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 12. 해신?? (3)
* * *
"그, 그럼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검왕회의 대장격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루이스는 혀를 쯧쯧 차면서 돌아서려던 그를 다시 붙잡았다. 남자의 얼굴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그게 아니죠."
"네?"
"그 전에 해야 하는 말이 있잖아요."
루이스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지금까지의 내 경험상, 루이스가 저렇게 웃으면 보통 터무니 없는 말이 튀어나오곤 했다.
"자, 따라해보세요. '조금 전의 일은 죄송했습니다'."
"……아."
가볍게 손가락을 튕긴 루이스가 다시 한 번 눈웃음을 지었다.
의외로 루이스는 진짜로 열이 받으면 화를 내는 게 아니라 미소로 대답하는 스타일이다.
"한 번 더 말해줄까요?"
"아, 아닙니다. 조금 전의 일은, 정말로 죄송했습니다!"
"알아들었으면, 앞으로는 조심해요. 이상하게 칼밥 먹은 사람들은 뭔 일만 생기면 일단 칼부터 뽑아들고 보더라고. 대화로 풀 수 있는 상황에서도 그러니까, 괜히 얻어맞고 그러는 거 아니예요?"
루이스는 착수금이 들어 있는 주머니를 짤랑대면서 덧붙였다. 특급 모험가를 고용하는 대가로 받은 계약금이다. 해신 토벌에 무사히 성공하면 여기에 추가금을 더 얹어서 받게 된다.
"내가 주먹을 안 쓰고, 칼을 써서 벴으면 어쩌려고 그랬는지 몰라. 사지 멀쩡하게 걸어서 돌아가는 걸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아, 알겠습니다."
검왕회의 남자는 상당히 굴욕에 찬 얼굴이었지만, 루이스는 가볍게 마력을 방출한 것만으로도 그의 태도를 조용하게 만들었다.
그가 도망치듯이 자리를 떴다.
다음에는 해신을 쓰러트린 후에 만나게 되겠지.
잠시 동안 공방에 정적이 감돌았다. 나는 시선을 돌려서, 아직 결박된 채 쓰러져 있는 여자를 새삼 살펴보았다.
난데없이 지하 깊은 곳에서 나타난, 꼬질꼬질한 여자를.
"저 아래에서 얻은 건 있어?"
"뭐, 대충은."
고개를 돌려서 연금술사와 시선을 맞춘다. 자리에서 일어난 연금술사는 쓰러진 여자 쪽으로 다가가서 그 뺨을 흰 장갑을 낀 검지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댔다.
"이 여자는 검왕의 제자였어."
"진짜요? 그래서 검 휘두르는 폼이 예사롭지 않았구나. 근데 왜 그런 사람이 지하에 감금되어 있었던 거지?"
"검왕검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광증에 빠졌다더라고. 거기에, 그 광증에 해신이 공명하는 바람에 증세가 더 심해졌고, 그걸 견뎌내지 못하고 스스로를 지하에 가둔 거지."
"……조금 전에 하는 걸 보면 광증이 아니라 무슨 광견 같던데요. 캬르릉, 하고 울부짖기까지 하고."
루이스가 익살맞은 표정으로 짐승의 울음소리를 흉내냈다.
그 소리에 반응했는지, 갑자기 눈을 감고 있던 여자가 눈을 부릅뜨고 일어났다. "컁!" 하고 소리를 내더니 바로 앞에 있던 연금술사의 손가락을 물어 뜯으려고 들었다.
그것보다도 빠르게 움직였다.
"꼼짝 마."
"……크르르."
그 다음 순간 나는 연금술사의 허리를 오른팔로 감싸 안은 채 뒤로 물러나 있었고, 그 여자의 목에는 루이스의 칼이 단두대처럼 걸려 있었다. 조금만 더 앞으로 나아가도 목이 날아갈 수 있는 위치다.
나는 여자에게 등을 보인 채, 검집의 끝 부분으로 여자의 턱을 겨누고 있었다. 언제라도 후려칠 수 있게 준비된 상황이다.
"아무리 봐도 광견이야, 광견. 아무리 이백 년 가까이 문명하고 분리되어 있었다지만, 보통 사람이 이런 식으로 정신이 나가나?"
"그건, 내가 설명해줄 수 있을 거 같은데. 신현아, 풀어줘."
"알았어요."
내 품에 안겨 있던 연금술사가 손바닥으로 내 등을 찰싹 찰싹 때렸다. 풀어달라는 신호였다.
살짝 힘을 풀어줬더니, 연금술사는 알아서 미꾸라지처럼 내 품에서 빠져나갔다.
꼼짝도 할 수 없는 여자의 코앞에서 쪼그리고 앉은 뒤, 다시 고개를 들었다.
