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이자는 검성의 길을 걷는 것 같습니다-84화 (84/287)

〈 84화 〉 11. 구르제스의 그림자 (5)

* * *

"……먼지 냄새."

루이스가 코를 잡으며 눈을 찌푸렸다.

이곳은 수백 년 전 검왕검이 제작되었던 비밀 공방이고, 최근에는 보이드가 개조해서 자신의 공방으로 쓰고 있던 장소이다.

보이드가 우리에게 당해서 수감된 일자가 대략 3개월 정도 전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 기간 동안 방치되었던 공방이 불결한 상태인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점은 음식물 냄새는 그다지 풍기지 않는다는 점.

보이드는 이곳을 떠나기 전까지 취식이나 취침 등의 행위를 거의 하지 않았는지, 먼지가 조금 끼어 있는 걸 빼면 쓰레기나 오물도 보이지 않았다.

3개월이나 음식물이 방치 되어 있었다면 끔찍한 냄새가 났을 텐데, 다행이다.

"보이드는 검왕을 거의 신앙 수준으로 따랐다고 했지. 되게 쓸데없는 미학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쓸모 있게 느껴질 때도 있는 거구나."

이것이 공방의 상태를 살펴본 연금술사의 평가.

보이드는 공방을 필요 최소한의 한도로만 개조해서 쓰고 있었다. 널찍한 공방에는 쇠를 달구는 화로와 발로 밟는 풀무. 그리고 쇠를 두들기는 도구 따위가 차례대로 정돈되어 있었다.

요즘은 천연기념물에 가까운, 옛날 느낌의 대장간이다.

보이드가 손을 댄 거라곤 전등 같은 것을 달아서 공방의 밝기를 높이거나, 부서진 부분을 보수한 것밖에 없는 것 같다.

정말로 이런 곳에서 검왕검이 만들어진 걸까?

나는 확인을 부탁할 생각으로 검집에 들어간 백신아의 칼자루를 손바닥으로 살짝 두드렸다.

"네가 보기엔 어때?"

「네? 어, 네?」

구경하느라 정신이 팔린 건가. 나는 검자루를 손바닥으로 두어번 두드려서 백신아를 자극했다. 그러고 나서야 녀석도 조금 정신이 듯 것처럼 "으으" 하고 소리를 냈다.

「……검주도 아시다시피, 제가 가지고 있는 기억에는 중간 중간 빠져 있는 부분이 있잖아요. 마치 벌레 먹은 달력처럼.」

"그렇겠지. 긴 세월 동안 지중에 파묻히면서 기억에 손상이 온 걸까?"

「그건 저도 잘 모르겠지만……, 묘하게 마음이 진정되네요. 마치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에요.」

"따로 느껴지는 건 없고?"

「……으, 죄송해용.」

"죄송하기는 무슨. 그럴 수도 있지."

애초에 백신아의 기억이 가물가물한 점을 인간의 기억 상실과 같은 선상에 둘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백신아는 인간의 손에 의해서 제작된 가상 인격이다. 기억을 저장하는 방식이 인간하고 다르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다.

실제로 가동한 세월만 200년이 넘어가는 녀석이니까.

순식간에 기분이 바닥으로 내리꽂힌 백신아를 살살 쓰다듬으면서 풀어준다.

이 녀석은 스스로를 '내게 유용한 도구'로 정의내리고, 그것을 제1원칙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다른 것보다도 내게 도움이 안 되는 상황을 제일 아쉬워하는 경향이 있다.

어차피 난 이 녀석에 지금까지 도움 받은 것만 해도 산더미라서 겨우 이런 거 가지고 일일이 침울해질 필요는 없는데.

"신현아. 이거 봐봐."

멀리에서 연금술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방이 200년 전에 세워올려진 장소라는 점을 감안했는지, 그녀는 손에 흰 장갑을 낀 상태였다.

대장간 부분과 분리되어 있는 안쪽 공간. 열려 있는 문 안쪽에서 연금술사는 나란히 선 동일한 형태의 두 책장 앞에 서 있었다.

"보아하니 보이드는 여기에 있는 책의 원본이 훼손되는 걸 피하기 위해서 필사본을 따로 만들어둔 모양이야. 왼쪽 책장에 들어있는 게 원본이고, 오른쪽 책장에 들어있는 게 필사본이지."

