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 12.5. 재충전
* * *
오른쪽 어깨를 기점으로, 그 아래에 붙어 있는 부분이 움직이지 않았다.
검짐을 허리에 매고, 검왕검을 검집으로 되돌리려던 그 순간 벌어진 일이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내 팔을 공중에서 붙잡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검을 움직이려고 해도, 움직이지 않는다.
쓰러져 있던 몸을 상반신만 겨우 일으킨 상태였던 루이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백신현. 너 뭐해?"
"잠깐만……, 가까이 오지 마. 내 오른팔의 상태가…… 이상해……."
아니, 오른팔 뿐만이 아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천천히 목을 죄여오듯이 내 의지로 움직이지 않는 부위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마치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개미떼가 일제히 내 몸을 타고 올라오는 듯한 느낌.
조금씩 제어권이 넘어가고 있는 게 느껴진다.
위험하다.
"……큭."
그 상태에서, 나는 조금 전에 해신이 남겼던 말을 회상하고 있었다.
검왕검을 두고 '거대한 함정'이라고 지칭하던 그 모습.
물론, 검왕검이 완전히 믿을 만한 존재라는 건 나도 처음부터 짚고 넘어간 부분이다.
검왕검을 관제하는 백신아의 인격은 믿을 수 있다. 하지만 검왕검 자체만 보면 이것은 연원도 목적도 알 수 없는 수상하기 그지없는 물건이다.
그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검왕검을 손에서 놓지 못했던 이유는 검왕검이 내게 주는 힘의 마력이 그야말로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검왕검이 아니었다면 넘어서지 못할 싸움이 많았다.
언젠가 크게 된서리를 맞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적은 있었지만, 설마 그게 바로 지금인 건가.
입술을 비틀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검왕검에서 시작된 정체불명의 마력은 내 팔을 휘어감아서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백신아! 내 말 들려?"
「────」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대답할 수 없는 상황인 걸까. 그게 아니면 대답하지 않는 걸까.
양쪽의 가능성은 공평하게 반반 정도였지만, 백신아의 인격을 신뢰하는 나는 녀석에게도 피치 못한 사정이 있다고 믿고 싶었다.
아니,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건 지금 내가 손에 검이라고 하는 매우 무시무시한 흉기를 들고 있다는 사실이고, 내 오른팔이 제어에서 벗어난 상태라는 사실이니까.
등허리에 매여 있는 조그만 가방으로 손을 뻗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에는 깜짝 놀랐지만, 이미 벌어진 상황을 되돌릴 수는 없다.
상태가 더 심각해져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 전에 나 자신의 선택으로 상황을 해결해야 한다.
등허리의 가방으로 들어갔던 손이 두꺼운 단검을 쥐고 나온다.
지금 현재, 내가 보기에 모든 것의 원인은 이 검왕검과 이어진 오른손에 있었다.
그렇다면 아마, 이 검왕검을 몸에서 떼어내는 것으로 이 상황을 끝낼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내 나름대로의 근거 아래에 내려진 판단이었다.
꺼낼 때는 역수로 쥔 상태였던 단검을 손안에서 반 바퀴 돌려서 제대로 잡는다.
망설임은 없었다.
그대로 내 손목을 내려쳤다.
* * *
고통이라는 것은 아무리 겪어도 도무지 익숙해질 수 없는 것이다.
단검이 손목을 절단하고 지나갔을 때 마치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마치 손목에서 불꽃이 뿜어져나온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진짜 이상한 일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현! 야, 백신현! 뭘 그렇게 멍 때리고 있어?"
별안간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의식이 각성되는 느낌이 들었다. 옆에서 날 부른 사람은 루이스였다. 내 뺨을 찰싹찰싹 때리면서 내 이름을 외치고 있다.
"아."
그 순간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내 모습을 다시 돌아보았다.
내 손으로 잘라냈던 오른쪽 손목은 여전히 그 자리에 멀쩡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왼손으로 쥐고 있던 단검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있다.
내가 단검을 꺼내서 손목을 잘랐다는 사실 자체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뭐지?'
내가 혼자서 꿈이라도 꾸고 있었던 건가?
고개를 아래로 내린 후, 시험 삼아 검을 쥔 오른팔을 움직여본다. 아주 잘 움직인다.
