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 11. 구르제스의 그림자 (2)
* * *
요란한 소리와 함께 플랫폼에 열차가 들어왔다.
몇 없는 사람들도 열차에 올라타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던 와중, 주먹을 옴팡쥔 샤를로트가 콧김을 세게 내뿜으며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굽이 낮은 여성용 구두를 주섬주섬 벗어서 손에 들었다.
아, 이거 말려야 하나. 하지만 샤를로트는 이미 열차 쪽으로 다가갔다가, 역무원에게 붙잡힌 상태였다.
"어, 너 지금 뭐하니? 왜 갑자기 신발을 벗어?"
"느에? 하지만 신현 씨가 열차에 탈 때는 신발을 벗으라고……"
역무원에게 붙잡힌 뒤, 분위기가 심상찮다는 걸 눈치챈 샤를로트가 천천히 다른 차량으로 시선을 움직인다. 그리고 아무도 신발을 벗지 않는다는 걸 눈으로 확인한 뒤, 붉어진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그 이후로는 순식간이었다. 빠르게 손에 든 구두를 신고, 역무원에게 거의 기역자가 될 정도로 허리를 숙힌 뒤, 이쪽으로 도도도 달려와서 옴팡쥔 주먹으로 나를 두들겨대기 시작했다.
"시, 신현……! 신현……! 신현 씨잇……!"
"아, 진짜 미안. 네가 진담으로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
물론 재미있어 보이길래 살짝 내버려둔 것도 사실이지만.
완전히 토라진 샤를로트를 달래면서 열차에 올라탄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묘하게 시끄러운 이쪽을 향해 잠시 돌아본 뒤, 곧이어 쿡쿡 웃음 소리를 내면서 열차에 올라탄다. 재미있어 보였나보다.
샤를로트는 꽤 완력이 높은 편이라 이렇게 투닥거리는 것도 은근히 아픈데, 사람들에게 말하면 비웃음 소리나 듣겠지.
"너희들, 꽤 사이 좋아 보인다?"
루이스는 복도를 사이에 두고 옆에 있는 좌석에 연금술사와 함께 앉아 있었다.
연금술사는 창가, 그리고 루이스가 안쪽이다.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루이스가 날 퉁명스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처음 봤을 때하고 비교하면 많이 친해졌지. 이런저런 일이 있었으니까."
내 얼굴만 봐도 금세 쪼그라들던 그때와는 비교가 안 된다. 우정과 비슷한 감정이 피어난 건 틀림없다.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서로 편하게 장난을 칠 수도 있는 거지.
창가 자리에 앉아서 내 어깨를 투닥거리고 있던 샤를로트도 주먹을 잠시 멈추고 루이스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어……. 나도 많이 부끄럽긴 하지만, 신현 씨가 나한테 장난을 치는 건…… 신현 씨가 나를 친밀하게 대해주는 것 같은 느낌이라서……, 무척 좋아해……."
샤를로트가 주먹을 쥔 손을 풀어서 내 왼쪽 어깨에 층층히 올린다.
"사실, 나나 우리 일족이 신현 씨에게 못된 짓을 한 건 사실이잖아……? 그래서 사실은 신현 씨도 내가 지긋지긋한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될 때가 있는데……"
미소 짓는 얼굴이 가까이 다가와서 내 어깨와 목 사이의 좁은 공간에 파고들었다. 코만 붙인 상태로 부비적거린다.
마치 아침 햇살을 쬔 아기 고양이처럼.
다시 고개를 든 샤를로트가 내게 체중을 실으면서 보드랍게 웃었다.
"신현 씨가 나한테 장난을 쳐 주면 그 만큼 나를 편하게 대해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알았어, 알았어. 내가 잘못했다."
루이스가 손을 내저으며 샤를로트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허탈하게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거린다.
"이건 뭐, 농담도 못하겠네. 얘는 무슨 한 마디 말만 하면 바로 삽을 쥐고 땅을 푸려고 한담? 나도 신현이도 뒷끝 같은 거 없으니까, 넌 그냥 편하게 있으면 된다고."
"앞으로 살다 보면 샤를로트도 많이 나아지겠지. 죄책감을 느끼는 것도 너무 심하면 오히려 병이지만,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하는 쓰레기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살짝 들린 샤를로트의 턱을 손가락으로 간질었다.
"푸흐흐."
간지러웠는지 샤를로트가 가볍게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몸을 물리지 않는 걸 보면 기분이 나쁜 건 아닌가보다.
앞으로도 샤를로트와는 오랜 인연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샤를로트는 조금씩 자기 자신만의 올바른 가치를 길러 나가게 되겠지.
