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화 〉 13. 검왕을 찾아서 (8)
* * *
같은 시각, 제피로스 소지의 모 호텔.
홍 기룡은 고층의 방을 잡아서 숙박하고 있었다.
이 도시에는 이틀 전에 도착했다. 내일 있는 친선비무는 그에게도 역시 중요한 시합이다. 대결의 결과에 따라 지급되는 보수가 달라지니까.
그의 고용주는 가지고 있는 모든 실력을 다해서 맞서 싸우라고 요구해왔다. 그는 진심 어린 투쟁 속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다고, 강하게 믿고 있는 것 같았다.
홍 기룡은 현재 호텔에 구비되어 있는 소파에 앉은 채 백신현의 인적사항을 살펴보고 있었다. 공정한 친선비무를 위해서 스페트로 일파와 교환한 자료이다.
"백신현. 올해로 스물 넷이라……. 란즈 가주는 이런 핏덩이에게 일파의 미래를 맡길 생각인가……?"
홍 기룡이 조용히 고개를 든다.
앉은 자리의 맞은편에는 마찬가지로 친선비무를 위해서 제피로스에 방문한 그의 고용주가 있었다.
고용주와는 동향 출신이라 홍 기룡이 젊었던 시절부터 교류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홍 기룡이 아직 젊었던 시절에도 여전히 노년의 나이에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는 백여년 전부터 홀로 서방 대륙으로 진출해서 무역 루트를 개척시킨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리고 나이가 약 백이십여 세에 이른 지금에 와서도 그 영향력은 건재하다.
스페트로 일파조차 그의 위세 앞에서는 고개를 떨어트린다.
고용주의 이름은 진?.
겉으로 드러난 그의 모습은 그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말라 비틀어진 인상이다.
말라 비틀어진 가뭄의 대지 같은 피부 위로 흉악한 눈두덩이가 데굴거린다.
노인이 혀를 찬다.
"내가 파악하기로 스페트로 일파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자는 바로 란즈 드 스페트로 본인일 터. 하지만 그가 나서지 않고 모험가를 고용해서 동원했다는 것은……, 이 스물넷의 핏덩이가 란즈 드 스페트로 가주 이상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인데……"
"어르신. 전 이 청년을 알고 있습니다."
"오오, 그런가. 어디 한 번 이야기를 들어볼까."
홍 기룡이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백신현.
그에게 있어서는 먼 과거의 인물은 아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그는 백신현의 모습을 지켜본 적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두 달 전의 일입니다. 스페트로 일파가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던 전대 스페트로의 폭주. 저는 회동에서 그 존재가 최초로 폭주하는 모습을 관객석에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눈을 감지 않아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무인인 그에게 있어서 그것은 쉽게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자극이었다.
최강의 검술과 무적의 창술이 충돌했던 바로 그 현장의 기억이 다시금 재생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전대 스페트로의 창에 맞서 싸웠던 것이 바로 이 청년입니다. 먼 거리에서 보긴 했지만, 틀림 없어요. 이 청년이 확실합니다."
"전대 스페트로의 솜씨는 특급 모험가의 차석인 마그누스조차 능가하는 수준이라고 하였지. 그러한 존재를 상대로, 불과 스물넷의 핏덩이가 맞서 싸웠다는 것인가……?"
"짧은 시간이지만 전대 스페트로와도 호각 이상의 실력을 보였습니다. 스페트로 일파가 정보를 통제하기 시작해서 끝까지 조사하지는 못하였으나……,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무시무시한 실력의 소유자인 건 확실합니다."
진은 감탄한 듯 오호호 하고 소리를 냈다.
늙은 그의 목에서 올라오는 목소리는 마치 장송곡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역시 란즈 가주로군. 벼랑 끝에 몰린 상황에서도 이러한 인재를 불러왔는가……? 자네와 비교하면 어느 쪽이 강한 거 같나?"
"회동 당시에 이 청년이 보여줬던 실력을 고려하면 제 수준으로 승리를 거두기는 어려울 듯 합니다."
"특급에 버금간다고 알려진 자네인데도 말인가?"
"그 정도로 대단한 실력을 가진 청년이었습니다."
