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화 〉 14. 한 걸음 앞
* * *
짹짹 들려오는 새소리에 눈이 뜨였다.
동이 트고 있었다.
"……."
결국 한숨도 자지 못했다.
연금술사와 하룻밤을 보내면 늘 이런 식이다. 동틀 때까지 질리도록 한 뒤, 떠오르는 아침해를 바라보며 고민에 빠진다.
오늘은 일찍 잘 거라던 난 도대체 어디로 간 거야.
씻고 나서 자려고 하니까 연금술사가 유혹하고, 또 한참 한 뒤에 또 씻고, 그 다음에는 내가 괜히 불이 붙어서 연금술사를 누르고.
그런 식으로 몇 번을 반복했을 뿐인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눈은 맑고 정신은 또렷하다.
오히려 내가 연금술사의 정기를 뽑아 먹은 것 같다.
내 옆에 모로 누워서 끙끙거리는 연금술사의 머리카락을 두어번 쓰다듬은 후, 땀을 비롯한 이것저것으로 푹 젖어있는 몸을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몸을 씻고 나서는 곧바로 찬바람이 쌩쌩 부는 야외로 나온다.
올해는 여러모로 다사다난한 일이 많았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이 잘 체감되지 않는다.
검왕검을 처음 주웠을 때가 여름. 그리고 지금은 가을의 끝물이다.
긴팔이긴 해도 얇은 차림으로 외출할 날씨는 아니다.
「있잖아요, 검주. 매번 이런 얘기 하는 것도 좀 지치는데요.」
"어, 왜?"
「……대단하시네요, 진짜.」
백신아가 답지 않게 감탄하는 목소리를 냈다.
이 녀석이 내게 감탄사를 토해내는 건 상당히 드문 일이다. 칭찬은 해주더라도 진짜로 놀라서 감탄하는 일은 아무래도 드물다.
이게 내 무공을 보고 나온 말이라면 참 좋았을 텐데……, 다른 것도 아니고 허리 쓰는 기술 가지고 이런 소리를 듣는 게 참 이상한 기분이다.
혹시 내가 이쪽에 재능이 있는 건가?
그런 건 알고 싶지 않았는데.
「하루 이틀 본 것도 아닌데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요. 역시, 얌전하게 생긴 사람이 실제로는 더 무섭다니까.」
검왕검이 허리춤에 매달린 상태로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그 모습에 가상 공간 속의 백신아가 겹쳐진다.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듯한 느낌이다.
「무술가가 아니라 그쪽으로 진로를 잡으셨으면 더 승승장구 하시지 않았을까용?」
"넌 진짜, 그러다가 맞는다."
어차피 쇳덩이라 때려봐야 내 손만 아프지만 그런 건 상관 없다.
지금은 요 녀석을 패주고 싶은 기분이다.
검집 위로 녀석의 칼날 부분을 손바닥으로 팡팡 소리가 나게 때린다. 백신아는 아잉, 하고 소리를 내면서 몸을 비틀었다.
통증을 주려던 내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반응이다.
한숨을 한 번 쉬고 다리를 움직이며 몸을 풀기 시작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뛰어주지 않으면 하루를 시작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어느 정도 땀이 나올 때까지 몸을 움직인 후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왠걸, 문앞에 서서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긴팔 차림의 루이스가 나를 보고 손을 들었다.
"아침부터 뛰고 오는 길이야?"
"어, 그런데 넌?"
"오늘따라 눈이 일찍 뜨였는데, 잠이 안 오더라고. 그래서 어제 일로 상의할 겸 와 봤지."
아침 일찍부터 이러는 걸 요 녀석은 민폐라고 생각하지 않는 건가.
하여튼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죄다 성격이 이상하다. 멀쩡한 건 나하고 샤를로트밖에 없는 거 같다.
「……아니죠, 검주. 보통 주변 사람들이 죄다 이상하다는 건 검주도 만만찮은 인격이라는 뜻인데요.」
"시끄러."
「아잉.」
다시 한 번 백신아를 손바닥으로 두들겼다.
백신아는 목소리를 숨기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의 대화는 루이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을 것이다.
