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화 〉 13. 검왕을 찾아서 (12)
* * *
"백신현,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진 노인이 현장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올리비아가 현장에 찾아왔다.
아마 묻고 싶은 게 많이 있을 것이다. 함께 퇴장하던 중 내가 올리비아를 내버려두고 혼자서 여기까지 뛰어왔으니까.
올리비아는 현장에 남은 참혹한 상흔을 둘러보더니,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걸 짐작한듯 표정이 굳어져 있었다.
"홍 기룡이 습격 당했어. 네가 말했던, 그 정체불명의 검사에게."
"……! 그런 거였나……"
"아직 확정은 아니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에게 습격 당한 건 사실이야. 그것도 처참하게 박살난 거 같고."
나는 시선을 돌렸다. 벽에는 홍 기룡이 얼굴부터 처박힌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의 혈액으로 붉은색이 흥건하다.
"네가 말한 것처럼 정말 안개처럼 사라지더라. 그 짧은 사이에 나와 루이스의 추적을 벗어나서 도망친 걸 보면 보통내기는 아닌 거 같아."
고개를 돌려서, 다음에는 반대편을 본다.
이 위치에서 출구까지는 못해도 십수 개의 벽이 세워져 있었지만, 정체불명의 검사는 하나도 남김 없이 깔끔하게 관통시킨 후 바깥으로 빠져나가고 말았다.
그야말로, 추적할 틈도 없이 빠르게.
하지만 그게 가능하기는 한 일인가. 나는 그렇다 쳐도 루이스의 추적술이나 파비아 같은 개과 수인의 추적조차도 완전히 뿌리치고 빠져나가는 게 가능하기는 한 일인지 모르겠다.
내가 같은 상황이었다면 지금처럼 흔적도 남기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었을까.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뭔가 트릭이 있는 건 틀림없다.
나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면서 말했다.
"일단, 경찰부터 부르고 생각할까."
* * *
경찰이 출동한 이후, 현장에는 격리 조치가 취해졌다.
나는 출동한 경찰에게 우리가 목격했던 상황을 최대한 자세히 설명한 후, 스페트로 가문이 쓰고 있는 폐교회로 안내 받았다.
내가 의뢰 성공에 대한 잔금 문제를 합의하던 중에 갑자기 뛰쳐 나갔던 거라서 그 이야기를 확실하게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음, 홍 기룡과 격전을 거친 직후 거의 쉬지 못했기 때문에 조금 피곤하다.
상처는 없지만 그건 애초에 긁힌 상처조차 허용해서는 안 되는 싸움이었기 때문이고, 전체적으로 몸이 나른했다.
오른손으로 목덜미를 주무르면서 폐교회로 들어간다.
외팔의 남자, 란즈 드 스페트로가 소파에 앉은 채 나를 올려보았다.
"오늘은 고생 많았네. 자네 덕에 큰 위기를 넘겼어."
"고생했다 백신현. 홍 기룡은 어마어마한 수준의 강자였어. 네가 아니었더라면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올리비아도 한 마디 거들었다.
홍 기룡은 강적이었다. 친선 비무의 형태라서 내가 어느 정도 이득을 본 점도 있다고 생각한다.
서로의 생명을 건 생사결이었다면 조금 더 빠듯하게 승부가 나지 않았을까.
설령 생사결이었다고 해도 질 생각은 없지만.
란즈 가주는 하나밖에 없는 팔로 종이 서류를 들어서 내게 내밀었다.
"정산 문제는 오늘 바로 끝내도록 하지. 약속했던 의뢰 성공 보수일세."
"……."
서류를 받아서 눈으로 새삼 확인한다.
이미 쉰내가 날 정도로 여러 번에 걸쳐 확인한 서류이지만, 돈이 내 주머니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안심할 수 없다.
서류에 오류가 없다는 걸 체크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했습니다."
"음. 의뢰 성공도 모험가 길드에 전달하도록 하지."
란즈 가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험가 길드의 의뢰는 의뢰인의 완료 확인으로 마무리된다. 이것이 그대로 실적에 반영되어서 모험가 등급에도 영향을 미친다.
지금의 나는 상급 모험가 검정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더 위로 올라갈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지만, 상급 모험가 검정 시험을 통과한 이후 지금의 실적이 본격적으로 반영될 것이다.
오늘의 의뢰는 최고 등급의 난이도로 설정 되어 있었으니까.
"자네 같은 인재가 우리 측에 와주면 좋을 텐데."
"한동안은 누구 밑에 들어갈 생각 없습니다."
"아쉽군."
란즈 가주가 입맛을 다신다.