그때까지는 이 아이가 지나치게 마음 고생을 하지 않도록 가까이에서 지켜봐주고 싶은 마음이다.
한 사람의 어른으로서.
그리고 부당하게 끊어질 뻔 했던 샤를로트의 인생을 다시 이은 장본인으로서.
열차가 종착지에 도착했을 때 즈음에는 이미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구르제스에 가기 위해서는 여기에서 반나절 정도를 추가로 걸어야 한다. 저 멀리에 바다가 보인다.
하지만 여기도 해안가 근처이기 때문일까. 역에서 내린 순간 찝찝한 공기가 훅 닥쳐왔다.
그리고 그런 느낌과는 또 별개로, 대기 중에 흐르는 마력이 좀 텁텁한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하나? 그런 느낌이었다.
제피로스의 맑은 공기와 비교하면 차이가 크다.
명목상으로는 관광지라지만, 솔직히 용무가 없으면 관광으로라도 오고 싶진 않은 곳이다.
"일단 오늘은 여기에서 짐을 풀자. 너하고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선생님하고 샤를로트는 꽤 힘들어 보이니까."
"그럴까? 음, 뭐, 나하고 네가 각각 한 사람씩 품에 안고 이동하는 방법도 있긴 한데."
"어차피 조사의 중심은 선생님이잖아. 선생님이 퍼져버리면 의미가 없어."
"그것도 그렇네. 그럼 뭐, 일단 오늘은 여기에서 쉴까."
루이스와 가볍게 의견을 교환한 후 가까운 호텔로 움직였다. 여기에서 반나절만 더 걸으면 구르제스지만, 체력에 일가견이 있는 우리 두 사람하고 다르게 연금술사와 샤를로트는 어느 정도 몸을 쉬어 줘야 한다.
무리하게 고삐를 당기는 것도 좋진 않다.
이곳은 관광지. 괜찮은 호텔은 차고 넘칠 정도로 많았다. 그 중 하나를 골라서 들어간 다음 체크인.
방을 두 개 잡고, 첫 번째 방에는 나와 루이스가, 두 번째 방에는 연금술사와 샤를로트가 들어가기로 했다.
루이스가 나하고 같은 방을 쓰고 싶어하는 건, 당연히 가상 공간을 통한 수련 때문이다.
제대로 된 검이 없는 탓에 현실에서의 수행이 정체되어 있는 반면, 가상 공간에서는 무기의 제약이 모두 해금되니까.
"나도 괜찮아. 연금술사 선생님하고는 묘하게 이야기가 잘 통하니까……"
"……나도 뭐, 그다지 상관은 없어."
샤를로트와 연금술사도 크게 불만은 없는 얼굴이다. 그런데 이 녀석은 언제 연금술사하고 친해졌지?
연금술사는 나와 루이스를 제외한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무관심으로 대하는데, 그런 성격이 오히려 샤를로트에게는 호감으로 다가온 걸지도 모르겠다.
샤를로트는 죄책감 때문에 오히려 우리들의 호의를 부담스럽게 느끼고 있으니까.
"……."
계속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극복할 수 있겠지. 샤를로트의 머리카락을 살짝 쓰다듬은 뒤, 가지고 온 짐을 챙겨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가져온 짐이 많지만, 사실 대부분은 연금술사의 물건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이 물건을 가지고 온갖 조사를 시작할 예정이기 때문에 우리가 쓸 장비라고 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연금술사의 방에 짐을 차곡차곡 쌓아두고 나온다. 일단 샤워부터 한 다음에, 밖으로 나와서 이곳의 식당을 찾아갈 생각이다.
내륙인 제피로스와 비교하면 역시 해산물이 많겠지? 즐길 거리가 많지 않은 이 세계에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게 몇 안 되는 낙이라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루이스는 생각할 게 있다면서 나를 먼저 욕실로 들여보냈다. 나도 훌렁훌렁 옷을 벗는다. 나도 루이스도 이 정도로 부끄러워할 시기는 이미 한참 지나갔다.
지금보다 어릴 적에는 5년 정도 동거한 적도 있었으니까.
차례로 몸을 씻은 후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다. 나야 뭐 늘 입던 가벼운 활동복 차림이지만, 루이스는 내게서 뺏어간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어깨는 좁아서 헐렁한데 아랫단은 큼지막한 가슴 탓에 위로 들려서 배꼽이 살짝 보인다.
아, 잠깐만. 어깨가 좁아서 왼쪽 어깨가 그대로 드러나보이는데, 저기에서 보이는 검은 끈은 혹시 속옷의 그건가.
별로 꾸민 거 같지도 않은데 워낙 미인이라 아무거나 집어서 입어도 어울리네.
