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화 〉 14. 한 걸음 앞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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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시간이 흐르고 나서, 붕대를 감은 루이스의 손가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손가락 근육의 움직임이 이상하다. 근육을 써서 움직이는 게 아니라 마력을 써서 조작하고 있는 것 같다.
"너무 움직이지 마. 그러다가 실밥 터진다."
도저히 봐줄 꼴이 아니었기 때문에, 옆에서 바라보면서 한 마디 핀잔을 줬다. 연금술사가 봉합하고 아직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얘는 무슨, 자기 손가락이 레고 블럭이라도 되는 줄 아는가보다.
연금술사는 지금 자리에 없다. 재워두었던 파비아가 슬슬 일어날 시간이라서 밥 먹일 준비를 하겠다고 떠났다.
어쩌다보니까 연금술사가 맡게 됐는데 생각보다 공을 들여서 관리해주고 있다.
고양이 같은 거 주워오지 말라고 핀잔을 주면서도, 막상 주워오면 잘 돌봐주는 아버지 같은 느낌이다.
사실 바깥에 쉴 세 없이 싸돌아다니는 우리보다는 집에 틀어박혀서 사는 연금술사가 돌보는 수밖에 없다.
"양피지는 아직 반응 없지?"
"어, 아직은 그쪽도 별 문제 없는 거 같아."
루이스의 질문에 양피지를 돌아보며 대답한다.
술식이 새겨진 양피지는 현재, 테이블 위에 무거운 것으로 고정되어 있는 상태다. 언제 찢어지더라도 바로 발견할 수 있게 눈에 잘 띄는 테이블에 가져다놓았다.
그 검사의 유파가 진짜 천변무궁류라고 가정하면, 최대한 빠르게 참전해서 단기결전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장기전이 될수록 강해지는 그 특성상, 천변무궁류는 일찍 쓰러트리지 못하고 방치하면 곤란해진다.
나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루이스 아씨가 지적해준 약점을 유용하게 쓸 수 있을까요?」
백신아도 조금 전의 연습은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루이스가 손가락을 날려가면서 내 허리를 깔아뭉게고 앉았을 때는 드물게도 「으엑」 소리를 내며 질린 티를 냈었다.
루이스도 제정신은 아니다.
"그게 천변무궁류의 약점은 맞지만, 그 대상이 나라서 더 치명적으로 먹혀 들어간 감은 있지. 나는 마력이 부족해서 흐름을 타기까지 시간이 좀 걸리니까."
나의 전투 방식은 전형적인 슬로우 스타터라고 볼 수 있다.
성격이나 실력이 그렇게 만든 게 아니라 마력의 결여가 만들어낸 좋지 못한 특성이다.
본격적으로 흐름을 타고 불이 붙기까지, 나는 꽤 오랜 시간을 소요하는 편이다.
이 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마력치를 높여주는 약품을 복용하거나 최소 10년 이상의 기간을 투자해서 꾸준히 수행하는 수밖에 없다.
수행이야 지금도 꾸준히 하고 있지만, 드라마틱한 변화를 기대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고. 그럼 비벼볼 만한 구석은 약품을 복용하는 방법 뿐인데, 사실 유의미한 효과를 보여주는 영약도 상당히 드물다.
자연계에서 찾을 수 있는 물건으로는 나쟈의 핵 같은 게 고작이고, 인공품 또한 소림사의 대환단 정도가 끝이다.
어느 쪽이든 확보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예전에 겨우 확보했던 나쟈의 핵도 내 체질을 고치는데 그냥 다 써버려서 남은 게 없고.
「그, 대환단이라는 건 소림사에서 제조하는 물건 같은데. 어떻게 구입할 수 있는 방법은 없나요?」
"아, 문외불출이거든 그거. 소림사의 최고 기밀이라서 소문만 무성하지, 실제로 본 사람은 거의 없어."
애초에 그건 어느 의미에선 나쟈의 핵 이상으로 귀한 물건이다.
수십 년에 하나 꼴로 겨우 제작이 되고, 그마저도 속가를 잇는 최고 실력자에게만 주어지는 물건이니까.
「이해가 된다 싶으면서도, 뭔가 째째한 느낌이 드네요.」
백신아가 볼멘 소리를 내며 투덜거린다.
나 같은 경우 애초에 그쪽으로는 관심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전혀 상관이 없었다.
차근차근 열심히 마력의 최대치를 높이는 수밖에 없다.
「근데 소림사면 그거죠? 구파일방? 제 기억이 맞다면 동방의 거대 무술 문파였던 거 같은데. 여기에서도 이야기가 무척 자주 들리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아, 네 때는 없었나보네."
