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화 〉 14. 한 걸음 앞 (2)
* * *
홍 기룡이 입원한 병원은 내게도 익숙한 장소였다.
요전에 스페트로하고 한바탕 붙은 다음에 기절해서 실려갔던 바로 거기.
제피로스 종합병원.
그는 꼭대기의 개인 병실에 입원해있었다.
진 노인 측의 사람들인지, 여기저기에 경비를 서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하나 같이 움직이기 불편해보이는 정장 차림이었지만 자세히 보면 상당히 고도의 마법적인 처리가 들어간 옷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검은 정장 위로 회색 실이 마치 회로처럼 복잡한 무늬를 형성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방화, 방수는 물론이고 팔다리가 움직일 때마다 옷이 걸리적거리지 않도록 신축하는 기능도 있는 것 같다.
겉으로는 불편해보여도, 실제로 입어보면 상당히 움직이기 편한 옷이다.
"이쪽입니다."
선글라스를 쓴 진 노인 측의 요원이 문앞에서 멈춰섰다.
노크를 한 뒤, 허락이 떨어지고 나서 들어간다.
진한 약품 냄새가 난다. 홍 기룡은 두꺼운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팔과 다리에는 상태를 체크하기 위한 온갖 전극이 붙어있고, 얼굴은 성형수술 환자처럼 붕대를 칭칭 감은 상태다.
하지만 그의 체구나 느껴지는 마력의 기척 등으로 나는 그가 홍 기룡이라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었다.
붕대 사이로 드러난 눈동자가 나의 존재를 눈치채고 움직인다. 그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오, 왔군."
"안녕하십니까."
홍 기룡의 옆에는 진 노인과 그의 직속 경호원이 서 있었다.
여전히 압박감이 강하다.
눈짓으로 경호원과 시선을 마주친 후, 홍 기룡의 근처로 다가간다.
생각했던 것보다 그의 상태가 심각하다. 이 사람, 말은 제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인 건가.
사실 왜 나를 부른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에게 있어 친선비무를 거친 수많은 무인 중 한 사람에 불과할 뿐인데.
꼭 나를 호출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던 걸까.
"……이쪽으로."
홍 기룡이 말라 비틀어진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의 입술은 물기를 잃어버린 것처럼 쩍쩍 갈라져 있었고, 그 입술 사이로 이빨이 부러지고 빠져나간 흔적이 보인다.
얼마나 참혹하게 당했는지 알 수 있다.
홍 기룡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오라며 눈을 깜박였다.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
홍 기룡의 말은 길지 않았다. 애초에 길게 전할 만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불과 몇 마디도 되지 않는 짧은 말을 남기고 홍 기룡은 다시 천천히 침대에 몸을 기대었다.
애초부터 절대 안정이 필요한 환자였다. 그에게는 좀 더 긴 회복 기간이 필요했다.
환자의 안정을 이유로 일단 병실에서 나왔다. 나와 올리비아 뿐만 아니라 진 노인도 함께였다.
"저 사람, 상태는 어떻습니까?"
나는 진 노인을 슬그머니 돌아보며 질문했다. 진 노인은 내가 먼저 말을 걸어올 줄은 몰랐는지 크게 기꺼워하며 대답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네. 코뼈를 비롯한 얼굴을 좀 심하게 다치긴 했지만, 충분히 회복할 수 있는 부상 수준이라는 진단이 나왔지……. 회복한 뒤 재활만 제대로 진행하면 무탈하게 무도인으로 복귀할 수 있을 걸세."
"잘 됐네요."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홍 기룡에겐 특별한 감정이 없지만, 그래도 재기불능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많이 찝찝했을 것이다.
"……그에겐 무슨 말을 들었지?"
지금까지 진 노인의 배후에서 목석처럼 서 있던 남자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나와 비슷한 수준의 체격을 가진, 바위를 깎아내서 조각한 것 같은 남자.
조금만 움직여도 정장이 찢어질 것처럼 커다란 근육이 느릿하게 움직인다.
느껴지는 마력의 기세도 심상치 않다.
나는 포커페이스를 잘 유지하고 있었지만, 올리비아는 상당한 압박감을 느끼고 있는지 표정이 굳어지고 있었다.
"별 거 아니에요."
처음부터 나를 압박하기 위해서 쏘아진 기세다. 그것을 알면 흘려보낼 수도 있다.
마력의 양이 어마어마해서 쉬운 작업은 아니었지만, 나의 기량은 수많은 격전 속에서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그의 기세를 부드럽게 흘려보내면서 나는 차갑게 대답했다.
"그 검사가 쓰는 검술이 저의 검술과 비슷하다고 하더군요."
"호오."
그 대답에 진 노인이 감탄사를 토해냈다. 강한 흥미를 느낀 듯하다.
"자네의 유파의 이름을 들을 수 있을까."
"천변무궁류. 아마 모르실 겁니다. 지금은 실전된 검술을 복원시킨거라서."
"……아, 그래. 처음 들어보는 검술이야."
진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다음 고개를 돌려, 그보다 머리 하나는 큰 경호원에게 시선을 맞췄다.