"루이스. 잠시 이 녀석 입 좀 벌려줄래."
"네? 아으, 만지기 싫은데……"
루이스는 질색하면서도 자세를 바꿨다.
쓰러진 여자의 등허리 부분을 엉덩이로 깔고 앉은 다음, 오른손으로 머리통을 잡고 왼손으로 턱을 잡아서 벌린다. 여자는 짐승처럼 울어대면서 저항했지만, 루이스에게는 도저히 안 되는 것 같다.
"역시, 안쪽에 인간의 것보다 훨씬 뾰족하고 발달되어 있는 송곳니가 있네. 다음은 신현이. 손으로 머리카락을 넘겨줄래?"
"알았어요."
질색하는 표정의 루이스를 잠시 바라본 뒤, 삐죽삐죽 뻗쳐 있는 검은색 머리카락을 손으로 넘기기 시작했다. 모근 안쪽을 보면 실제 머리카락 색이 시꺼먼 건 아니고, 지나치게 때가 타다 보니 벌어진 현상이었다.
진짜 머리카락 색은…… 아마도 갈색이다.
길게 자란 데다가 잡초처럼 뻣뻣해서 넘기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한 번 손을 움직일 때마다 투두둑, 하고 머리카락이 뚝뚝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상태가 심각하다.
그러던 와중 두피나 머리카락과도 다른 또 다른 특이한 감각이 손 끝에 걸렸다. 손으로 머리카락을 넘겨서 안쪽을 살핀다.
……뭐야, 이거. 귀 아니야?
"신현아. 뭘 좀 찾았어?"
"머리 쪽에 귀가 있네요. 아, 이거 혹시……"
나도 실제로 본 건 처음이지만, 이런 특징을 가지고 있는 종족은 하나 뿐이다.
정확히는, 종족을 나누는 한 분류라고 해야 할까.
"역시, 개과 수인?人이었구나."
머리카락 사이에 숨겨진 귀를 확인하고 연금술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이 말한 것처럼, 순수한 인간이 광증에 시달린다고 해서 이런 식으로 짐승 이하의 사고 방식을 가지게 되진 않겠지만…… 수인이라면 이야기가 달라."
연금술사는 예전에 내가 샤를로트에게 했던 것처럼, 여자의 턱을 잠시 간질이다 손을 뗀다.
"아마 광증에 이성이 흡수당하면서 수인으로서 가지고 있는 본능이 수면 위로 올라온 거겠지. ……뭐, 수인의 수명은 인간하고 큰 차이가 없는 만큼, 어떻게 200년의 세월을 버텼는지는 아직 의문이지만."
"선생님은, 수인을 직접 본 적이 있으세요?"
"너희들보다는, 오래 살았으니까."
연금술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해신하고 싸울 준비를 하는 동안 난 이쪽의 광증을 해제할 방법을 찾아볼까. 그 시대에는 답이 없어서 스스로를 가둘 수밖에 없었겠지만,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으니까 고칠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도."
"그럼 큰 도움이 될 수 있겠네요. 그 시대의 산 증인이라면 알고 있는 것도 많을 테니까."
이 여자가 검왕의 제자라면 내게 있어서도 아주 먼 스승뻘이 된다.
따지고 보면 난 검왕검의 제자라서 항렬을 따지기는 좀 애매하지만, 굳이 항렬을 구분하면 사저??나, 사고?? 쯤이 되려나.
아직 이 여자의 성격을 잘 모르는 만큼, 마냥 평화로운 관계가 될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도와줬더니 갑자기 보따리 내놓으라는 식의 인간일 가능성도 있고.
검왕의 안목이, 설마 그 정도로 낮지는 않겠지만.
잠시 눈을 깜박이던 나는 옆에서 계속 우리들의 대화를 경청하며 눈치를 보던 샤를로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럼 샤를로트 너도 선생님을 좀 도와주는 게 어때? 너도 일단 광증의 경험자니까,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어, 진짜? 내가 도와도 괜찮아……?"
말은 그렇게 하지만, 뚜렷한 역할이 제시된 게 좋은 것 같다. 얼굴은 벌써 싱글벙글이다.
연금술사도 그다지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난 상관 없어. 시킨 일은 실수 없이 잘 하는 스타일 같으니까. 심부름이나 좀 부탁하지."
"여, 열심히 하겠습니닷."
"그렇게 긴장할 만한 일은 시키지 않을 거야. 애초에, 시킬 수도 없고."
주먹을 옴팡쥐고 대답하는 샤를로트를 한 마디로 일축한 뒤, 연금술사는 다시 시선을 내게 향했다.