「네, 네. 물론 제 시절에도 동양의 신비한 무술 문파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었고, 서책 같은 것도 암암리에 돌기는 했지만요. 천변무궁류도 세계 각지의 온갖 무술의 장점과 단점을 취합한 끝에 완성된 무술이고.」
여기에서 말하는 백신아의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200여년 전의 과거이다. 난 이 세계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상당히 껄끄러운 느낌이 들지만, 지식의 형태로는 알고 있다.
"네가 말한 것처럼 구파일방은 원래 동양의 거대한 열 개의 문파를 두고 하는 말이야. 본파??는 여전히 바다 건너에 있는 대륙에 있지."
「그럼 여기에 있는 구파일방은?」
"해외 분파야. 150년 전에 항해기술이 발달하면서 동양의 문파가 말 그대로 물밀듯이 쏟아져들어왔거든."
옆에 앉아있던 루이스가 검지를 들고 설명을 시작했다.
"구파일방은 동방에서 제일 사이즈도 크고 돈도 많은 곳이잖아? 당연히 뱃길이 뚫렸으니까 누구보다도 먼저 대륙 너머로 진출해서 선점하고 싶어하겠지? 그게 바로 여기에 있는 구파일방이야."
「무슨, 꼭 장사꾼 같네요.」
"정확히 짚었어."
루이스가 웃으며 대답했다.
"나나 신현이처럼 작정하고 강해지기 위해서 죽을 힘을 다하는 사람은 드물지. 구파일방이 이쪽에서 사람을 끌어들이는 미끼는 호신하고 건강이야."
「호신하고 건강…….」
"거기에 동방의 신비한 이미지도 적절하게 가미해서 장사를 하고 있는 게, 여기의 구파일방이지. 뻔한 수법이지만 의외로 잘 먹히거든. 동방의 이미지 장사."
아무리 뱃길이 열리고 오래 되었다지만, 일반 사람들에게 있어 동방은 여전히 신비의 대륙이다. 그런 쪽의 환상과 신비를 자극하는 홍보 방식이 생각보다 잘 통한다.
구파일방을 비롯한 이쪽에 진출한 온갖 무림 문파들이 불편해보이는 하늘하늘한 도복 따위를 입고 다니는 것도 그런 방식의 일환이다.
움직이기 편한 옷을 입고 다니면 사람들의 환상을 자극하기 어려우니까.
"아예 그런 홍보만을 전담으로 맡아서 하는 부서도 있고. 잘생기고 이쁜 애들만 골라서 화려한 초식 위주로 광고를 한다던데."
「그럼, 무술 수련은 안 하는 건가요? 그래도 무예 문파잖아요.」
"아, 그것도 당연히 하지. 문파가 아무리 사이즈가 커지더라도, 근본적으로 그 구조를 유지할 수 있는 힘은 필수불가결이니까. 해외의 문파를 통솔하는 자리는 동방에 있는 본파에서도 최고의 실력자들만이 앉을 수 있는 중요한 위치거든."
「동방의 본파와 해외의 분파 중에서 어느 쪽이 더 강할까요?」
백신아는 골수무인답게 그 점이 제일 신경 쓰이는 것 같았다.
해외의 모든 상황을 총괄하는 지도자와 본파의 최강자. 어느 쪽이든 그 유파에서는 최고 최대의 실력을 가진 인재이기 때문에 백신아 뿐만 아니라 누구나 궁금해할 법한 부분이다.
"그건 나도 잘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해외 분파 쪽이 더 강하지 싶어. 이쪽의 무술과 지속적으로 교류를 해오면서 동방의 본파와는 또 다른 독자적인 형태의 발전을 거듭하고 있으니까."
물론 현지에서 교류한 기록은 동방의 본파에도 전해지지만 그 질과 농도에 있어서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아무래도 실제로 경험해보는 쪽이 정보의 질은 높다.
"좀전에는 동방의 신비니 어쩌니 했지만, 동방의 무술이라고 단점이 없는 건 아냐. 동방의 무술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쪽만의 독자적인 무술 체계 또한 존재하고, 이쪽의 무술에서 동방의 무술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수도 있지."
이것은 파르네제식 검술을 한계까지 연마한 실력자로서의 견해일 것이다.
그리고 루이스 또한 그 스스로의 검술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온갖 방식의 격투술 및 동양 무술의 투로를 습득하고 있다.
"무술이라는 게 한 가지 길을 우직하게 파서 얻을 수 있는 강함이 있는가 하면, 온갖 다양한 무술을 섭렵해서 얻을 수 있는 강함 또한 존재하거든. 그리고 나는 개인적으로는 후자 쪽이 더 좋다고 생각해. 한 가지 무술만 익히다 보면 모르는 무술이 나타났을 때 대응이 전혀 안 되니까."
