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화 〉 15. 마검??
* * *
나갈 준비는 언제나 되어 있었다. 입고 있던 옷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난 뒤,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선다.
나는 루이스를 돌아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손가락은 괜찮아?"
"응, 거의 다 아물었어."
루이스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다섯 손가락을 쥐었다가 다시 편다. 저 말을 그대로 믿어야 할지 의심스럽다.
나도 그렇지만, 루이스는 부상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래, 손가락은 그렇다 치고. 그 검으로 싸워도 괜찮겠어?"
루이스의 검은 특급을 위해서 준비된 물건이 아니다.
작정하고 힘을 쓰는 루이스의 마력을 견뎌내기에는 조금 하자가 있는 물건이다.
즉 루이스는 이 싸움에서 모든 힘을 검에 온전히 실을 수 없다는 뜻이 되는데, 그런 무기로 충분한 것일까.
하지만 루이스는 가볍게 목을 오른쪽으로 꺾으면서 대답했다.
"괜찮아. 이거 하나면 충분해."
"알았어. 간다."
연금술사에게 인사는 하지 않는다. 그녀도 이미 상황은 알고 있다. 공방의 문을 향해 살짝 눈짓한 후, 곧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올리비아를 비롯한 스페트로 일파가 거주중인 폐교회는 이곳의 빈집촌과 마찬가지로 도시 중심에서 크게 벗어난 교외에 위치하고 있다.
그런 탓에, 따지고 보면 오히려 여기에서 곧바로 찾아가는 편이 더 가까운 이점도 있다.
"야, 백신현."
"왜?"
"너무 느려서 그런데. 차라리 이게 나을 거 같아."
늦지 않게 도착하기 위해서 전력질주를 하던 도중, 루이스가 불현듯 답답하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윽?!"
부지불식간에 날아온 왼손이 내 오른팔을 덥석 잡았다. 힘을 주고 확 끌어당기자 100kg가 넘어가는 내 몸뚱이가 쭉 끌려간다.
루이스가 잡아당기는 속도가 내 다리를 움직이는 속도보다 빠르다. 속도가 붙은 비행기가 천천히 지면에서 떠오르는 것처럼, 지면을 내딛으며 달리고 있던 두 다리가 바닥에서 떨어졌다.
어마어마한 바람이 내 얼굴을 쓸고 지나간다. 거울이 없어서 내 얼굴을 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아마 엄청나게 참혹한 꼴이 되어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눈을 제대로 뜨고 있기 어려울 정도다.
지금의 속도도 천변무궁류의 제일검과 비교하면 많이 느린 속도이지만, 천변무궁류의 제일검은 사용과 동시에 내 전방의 공간을 진동 상태로 만들어서 공기의 저항을 무시하고 꽂히는 공격이다. 이런 식으로 무식하게 얼굴에 공기가 쏟아지진 않는다.
쏟아지는 바람을 견디며 눈을 부릅뜬다. 쥐며느리만한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집중만 제대로 하면 충분히 버틸 수 있는 수준이었다.
나의 질주와 비교해서 십수 배 가까이 재빠른 루이스의 질주는 순식간에 내 몸을 목적지에 가져다놓았다.
폐교회의 앞에는 사람이 없다. 이건 나도 올리비아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 이 교회가 전장이 될 가능성을 염두해서 고용인을 모두 다른 곳으로 보낼 예정이라고.
올리비아의 대처는 늦지 않게 이뤄진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지금 이 자리가 전장이 되어있는 것 같지는 않다.
전사들만이 느낄 수 있는 '전투의 감각'이랄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농밀한 피의 냄새라고 해야 할까. 그런 것이 전혀 없다.
여기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눈을 깜박였을 때, 루이스가 쥐고 있던 나의 팔을 천천히 놓았다. 관성을 무시하고 억지로 정지하게 된 나의 신체는 그 자리에서 움찔거리며 천천히 멈춰서게 되었다.
루이스도 나와 비슷한 것을 느꼈는지 허리춤에 손을 얹고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본다.
눈이 팍 찌푸려진다.
"그래도 1분 안에 도착했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싸움이 다 끝나버린 건 아니겠지?"
말하면서,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던 중 갑자기 폐교회가 아니라 그 옆, 나무가 무성한 숲속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와 루이스는 거의 동시에 허리춤의 검에 손을 가져갔다.
충분히 검을 쥐고 발검할 수도 있는 순간이었지만 검을 뽑아야 하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나무의 뒤편에서 여전히 갑갑한 정장 차림의 올리비아가 서 있었다.
"온 거냐."
"뭐야, 너 왜 거기서 나와?"
