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 11. 구르제스의 그림자
* * *
어깨를 주무르면서 정문을 통과한다.
조금 아프기는 하지만 파김치가 될 정도까진 아니었다. 마그누스는 그래도 정도라는 걸 아는 인물이라 모의 전투에서 함부로 힘을 쓰진 않는다.
물론 나 자신의 실력이 이전에 비해서 조금 더 늘어난 것도 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할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다.
강자와의 싸움은, 그 싸움에서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정말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귀중한 경험이다.
나쟈와의 싸움도, 보이드와의 싸움도, 스페트로와의 싸움도 마찬가지였다.
생사를 넘나드는 싸움 끝에 손에 쥔 힘은 영혼에 달라붙어서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였나. 어디 책에서 읽어본 문구인데, 책 제목이 기억이 안 나네."
「뭔데요, 그게?」
"죽을 고비를 겪고 넘어선 인간은 예전보다 더 강해질 수 있다는 말이야."
솔직히 온갖 정신병에 시달리는 내 입장에서 보면 좀 아리송한 말이다.
정말로 사람은 시련을 겪어야만 강해질 수 있는 것일까? 순서대로 강해지는 방법도 있는데 괜한 정신병만 추가로 얻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좀 들고.
결국 세상 이치라는 건 바라보는 시선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도시 중심부를 가로지른 후 외곽에 있는 빈집촌으로 들어섰다. 내가 알기로 여기에 주소를 두고 있는 사람은 두 명 뿐이다.
나, 그리고 연금술사.
그런데 나오기 전에는 불을 끄고 나왔던 집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나는 살짝 힘을 빼고 어깨를 늘어트린 뒤, 잠겨 있지 않은 문고리를 돌리고 들어갔다.
"아, 왔어?"
"너 뭐하냐."
루이스가 의자에 희한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한쪽 다리는 쭉 펴고, 반대쪽 다리는 무릎을 굽혀서 몸통에 가까이 붙인 자세. 지금 당장 잡지의 표지 모델로 서도 위화감이 없을 것 같은 꼴이다.
사실 루이스가 여기에 있는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유사시를 대비해서 연금술사와 루이스에게 각각 하나씩 우리 집의 예비 열쇠를 쥐어두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급한 상황에서 쓰라고 준 거지, 아무데나 찾아와서 자기 집처럼 써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는데.
루이스는 맨발이었다. 그리고 근처에 벗어뒀던 손님용 슬리퍼를 신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주인용 슬리퍼를 신지 않는 정도의 예의는 있었나보다.
"그야 네 가상 공간 좀 쓰려고 왔지. 정확히는, 신아의 가상 공간이지만."
"그래, 그런 용건일 줄 알았다."
어차피 루이스가 그렇지 뭐.
루이스는 오히려 뻔뻔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아, 하지만 그렇게 부끄러운 꼴을 감수하면서 겨우 얻어낸 출입권이잖아. 그럼 단물이 빠질 때까지 최대한 써 줘야지."
오른손을 그 자리에서 두어 번 휘두른 후, 빠르게 내지른다. 복싱으로 치면 잽. 그 정도로 빠르고 간결한 움직임이었다.
주먹에서 발사된 바람이 내 머리카락을 가볍게 흔들었다.
슉, 이 소리는 입에서 나온 소리가 아니었다.
"은근히 드물단 말이야. 특급 모험가가 마음대로 힘을 휘두를 수 있는 공간이. 내가 진짜 작정하고 힘을 쓰면 이 도시 하나쯤은 반나절 안에 잿더미로 만들 수도 있다고."
루이스의 말은 아마 사실일 것이다. 내가 조금 전에 지나쳤던 제피로스의 정문도 루이스와 보이드의 전투로 성벽째 무너져내렸던 것을 겨우 수복한 것이었으니까.
특급은 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힘이 강하다.
그들의 진짜 적은 바로 그 무시무시한 완력 그 자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래서 그 가상 공간은 무척 마음에 들어. 마음대로 힘을 휘둘러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 데다가, 최고의 검사가 24시간 내내 상주해 있으니까."
"그건 좋은데. 난 좀 있다가 들어갈 거야."
전투로 너덜너덜해진 겉옷을 옷걸이에 걸면서 대답했다.
"왜?"
"왜냐니. 오늘은 수련을 많이 빼먹었잖아. 아무리 가상 공간에서 열심히 해 봐야, 그걸 현실에서 몸에 붙이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물론 기초 수련은 했지만 그건 당연히 해야 하는 거고.
어제 오늘에 걸쳐 연금술사, 루이스와 몸을 섞느라 시간을 많이 쓴 데다가 보이드도 찾아가고 샤를로트한테도 들리면서 수련 외적으로 쓴 시간이 많았으니까.
가상 공간에 들어가더라도 빼먹은 만큼은 보충하고 나서 들어가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결국 싸우는 건 현실의 나 자신이니까.