오른쪽 책장에서 책을 한 권 뽑아낸 연금술사가 마치 카드 마술을 하듯 페이지를 빠르게 넘겼다. 책의 손상 같은 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얼굴이다.

원본이 아니라 필사본이기 때문에 막 다루는 건가.

"물론 원본의 보관 상태도 상당히 양호해. 보이드가 잘 관리한 것도 있겠지만, 그 이전에 책 자체가 일종의 마도서처럼 되어 있어서 평범한 책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높은 내구도를 가지게 된 거야."

그 다음에는 왼쪽 책장에서 책을 한 권 뽑아내서 가볍게 흔들었다.

"마도서라는 건 책에 새겨진 활자 하나 하나에 마력이 스며드는 과정을 반복한 끝에 만들어지는 물건이지. 이 책도 마찬가지야. 집필하는 과정에서 대량의 마력이 유입되었고, 그 구조가 매우 합리적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높은 내구성을 가지게 된 거지."

마구잡이로 마력을 유입시킨다고 무조건 마도서가 되는 건 아니다.

수준이 떨어지는 검이 특급 모험가가 공급하는 마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부러지는 것처럼, 모든 활자에 무작정 마력을 실어봐야 책을 망가트리기만 할 뿐. 마도서는 되지 않는다.

나는 연금술사가 내게 건네준 책을 넘기면서 대답했다.

"내용을 보면 그다지 마도서 같진 않은데요? 아, 그래서 '일종의 마도서' 이라고 표현하신 건가. 마도서는 아니지만, 마도서처럼 내구도가 높아진 상태이니까."

"응. 이 책을 집필한 사람은 마법사가 아니라 대장장이였지만, 극에 이르면 통하는 법이지. 책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스며든 마력이 마도서의 구조처럼 결합하면서 내구도를 높인 거야."

책을 돌려서 집필자의 이름을 확인한다.

백신아가 스스로 말했던 검왕검의 제작자, 명공 루키우스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루키우스만의 독자적인 제작공법에 대해서 쓴 책이네요."

지나치게 전문적인 내용이라서 나도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결론을 내린다.

연금술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물론, 200년 전의 제작공법인 만큼 현 시점의 기술과 비교하면 조금 떨어지는 부분도 있지만……, 그 시절의 대체적인 수준을 고려하면 상당히 선구적인 방식이지."

의외로 연금술사가 다른 분야의 전문가를 높이 평가하는 건 드문 일이다. 연금술사와 대장장이. 기존의 물질을 자극하고 두들겨서 새로운 물건을 만든다는 점에 있어서는 일종의 동류라고 볼 수 있다.

같은 '제작자'의 입장에서 루키우스의 실력에 감탄한 걸지도 모른다.

연금술사가 책을 살짝 높이 들면서 말했다.

"표현하기로는 제작 공법에 대한 책이지만, 사실상 루키우스가 평생 추구하던 '최고의 검'을 만들기 위한 시행착오가 담겨 있는 기록이야."

"'최고의 검'이라……."

"아마도, 네 허리에 걸려 있는 그 녀석을 두고 하는 말이겠지."

연금술사가 뭉근한 시선으로 허리춤의 백신아를 지켜본다. 내 생각도 그렇다. 보이드조차 검왕검이라고 지칭한, 유일무이한 녀석이니까.

"……근데 이거, 일단 해석부터 하는 게 먼저일 거 같아요. 너무 옛날 책이다보니까 표기 같은 것도 통일되어 있지 않고. 용어가 달라진 부분도 있으니까."

다른 쪽에서 필사본을 훑어보던 루이스가 볼멘소리를 냈다. 루이스가 말한 것처럼, 내가 이 책을 어중간하게 이해한 이유도 그런 부분에 있다.

우리와 비교해서 연배가 조금 높은 연금술사는 그나마 수월하게 이해하는 기색이었지만, 그녀에게도 이따금씩 해석에 부치는 부분이 있는지 입술을 삐죽이며 생각에 잠기는 구간이 있다.