최근 며칠 동안 이번 의뢰 때문에 이 폐교회를 여러 번 출입했었는데, 그때마다 란즈 가주에게 듣는 말이다.
농담은 아니다.
실제로 몇 번씩이나 스페트로 가문 쪽으로 넘어왔을 때 제공되는 보수나 온갖 혜택에 대해서 들었으니까.
하지만 뭐, 여기에서 진짜로 넘어가버리면 지금까지 날 보고 투자한 루이스에게 볼 낯이 없기도 하고.
올리비아와 샤를로트는 괜찮은 놈이지만 란즈 가주는 날 가지고 무슨 수를 써보려다 실패한 전적도 있고.
그다지 마음은 안 끌린다.
정산을 확실하게 끝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배웅하지."
"아, 고마워."
올리비아가 옷걸이에 걸려 있던 코트를 건네줬다. 겉에 걸치고 나서 란즈 가주에게 고개를 살짝 숙인 후 폐교회를 나왔다.
"오늘 네가 싸우는 모습을 보고 확신했다."
"뭐가?"
교회 마당까지 쫓아 나왔던 올리비아가 날 보며 말했다.
"그때 가주님을 말리기를 잘 했다고. ……내가 그때 가주님을 말리지 못했다면 널 잘못 건드렸다가 아주 된서리를 맞았겠지."
글쎄다.
솔직히 그때 란즈 가주가 계략을 써 왔다면, 솔직히 감당하기 어려웠을 거라고 생각한다.
불과 두 달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지금의 내 실력은 그때와 비교해도 차원이 다르게 상승되어 있다.
나는 스페트로와의 전투에서 정말로 많은 것을 얻었다.
그 싸움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저 아래에서 실력을 높이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사선을 넘나드는 싸움의 가치는 그런 것이다.
뭐……, 진짜로 란즈 가주가 계략을 썼다면 바로 백신아에게 몸을 넘겨서 다 쓸어버렸을 테지만.
그런 의미에서 보면 란즈 가주가 계략을 쓰지 못하게 말리고, 최대한 유한 방식으로 내게 접근한 올리비아의 선택은 틀리지 않은 셈이다.
내가 이번 의뢰를 받아들인 것도 거의 올리비아 때문이고.
"오늘은 고생했다. 다음에도 무슨 문제가 있으면 네게 부탁하도록 하지."
"아. 보수만 충분히 준다면."
"조심해서 들어가라. 그 정체불명의 검사가 너와 홍 기룡의 친선 비무를 보고 있었다면, 너도 그 검사의 표적이 될 가능성이 있어."
"그래, 너도."
그 정체불명의 검사는 어느 정도 수준 이상의 실력자라면 가리지 않고 습격해대는 성질이 있다고 들었다.
나와 루이스도 그렇지만, 란즈 가주 역시 표적이 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올리비아와 헤어진 후 다른 길로 빠지지 않고 빠르게 집으로 복귀했다. 지친 상태로 쉬지 않고 계속 움직여서 그런가, 몸이 아주 천근만근이다.
아, 배고프다. 먹을 거나 좀 사서 들어갈까.
여기의 음식은 간이 좀 약한 편이라서 처음에는 조금 고생했지만, 익숙해지면 그럭저럭 먹을 만 하다. 고기와 빵을 사서 들어간다.
갑자기 많은 돈이 들어오긴 했는데, 생각보다 쓸 데가 없네.
돈을 너무 손에 쥐고만 있는 것도 좋지는 않으니까, 쓸 만한 구석을 생각하긴 해야 하는데…….
이런 식으로 답이 없는 문제를 고민하고 있을 때, 나는 생각이 무척 길어진다. 결국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빈집촌에 도착할 때까지도 확실하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일단 고민을 끝내고, 문고리를 돌렸다.
"늦었네."
루이스의 목소리였다. 고개를 든다.
손님용 의자에 루이스가 거만하게 앉아 있었다. 옆에는 연금술사도 있다.
테이블이 있는 위치에는 나더러 앉으라고 세팅한 의자와 찻잔이 있다. 지금 막 내렸는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다.
의자를 당겨서 자리에 앉는다.
루이스가 잔을 들어서 가볍게 내 잔에 부딪쳤다. 찻잔 가지고 할 만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그런 사소한 일에 일일이 매달리는 성격은 아니다.
"쉬고 싶지? 얼른 끝내고 놓아줄게."
마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정확히 내 컨디션을 짚는다. 루이스도 그 친선비무를 지켜보고 있었던 만큼 내가 많이 지쳐 있는 상태라는 건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나 이상으로 나의 능력이나 한계를 정확히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여자이니까.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빠르게 본론을 짚었다.
"아, 그 정체불명의 검사 때문이지?"