"자네는 어떤가?"
"저 또한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 송구합니다."
경호원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 어떤 책에서도 이름을 찾지 못한 검왕의 숨겨진 검술이다. 검왕회의 인간들조차도 들어보지 못한 검술을 진 노인이 알고 있을 리가 없다.
"실례가 안 된다면 자네의 검술을 볼 수 있을까?"
"사건의 해결을 위해서라면, 당연히 협력 해야죠."
무술가에게 있어 초식과 기술은 함부로 드러내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천변무궁류는 초식 위주의 검술도 아니고 진 노인과 그의 경호원은 바로 어제 있었던 친선비무에서 나의 검술을 목격한 전적이 있다.
이제 와서 못 보여준다고 잡아떼더라도 크게 이득볼 것이 없다.
물론, 그래도 혹시 모르기에 천변무궁류를 가르쳐준 스승에게도 확인을 한 번 구했다.
그리고 백신아의 대답은 『그다지 상관 없는데요』 였다.
천변무궁류는 애초에 같은 천변무궁류의 검사가 아니면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한 검술이다.
자체적인 기밀성이 상당히 높다고 볼 수 있다.
진 노인과 함께 병원 뒤편에 있는 넓은 공터로 나왔다. 입원한 환자들의 재활을 위해서 준비되어 있는 공간으로, 제법 넓다.
중앙에 서서 검을 뽑고, 조용히 검술의 시연을 시작했다.
천변무궁류에도 초식은 있지만, 이것은 말하자면 고급 단계에 들어가기 전까지 마력의 흐름을 제어하는 기준을 잡아주는 길잡이에 가깝다.
마력의 흐름을 제어해서 원하는 현상을 일으키는 것이 천변무궁류의 요점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실력이 붙으면 초식이나 검술에 일일이 구애 받지 않는다.
현재의 나도 딱 그런 단계였다. 발생시키기를 원하는 기술을 머릿속에 그리고, 거기까지 도달하기 위한 마력의 흐름을 검술과 몸짓으로서 제어한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이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건 기실 알아본들 전혀 쓸모가 없는 정보였다.
마력의 흐름을 제어할 수 있는 단계까지 대기 중의 마력을 자극한 뒤, 어느 정도 때가 되었다 싶었을 때 신발 밑창을 바닥에 강하게 마찰시키면서 자세를 잡았다.
한 줄기 질풍이 불었다.
"……!!"
그 다음 순간, 나는 전혀 다른 위치에서 검을 휘두른 자세로 멈춰 있었다.
올리비아는 물론이고 진 노인마저 나의 움직임을 놓쳤다.
하지만……, 진 노인의 경호원은 유일하게 내 움직임을 감지했는지 끝까지 시선으로 나의 뒷모습을 쫓고 있었다.
"우선, 이것이 제일검."
나는 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척하며 검을 비스듬하게 어깨에 걸쳤다.
"사실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있는 올리비아로부터 그 정체불명의 검사가 저의 검술과 유사한 검술을 펼친다는 것을."
"호오,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그 정체불명의 검사의 소문을 전해 듣고 있던 중, 그 검사가 사용하는 검술의 형태가 백신현의 검술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백신현에게는 그 사실을 미리 알려 두었었죠."
올리비아는 조금 당황하면서도 침착하게 대답했다.
녀석이 시선이 이쪽으로 슥 움직인다.
"그 정체불명의 검사에게는 세 가지의 눈에 띄는 기술이 있다고 전해집니다. 그 첫번째가 바로 조금 전에 백신현이 보여준 초고속의 참격기, 유성?입니다."
"그리고 두번째가 어제 제가 홍 기룡 씨와의 친선 비무에서 보여줬던 초강력의 신체 강화기, 혜성?."
"아, 그건 어제도 봤지. 자네도 기억나나?"
"네, 회장님. 기억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쓰이는 강화 마법과 비교해서 수 배에서 수십 배에 가까운 출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진 노인이 손뼉을 쳤다.
"호호. 그럼 마지막 그 세번째 검술이라는 것을 볼 수 있을까?"
"이것도 어제 보인 기술입니다."
마력의 기류가 검왕검의 날을 중심으로 맺히기 시작한다.
마력의 색채는, 청색.
"천변무궁류의 제삼검, 거성巨?. 보다시피 효과는……"
"조금 전의 혜성과 같은 구조인가. 그 원리를 그대로 검에 적용했군."
"비슷하죠."
진 노인의 경호원이 조용히 평가했다.
말한 것처럼 거의 유사한 원리이지만 마력의 색채가 적에서 청으로 달라지는 만큼 서로 차이가 있다.
감각은 비슷해서 그나마 익히기 쉬웠던 기술이지만.
"이렇게 하나 같이 특이한 성질의 기술이라 올리비아도 홍 기룡 씨도 제 검술과의 유사성을 지적한 거겠죠."
"그 이외의 기술을 보여줄 수 있겠나?"
"그건 안 되겠습니다."
나는 검왕검을 도로 검집에 집어넣으면서 대답했다.