"……으음. 너 빼고 나 혼자만 들어가는 건 안 되나?"
"안될 걸. 나하고 신체적 접촉을 취한 상태에서, 네 코어에 섞인 내 마력을 매개로 통과하는 식이니까."
나는 백신아를 향해 고개를 돌려서 확인을 요청했다. 백신아의 대답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나만 들어갈 수 있는 걸 온갖 편법을 써서 들어가게 만든 거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정 그러면 얌전히 내 수련이 끝낼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가. 꽤 오래 기다려야 하겠지만."
어차피 지금의 나는 가벼운 운동복 차림이다. 겉옷만 벗은 후 팔과 다리에 무게추만 달아놓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전에 수중 훈련을 했을 때 썼던 물건을 살짝 개조한 것으로, 이 물건들은 무게로 내 팔과 다리를 붙잡을 뿐만 아니라 내 몸에 흐르는 마력의 흐름을 어느 정도 억누르는 효과도 가지고 있다.
굳이 이런 물건을 쓰는 이유는 간단하다. 스스로 코어를 혹독한 상황으로 몰아붙여서 코어의 기능을 높이고, 최대치를 끌어올리기 위해서이다.
나쟈의 핵을 생으로 섭취함으로써 코어를 습득하긴 했지만, 이제 막 내 몸에 생성되었을 뿐인 코어는 아무런 강화도 되어 있지 않은 상태다.
수련을 통한 강화는 필수적으로 취해야 하는 조치였다.
내가 나쟈의 핵을 획득하고 이제 두 달 정도가 지났다. 아직 수행의 초반이기 때문에 마력의 최대치가 높아지는 감각이 생생하게 느껴지고 있지만, 점점 최대치가 높아질수록 변화를 느끼는 것이 어려워지기 시작할 것이다.
"……수련하는 게 한창 재미있을 때네."
"그렇겠지."
"원래 뭘 하더라도 처음이 제일 재미있어. 실력이 느는 게 정체기에 들어가고 슬슬 상승치가 떨어지기 시작하면 의욕이 확 떨어지기 시작하거든."
루이스 입장에서 보면 시시하기 그지없는 수행일 텐데, 녀석은 내가 수행하는 야외까지 따라 나와서 쪼그린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턱을 괸 루이스가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나는 루이스의 말을 듣고 오히려 의문을 품었다.
"그런데 루이스 너도 그럴 때가 있냐?"
루이스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다.
검을 쥔 세월이 나의 절반 이하인데도 일찌감치 나를 추월해서 최연소 특급 모험가에 이름을 올리기까지 했으니까.
지금까지는 보이드나 스페트로처럼 수백 년 가까이 살아온 노괴들이 상대라서 힘을 제대로 쓰지 못했지만 루이스가 10년만 더 일찍 검을 시작했어도 충분히 선전하거나, 이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마그누스나 스텔라 같은 초일류 특급 모험가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의 재능.
그것을 나는 지금껏 그 누구보다도 가까운 위치에서 보아왔다.
하지만 루이스는 혀를 삐죽 내밀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네가 뭘 몰라서 그러는 거라고. 나도 당연히 수련의 진도가 정체될 때쯤은 있고, 좌절할 때도 있어. 난 솔직히 네가 천재에 대해서 너무 큰 환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가? 하긴, 천재도 사람이니까."
"그리고 최근 들어서는 그놈의 천재성이니 뭐니 하는 것도 전혀 의미가 없었잖아. 결국 지금까지의 모든 전투는…… 요 녀석이 없었다면 이기지 못할 전투였다고."
팔짱을 끼고 자리에서 일어난 루이스가 백신아를 턱짓을 가리켰다.
처음에는 담담하게 말하더니, 말하면서 점점 화가 올라온 모양이다. 고개를 살짝 숙인 루이스가 음습한 표정으로 이를 바득바득 갈아대기 시작했다.
"분하드아……."
혼자서 삽을 푸기 시작한 루이스를 무시하고, 나는 다음 수련으로.
수련 내용 자체는 평소대로다. 웨이트와 러닝을 반복한 뒤 섀도우 복싱으로 몸을 풀고, 그 다음에는 조금 전의 전투를 복기하면서 이미지 트레이닝.
마지막에는 수중으로 들어가서 천변무궁류의 수행이다. 사실 이게 제일 어렵다. 안 그래도 쓰기 어려운 천변무궁류의 감각을 수중에서 잡아야 하니까.
꾸준히 수행해온 덕에 조금씩 성과가 나오고 있긴 하지만 수중에서도 자유자재로 쓰기 위해선 시간이 좀 걸릴 거 같다.
"……."
그리고 루이스는 그 모든 수행 과정을 꼼꼼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이게 하나 하나의 수련 시간은 길지 않을지 몰라도, 죄다 더하면 네다섯 시간은 충분히 되는 스케줄이다.
내가 집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노을이 진 정도였던 거리에도 어둠이 내려섰다.