"응, 맞아."
루이스의 표정이 빠르게 굳는다.
"경찰도 움직이겠지만 너도 알다시피 그 검사의 도주 실력은 어마어마한 수준이야. 솔직히 말해서 정공법으로 추적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니라고 봐."
추적술의 달인인 루이스가 이런 말을 할 정도면 그 검사는 정말로 까다로운 존재인 것 같다.
하긴, 어마어마한 후각을 가진 개과 수인조차도 제대로 추적이 불가능한 수준이었으니까.
"애초에 물리적으로 도망친 것도 아니겠지. 벽을 무너트린 건 그냥 페이크. 특수한 방법으로 모습을 감추는 게 틀림없어."
나는 손가락을 튕기면서 대답했다.
안개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진다는 소문은 비유가 아니다.
특수한 형태의 기술을 습득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마법일까?
연금술사를 돌아본다. 하지만 연금술사로서도 영 감을 잡지 못하는 얼굴이다.
"그런 계통의 기술을 몇 개 알고 있지만, 너희들도 알다시피 마법은 그런 편리한 게 아니야. 아니, 그 이전에…… 공간 이동 계열의 마력은 매우 특수한 파형을 발산하기 때문에 그런 걸 썼다면 당연히 너희도 느낄 수 있었겠지."
"그야말로 미지의 기술인가. ……사실상 추적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도 무방하겠네요."
"네가 생각하기엔 어때?"
나는 허리에 매고 있던 검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현 시점에서 내가 알고 있는 모든 무인 중 최강의 존재.
그녀는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모…… 르겠어요. 연금술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공간 이동이라면 그걸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어요. 저는 물론이고 검주나 루이스 아씨라도 눈치챌 수 있으셨겠죠.」
백신아의 감각에도 오리무중인가.
하지만 이건 오히려 역으로 힌트가 될 수도 있을 거 같다.
즉, 루이스의 추적술이나 개과 수인의 후각조차 무시하면서, 공간 이동이 아닌 방식으로 도주했다는 소리가 되니까.
……아직은 긴가민가 하지만 무슨 방식으로 이동하는 건지 살짝 감이 올 거 같기도 하다.
"그 검사가 천변무궁류를 쓰는 건지는 확인을 못 했어. 전투가 너무 짧기도 했고."
나는 천변무궁류의 사용자로서의 의견을 덧붙였다.
공방이랄 것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검술의 성질에 대해서 거의 분석하지 못했다.
"가장 좋은 건 습격 했을 때 역으로 박살을 내 버리는 건데."
루이스다운 발상이다. 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최고의 방법인 건 틀림없다.
설령 추적하는데 성공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그 검사를 쓰러트리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어차피 그 검사는 각지의 실력자들을 차례로 노리고 있다.
머지 않아 루이스의 차례가 돌아오겠지.
"차라리 루이스 네가 계속 여기에 있는 편이 나을까? 그래야 습격을 당하더라도 바로 협력해서 대응할 수 있잖아."
"으음. 하지만 대비하고 있는 티를 내면 왠지 나타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조금 전에도 수적으로 열세에 처하니까 바로 도망쳐버렸고."
"일대일로 붙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면 아예 나타나지도 않을 거라는 소린가……. 귀찮네."
일단 도망치기 시작하면 잡는 게 불가능에 가깝다는 점이 껄끄럽다.
결국 일대일로 싸우면서 기회를 노리다가 한 방에 끝내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소리니까.
이렇듯 나와 루이스가 마땅한 해답을 내지 못하고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자, 연금술사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질문했다.
"그런데 너희가 꼭 그런 식으로 나설 필요가 있을까?"
"뭐가요?"
"지금이야 그 검사도 승승장구하고 있지만, 저런 식으로 계속 해나갈 수 있을 리가 없어."
연금술사는 슬리퍼를 벗고 맨발이 되었다. 그대로 의자에 쪼그리고 앉아서 차를 홀짝인다.
"적당히 놔둬도 최상위권의 특급 모험가나 그에 버금가는 구파일방의 실력자들한테 덤비다가 쓰러질 거 같은데…… 그럴 바에야 굳이 부딪치려고 할 필요 없이, 함께 다니면서 습격 정도만 대비하는 게 어떨까."
"그런 방법도 있긴 하죠."
루이스는 그 검사가 수적 열세를 껄끄러워 할 거라고 예상했다.
이건 반대로 말하면, 나하고 루이스가 항상 붙어 다니기만 해도 습격 당할 일은 없다는 소리가 된다.
그럼 그 검사도 적당히 다른 상대들을 노리다가 더 윗 단계의 고수들을 습격하는 걸로 방향을 틀어버릴지도 모른다.
