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 9. 성욕의 연금술사 (2)
* * *
퇴원은 일주일 뒤였다.
마그누스와 스텔라의 퇴원도 정확히 그 즈음이었지만, 서로 엇갈렸기 때문에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그 사람들은 퇴원한 후에도 이것저것 추가로 처리해야 하는 일이 있으니까, 대충 일주일 정도는 더 있지 않을까 싶다.
당장 루이스도 보상 관련 문제로 올리비아와 시도 때도 없이 미팅 중이었으니까.
퇴원 직후 어마어마한 양의 현찰이 계좌에 꽂히고 끝났던 나와 비교하면 상당히 고려해야 하는 요소가 많아 보였다.
특급 모험가라는 것도 참 쉬운 일이 아니다.
난 저 자격만 얻으면 하고 싶은 일은 다 하고 다닐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 건물이 난 괜찮을 거 같은데. 원래부터 공실이 많은 곳이라 어지간하면 계약 조건도 너한테 유리하게 짤 수 있을 거야. 귀신 나온다는 소문이 있어서."
"그거 연금술사 선생님이잖아요."
"그거 나 아닌데?"
"……?"
아무튼, 퇴원한 이후에는 연금술사와 함께 공방 근처의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괜찮아 보이는 건물을 돌아다녔다.
조건은 크게 따지는 편은 아니지만 훈련할 수 있는 공터 같은 게 근처에 있으면 좋을 거 같다.
「요번에는 검주의 의향을 따르겠지만, 다음 번에는 제가 집을 고를 거에요. 다음 번에는 무조건 뷰 좋고, 주변 환경 좋은 곳으로 이사 갈 거야.」
"너는 검이 왜 그렇게 주변 조건을 따지냐. 어차피 사시사철 검집 안에만 들어 있으면서."
「아, 왜요. 전 되게 보기도 좋고 살기에도 좋은 그런 곳에서 살고 싶단 말이에요. 제 실력이면 그럴 자격은 충분히 있잖아요? 검에게도 기본권을 보장하라!」
기요틴에 목 날아갈 소리 하고 자빠졌네.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특급 모험가조차 하수로 깔아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이니까.
나도 그 심정을 이해 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충분한 실력이나 자금, 인맥 같은 것도 없이 눈에 띄는 것을 해봐야 좋을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특급 모험가보다 강한 건 여기에 있는 이 녀석이지, 내가 아니니까.
그런데 지금은 그런 식으로 함부로 여유를 만끽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수행을 해도 모자랄 판에 여유는 무슨 얼어죽을 여유. 밤낮으로 거의 휴식 없이 검을 휘둘러대는데도 아직 갈 길이 멀다.
스페트로의 창극은 내게 있어서 아주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하루 이틀 만에 흩어져버릴 거라고 생각했던 그때의 전투 감각이 아직 이 손에 남아 있다.
치열한 전투의 자극이 내 머리를 이전까지 없는 수준으로 빠르게 회전시키고 있었다. 아이디어가 머릿속에서 쉴 세 없이 피어난다.
깨어 있을 때는 현실에서 검을 휘두르고, 잠들어 있을 때는 검왕검 내부의 가상 공간에서 검을 수행하는 하루 하루가 이어진다.
"검주께서는 최선을 다 하셨지만, 솔직히 제 수준에서 보면 검주에게도 좀 부족한 부분이 있었어요. 한동안은 그 부분을 교정하는 걸 수행 내용으로 하죠."
검왕검 내부의 가상공간.
대련에서 패배하고 바닥에 쓰러진 내 목에 칼을 겨누며 인간 형태의 백신아가 엄숙하게 선언했다.
스페트로와의 싸움은 내 수준에서는 이 이상 없을 정도로 완벽한 전투였다고 생각한다. 정해진 내용은 모두 완벽하게 수행했고, 그 과정에서 벌어진 몇 가지의 변수에도 완벽하게 대응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조차 여전히 미숙한 면이 있었다고 백신아는 표현한다.
녀석이 도대체 어느 정도의 경지에서 우리의 싸움을 관조하고 있었던 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백신아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충분히 되는 실력자였다. 신뢰할 가치도 충분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다시 몸을 일으킨 후, 내게 있어 아직 부족한 부분을 직접 얻어 맞아 가면서 체험해나갔다.
어느 정도 부상을 입으면 신체에서 알아서 고통을 끊어주는 현실하고 다르게, 이 세계에는 고통의 상한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기절할 것 같은 고통에 잠시 눈이 뒤집어져도, 한 대 추가로 얻어 맞으면 다시 정신이 돌아오는 수준이다.
"현실에서 네가 수련하는 걸 볼 때마다 진이 빠질 지경이던데, 여기에서는 한술 더 뜨는 거 같네."