"그건 그렇고, '이걸' 안전하게 구속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신현이 너나 루이스가 붙어 있으면 편하겠지만, 솔직히 내 실력으로는 완전히 제어하기 어려울 거 같은데. 조사도 좀 청결한 상태에서 하고 싶고."
"알았어요."
난 살짝 고개를 까딱거리면서 대답했다.
"그건 저한테 맡기세요."
* * *
작업에 휘말리지 않도록 다른 세 사람을 모두 바깥으로 내보낸 후, 때가 꼬질꼬질한 검을 묶여 있는 여자의 앞에 가져다놓았다.
물론, 의식을 되찾은 이 여자는 언제라도 내게 덤벼들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를 흉흉한 시선으로 노려보는 여자의 시선을 무시하고, 다음 행동에 들어간다. 허리춤의 백신아를 뽑아들어서 여자의 팔과 다리를 구속하고 있던 와이어를 끊었다.
"……크?"
구속은 풀어졌지만, 의외로 여자는 함부로 움직이지 않고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평범한 광증은 아닌 것 같다. 내가 보기에는 그냥 짐승의 본능을 일깨웠을 뿐인, 원시회귀 같은 걸로 보인다고 해야 할까.
마치 함정에 걸려 있다 빠져 나온 짐승처럼 잠시 동안 그 자리에서 조용히 그르릉대기만 한다.
나는 그녀를 자극하기 위해서 검을 앞으로 겨누었다.
"검왕의 제자, 파비아. 지금부터 당신과 검을 겨루고 싶다."
이름은 지하에 있던 기록에서 알아냈다.
검왕의 제자이자, 검왕검의 제작에도 참여했던 스탭.
개과 수인의 여자.
그 이름, 파비아.
"……크?"
"내 말은 알아듣지 못했겠지만 내 목소리에 담겨 있는 의지는 읽어낼 수 있었겠지. 짐승의 본능이란, 그런 거니까."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는 상식과 비교해 보았을 때, 가장 편리하게 상대방의 힘을 빼앗을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점혈이다.
팔과 다리의 힘줄을 끊는 등의 행위는 후환이 두려운 데다가, 혹시 나중에 복구할 필요가 생겼을 때도 고생하게 된다.
그에 비해서 점혈은 크게 후유증을 걱정할 필요도 없고, 원래 상태로 복구시키는 것도 쉽다.
하지만 천변무궁류의 기술에는 점혈의 기술이 없다.
그 대신 존재하는 것이 마력과 살기를 통해서 심령을 제압하는 기법이지만, 이것을 상대에게 쓰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그 조건을 만족하기 위해서, 난 지금 다른 모두를 바깥에 내보낸 뒤 눈앞의 여자와 일대일로 대치하고 있다.
절대로 먼저 공격하진 않는다. 그런 식으로는 심령을 제압하는 기술을 쓰는 조건을 만족시키기 어렵다.
내게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각인시키고, 정신을 꺾고 나서야 비로소 심령 제압술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최소한 지금의 내 수준에서는 그렇다.
"신아 너는 저 사람에 대해서 아는 게 전혀 없지?"
백신아를 양손으로 쥔 상태에서 조용히 중단세로 멈춰선다. 백신아는 이제 숨길 생각도 없는 건지 날을 진동시키면서 내게 질문했다.
「네. 제가 가상 인격을 각성하고 기록을 저장하기 시작한 시점에는 이미 없던 사람이었어요. 초기 제작 단계에만 참가한 사람이 아닐까 싶네용.」
……이제 와선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은근히 아는 게 없구만.
아니, 됐다.
백신아의 진가는 인간의 영역을 초월한 수준에 있는 어마어마한 검술에 있으니까.
사소한 단점 정도는 아무래도 좋지 뭐.
그리고, 그 잃어버린 기록을 되찾기 위해서 해신과 맞서 싸우려는 거니까.
지금은 일단 눈앞의 싸움에 집중하자.
어쩌면, 앞으로 내 사저??가 될 수도 있는 사람을 돕는 일이니까.
"크아아아!!"
겨우 싸울 마음이 들었는지, 파비아가 짐승처럼 포효하면서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제 시작이다.
천변무궁류의 심령 제압술이 통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상대방의 정신을 꺾어놓을 필요가 있다. 보이드가 바로 그 예였다.
놈은 백신아에게 패배하고 코어까지 분쇄된 탓에 천변무궁류의 심령 제압술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대로 제압 당하고 말았다.
정신적으로 약해진 상대에게 잘 통하는 수법이다.
"……."
쉽게 말하면, 지금부터 온힘을 다해서 덤벼드는 파비아를 상대로 맞서 싸워서 굴복시킬 생각이다.
천변무궁류의 심령 제압술이 통할 수 있을 정도로.
한계까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