"보이드는 검왕과 같은 시대를 살아온 인간이지. 그래서 따로 해석하는 과정 없이 읽어낼 수 있었던 것 같지만…… 이건 나도 조금 시간이 걸릴지도."

하지만, 연금술사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꽤 흥미가 생긴 얼굴이다.

진짜 학자는 미지의 지식 앞에서 오히려 불이 붙는다.

연금술사도 그런 부류였다.

"……."

자리에 앉아서 보이드가 필사한 복사본을 위주로 빠르게 훑는다. 내용은 완벽하게 옮겨진 상태이지만, 루키우스가 집필한 원본과 비교하면 담겨 있는 마력의 수준이 많이 천박하다.

마도서를 필사하는 데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게 이 부분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루키우스도 상당한 수준으로 마력을 다룰 줄 알았던 것 같다.

"천변무궁류에 대한 정보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군. 순수하게 검왕검 제작에만 골몰한건가?"

"……어, 있잖아. 신현 씨?"

"응, 왜 그래?"

저마다 각자 위치를 잡고 책을 훑고 있던 중에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샤를로트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내 이름이 불려서 일단 고개를 들어서 대답한다.

"저기, 난 뭘 하면 좋을까……? 나, 나도 책을 좀 읽어보는 편이 좋을까?"

"음, 솔직히 네 수준에선 좀 어려울 거야. 어휘도 많이 복잡하고. 무슨 논문처럼 쓰여 있어서."

"그, 그럼 나는 어떡하면 좋지……?"

우물쭈물거리는 샤를로트가 신경이 쓰였는지, 제일 먼 자리에 앉아있던 연금술사가 턱짓으로 말했다.

"그럼 호텔방에 가서, 3번이라고 쓰여 있는 가방을 좀 가져와줘. 오늘은 그거 가지고 좀 만져봐야겠다."

"아, 알겠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다녀올게요!"

샤를로트가 전체적으로 많이 흥분한 상태였기 때문에, 나는 좀 진정하라는 뜻으로 손짓했다.

"너무 서두를 필요는 없어. 그러다 넘어진다."

"알았어. 그럼, 빠르게 가져올게!"

내 말을 전혀 안 듣는구만.

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나가는 샤를로트를 일별한 뒤, 나는 다시 책을 들여다보며 작업을 시작했다.

"아, 신현아 찾았어. 검왕검에 쓰인 합성금속의 연금식이야."

원본이 되는 책을 손에 든 연금술사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래도 검왕검의 제작자의 공방이라서 뭐가 있긴 있는 모양이다.

"척 봐도 뭔가 엄청나게 기네요. 저도 연금 쪽은 전공이 아니라서 알아보기 어려운데, 전문가의 견해는?"

"지금 기준으로도 터무니 없는 수준의 오버 테크놀로지야. 내 능력으로 재현하려면 못해도 10년은 걸리겠는걸."

"긴 건지 짧은 건지 잘 모르겠네요."

"음, 검왕검의 성능을 고려하면 10년 동안 삽질을 해볼 가치는 있다…… 정도려나. 그리고 유출을 감수하고 다른 학자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기간을 좀 더 단축할 수도 있을테지."

연금술사가 자리에서 일어난 후, 공방을 빙글빙글 돌면서 말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그 금속을 얻어내는 연금식에 불과해. 이걸 재련해서 원하는 형태로 주조하고, 거기다가 검왕검처럼 다양한 기능을 추가하기 위해서는…… 또 추가로 다른 공정을 거칠 필요가 있어."

연금술사는 선 자리의 옆에 책을 차곡차곡 쌓아서 탑을 만들었다. 그 탑의 높이는 이제 연금술사의 어깨 높이까지 왔다. 그 자리에 팔을 걸치면서 느긋하게 입맛을 다신다.

"합성 금속을 만드는데 필요한 연금식이 이 정도 분량이야. 그리고 검왕검에 첨부된 다양한 기능을 고려하면, 아마 여기에 있는 모든 장서를 다 더해도 검왕검의 완전한 설계도는 나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음,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실질적인 검왕검의 제작은 여기에서 이뤄진 게 맞지만, 그 이외에도 다른 공방에 다른 자료가 추가로 보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어. 뭐, 나도 한 번 훑어본 게 전부라서 확신은 못 하겠지만."