무한히 뻗어 나간 새하얀 공간. 나와 백신아만의 공간 속에서, 우리 이외의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 연금술사가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넣은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당연히 내가 초대한 것이다. 그녀는 처음부터 이 공간에 출입할 자격이 있었기 때문에 루이스처럼 이것저것 복잡한 과정을 거칠 필요 없이 바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직접 여기를 찾아서 들어온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이건 내가 무인이 아니라서 물어보는 건데, 그런 식으로 고생하면, 재미는 있어?"
"재미는 있어요. 오히려 제 몸에 나날이 축적되는 힘을 느낄 때마다 황홀해질 지경이거든요."
아플 때도 있다. 괴로울 때도 있고, 경지가 정체되어서 그냥 다 때려치고 싶어질 때도 물론 있지만, 그때마다 강해진 나를 상상하며 부러질 것 같은 다리에 힘을 불어넣었다.
이렇게 보여도 나는 꽤 즐기고 있다.
"그 어떤 미주도 이보다 달콤할 순 없죠."
"하여튼 무인들이란, 다들 돌대가리라니까."
"그런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는 건 사실이지만요. 전 꽤 즐기고 있어요."
나는 옆에 서 있는 백신아의 어깨에 살짝 손을 얹으면서 대답했다.
"아직 갈 길이 많이 멀지만요."
"……그럼, 오랜만에 네 실력을 한 번 측정해볼까."
그녀가 중얼거린 순간, 입고 있던 옷이 달라졌다. 체크무늬 활동용 드레스에 상박을 살짝 덮는 갈색 케이프. 머리에는 흰색과 갈색을 차례로 배치한 투톤 컬러의 베레모.
이전에도 여러 번 봤던 그녀의 전투용 복장이다.
칼 한 자루만 있어도 최대 전력을 발산할 수 있는 우리와는 다르게 마법사들은 진짜 실력을 발휘하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이 꽤 많다.
그녀 같은 경우, 저 복장에 두꺼운 책을 손에 펼친 자세가 최대 전력의 형태다.
"네가 신아를 얻은 이후 나보다 강해진 건 알지만, 그게 정확히 어느 정도의 차이인지는 측정해본 적이 없잖아. 그렇지?"
"그건 그렇죠, 굳이 서로 힘겨루기를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도 있고."
연금술사를 얕보는 의미는 아니다.
친구이면서도 서로의 실력을 겨루는 경쟁 관계였던 루이스와 다르게, 연금술사는 그런 상대가 아니었다는 의미이다.
연금술사는 내게 있어 학자로서의 스승이다.
굳이 도전한다면 힘겨루기가 아니라 지식과 연구로 도전해야 맞다.
"참 드문데요. 선생님이 먼저 이러는 게 흔한 일은 아닌데. ……역시, 스텔라와 마주쳤기 때문입니까?"
"신현이 너, 그 소리 하려고 지금까지 타이밍 재고 있었던 거지?"
"뭐, 그렇죠."
연금술사가 입술을 오물거리며 투덜댔다.
하지만 평소에 이런 짓을 안 하던 사람이 갑자기 이러니까 나도 좀 신경이 쓰인 거다.
요 근래 들어서 연금술사의 심경에 영향을 줄 만한 건 그 여자와의 만남밖에 없었으니까.
"걔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라니까. 이번에 있었던, 스페트로와의 싸움 때문에 나도 조금 심경이 변한 거 뿐이야."
"그런 건가요?"
"나보다 훨씬 어린 애들을 싸움에 내보내고 나 혼자서 자리를 지키는 것도 솔직히 좀 웃긴 그림이잖아. 그래서 그런 거야."
살짝 삐뚤어진 베레모를 고쳐 쓰면서 연금술사가 고개를 돌렸다.
"너희들처럼 작정하고 훈련할 생각은 없지만, 틈틈이 비는 시간에 조금씩 해보려고."
연금술사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애초에 걔하고 갈라선지 거의 20년이 다 되어가는데 이제 와서 그런 거 가지고 낑낑거릴 리가 없잖아."
새침하게 대답한 연금술사가 두꺼운 책의 문장을 손끝으로 가볍게 건드린 순간 내 머리 위로 마력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주먹이 떨어졌다.
기습적인 공격이었지만 술식이 발휘되기 전에 마력의 선을 이미 감지한 상태였다. 옆으로 두 걸음 물러서서 주먹을 회피한 후, 검을 뽑아서 연금술사의 목을 향해 겨누었다.
"갑자기 기습 공격이에요?"
"연습은 실전처럼. 준비한 후 시작, 하고 싸우는 건 진짜 실전이 아니잖아. 스포츠지."
연금술사는 뻔뻔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리고 이때, 연금술사의 다음 마법은 이미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그녀의 목에 검을 겨눈 내가 서 있는 지면 아래에서 수많은 가시가 기습적으로 뿜어져나왔다.