루이스가 씨익 웃으며 한 마디 거들었다.
"왜? 맞는 말이잖아. 그리고 내가 보기에 제일 이상한 건 너야."
"됐거든."
몸을 돌려서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간다. 그 직후 루이스가 표정을 찡그리며 코를 움찔거렸다.
"……피곤하다면서, 도대체 얼마나 해댄 거야?"
"뭐, 그렇게 됐어."
"하여튼,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더니."
그 말이 이런 때 쓰이는 말이 맞나?
"에이, 이러면 괜히 쉬라고 배려해준 나만 헛물 켠 거 같잖아."
나도 나름대로 냄새를 지우려고 환기도 하고 청소도 한 다음에 나온 건데, 루이스의 감각을 속이기는 어려웠나보다.
루이스가 고개를 쭉 뻗어서 침실에 누워있는 연금술사를 살펴본다. 그녀는 지금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창백한 안색으로 끙끙거리는 중이다.
"몸도 약한 사람이 뒷일은 생각도 안 하고 막 해대니까 저렇게 되는 거지. 하여튼, 절제라는 게 없어요, 절제라는 게."
연금술사가 잠에서 깨지 않게 방문을 닫은 뒤, 테이블의 의자를 빼서 자리에 앉는다. 루이스도 반대쪽에 앉았다.
"보아하니 밤샌 거 같은데, 안 자도 괜찮겠어?"
"괜찮아. 익숙하니까."
"칫, 쉬게 해준 보람이 없잖아."
루이스가 고개를 획 돌리며 혀를 찬다.
나는 루이스의 태도에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면 너도 여기 온 김에, 그냥 하고 갈래?"
"……안 해. 너하고 다르게 난 언제 그 정체불명의 검사한테 습격 당할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그런 상황에서 마음 편하게 그 짓을 하긴 힘들어."
예상하던 대답이었기에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 이유는 간단하다. 루이스의 코어에 스며든 내 마력이 슬슬 바닥날 때가 되었기에, 다시 한 번 충전할 필요가 있어서이다.
엄밀히 따지면 어제 했어야 하는 일이지만 여러 가지 문제가 겹쳐져서 어제는 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루이스 쪽에서 몸을 뺐다고 해야 할까.
이런 일에 상당히 개방되어 있는 연금술사와 비교해서 루이스는 아직도 좀 어색한 느낌이 있다.
뭐, 실제로 한 횟수도 그렇게 많지 않으니까.
"일단 그 검사를 어떻게 하는 게 최우선인데, 뾰족한 방법이 뭐가 있을까……."
"만나는 거 자체는 쉬워. 다음 표적은 너 아니면 란즈 가주일 테니까."
"꼭 그럴까? 네 차례일수도 있다고 봐."
루이스는 내 의견을 부정하며 고개를 들었다.
"어제의 친선비무로 네 실력이 특급에 버금가는 실력자라는 건 이미 알려졌잖아. 표적이 될 가능성은 충분하지. 그리고 그 정체불명의 검사의 말도 좀 신경이 쓰여."
나도 그 이야기는 들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한다.
"날 보면서 '찾았다'라고 말했지."
"응, 그게 신경 쓰여."
"설마 진짜로 날 습격해온다면 나는 오히려 좋아.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백신아가 상대하면 어렵지 않게 꺾을 수 있을 테니까."
애초에, 그 정체불명의 검사는 한계가 명확하게 그어져 있다.
마그누스나 스텔라 같은 최상위권의 특급이나 그에 버금가는 구파일방의 초고수들은 물론, 백신아와 맞서 싸우기도 어렵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어제 그 국면에서 도망칠 리가 없다.
"……문제는 마주쳤을 때 확실하게 잡아야 한다는 거지. 일단 도망치기 시작하면 붙잡을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
그 검사를 확실하게 제압하기 위해서는 도망칠 틈도 주지 않고 한 번에 쓰러트려야 한다.
꽤 까다로운 조건이다.
루이스가 검지를 세우고 말했다.