루이스가 말하고 있는 것은 오직 루이스 한 사람만의 개인적인 견해가 아니라 동서양의 다양한 무술을 섭력하고 있는 이들의 공통적인 평가이다.
그 어떤 무술에도 장점과 단점이 존재하는데, 이것은 타 무류의 기술을 더함으로써 이겨낼 수 있는 문제다.
이것이 바로 현존하는 근대 무술 사상 중 최고 고급 단계로 꼽히는, '종합 격투', '종합 무술'의 이론이다.
비전이라는 이름 아래에 숨겨져 있던 각종 무술 유파들이 양지로 올라오고, 뱃길이 열리면서 동방의 무술들마저 쏟아져들어오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 종합 무술이 발전하는 것은 어떤 의미로 필연이라고 볼 수 있다.
"양쪽의 실력이 동일하다고 쳤을 때는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쪽이 아무래도 더 유리하지 않을까? 대응법을 모르면 공략이 안 되는 무술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
이쪽에서는 조금 다른 이름이지만, 내게 익숙한 '저쪽 세계'의 격투기로 비유하자면 주짓수를 비롯한 서브미션 계열 기술이 이런 유형에 해당된다.
모르고 붙어도 어느 정도 짐작이 되고, 대응할 수 있는 타격기와는 다르게 서브미션, 그래플링 류는 모르면 정말 대응이 안 된다.
내가 무술 뿐만 아니라 마법 같은 영역에 발을 걸치고 있는 이유도 비슷하다. 내가 마법을, 마력을 쓰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이 그걸 안 쓰는 건 아니니까.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지식을 확보해둘 필요가 있다.
말 그대로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해야 할까.
「음음, 그럼 루이스 아씨하고 그 구파일방의 대장들하고 붙으면 어느 쪽이 더 셀까요?」
유치하기 그지없는 질문이었지만, 누가 더 강한가에 대한 물음은 무술가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루이스는 살짝 자존심이 상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직은 좀 힘들어. 구파일방의 대장급은 보통 특급 모험가의 5위권에 수준에 모여 있거든. 몇 년만 수행하면 금방 뛰어넘을 수 있겠지만."
우리 세대의 무술가 중에서는 루이스가 단연 최강이지만, 더 윗세대로 올라가면 어마어마한 세월을 무술에 투자해온 진짜배기 고수들이 포진되어 있다. 그리고 루이스의 실력은 아직 그들에게 미치지 못한다.
스무 살에 검을 잡았으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고작 몇 년만에 지금의 위치에 오른 것부터가 사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세상에는, 정말로 강한 사람이 많네요. 그런 사람들하고 죄다 붙어보는 것도 일이겠다.」
"그런 사람들은 승부를 잘 받아주지도 않아."
이번에는 내가 입을 열었다.
"물론 구파일방의 대장쯤 되면 어중이떠중이가 수십 명이 몰려들어도 가볍게 쓸어버릴 수 있겠지만, 잘못했다가 지기라도 해 봐. 문파만 흔들리는 게 아니라, 그 문파가 엮여 있는 온갖 산업이 세트로 주저앉는다고."
그런 이유로, 진짜배기 고수들끼리 부딪치는 꼴을 보는 건 정말로 보기 드문 일이다.
홍 기룡처럼 아예 의뢰를 받아서 활동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쪽은 문파 자체가 개인사업자 수준이라서 가능한 일이고.
구파일방쯤 되면 함부로 움직이기도 어렵다.
「끙. 무인이라는 것들이 잔재주만 늘어가지고…… 다 때려치고 그냥 화끈하게 한바탕 하면 안 되나요?」
"요즘은 힘들지. 세상이 많이 달라졌으니까."
백신아는 나의 말에 격한 세대격차를 느끼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말세네요.」
"웃기고 자빠졌네."
내 검은 이런 식으로 헛소리를 하는 병이 있다.
「어쩌면 그 정체불명의 검사가 무술인들을 습격하는 것도 이런 이유 아닐까요? 요즘 시대에는 막 머리 비우고 맞붙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깝잖아요.」
"그래서 몇 세대 전의 낭인처럼 무작정 문파 쳐들어가서 습격하고 일대일로 한바탕해서 깨부순다고?"
「네네, 그런 거 아닐까요?」
"너희 시절이라면 몰라도 지금 기준으로는 빼도 박도 못하는 범죄야, 그거."
이건 그냥 퍽치기나 다름 없잖아.
"그 검사가 어떤 목적으로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는 이제 곧 알 수 있을 거 같은데?"
옆에 앉아 있던 루이스가 문득 테이블 방향을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나도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다음 순간,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양피지가 반으로 찢어졌다.
루이스는 아직도 붕대가 감겨 있는 왼손을 말아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움직여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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