"하나씩 설명해줄테니, 일단 이쪽으로 와주지 않겠나."
"……?"
고개를 갸웃거리며 루이스를 돌아본다. 루이스도 크게 이견은 없어 보였다. 끌어올렸던 마력을 천천히 가라앉히고 올리비아를 향해 다가간다.
숲의 안쪽으로 얼마 들어가지 않아서 올리비아가 두꺼운 아름드리 나무에 등을 기대고 섰다.
이야기할 준비가 된 거 같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질문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양피지는 찢은 거 맞아?"
"아, 그래. 내가 찢었다."
올리비아가 눈을 감으며 대답했다. 녀석의 품 안에서 반으로 찢어진 양피지의 조각이 나왔다.
"그럼 그 검사는 어디에 있는 거지? 아니면, 벌써 도망친 건가?"
"그런 건 아니다. 저 교회 안에 있어. 지금은 가주님과 독대 중이지."
더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소리가 나왔다.
정체불명의 검사가 나타나서 양피지를 찢었다. 여기까지는 이해했다. 그런데 주변 상황을 보면 아무리 봐도 그 검사와 부딪친 거 같지는 않고, 그럼 도대체 상황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고 있는 거지?
"이해하기 어려울 거다. 사실 나로서도 지금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긴 어려우니까."
올리비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쉰 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의 일이다. 그 정체불명의 검사가 우리 교회의 문을 두드리더군. 당연히 나는 놈을 경계하면서, 곧바로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그런 상황이 된 거지?"
"본격적으로 부딪치려던 바로 그때, 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천변무궁류의 검사를 데려오라고.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겠다고."
"뭐야, 그럼 지금 신현이를 팔아넘긴 거예요?"
당사자인 나는 가만히 있는데, 뒤에서 같이 따라오던 루이스가 세게 쏘아붙였다.
올리비아는 루이스의 기세에 눌리는 듯하면서도 침착하게 해명에 나섰다.
"그런 건 아닙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무술가를 습격한 범죄자의 말을 함부로 믿을 수는 없었지만, 그의 제안에 응함으로써 어느 정도 시간을 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조용히 루이스의 눈치를 살핀다.
멈추면 루이스의 반응이 격해질거라고 생각했는지, 올리비아가 눈을 가늘이며 쉬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놈이 뒤늦게 본색을 드러내더라도 백신현과 루이스 님이 있다면 좀 더 수월하게 놈을 포위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저 검사가 어째서 그런 제안을 했는지는 의문입니다만……."
틀린 말은 아니다.
싸우는 사람이 둘이냐 넷이냐는 아주 큰 차이가 있으니까. 따로 따로 싸우는 것보다는 나와 루이스를 들인 다음에 싸우는 편이 훨씬 승산이 높을 거다.
하지만 올리비아가 말했듯 그 검사가 어째서 그런 제안을 했는지는 의문이다.
우리 네 명을 상대로 포위 당하더라도 충분히 위험에서 빠져나갈 자신이 있다는 의미일까.
놈의 도주 기술에는 의문점이 많다.
대략적인 상황을 전달 받은 후 다시 교회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검사에게는 의문스러운 점이 많다. 나를 바라보면서 '찾았다'라고 발언한 전적도 있고.
어쩌면 나를, 아니 천변무궁류의 검사를 찾아다니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수많은 무술사를 습격해온 것도 그 중에서 천변무궁류의 계승자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가보는 수밖에 없을 거 같다.
닫혀 있던 교회의 문에 손을 대고 그대로 쭉 밀었다.
그 정체불명의 검사는 아주 눈에 띄는 위치에 있었다.
폐교회의 제일 깊은 곳, 신부가 미사를 볼 때 올라서는 단상 위에 등을 돌리고 서 있다.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쏟아지는 빛을 온몸으로 받고 있던 검은 검사가 조용히 몸을 돌렸다.
이전에는 겨를이 없어서 자세하게 관찰할 틈이 없었지만, 이런 식으로 다시 보게 되니 영 특이한 생김새이다.
팔도 두 개고 다리도 두 개지만 그 실루엣은 인간과 크게 다르다.
마치 지푸라기를 꼬아 만든 인형 같은 모습이었다.
그 검사의 옆자리에는 란즈 가주가 창을 든 채 놈을 노려보고 있다.
문이 열린 기척에 그가 시선을 돌린다. 눈이 마주친 순간 란즈 가주는 눈을 살짝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듣자하니 나를 호출한 모양이던데. 이유가 뭐지?"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서 검은 검사를 향해 말을 걸었다. 인간 같지 않은 실루엣은 머리부터 뒤집어쓴 검은 로브에 숨겨져 있다.