모든 것이 내 의지대로였다.
「검주, 왜 그러세요?」
백신아까지 내가 왜 이런 행동을 보이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목소리다. 진짜로, 나만 이상했던 게 맞았던 건가?
갑작스럽게 닥쳐온 현기증에 나는 왼손으로 이마를 감싸쥐며 잠시 비틀거렸다.
"어? 뭐, 뭐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정하더니 갑자기 왜 이래? 야, 백신현. 너 괜찮아?"
루이스는 잠시 동안 가만히 서 있던 내가 갑자기 비틀거리기 시작하니까 오히려 당황한 얼굴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나 이상으로 크게 소모된 사람이 바로 루이스다. 오히려 내가 부축해줘도 모자랄 판에 도움은 무슨.
나는 루이스의 손짓을 만류하면서 나 혼자만의 힘으로 꼿꼿하게 섰다.
"……환각을 봤어."
하지만 어차피, 이 상황에서 멀쩡히 돌아가는 건 조금 어렵다. 잠시라도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다.
나는 루이스를 먼저 자리에 앉힌 다음, 그 자리에 엉덩이를 대고 철썩 쓰러졌다.
"환각……?"
「환각이요……?」
두 사람의 반응을 보면 조금 전의 그건 정말로 나밖에 보지 못한 환각이었던 것 같다.
오른팔을 움직여서 검집에 검왕검을 집어넣는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잠금쇠가 걸린다.
"그러니까 해신의 말이 끝난 직후에 그런 환각을 봤다 이거지? ……해신의 피를 너무 많이 뒤집어 써서 그런 거 아냐? 해신의 피에 환각 작용 같은 게 있잖아."
공방 속에서 해신의 피가 가지고 있는 형질을 눈치챈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루이스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면서 말했다.
"나 같은 경우 어지간한 독소는 체내에서 알아서 다 분해가 되지만, 넌 그게 안 되잖아. 그래서 이상한 환각이 보인 거 같은데."
루이스가 특급 모험가로서의 견해를 밝혔다. 녀석이 말한 것처럼 그게 가장 현실적인 결론이다.
나도 혜성에 돌입하면서 해신의 독소를 몰아내긴 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몰아내지 못한 해신의 혈액이 남아 있었고, 그것이 조금 전 해신의 핵과 반응하면서 이상한 환각을 보게 만들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현실은, 진짜였으니까.
"애초에 나는 해신의 핵이 말을 했다는 소리도 처음 듣는다고. 핵이 무슨 말을 했다는 거야."
"그럼, 그때부터 환각이었던 건가?"
하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애초에 핵이 어떤 방식으로 말을 할 수 있다는 건가. 그 꼴을 보고도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한 나도 좀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백신아, 너는 어떻게 생각해?"
「어, 저요……?」
고개를 돌려서 이번에는 백신아에게 질문한다. 하지만 녀석은 답지 않게 한참 동안 우물쭈물 거리면서 고민하는 기색이다.
느낌 상, 이건 할 말이 있어서 고민하는 게 아니라 할 말이 없기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해신하고 부딪친 이유는 그 과정에서 백신아가 뭔가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었는데, 결국 녀석은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했으니까.
「그, 글쎄요……. 루이스 아씨의 말씀이 맞지 않을까요? 검주는 실력에 비해서 마력이 많이 부족하기 때문에 환각이나 정신계 공격에는 좀 취약한 부분이 있잖아요.」
"……뭐, 그렇게 생각하는 게 합당하겠지."
검왕검이 위험하다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계속 휘두르는 이유는 그 위험성을 고려하더라도 검왕검에 의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컸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싸움은 검왕검이 없었다면 이겨내지 못할 싸움이었다.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납득시키고는 있었지만, 잠재 의식 속에서는 여전히 두려움이 남아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이 환각의 형태로 모습을 드러낸 걸지도 모른다.
"신현이 너는, 정밀 검사를 좀 해봐야 할 거 같다. 금방 환각에서 빠져 나온 걸 보면 심한 건 아닌 거 같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아, 그래야겠어."
어디까지나 만에 하나의 상황을 대비해서 검사해야 한다는 소리고, 아마 별 문제는 없을 거다.
