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화 〉 13. 검왕을 찾아서 (2)
* * *
루이스보다 강하다고?
듣고 보니까 그런 거 같기도 하다. 겉으로 드러나는 기세나 마력의 크기 등은 루이스와 비교해도 꽤 우위에 있는 것 같았다.
물론 마력이 많다고 해서 무조건 이기는 건 아니고, 루이스의 전투 감각은 천재적이라서 실제로 붙어보면 결과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눈앞의 상대가 최소 특급 수준에 도달해 있는 강자라는 건 충분히 느껴졌다.
검왕회의 사람들은 왜 이런 사람을 놔두고 우리에게 해신 토벌을 부탁한 것일까.
뭔가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원래는 밥부터 해결할 생각이었지만, 이 남자의 실력에 흥미가 끌렸다. 공복 같은 건 호기심에 비하면 사소한 것이다.
그의 권유를 받아서 검왕회의 사무실로 다시 올라왔다.
내부는 상당히 깔끔한 편이었다. 딱 업무용 사무실 같은 분위기라고 해야 할까.
자로 잰 것처럼 정확한 간격으로 놓여 있는 책상. 복잡한 글씨가 쓰여 있는 칠판. 한쪽 구석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박스, 서류 상자.
보고 있으면 여기가 무술 단체가 맞기는 한 건지 의문이 느껴질 정도다.
손님용 소파에 앉아서 기다리자, 검왕회의 회장이 차를 가져왔다. 진한 향기가 나는 녹차였다.
"드시지요."
"고맙습니다."
녹차는 거의 마셔본 적 없지만 냄새는 괜찮은 거 같다. 후후 불어서 마시니까 딱 괜찮은 정도의 쓴맛과 함께 고소한 향기가 느릿하게 올라온다.
음, 마실 만 한데.
"그런데 저희 사무실에는 어쩐 일로? 혹시 잔금이 덜 치뤄지기라도 한 건가요?"
"그런 건 아니예요. 그냥, 길을 걷다가 여기가 보이더라고요. 흥미가 느껴져서 한 번 찾아온 거죠."
"듣던 대로, 상당히 특이한 성격이십니다."
인상 좋은 남자는 조금 당황한 안색이다. 혹시 이 사람도 백신아가 그런 것처럼 내가 뭐 시비라도 걸러 온 거라고 생각했던 건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가 그 정도로 막돼먹은 놈은 아니다.
검왕회의 사람들하고는 첫 인상은 최악이었어도, 마지막에는 평범하게 헤어졌으니까.
"참, 자기 소개가 좀 늦었습니다. 전 검왕연구회의 40대 회장직을 맡고 있는 리우 추이입니다."
리우 추이.
그는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인상 좋은 중년 남성이었다. 언제나 웃고 있는 얼굴이라서 편안한 느낌이지만, 자세히 보면 웃는 얼굴 이외의 표정을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 남자가 특급에 버금가는 실력자라는 걸 감안하면 당연한 일이다.
특급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영역에 도달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인간이 넘어설 수 없는 절대적인 벽을 부수고 나아가기 위해서는 평범한 인간과는 구별되는 특이한 감성이 요구된다.
리우 추이 또한 일반적인 감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은 아닐 것이다.
"이해가 안 되네요."
"뭐가 이해가 안 된다는 뜻인지?"
"그쪽은 척 봐도 특급에 버금가는 대단한 실력자인데, 어째서 해신 토벌에는 참가하지 않으셨는지 궁금해서요."
"아……"
리우 추이는 조금 놀란 얼굴로 대답했다.
"기세를 숨긴다고 숨겼는데도 그게 보이시나 봅니다."
"그거야 뭐, 대충 보이죠."
잘 숨기고 있기는 하지만 천변무궁류를 다루는 나는 이런 쪽을 간파하는데 특화되어 있다.
수준 차이가 너무 심하면 알아채기 어렵지만, 그 정도까진 아니었다.
"여기는 보아하니 돈이 많은 조직도 아닌 거 같은데, 저희를 고용할 바에야 그쪽이 나서는 편이 더 낫지 않았을까요?"
"……그건 제가 이 도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정이라……?"
"이 도시에서 오래 떨어져 있을 수 없는 사정이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제가 해신 토벌에 참가하는 건 불가능했어요. 그래서 다른 부하들도 다른 특급 모험가를 고용해서 해신을 토벌할 생각을 했던 겁니다."
이 도시에 뭔가가 숨겨져 있는 건가.
그게 아니면 리우 추이 개인의 문제?
어느 쪽이든 현 상태에서 내가 알아보기는 어려운 문제들이다.