검은 검사가 고개를 돌린다.
후드 아래로 드러난 얼굴은, 눈동자를 제외하면 제대로된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운 상태였다.
시꺼먼 붕대 같은 것이 코, 입, 귀를 모조리 돌돌 말하서 숨겨버리고 붉은색으로 번뜩이는 안광만을 드러내고 있다.
마치 죽을 병에 걸린 환자 같은 분위기이다.
전쟁 시절의 흑사병 환자가 저런 모습일까.
"아니, 그 이전에 이걸 먼저 물어봐야겠군. 어째서, 다른 사람들을 습격하고 다닌 거지? 나를 찾겠다고 잘못도 없는 사람들을 죄다 박살내고 다닌 거냐?"
"그……, 렇다……."
간신히 들은 첫 마디에 표정이 구겨졌다.
그것을 과연 사람의 목소리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고작 한 마디 내뱉은 것만으로도 귀가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짧은 사이에 소리가 수십 가닥으로 갈라지면서 기괴한 음색을 내었다.
칠판에 손톱을 대고 긁는 것과 비슷한, 인간의 불쾌함을 자극하는 목소리다.
"나, 나는…… 천변무궁류의 검사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그 행방을 찾을 길이 없었기에……, 이름 있는 실력자를 하나씩 무너트리기 시작했지……."
붉은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러가더니 이윽고 나를 향해 고정되었다.
안광이 느껴질 정도로 힘 있는 눈동자였다.
"천변무궁류의 검사는…… 틀림없이 세간에 이름을 떨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
지리멸렬하기 그지없는 행동양식이다.
천변무궁류의 검사가 이름을 떨치고 있을 거라는 추측 하나만으로 온갖 무고한 사람들을 무너트리고 다녔다는 건가?
홍 기룡의 경우에는 아예 사경을 헤메는 수준의 부상을 입었다.
아무리 내가 다른 무술인들에게 별 감정이 없고, 홍 기룡에게 감정이 없다고 해도 불쾌함을 느끼게 되는 건 당연하다.
사이코패스를 앞에 두고 혐오감을 느끼지 못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래, 그리고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드디어 목적을 달성하셨군. 그럼 이제 당신의 다음 목표는 뭐지? 날 쓰러트리는 건가?"
"……그, 그것이 목적은 아니지만……, 어,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다고 볼 수 있겠군…… 지금부터 나는……, 네게 도전할 생각이니까……."
그 말이 끝난 순간 나를 제외한 다른 세 사람이 동시에 움직였다.
루이스의 검이 검은 검사를 겨누고, 올리비아와 란주 가주의 창이 좌우에서 그의 도주 경로를 차단했다.
오직 나만이 그의 앞에서 거만하게 서서 조용히 말을 내뱉었다.
"이 교회를 찾아온 시점에서 다대일의 구도가 될 거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겠지. 그런 상황에서, 내가 순순히 승부를 받아줄 거라고 생각한 건가?"
"그, 그런 건 상관 없어……."
그 다음 순간 벌어진 일이다.
바로 눈앞에 서 있던 검은 검사의 모습이 한 순간 눈앞에서 사라졌다.
타닥.
그 직후, 그 등뒤에서 들려온 발소리.
나는 생각하기보다도 먼저 몸을 돌려서 응전했다.
캉!!
검과 검이 부딪치면서 가공할 파열음을 토해 내었다.
"……보고도 모르겠군. 도대체 어떤 기술을 쓰고 있는 거지?"
이해할 수 없는 이동 기술이다.
완전히 포위된 그 상황에서 특급 모험가 두 사람과 일급 모험가 한 사람의 감각을 모조리 속이고 나의 배후로 돌아들어왔다.
마그누스나 스페트로라도 이런 짓은 못할 거다.
도대체 무슨 속임수가 있는 거지……?
검과 검이 서로 마주댄 그 상황에서 검은 검사가 조용히 이죽거렸다.
"나, 나 따위도 일대일로 쓰러트리지 못한다면, 네게도 가능성은 없다는 소리이니까……"
이해할 수 없는 소리.
하지만 내 주목을 끈 것은 놈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검은 검사가 휘두른 그 검은, 붉고 붉은 녹이 빽빽하게 슬어 있는 검이었다. 날카롭다기보다는 투박하고, 단단하기보다는 불안하다.
검과 검이 부딪친 순간의 충격을 뒤집어쓴 탓일까. 검에 붙어있던 붉은 녹이 산산히 깨지면서 내부의 모습이 드러났다.
외부로 노출된 칼날이 빛을 발한다.
"……!!"
그야말로 검왕검과 같은 색채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