피할 수도 있었지만, 마법사를 상대로 중요한 건 다음 마법을 실행할 시간을 주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 걸음 앞으로, 그리고 손목을 살짝 굽혀서 칼끝이 연금술사의 옷자락에 걸리도록 했다.
"엇……?!"
그대로 가차 없이 잡아당긴다. 옷이 잘리거나 뜯어지는 일은 없었다. 옷자락에 걸린 칼을 눕혀서 칼등이 힘을 받게 한 뒤 그대로 힘을 주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빠르게 잡아당기더라도 힘을 받는 게 날이 아니라면 칼은 아무것도 자를 수 없다.
앞으로 나아간 나와 내게 잡아당겨져서 조금 전까지 내가 서 있던 위치로 이동하게 된 연금술사. 그리고 그녀의 사방에선 연금술사 자신이 세팅한 마법이 날아오고 있다.
당연히 연금술사는 빠르게 마법을 캔슬하고 반격의 식을 짜내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움직임이 굳은 연금술사의 몸에 오른쪽 어깨를 부딪쳐서 멀리 날려보낸 후, 바닥에 쓰러진 그녀의 목에 칼을 겨누었다.
"……."
연금술사는 다른 마법을 여러 개 병행해서 나를 멈춰세우려고 했던 모양이지만, 마법사의 기술은 실행되기 전에 반드시 마력으로 이루어진 전조를 발산한다. 모조리 회피한 후 그녀를 제압하는 위치에 섰다.
바닥에 쓰러진 연금술사는 아직 다른 방법이 남아 있는지 잠시 생각에 빠진 후,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중얼거렸다.
"세다……."
"아무리 마법사의 시대가 도래했다지만,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마법사가 무인에게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거기다가 여기는 지형지물이 아예 없는 탁 트인 지형이고."
조건이 너무 나빴다.
마법이 마력으로 다룰 수 있는 온갖 작업을 다양하게 해낼 수 있는 기술이라고 치면, 무공은 오로지 싸워서 이기고, 상대를 죽이는데 특화된 기술이다.
마법 체계가 대두되면서 무공의 위상이 많이 떨어진 건 사실이지만, 순수한 전투 기술에 있어서는 마법이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부분이 존재했다.
검을 거둔 직후, 연금술사가 그 자리에서 상반신만 벌떡 일으켰다.
"그런 게 아냐. 이건 단순히 네가 가지고 있는 무?가 나한테 이긴 게 아니라, 판단력이나 전투 감각에서 나를 눌러버린 거잖아. 천변무궁류도 전혀 쓰지 않았고."
"그건 그렇지만요."
"처음 만났을 때와 비교하면 참 많이 강해졌는 걸, 너도."
"저만큼 죽을 위기를 겪고, 그 위기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누구나 이 정도는 할 수 있을 걸요."
"그 전제 자체가 글러먹었잖아. 그런 고생을 하고도 이제까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네가 범상찮은 인간이라는 뜻이니까."
내 체질인건지, 그게 아니면 더럽게 운이 나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유독 이 세계에서 수많은 사건사고에 휘말리는 경향이 있었다.
원래부터 이 세계가 쓰레기라서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래서 죽을 고생도 참 많이 했다.
이세계 인생 스타트부터 노에 검투사로 시작했으니까.
"뭔데요, 뭔데요. 저한테도 들려주세요!"
옆에서 듣고 있던 백신아가 갑자기 이야기에 끼어 들었다.
"별 내용도 없어. 그냥 내가 고생한 얘기 뿐인데."
"그래도요. 그래도. 검주는 은근히 옛날 얘기 잘 안 하시잖아요."
"중요한 건 지금이니까."
그럴 수밖에 없잖아. 평생 개고생만 해온 인생인데, 그런 거 얘기해봐야 동정하는 소리밖에 듣고 말겠지.
괜히 그런 소리를 해서 분위기를 가라앉히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신현이 너도 참 대단한걸. 아무것도 없는 이런 공간에서 하루에 열 시간이 넘게 수행하면, 다른 것보다도 정신이 많이 힘들 거 같아."
"이것도 조금 전의 대답하고 같아요. 힘든 것 이상으로 재미있으니까, 이러고 있는 거죠."
연금술사에겐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영역일지도 모르겠다.
"신현이 넌 그렇구나. 난, 이상한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이상한 생각이요? 뭔데요?"
안 그래도 괴짜인 연금술사의 입에서 스스로 이상하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면 보통 일은 아닐 텐데.
이 질문을 던진 시점에서 뭔가 실수를 저질렀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한 번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상 연금술사는 그 어떤 미친 소리라도 별다른 부끄럼 없이 내뱉을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는 내심 그녀의 입에서 이번에는 또 무슨 미친 소리가 나올지 내심 긴장하고 있었다.
연금술사는 늘 그렇듯 표정 변화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여기에선 야한 짓을 해도 뒷정리를 할 필요가 없겠구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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