사실, 연금술사의 말이 가장 정답이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에 머리를 들이밀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언제 습격 당할 지 전전긍긍하며 속앓이할 바에야, 한 번 부딪쳐서 박살내버리는 편이 더 낫잖아요."
루이스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그리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검사는 절 보고 '찾았다'라고 말했어요. 일단 때려눕혀 놓고, 그게 무슨 뜻인지 한 번 들어보고 싶네요."
"……."
연금술사는 도저히 공감하지 못하는 얼굴이다.
"……으음, 난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어. 젊은 애들은 감성이란……"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하고. 이제 슬슬 일어날까요? 신현이 쟤도 좀 쉬어야 할 거 같고."
루이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나를 향해 눈짓한다. 친선 비무를 지켜본 루이스는 그 전투에서 내가 꽤 체력적으로 지친 상태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자리에 찾아온 것은 어디까지나 그 정체불명의 검사에 대한 사실을 다시 한 번 인식시키기 위해서였다.
그 존재와는 다시 한 번 부딪치게 될 테니까.
"아, 나는 잠시 더 있다가 갈게."
"……신현이도 좀 쉬어야 하지 않을까요?"
연금술사는 자리에 앉은 상태로 고개만 들었다. 짧은 말이었지만 루이스는 이미 연금술사의 의도를 파악한듯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루이스도 좋은 성격은 아니지만 연금술사와 비교하면 모범생이나 다름 없다.
연금술사에게 배려를 바라는 것도 좀 웃기긴 한데.
"그건, 신현이 하기 나름이겠지."
"뭐, 본인 의지가 제일 중요하긴 한데요."
루이스는 살짝 표정을 찡그린 후.
"그럼 전 먼저 일어나 볼게요. 야, 백신현. 너도 딴짓하지 말고 쉬어 둬. 나도 나지만 너도 습격 당할 가능성이 있다고."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농담 아니다?"
루이스는 영 못마땅한 얼굴이다. 무슨 심정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건지 대충 이해는 간다.
자리에서 일어난 루이스는 문을 열고 나가려다가 문득 돌아서서 나와 눈을 맞췄다.
"참, 그리고 근처에 꼬인 벌레들은 내가 처리할 테니까 신경 안 써도 돼."
"그래."
그 말을 끝으로 루이스가 문을 닫고 사라졌다.
그 직후 우당탕탕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수많은 사람들의 비명이 연이어서 들렸다.
아마 진 노인 쪽에서 우리를 감시하기 위해서 보낸 사람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 정도로 질 낮은 은신술로는 루이스를 속일 수 없다.
루이스는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깔끔하게 제거해버릴 것이다.
연금술사는 창밖을 잠시 응시하더니 고개를 저으면서 살짝 웃었다.
"과시하듯이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거 같은데."
"전 그런 취향 없어요."
나는 커튼으로 창문을 가리면서 대답했다.
아무리 내가 최근 들어 성적으로 많이 개방되었다고는 해도 그건 좀 난이도가 높다.
아니, 애초에 그런 거에 익숙해지기 시작하면 끝장인 거 아닐까.
쾌락으로 뇌가 썩어버린 인생을 살게 될 거 같다.
"나는 조금 관심 있을지도. 짧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이 해서 그런가. 살짝 매너리즘이 온 거 같아."
짧게 말한 연금술사가 의자에 앉은 내 허벅지 위에 올라탔다.
내 오른손을 조그만 양손으로 쥐고 들어올리더니, 자신의 목으로 가져가게 했다.
다섯 손가락을 하나씩 조작해서 스스로의 목을 감싸쥐게 만들었다.
도대체 무슨 속셈인지 알 수 없어서,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연금술사는 자신의 목을 쥐게 했던 나의 다섯 손가락을 다시 하나씩 풀어헤친 다음, 허리를 곧게 펴서 나와 시선을 마주치려 했다.
"그나저나 음…… 확실히, 꽤 피곤해보이네. 홍 기룡이 그 정도로 대단한 상대였던 걸까."
내 눈에 손을 가져간 뒤, 집게 손가락으로 오른쪽 눈꺼풀을 벌린다.
거울은 보지 않았지만 아마 실핏줄이 올라온 상태가 아닐까 싶다. 꽤 피곤한 상태인 건 사실이니까.
"그렇다면…… 일단 체력을 회복시키는 게 먼저려나."
연금술사가 두 손을 겹쳐서 내 뒤통수를 감싸쥔 후, 내 얼굴을 끌어당겨서 부드럽게 감싸앉았다.
내 얼굴은 정확히, 연금술사의 가슴 사이에 파고 들어간 상태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