리우 추이는 본인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머금으며 말했다.
"그러던 도중 '루이스 파르네제'라는 특급 모험가를 고용해서 해신 토벌을 부탁했다고 이야기를 전달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여성 모험가에게는 함께 붙어 다니는 파트너 격의 남자가 있었다고도."
"……."
이건 내 이야기인가.
"하지만, 그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점이 있었군요."
"무슨 뜻이죠?"
"당신의 허리춤에 있는 그 검."
리우 추이의 시선이 슥 움직였다.
"그건 혹시 검왕검이 아니오리까?"
"……."
"부하들은 전혀 알아보지 못한 듯 하지만, 제 눈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그 검집의 모양하며 칼자루의 형태까지. 모두 문헌에 남아있던 검왕검의 모습 그대로예요."
사실,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검왕회는 보이드와도 교류가 있었던 집단이다. 보이드를 통해서 검왕검에 대한 정보가 넘어갔을 가능성도 낮지 않았다.
오히려 검왕검을 앞에 두고도 지금까지 알아보지 못한 검왕회의 사람들이 좀 이상한 거라고 봐야 한다.
"음, 그래서 어쩌실 생각이죠? 이걸 빼앗으려 드신다면, 그쪽도 보이드처럼 만들어드릴 수밖에 없는데요."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리우 추이는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검왕검은 스스로의 주인을 선택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검왕검이 선택한 주인이 백신현 님이라면 제가 왈가왈부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보이드 씨는…… 그러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만."
"뭐, 그랬죠."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검 하나 잘못 주웠다고 그거 때문에 죽을 뻔 했으니까.
"하지만 솔직히 저도 좀 궁금합니다."
"뭐가요?"
리우 추이가 눈을 가늘였다.
"겉으로 드러나는 백신현 님의 마력은 일반인보다 조금 나은 수준에 불과한데, 어떻게 그 정도의 마력으로 검왕검에 선택 받을 수 있었던 건지……"
"자주 듣는 소리네요."
정확히는, 이 마력만 보고 얕보이는 경우가 되게 많다.
날 두고 할 수 있는 말이 이것밖에 없는 건지.
예전에 올리비아도 비슷한 말을 했었지. 내가 아니라 루이스가 검왕검에게 선택 받은 줄 알고 있었다고.
내가 얕보이는 게 꼭 하루 이틀 일은 아니다.
내 심기가 불편해진 걸 눈치챘는지 리우 추이는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기분을 상하게 할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닙니다. 백신현 님이 다른 특급 모험가와 함께 해신 토벌에도 참가해서 무사히 돌아왔다는 건 저도 들어서 알고 있지요. 그러니까……"
리우 추이가 상반신을 앞으로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궁금한 겁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진짜 가치가."
"……."
난 다리를 왼쪽 다리를 들어서 오른쪽 허벅지에 올린 후, 허리를 곧게 펴면서 몸을 뒤로 젓혔다.
차갑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게 그렇게 궁금하시다면…… 한 번 붙어보죠."
공복은 이미 잊은 지 오래였다.
"이쪽으로 따라오시죠."
리우 추이를 따라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공터로 향했다.
특급의 영역에 도달한 초인의 전투는 의도하지 않아도 주변에 큰 피해를 일으키는 법이다.
검이 부딪치는 것만으로도 바닥이 뒤집어지고 나무가 뿌리째 뽑혀 나간다.
자연재해가 인간의 형상을 취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공터에 들어온 후 나는 낮게 심호흡을 하며 투지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후우……."
루이스와 비교되면서 얕보이는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다.
무?의 신에게 축복을 받았다고 표현해도 모자람이 없는 희대의 천재, 루이스 파르네제.
녀석이 처음으로 검을 쥔 건 불과 5년 전의 일이다.
나는 지금까지 정말로 많은 무인과 고수를 보아왔지만, 루이스 같은 재능을 가진 사람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지금의 루이스보다 강한 사람은 있겠지. 하나씩 꼽아봐도 열 손가락을 다 채울 수 있다.
하지만 5년 뒤의, 10년 뒤의 루이스는 어떨까.
생각만 하고 있어도 머리가 멍해질 지경이다. 지금까지 그 재능을 보아온 나도 감히 그 한계를 가늠할 수 없다.
루이스는 천재다.
내가 알고 있는 그 누구보다도.
그런 여자의 옆자리에서 나는 오랜 세월 동안 투쟁해왔다.
열등감을 느꼈다. 패배감도 당연히 느꼈다. 저 앞에서 삼단 뛰기로 달려나가는 친구를 바라보며 조용히 속을 끓였다.
그리고 그때마다 나는 강해졌다.
