 상정해온 '최악의 적'에 비하면 한 수에서 두 수 정도 뒤쳐지는 놈들이었다.

그래서 절망하지 않고 꿋꿋히 버텨나갈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내가 상정해온 최악의 적이란 도대체 누구인가?

사실 입 아프게 말할 것도 없다.

'내가 제일 두려워했던 건…… 바로 네가, 날 죽일 생각으로 덤벼드는 상황이었어.'

백신아는 강하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그렇기 때문에 나는 언제나 백신아가 나의 적으로 돌아서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가까운 곳에서 함께 싸워왔기에 안다.

백 년을 노력해도 나는 백신아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

하지만 그건 나 뿐만이 아니다.

보이드도, 스페트로도, 루이스조차도.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백신아의 경지에 도달할 수는 없다.

천하무적, 최강무쌍의 검사.

그녀가 나의 적으로 돌아서는 것만큼 끔찍한 상황은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하고 죽음을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설령 다음 순간 내 목이 날아가더라도 그 직전까지 빠져나갈 수 있는 수단을 찾아내야 한다.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검은 존재는 나를 죽이려는 것이 목적이 아닌 듯, 쓰러진 나의 목을 오른손으로 덥석 틀어쥐고 그대로 들어올리는 행동을 보였다.

접촉한 손을 통해 마력이 흘러들어온다. 마력을 통해서 저항하려 했지만, 소용 없었다.

"윽……!!"

코어의 침식이 다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 *

"……."

바로 그때, 검은 존재의 시선이 처음으로 나 이외의 다른 방향을 향해 움직였다.

놈의 시선이 움직인 방향은 바로 위.

하늘을 향해 시선을 들어올린 채 뭔가를 감지하고 있다.

뭐지? 도대체 뭘 바라보고 있는 거지?

수수께끼는 오래 가지 않아 해결되었다. 검은 존재는 내 목을 쥐고 있던 손을 거두면서 뒤로 빠르게 물러났다.

정확히 그 직후 위에서 아래로 짐승형의 실루엣이 지면에 꽂혔다.

흙먼지가 피어오른다.

간신히 해방된 나는 뒤로 주저 앉은 채 나를 구한 존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는 상황에서 내가 그것을 짐승형으로 판단한 이유는 간단하다.

지면을 네 개의 다리로 딛고 있었고, 입에는 검을 물고 있다.

하지만 천변무궁류의 검사인 나는 눈이 조금 보이지 않는다고 눈앞의 본질을 잘못 보지 않는다.

그녀를 사족 보행의 짐승으로 잘못본 건 그저 한 순간의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목이 졸리는 상황에서 해방된 지금의 내 눈에는 그녀들의 모습이 똑똑히 보이고 있다.

갈색.

흙색으로 빛나는 머리카락이 갈기처럼 무성하다.

내가 걸어둔 봉인을 해제한 건지 네 다리로 지면을 딛고 선 파비아는 전신에서 특급 모험가에 버금하는 수준의 마력을 분출하고 있었다.

마력의 색채는 머리카락과 같은 색이다. 갈색으로 빛나는 입자가 은은하게 흩어진다.

파비아의 등에는 그녀에게 거의 매달리다시피 한 자세로 앉은 연금술사가 있다.

"크르르르……"

파비아가 낮게 신음하며 그르릉 소리를 낸다.

나는 나의 사저??랄 수 있는 여자가 저 정도로 강한 적의를 발산하는 걸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녀와 나는 이전에 한 번 부딪친 적이 있었지만 그때 나에게 보였던 적의와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숙적을 바라보는 눈이었다.

"크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파비아가 매섭게 울부짖었다.

원수라도 찾아낸 듯한 절규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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