내 몸에 달라 붙은 대부분의 혈액은 혜성에 의해서 모두 불태워졌을 테니까.
루이스와 대화를 나누면서 조금씩 체력을 회복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등허리의 가방에서 주머니를 하나 꺼내서 거기에 해신의 핵을 수납했다.
……그 과정에서 가방 속에 보관되어 있던 단검에 손이 스쳤지만,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이제 돌아가자."
"그럴까."
나도 꽤 회복은 빠른 편이지만, 루이스의 회복 속도는 진짜 보통이 아니었다.
내가 그냥 체력이 좋다고 치면 루이스의 경우 일반인과 비교해서 마력이 차오르는 속도가 수 배 이상 높다.
이건 루이스가 특급이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능력이 아니라 그냥 타고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능력이다.
늦깎이 검사이면서도 빠르게 실력을 높여나갈 수 있었던 요인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해신의 핵을 수납한 주머니를 집어들고 일어선다.
바로 그때…… 등 뒤에서 웃음 소리가 들려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 * *
늦은 밤. 나와 루이스는 검왕검의 제작공방으로 간신히 복귀했다.
평소와 비교해서 거리에 불빛이 많이 켜져 있는 편이었는데, 아마 해신과의 싸움에서 발생한 소음이 사람들의 밤잠을 쫓아냈기 때문일 것이다.
어두운 밤이어서 자세한 상황을 파악한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앞으로 시끄러운 밤으로 기억에 남게 될 것은 자명했다.
"두 사람 다 수고했어."
샤를로트는 자러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연금술사는 화로에 피워둔 불꽃을 등불 삼아 책을 읽으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크게 다친 곳은 없지? 두 사람 모두."
"네. 많이 지치기는 했지만요."
루이스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녀석의 마력은 이미 절반 이상 회복되어 있는 상태였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들을 테니까. 일단 둘 모두 씻는 게 좋을 거 같다. 바닷물 때문에 냄새가 심하게 나."
연금술사가 인상을 찡그리며 코를 잡았다. 물 자체는 다 말랐지만, 냄새까지 빠지는 건 아니라서 벌어지는 불상사이다.
코를 잡은 연금술사가 가리킨 방향으로 가서 욕실의 문을 열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안방에 침낭을 덮고 누워있는 샤를로트를 발견했는데, 모로 누워서 새우잠을 자는 꼴이 꼭 대학원생 같아서 무척 안쓰러운 느낌이 들었다.
욕실의 문을 열고 안쪽을 슥 둘러본다. 샤를로트가 이미 한 번 손을 댔는지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정돈되어 있는 느낌이 강했다.
"욕실이라기보다는 샤워룸 같네. 물은 바가지로 따로 퍼다 써야 하지만."
그래도 아주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닌 모양이다. 루이스가 낮게 콧소리를 냈다.
덩치가 큰 사람이 쓰는 걸 고려했는지 욕실은 꽤 넓은 편이었다. 선반에는 연금술사가 가지고 온 비누도 보인다.
난 살짝 눈을 가늘이며 말했다.
"음, 루이스 너는 오래 씻는 편이니까 나 먼저 씻으면 안 되냐? 나야 뭐, 간단하잖아. 한 번 씻는 데 10분도 안 걸릴 텐데."
"으, 하지만 난 지금 당장이라도 씻고 싶은 기분인데."
나는 루이스에게 합리적인 선택지를 제시했지만, 루이스는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이기 때문에 내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는 태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루이스에게 순서를 양보하면 나는 이 찝찝한 상태로 30분은 더 기다려야 한다.
그건 안될 일이지.
루이스와 함께 서로의 손목을 붙잡은 채 힘 싸움에 들어갔다.
나이를 스물넷이나 먹은 남녀 둘이서 욕실을 두고 실랑이하는 꼴이 한심하게 보였는지, 연금술사는 한숨만 한 번 쉬고 이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알았어. 그럼 이렇게 하자."
상당히 드물게도 루이스 쪽에서 먼저 힘을 빼고 물러섰다. 루이스 쪽에서 먼저 굽히는 일은 상당히 드물었기 때문에 나도 조금 당황스러운 기분이다.
"나하고 같이 들어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