열등감과 패배감이 나를 강하게 만들었다.
이건 내가 루이스에게 가지고 있는 호의와는 별개의 감정이다.
겉옷을 벗어서 나뭇가지에 걸었다.
가볍게 스탭을 밟으면서 검술을 준비한다. 상대는 특급 레벨의 고수. 지금의 루이스와 비교해도 더 강할 가능성이 있는 상대다.
아마 나보다도 강하겠지.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붙은 놈들 중에서 나보다 약한 놈은 거의 없었다.
긴장할 필요는 없다.
자주 있는 일이니까.
검을 뽑아서 양손으로 쥐고 중단세로 자세를 잡는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리우 추이의 자세가 조금 이상하다.
"그 자세는……?"
"검왕이 말년에 남긴 자료를 토대로 저희 측에서 복원한 검술입니다. ……왜 그러십니까?"
"싸움이 끝난 뒤에 가르쳐드리죠."
"알겠습니다."
리우 추이가 눈을 깜박인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것 같다.
하지만 내가 그런 태도를 보인 이유가 있다.
리우 추이가 취한 기수식은 천변무궁류가 아니다.
비교하자면 파비아가 보여준 검술과 비슷하다. 그것과 비교해서 조금 더 세련되고 완성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한 가지 확실한 건 천변무궁류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자세였다.
천변무궁류의 검사인 나는 그 사실을 느낄 수 있다.
나 자신의 감각이 느낀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나는 본격적으로 천변무궁류의 운용에 들어갔다.
재빠르게 찌르면서 파고든다.
쿵!!
리우 추이의 표정이 놀란 듯 경직됐다.
"……이건!"
예상했던 것과 비교해서 세 배에서 네 배 정도의 위력이겠지. 이 정도로 특급을 무너트릴 수는 없지만 기선은 제압했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마력을 신체와 검의 강화에 돌리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일격은 정상적인 방법으로 얻어낸 파괴력이 아니다. 부족한 마력을 보충하기 위해서 내 나름대로 머리를 굴린 결과물이다.
마력에 의한 신체 강화는 근섬유에 힘을 더하는 것 이상으로 관절이나 인대, 혈관을 보호하는데 더 많은 양의 마력을 쓴다.
지나치게 강해진 근력은 오히려 스스로의 몸을 망친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한 행위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 혈관이나 인대를 보호해야 하는 마력조차 짜내서 근력 강화에 돌리고 있었다.
증폭된 신체 능력에 의한 부상은 단련한 몸으로 무시한다.
그로써 일반적인 강화 마법과 비교해서 조금 더 높은 효율을 획득한다.
내가 신체의 단련을 게을리 하지 않는 이유다.
"그런 식으로 몸을 강화할 줄이야…….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리스크를 짊어진 신체 강화에도 불구하고 특급의 벽은 높다. 리우 추이의 몸이 튕기듯이 꼿꼿하게 섰다. 바닥을 세게 내딛은 순간 지면이 푹 들어가면서 그의 몸이 사라진다.
지나치게 빠른 속도가 그의 몸을 나의 시야에서 벗어나게 만들었다.
고개를 돌린다. 나의 눈은 그를 쫓을 수 없지만, 마력의 흐름은 그가 움직이기 전에 항상 먼저 요동친다.
천변무궁류의 검사는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마력의 흐름조차 포착할 수 있다. 그가 닿기 전에 움직였다.
내가 간발의 차이로 몸을 비튼 그 순간, 내가 있던 위치로 리우 추이의 칼이 빠르게 찔러 들어왔다.
그의 움직임에도 마력을 제어하는 흐름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천변무궁류가 아니다.
'……기본 스타일은 어마어마한 힘으로 밀어붙이는 강검. 단순히 빠르고 무거울 뿐이지만 그래서 더 대응하기가 까다로워.'
온갖 복잡다양한 방식과 흐름을 내포하고 있는 천변무궁류와는 정반대의 검술이다.
천변무궁류와 비교해서 변수를 창출하는 능력은 많이 부족하지만, 일격, 일격이 무겁고 빠르다.
호쾌한 맛이 있어서 나도 모르게 휩쓸릴 것 같은 느낌이다.
저 검격을 누르기 위해서는 나 역시 긴 시간을 들여서 천변무궁류를 준비할 수밖에 없다. 어설픈 흐름으로는 찍어 누르기 어렵다.
'무겁다……!'