허 참.
연금술사도 그렇고. 이젠 정이 들대로 들어서 가족 같은 마음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될 줄이야.
감정은 육체의 노예라더니, 그 말이 진짜 맞긴 맞는 것 같다.
"뭐해? 얼른 나가자."
"아, 그래."
루이스가 내 팔을 가볍게 치면서 앞서 나갔다.
복장은 최대한 가볍게, 하지만 나와 루이스의 허리춤에는 길쭉한 검이 한 자루씩 매달려 있다. 내 허리에는 당연히 늘 붙어 다니는 백신아. 그리고 루이스가 가지고 있는 건 급한대로 집어온 평범한 검이다.
1급의 출력까지는 견뎌낼 수 있지만 특급의 영역에서는 도저히 힘을 못 쓰고 부서져버리는, 비싼 주제에 더럽게 미묘한 물건이다.
저걸 쓸 바에야 차라리 맨주먹으로 싸우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루이스는 기본 신체 능력도 높은 편인 데다가 주먹 싸움에도 일가견이 있으니까 진지하게 고려해볼 수도 있는 방안이다.
호텔 방 바깥으로 나왔을 때, 이미 연금술사와 샤를로트는 채비를 마치고 우리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우리도 꽤 일찍 씻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보다 더 빠르게 나올 줄이야.
같이 들어가서 얼른 씻고 나온 건가?
연금술사는 여기에서도 검은 원피스 위에 흰 가운만 걸친 옷차림을 유지했지만 샤를로트는 조금 다르다.
애초에 신앙심 같은 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수녀복도 때려치우고 예전에도 보았던 활동복을 입고 있었다.
그 위에 끈이 몸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가죽 가방을 메고 있었는데, 언뜻 보이는 모양을 보아하니 생필품이 들어간 건 아닌 것 같다. 저 무게감, 이 소리. 무기를 쪼개서 집어넣은 게 틀림없다.
"샤를로트, 그 안에 뭘 챙겨왔어? 글레이브?"
"응, 글레이브야. 아무래도 공격 범위가 제일 기니까……."
샤를로트가 가방끈을 쥐고 흔든 순간 짤랑이는 소리가 들렸다.
글레이브라는 건 길쭉한 장대에 칼날을 붙인 창의 친척 같은 무기이다. 문화권에 따라서는 언월도와 동일시되는 경우도 있고.
내가 보기엔 글레이브나 창이나 거기서 거기 같은데, 글레이브는 되고 창은 안 되는 샤를로트의 기묘한 반응이 조금 이상하다.
샤를로트의 광증은 창이라고 인식한 물건을 손에 쥐는 순간 발현한다. 명색이 창술명가라는 곳의 후계자임에도 창술을 전혀 배우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다.
광증을 발현시키는 무기와 그렇지 않은 무기.
이 부분을 잘 파고들면 흑주대천신공의 파해식을 짜내는 것이 쉬워질 수도 있다.
아니, 오히려 특정 키워드에 반응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광증이 아니라 최면, 암시 쪽에 더 가까운 듯한 느낌도…….
짧은 수수께끼에 골몰하며 호텔 바깥으로 나온다. 바로 그때, 루이스가 갑자기 내 옷깃을 잡아끌면서 나를 불렀다.
"야, 백신현. 저거 좀 봐봐."
"……뭐지?"
루이스가 부른 방향으로 시선을 돌린 순간 내가 얼빠진 목소리를 낸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갑자기 길에 나와있는 현지인들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 근처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던 샤를로트에게 질문했지만 샤를로트도 모르는 눈치.
분위기만 보면 무슨 종교 행사 같은데……, 혹시 이쪽 지방에서만 국지적으로 유행하는 신흥 종교 같은 건가?
바닥에 꿇어앉지 않은 사람은 우리와 같은 외지인인 거 같았다.
다들 당혹스러운 시선으로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바로 그때.
"……어?"
「……어?」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백신아도 나와 거의 비슷한 순간에 감지했는지 공교롭게도 우리 둘의 목소리가 완전히 겹쳐졌다.
"왜 그래?"
루이스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특급 모험가조차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다.
대기 중의 마력을 제어하는 천변무궁류의 특성상 마력의 흐름이나 성질에 한해서, 나는 특급 모험가보다도 더 많은 것을 보고 들을 수 있었다.
나는 해안가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보이는 지평선 쪽에서, 이상한 기척을 느꼈다.
"백신아. 너도 들었지?"
「네」
도대체 뭐였지?
저 지평선 너머에서, 마치 인간도 괴물도 아닌 '무언가'가 울부짖고 있는 듯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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