홍 기룡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걸음마를 뗄 때부터 무예의 수련을 거듭해온 골수무인으로써, 스스로의 실력을 누구보다도 잘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해보겠습니다. 설령 실력 차이가 있더라도 제 아들뻘인 청년에게 무기력하게 패배해줄 수는 없죠. 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홍 기룡은 오히려 의욕을 느낀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진이 조용히 묻는다.
"오오, 그렇군. 그러고 보니 3대째의 나이가……"
"이 청년의 나이와 같습니다. 물론, 저하고 다르게 일찍 자식을 볼 생각은 없는 것 같습니다만……"
홍 기룡은 두통을 느낀 듯 집게 손가락으로 콧등을 한 번 세게 눌렀다.
그 일대에서는 적수가 없다고 알려진 절세고수에게도 자식농사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광경이다.
"제 아들과 같은 세대에 이러한 실력 있는 젊은이가 있다는 것은 기뻐할 일입니다. 마침, 이곳에는 역대 최연소의 나이로 특급 모험가에 오른 여인도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홍 기룡은 또 다른 무인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 노도와도 같은 찌르기 속에서도 승부를 포기하지 않은 채 필사적으로 맞서 싸우던, 또 한 사람의 검사를.
"세상은 넓습니다. 그리고 같은 세대에 그러한 인재들이 있다는 것이 제 아들에게는 큰 행운이 되겠지요."
앞서 떠올린 두 남녀에게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의 아들 또한 아비의 무재를 이어 받아 또래에는 적수가 없을 정도로 높은 실력을 가지고 있다.
힘은 힘을 끌어당기는 법.
언젠가 홍 기룡의 자식과 그들은 마주치게 될 것이 틀림없다.
머지 않은 미래에 다가올 광경을 떠올리며 홍 기룡은 조용히 눈빛을 가라앉혔다.
* * *
약속한 친선 비무의 당일이 되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가볍게 몸을 풀고 난 후, 늘 입고 다니던 대로 옷을 차려입고 자취방을 나선다.
콜로세움에 다시 방문하는 건 거의 두 달 만이다. 스페트로 사건 이후 다시 방문한 콜로세움은 여전히 뜨거운 열기로 북적이고 있었다.
……뭐야, 이거 사람이 너무 많은데?
일정을 생각하면 호객할 시간도 거의 없었을 텐데, 용케 이 정도로 사람들이 모였구나 싶다. 콜로세움의 좌석의 절반 정도가 차 있다.
넓은 콜로세움의 너비를 생각하면 이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늦지 않게 도착했군, 백신현. 이쪽이다."
콜로세움 앞에서 올리비아와 마주쳤다.
올리비아는 나를 자취방에서부터 모셔 가려고 했었지만, 그건 너무 거창하다 싶어서 거절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콜로세움의 바로 앞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사람이 많네. 어떻게 된 거야?"
"홍 기룡의 이름값 때문이겠지. 유명한 실력자이지 않나."
"하긴, 내 이름 때문에 보러 온 사람은 없겠지."
나는 차갑게 조소한 후, 올리비아의 안내를 따라 스태프 전용 통로로 이동했다.
친선 비무는 한 시간 뒤로 예정되어 있다. 나는 그 전에 최근 일주일 동안 컨디션을 맞춰놓은 육체를 최고 상태로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스트레칭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지금까지 축적해온 루틴을 수행해나간다.
"우리가 자네에게 부탁한 의뢰는 모험가 길드의 중개를 통해서 들어간 정식 의뢰일세."
"……."
내가 몸을 풀고 있던 와중에 란즈 가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상반신을 앞으로 굽힌 자세로 호흡하고 있었다.
많이 긴장한 얼굴이다.
그에게는 사업의 명운이 걸려 있는 중요한 사안인 만큼 당연한 모습으로 보인다.
"즉, 관객석에도 자네의 실력이나 의뢰의 수행 정도를 조사하기 위한 모험가 길드의 인원들이 나와 있지. 그것을 바탕으로 자네에게 실적이 기록될 것일세."
"……."
란즈 가주가 말한 것처럼 모험가 길드를 거친 공식 의뢰와 그렇지 않은 비공식 의뢰의 차이는 크다.