리우 추이는 나의 검술에 대해서 모른다. 하지만 나의 움직임에서 뭔가를 느꼈는지 빈틈이 없는 짧은 공격 위주로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한 번 공격을 받아낼 때마다 나의 몸뚱이가 핀볼처럼 날아다니기 시작한다. 쿵! 쿵! 쿵! 쿵! 리우 추이의 공격은 급소를 노리지 않았다. 방어 위로 무식하게 후려쳐서 무너질 때까지 밀어붙이는 방식이다.
"큭!!"
세게 후려친 검격에 내 몸이 붕 떠올라서 멀리 나가떨어진다. 하지만 리우 추이는 신기하게도 추가타에 들어오지 않았다.
무리하게 파고들었다가 오히려 역습을 당하는 걸 경계하는 것 같다.
그는 상당히 숙련된 전사였다. 리스크를 각오하고 압도적으로 누르는 방식은 빈틈이 노출될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것 같다.
이런 타입이 제일 성가시다. 압도적인 승리에 집착하지 않고 최고 최선의 효율로 상대를 확실하게 깎아내리는 기계적인 전투법.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천변무궁류와는 최악의 상성이야.'
리우 추이의 검술이 저런 형태를 취하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압도적인 힘과 속도로 무리하지 않게 누르면서 승부의 흐름을 일관적으로 잡아내는 저 방식이 그의 검술에 최적화된 투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 그의 검술이 휘어잡고 있는 건 고작해야 승부의 흐름에 지나지 않는다.
천지자연에 존재하는 마력의 흐름을 틀어쥔 천변무궁류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의 실력은 루이스보다 우위에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전투 방식은 천변무궁류와 그야말로 최악의 상성 관계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마력의 흐름을 보지 못하는 그의 방식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차라리 루이스처럼 쉬지 않고 몰아치는 방식이었다면 나는 틈도 잡지 못하고 쓰러졌을 텐데, 운이 나빴다고밖엔 할 말이 없었다.
그의 공격은 무리를 하지 않는다. 때문에 읽어내기가 쉽다.
설령 읽히더라도 어쩔 수 없이 얻어맞게 되는 게 그의 방식의 장점이지만, 나의 검술은 천변무궁류.
승부가 길어질수록 승기는 내쪽으로 넘어온다.
거리를 벌린다. 검을 양손으로 고쳐쥔 채 자세를 낮춘다.
"간다."
'……오는 건가!'
근거는 없었다.
그저 불현듯 닥쳐온 무거운 압박감이 리우 추이의 다리를 멈추게 만들었다.
수많은 경험 끝에서 단련된 '고수의 감'이 일으킨 현상이었다.
지금 파고 들었다면 틀림없이 당한다. 더 이상 다가가서는 안 된다. 물러나서, 최대한 거리를 벌려야 한다.
그는 물러나면서도 검을 들어서 방어 자세를 취했다. 공격 범위에서 물러날 수 있으면 좋지만, 때에 맞추지 못하더라도 공격을 받아낼 생각이었다.
그는 언제나 이중삼중으로 대비를 해 둔다.
온갖 허실과 빈틈으로 가득한 실전에서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대처 방식이었다.
다만, 그의 오산은 하나 뿐.
천변무궁류?????
제일검?一?
준비를 끝마친 천변무궁류는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공격이 아니라는 것.
"……헉!!"
그야말로 공간이 삭제된 듯 하였다.
저 멀리에 서 있던 백신현의 몸이 시간차를 두지 않고 그의 코앞으로 이동했다.
잔상은 남지 않았다.
새하얀 유성이 소리조차 찢으며 나아갔음으로.
* * *
솔직히 마음에 드는 결과는 아니었다.
내가 리우 추이를 쓰러트릴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그의 검술과 나의 천변무궁류가 지독하게 상성이 안 맞았던 탓이었으니까.
나의 순수한 실력은 아직 특급 레벨에 미치지 못한다.
운이 좋아서 얻어낸, 상성을 통한 승리.
하지만 사실, 이런 걸 생각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나의 미숙함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 이 상황이 반대였다고 생각해보자.
천변무궁류의 상성이 되는 무술이 존재하고, 내가 그것 때문에 패배하게 된다면…… 나는 그 결과를 '상성 때문에 패배했다'라고 변명할까?
그렇지 않다.
그 어떤 불리한 조건이라고 해도 승리하는 것, 그것이 최강.
이런 시시한 사실에 일일이 집착한다는 것 자체가 내가 아직 미숙하다는 증거다.
그러니까 지금은 그런 쓸데없는 생각 말고 다른 생각을 한 번 해보자.
검왕이 말년에 남겼다고 알려진 리우 추이의 검술은, 어째서 이다지도 천변무궁류에 취약한 것일까.
아니 애초에, 천변무궁류가 후대에 남겨지기는 한 걸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