"아직 확실하게 제 검술과 동일한 검술이라고 밝혀진 것도 아니거니와, 애초에 그쪽까지 순서가 가지도 않을 거예요. 그건 확실합니다."
애초에, 진 노인의 일파 중에서 이름난 실력자들은 죄다 저 대륙 너머에 있다.
실질적인 진 노인의 최고 전력은 여기에 있는 경호원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의 실력은 척 봐도 나와 루이스를 훨씬 능가하는 경지에 있다.
그에게 순서가 돌아가기도 전에 나 또는 루이스와 부딪칠 가능성이 높다.
"그런 상황에서, 이 이상 기술을 유출하고 싶진 않네요."
제일검부터 제삼검까지는 이미 정체불명의 검사가 구사했다는 소문도 있었던 데다가, 홍 기룡과의 친선 비무에서 보여준 적도 있기 때문에 거침없이 드러낼 수 있다.
하지만 제사검부터는 아무래도 드러내는 게 꺼려진다.
정면승부에 특화되어 있는 제일검부터 제삼검까지의 기술과는 다르게, 제사검부터 제육검까지는 속임수와 페이크에 집중되어 있는 환검? 계통이다.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반감되는 계통이라는 소리다.
나는 진 노인을 돌아보며 살짝 웃었다.
"진 어르신도 도장을 운영하고 계시는 만큼 이해해 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오오, 그렇군. 그건 확실히 내가 좀 무례했어. 사과하지."
진 노인은 납득하는 기색이다.
하지만 그는 나의 네 배 가까이 되는 인생을 살아온 늙은 너구리다. 보이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수는 없다.
"자네는, 아니 자네들은 혹시 그 검사에 대한 조사를 계속해나갈 생각인가?"
"그렇습니다. 언제 저희 차례가 될지 알 수 없으니까요. 할 수 있으면 저희 선에서 끝을 내야죠."
"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우리도 도와줄 수 있네……. 홍 기룡은 비록 내 부하는 아니더라도 내 초대로 여기까지 온 내 사람이야. 그를 이런 식으로 만든 습격자를 용서할 수는 없지."
"알겠습니다. 자주 연락하고, 여차할 때는 협력하기로 하죠."
나는 진 노인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렸다.
"올리비아."
"어, 음. 왜 그러냐."
"이제 슬슬 돌아가자."
"……그러지. 그럼, 진 어르신.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올리비아가 떠듬떠듬 거리면서 고개를 숙이고 돌아선다. 하지만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등뒤에서 진 노인이 다시 한 번 나를 불렀다.
"백 군. 그 아이, 아이샤와는 무슨 관계인가?"
연금술사의 이름이 나왔다.
나는 대수롭지 않은 척을 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제 스승 같은 사람입니다. 열넷, 열다섯 시절부터 지금까지 쭉 신세를 져 왔어요."
"……그 아이에게 자네 같은 젊은 고수가 있다니, 큰 행운이구만."
"감사합니다."
진 노인과 일별한 후 완전히 자리를 빠져나왔다.
올리비아는 병원을 나온 뒤, 한참 동안 입술을 다문 채 당차게 걷고 있었다.
인적이 드문 카페로 들어가서 주문하는 그 순간까지도 올리비아는 조용했다. 심하게 긴장한 것 같다.
한참의 시간을 소모한 후, 올리비아가 무거운 한숨 소리를 토해냈다.
"……압박감으로 심장이 으깨지는 줄 알았다. 백신현 너는 그 상황에서 용케도 말이 나오는군. 대단한 놈."
"그럼 뭐, 겁 먹어서 말문이라도 막혀야 하냐?"
"그런 건 아니지만."
올리비아가 팔짱을 끼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하지만…… 다시 봐도 대단한 실력이더군. 그 남자."
"누구? 아, 그 진 노인 경호원?"
"그래, 저번에 계약 맺으러 갈 때도 한 번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그의 기세를 이겨내느라 상당히 고생했던 기억이 있다. 내 사견으로는 아마 마그누스 님이나 스텔라 님 같은, 최상위권의 특급 모험가에 버금가는 실력자인 것 같아."
올리비아도 나이에 비하면 상당히 뛰어난 실력자이지만 진짜배기 특급에 비하면 여러 모로 손색이 있다.
내가 보기에도 그의 실력은 어마어마한 수준인 것 같았다. 올리비아가 압박감을 느끼는 건 당연했다.
나는 올리비아 쪽으로 상반신을 살짝 기울이면서 질문했다.
"그 정도 실력자면 꽤 유명할 거 같은데, 혹시 올리비아 너는 아는 거 있어?"
"……아, 그렇군. 너는 여기에서 거의 나가지 않으니까 잘 모를 수도 있는건가."
"음?"
말하는 투를 들어보면 아는 게 당연할 정도로 유명한 사람인 것처럼 들린다.
호기심이 동해서 솔직하게 질문했다.
"나는 잘 모르는 사람인데, 혹시 유명한 사람인가?"
"양지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암흑가의 지하무술계에선 상당히 유명한 인물이다."
올리비아가 자신의 귓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중동의 지하무술계에서는 대적할 자가 없는 일인자로 알려져 있으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