시계는 보지 않았지만, 아마 밤 열두 시는 벌써 넘어갔을 것이다.
"징하다, 너도 참."
"아냐, 아냐. 의외로 볼만했어. 나도 몸 쓰는 사람이잖아. 좋은 구경거리였다고."
루이스 보라고 한 일은 아닌데, 아무튼 만족스러운 모양이다.
현재 상의를 벗고 운동용 반바지 한 벌 차림이었지만, 이제 와서 그런 걸 신경쓸 정도의 사이는 아니다.
루이스가 집에서 꺼내온 수건을 내 얼굴에 던졌다. 한손으로 캐치해서 그대로 머리 위에 얹었다.
그 다음에는 몸도 좀 씻고, 오늘 쓴 옷을 빨래해서 널고…… 빨래는 루이스가 도와줘서 좀 수월하게 끝났지만, 해야 할 일을 모두 끝마치고 보니까 벌써 시계가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시간 참 빠르네.
"……다 끝났지? 그럼, 어서 시작하자고."
"알았어."
불을 끄고 침대에 눕는다. 루이스는 이미 머리를 풀어헤친 상태로 먼저 누워 있었다. 어둠 속에서 본 루이스의 얼굴은 평소와 비교해서 조금 더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그럼, 시작한다."
"……응."
눈을 감은 뒤, 천천히 검왕검 속으로 돌입했다.
* * *
구르제스로 떠날 준비가 된 건 그 후로 3일이 지나서였다.
아무래도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연구 목적으로 찾아가는 것이다보니 가져온 짐이 꽤 많다.
나는 한 손에 두 개씩 해서, 총 네 개의 여행 가방을 손에 들고 있었다. 루이스는 한 손에 하나씩. 연금술사는 하나만 들고 있다.
구르제스는 여기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해안가 도시이기 때문에 도보로만 가는 건 너무 불편하다.
그래서 우리는 제피로스에서 일단 이틀 정도 걸어서 내륙의 도시로 이동한 후, 그곳에서 열차를 타고 구르제스 근처까지 이동할 생각이었다.
지형이 험준한 데다가 몬스터들이 대량으로 서식하는 제피로스까지는 철도가 이어지지 못한 상태였다.
철도를 타고 싶다면 이렇게 내륙으로 들어와야 한다.
"……기대된다."
옆에 서 있던 샤를로트가 혼자서 조용히 웃었다. 난 고개를 갸웃하며 질문했다.
"샤를로트, 열차는 처음이야?"
"응? 아, 응. 처음이야. 지금까지는 쭉 마차 같은 것밖에 안 타봤으니까……. 신현 씨는?"
"나도 처음이야. 이 세계에 떨어지기 전에는 몇 번 타 봤지만."
"맞다. 신현 씨……, 이 세계 사람이 아니라고 했었지? 너무 익숙해보여서 나도 가끔씩 깜박할 거 같아."
"일단 말이 통한다는 점이 크지."
사실, 생각해보면 상당히 말이 안 되는 일이다.
태어난 나라가 다른 정도도 아니고, 아예 태어난 세계 자체가 다른데도 서로 대화가 통할 뿐만 아니라 읽고 쓰는데도 전혀 문제가 없을 정도이니까.
이것은 나 뿐만 아니라 나를 비롯한 다른 세계에서 떨어진 사람들이 모두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특징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세상에 벌어지는 모든 결과에는 그에 합치하는 원인이 존재하는 법.
이런 식으로 멀쩡하게 말이 통한다는 것 자체가 누군가의 인위적인 조작일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한다.
애초에 멀쩡한 영어 어휘나 한자 어휘로 대화할 수 있다는 것 자체부터가 좀 이상하다고.
내 생각에는 아마도, 이 세상 사람들의 말이 자동적으로 내가 알아 들을 수 있는 언어로 번역되어서 들어오는 게 아닐까 싶긴 하지만…… 이건 실험해볼 방법이 없으니까.
고민하다보면 끝이 없다보니 이 문제에 관해서는 최대한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다.
안 그래도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데.
샤를로트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열차가 왔다. 처음 보는 물건에 감탄했는지 샤를로트가 눈을 빛내면서 뒷꿈치를 쭉 들었다.
나이에 맞지 않게 어른스러운 행동거지를 보이는 아이이지만, 이런 모습을 보면 영락없는 어린 아이다.
살짝 장난을 쳐볼까. 오늘은 평일이라 열차를 타려는 사람도 거의 안 보이고.
자세를 낮춰서 샤를로트와 눈높이를 맞춘 후 귓속말로 작게 속삭였다.
"맞다, 샤를로트. 열차에 탈 때는 신발을 벗고 타야 하니까. 깜박하면 안 돼."
"아, 진짜? 알았어. 명심할게, 신현 씨."
샤를로트가 꽃이 피어나는 듯한 미소로 화답했다.
어라, 이걸 진짜 믿네.
이러니까 또 죄책감이 드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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