"……이해가 안 되는데요. 여기가 검왕검의 제작 장소라면, 모든 설계 공정이 다 보관되어 있어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연금술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의견을 긍정하면서도, 나온 결과가 이러하니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끊임없이 설계도를 들여다보며 공정을 조정해도 모자랄 판에, 스스로 설계도를 여러 갈래로 분산시킨다는 건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니까.

근처에 따로 자료를 보관한 창고가 있는 건 아닐까? 아니, 아니다. 자세한 건 알아봐야 하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높지 않다.

진짜로 다른 공방이 있다고? 정말로?

잠시 입술을 손끝으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긴다. 본격적으로 집중에 빠져든 순간, 주위의 풍경이 흑백으로 변하면서 체감하는 시간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키워드를 정리해보자.

루키우스의 공방은 대장간과 생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고, 생활 공간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건 책장에 빼곡하게 꽂혀 있는 책이다.

책장은 모두 두 개.

하나는 원본이고 또 하나는 보이드가 필사한 사본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원본하고 사본에 서술된 문장에는 차이점이 없다.

차이점은 하나. 원본은 마력의 흐름이 아주 정순하고 합리적인 구조를 띄고 있기 때문에 마도서와 같은 높은 내구도를 획득했지만, 사본은 그러지 못했다는 것.

여기까지 생각을 끝마친 후, 다시 정상적인 체감 시간으로 돌아온 나는 고개를 살짝 들었다.

"선생님, 루이스."

"응. 왜?"

"지금부터 왼쪽 책장의 책을 모조리 뺀 다음, 내가 말하는 순서대로 다시 꽂아줘."

"……?"

루이스는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지만 연금술사는 달랐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바로 알아들었다는 듯, 고혹적인 미소로 나를 마주했다.

"아, 그렇구나. 여기에 있는 루키우스의 서적은 그 하나 하나가 완성된 마도서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 즉 하나 하나가 마력을 품고 있다……."

"천변무궁류의 요령과 같아요. 대기 중의 마력을 배치해서 제가 원하는 효과를 끌어내는 것처럼, 서로 다른 성질을 가진 마도서를 정해진 순서대로 배치하면, 뭔가 효과가 나올지도 모르죠."

보이드가 필사한 사본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효과지만, 원본은 그 무엇 하나 수준이 낮은 물건이 없었다.

확신은 없지만 천변무궁류의 사용자로서 함부로 넘길 수 있는 가능성은 아니었다.

마력의 흐름을 배치하고 조합해서 최고 최속의 위력을 끌어내는 것이 천변무궁류의 요체임으로.

원본 하나 하나의 마력의 흐름을 읽고, 이들의 출력을 동시에 증폭시킬 수 있는 배치를 고안한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천변무궁류의 제삼검, 거성의 원리를 조금 응용했을 뿐이니까.

루이스와 연금술사에게 부탁해서 책의 배치를 지시하고, 나는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전체적인 밸런스를 궁리했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결론이 도출되었다. 마지막 한 권의 책을 연금술사가 까치발로 꽂아넣은 그 순간, 책장에 배치된 모든 책이 일제히 빛을 내기 시작했다.

손을 들어서 빛으로부터 눈을 지킨 연금술사가 낮게 중얼거렸다.

"이건 처음부터…… 천변무궁류의 계승자를 기다려왔던 걸지도……."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괜히 가슴이 두근두근 거리는걸요?"

책장의 빛이 잦아 들었을 때, 왼쪽 책장의 옆에는 지금껏 보지 못한 문이 새로 발생한 상태였다.

공교롭게도 그 위치는 원본과 사본이 보관된 두 책장의 중앙 지점이었다.

"……? 잠깐만, 백신현. 선생님. 이거 뭔가 좀 이상한데?"

"갑자기 왜 그래?"

숨어있던 길을 보고 조금 감탄하고 있었을 때, 갑자기 루이스가 어깨를 흠칫거리면서 눈을 찌푸렸다.

녀석은 오른쪽 귀에 손을 댄 상태였다.

"발소리. 발소리가 들려. 저 문 너머에서."

……발소리라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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