"내가 오늘 아침에 모험가 길드에 출근 도장 찍으러 나갔는데, 모험가 길드에서도 수배서를 하나 낼 생각인 거 같더라구. 최상급 난이도로."
"용모파기 하나 제대로 나온 게 없는데 뭘 어떤 식으로 판정하려는 거지."
"그러게."
애초에 얼굴도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존재이다.
모험가 길드에서도 어느 정도 대응 메뉴얼은 존재하겠지만, 애먼 사람을 잡아와서 그 검사라고 잡아떼더라도 확인할 방법이 없다.
어쩌면 그 정체불명의 검사를 압박하기 위한 수단일 가능성이 있다.
높은 등급의 의뢰는 모험가 길드 뿐만 아니라 도시 각지에도 의뢰서가 걸리고 대대적으로 광고가 나가니까.
"……싸우는 거야 그렇다 쳐도 그 타이밍을 온전히 상대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는 게 성가시네. 정정당당하게 덤비라고."
루이스가 손바닥에 주먹을 부딪치면서 코를 씨근거렸다. 난 차가운 시선으로 대답했다.
"사람 습격하고 다니는 놈한테 그런 말을 해서 통하겠냐."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사람 습격하고 다니는 미친 칼잡이에 불과한 놈인데, 그런 걸 기대하는 것도 이상하다.
마주치면 문답무용으로 베어버리는 게 최선이다.
고민하고 또 고민해도 마땅한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간다. 그리고 그때, 바깥에서 갑자기 인기척이 느껴졌다. 손님인가? 하지만 내 인간 관계는 상당히 좁아서 여기까지 찾아오는 사람도 거의 없다.
또 진 노인인가. 내가 한숨을 쉬었을 때, 문 바깥에서 내가 아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다. 백신현. 올리비아."
자리에서 일어나서 문을 열어준다. 루이스보다 높고, 나보다 낮은 눈높이. 단정한 군청색 머리카락.
정장차림의 올리비아가 이른 시간에도 아랑곳없이 찾아와 있었다.
하지만, 문이 열린 순간 올리비아도 그 냄새를 맡은 것 같다. 읏 하고 소리를 내면서 한 걸음 물러선다.
환기한다고 환기했는데도 실력자들의 감각에는 역시 감지되는 것 같다. 루이스는 그렇다 치더라도 올리비아까지 이러니까 좀 민망하다.
"음, 뭐, 음. 아, 루이스 님도 계셨습니까."
"아, 네. 계셨는데요. 여기는 어쩐 일로?"
루이스는 올리비아만 보면 괜히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경향이 있다. 올리비아가 그 모습에 또 다시 굳는다.
이 두 사람은 역학관계가 상당히 명확하게 드러나는 편이다.
올리비아는 잠시 동안 태도를 갈무리한 뒤, 다시 나와 시선을 맞췄다.
"홍 기룡이 조금 전에 의식을 차렸다고 진 노인 측에서 연략이 왔었다."
"아, 무사한 모양이네."
다행이다. 통성명을 나누고 주먹을 조금 맞댄 게 전부이지만, 그래도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조금 찝찝했을 것 같다.
"그런데 그 홍 기룡이 너를 찾는다고 하더군."
"나를?"
왜지?
그 정체불명의 검사에 대해서 전해줄 사실이라도 있는 건가?
"그래. 그러니까 같이 병원까지 와줄 수 있겠나?"
"굳이 날 불러서 줄 정보가 있다면, 당연히 가 봐야겠지."
직접 붙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점이 있을 것이다.
"나도 따라갈까?"
루이스가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나는 그 말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닫혀 있는 침실의 문을 힐끗 쳐다봤다.
"괜찮아, 혼자 가볼게."
"알았어. 난 여기서 기다리고 있지 뭐."
말을 하지 않아도 루이스는 이미 눈치챈 기색이다. 루이스가 얌전하게 앉아있는 모습을 보고 오히려 올리비아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올리비아가 나이로 치면 오히려 우리보다 연상인데 전체적으로 많이 눌리는 인상이다.
기가 많이 죽은 거 같다고 해야 할까.
최소한의 짐만 챙긴 뒤 곧바로 현관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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