의뢰인과 모험가가 각각 길드에 수수료를 떼이는 대신 모험가 길드에서 제공하는 다섯 가지의 혜택이 존재하고, 돈의 흐름이 공식적으로 남기 때문에 세금 계산을 하기도 편하다.
그리고, 공식 의뢰의 경우 길드에서 파견한 요원들이 해당 모험가의 성과를 조사하고 검사해서 눈에 보이는 실적의 형태로 기록한다.
이런 형태로 기록된 실적이 후에 모험가 등급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당장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자네가 상급 모험가 검정에 합격해서 더 위로 올라가는 게 허락된다면 그 즉시 오늘의 의뢰 실적이 반영될 걸세. 어쩌면 곧바로 1급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도 모르고."
란즈 가주가 말했듯이, 나는 이미 4급에 도달한 상황이라 당장은 지금의 실적이 등급에 반영되진 않는다.
지금보다 더 높은 등급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상급 모험가 검정 시험을 통과할 필요가 있다.
음, 그 이야기가 나오니까 또 다시 흥분되는데.
승부욕이 펄펄 끓기 시작했다.
"부탁하네, 부디 이겨주게."
란즈 가주가 그답지 않게 고개를 숙였다. 올리비아는 자신도 모르게 흠칫했지만, 그것을 말리지는 않았다.
무작정 계략을 부리는 것보다 당당하게 정면에서 부딪치는 것이 더 크게 효과를 볼 수 있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몸을 풀고 잠시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대기 시간이 모두 끝이 났다.
이제 나갈 시간이다.
오른손으로 목을 살짝 주무른 뒤, 검을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리고 나는 마지막으로 붉은 스카프를 꺼내서 오른쪽 상박에 감았다.
이것은 내가 공식 의뢰일 때만 쓰고 다니는 것으로, 여러 명의 인간과 몬스터가 뒤섞인 난전 상황에서도 나를 쉽게 구분할 수 있도록 표식으로 쓰는 물건이다.
난전 상황에서는 아무리 모험가 길드의 요원들이라도 모험가 개개인의 실적을 파악하기 어렵다. 그래서 모험가들은 모험가 길드의 요원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이런 식으로 표식을 붙이는 경우가 있다.
루이스가 머리카락을 옆으로 틀어 올려서 묶고 다니는 것도 같은 이유다.
전쟁 속의 장군들이 화려한 투구와 갑옷을 입고 다니는 것도 공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인데, 그러한 흐름이 모험가 사회로 그대로 이어져 내려왔다.
물론 오늘은 난전 상황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에 스카프를 묶고 다닐 필요는 전혀 없지만……, 모처럼의 공식 의뢰니까. 마음도 다잡을 겸 감아둘까.
통로를 통해서 콜로세움으로 나선다. 아직 상대방은 도착하지 않았는지, 자리에 서 있는 건 나밖에 없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낯설다.
이 정도로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준비하는 건 오랜만이다. 노예 투기장 이래로 거의 처음이다.
긴장은 되지만 부담감으로 치면 이것 이상으로 위험한 싸움도 수도 없이 넘어왔다.
심호흡 한 번으로 일렁이던 마음을 다잡은 뒤 고개를 든다.
통로 너머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조용한 시작이었다.
* * *
"……있잖아요, 선생님."
"응."
루이스가 관객석에 앉은 상태로 연금술사를 돌아본다. 정작 그 연금술사는 옆에 앉힌 파비아가 사고 치지 않게 감시하느라 바쁘다.
서로 손목을 끈으로 엮어서 잡아두긴 했지만, 파비아가 작정하고 힘을 쓰면 연금술사는 질질 끌려갈 수도 있다.
"홍 기룡을 고용한 사람이, 진이래요. 그러니까……"
"상관 없어. 어차피, 그 영감은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도 잘 모를 테니까."
연금술사는 루이스의 말을 짧게 일축한 뒤, 왼손으로 목을 주무르며 대답했다.
"그런 것보다도, 지금은 신현이가 중요해. ……특급 모험가의 의견을 듣고 싶은데."
연금술사가 조용히 루이스를 주시한다.
"……."
잠시 고민하던 루이스가, 곧 입을 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