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이자는 검성의 길을 걷는 것 같습니다-66화 (66/287)

〈 66화 〉 8. 나와 검주의 어사일럼(Asylum) (15)

* * *

"후……, 우……."

병실 바닥을 엄지 손가락 두 개로 짚고 다리를 공중에 띄운다. 힘은 그다지 안 드는데 균형 잡는 게 어렵네, 이거.

다른 모험가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겠지만, 나 같은 경우 특히 신체 능력 자체가 밑천이기 때문에 하루라도 훈련을 거를 수가 없다.

요 며칠 간 스페트로와의 전투로 얻은 후유증으로 혼수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빼먹은 분량 만큼 수련치를 다시 채워둬야 한다. 이게 안 그런 거 같으면서도 은근히 차이가 크다. 특히, 마력으로 신체 강화에 들어가다보면 차이점을 크게 느낄 수 있다.

수 킬로미터 단위의 저격에서는 불과 1cm의 조준 실수가 수십 미터 이상의 오차를 빗어내는 경우가 있다.

가까이서 보았을 때는 사소한 차이에 불과하지만, 다루는 힘의 숫자가 커지면 커질수록 사소한 차이는 어마어마한 오차가 되어 돌아온다.

특히 나는 기본적인 신체 강화 기술 뿐만 아니라, 혜성 같은 초고배율의 신체 강화 기술도 가지고 있는 만큼 이 차이를 더 크게 느낄 수 있다.

병실 안에서 할 수 있는 수준의 선에서 트레이닝을 반복한 후, 마지막으로 하는 것이 지금의 자세다. 처음에는 엄지 손가락 두 개로 버티다가, 중간부터는 왼손을 떼고 오른손 엄지 손가락 하나로만 몸을 지탱한다.

마찬가지로 힘은 크게 안 드는데 균형 잡는 게 어렵다. 꽤 오랜 시간 지속한 후 천천히 자세를 원래대로 되돌린다. "후" 하고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구겨진 환자복을 쭉 당겨서 편다.

그때, 병실의 미닫이 문에서 똑똑 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의사가 찾아올 시간은 아닌데.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잠궈두었던 문을 열었다.

제2위의 특급 모험가, 마그누스가 팔에 수액을 꽂은 채 문앞에 서 있었다.

"훈련 중이었나? 내가 방해했나보군."

"아뇨. 지금 막 끝났습니다."

정확히는 잠시 쉬다가 다음 세트에 들어갈 생각이지만 뭐, 대화를 나눌 여유는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가 찾아온 것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다.

내가 쓰는 환자 침대에는 연금술사가 걸터 앉아 있었다. 그녀는 마그누스의 얼굴을 본 순간 표정을 찡그렸다.

"이 애한테 무슨 용건이야?"

"……아, 별 건 아니고. 이번 사건의 경과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좀 알려주고 싶어서. 따지고 보면 이쪽도 관계자이지 않나."

마그누스는 연금술사의 말을 스리슬쩍 흘려보낸 후 나를 병원의 카페 테라스로 안내했다.

연금술사가 나의 등 뒤에서 쫄래쫄래 따라오고 있었지만, 따지고 보면 그녀도 이 건의 관계자이기 때문에 마그누스도 크게 개의치 않는 표정이다.

사람이 없는 시간대이기 때문인지 카페 테라스는 꽤 한적한 편이었다. 하지만 마그누스는 보안을 철저하게 하기 위해서 카페 테라스의 1/3 정도쯤 되는 범위에 보디가드를 따로 세워둔 상태였다.

"……보디가드? 대장 정도의 실력에 보디가드가 필요하긴 합니까?"

"의외로 필요하다. 내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홀몸으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마그누스는 쓸데없는 허세나 오만함 따위가 전혀 없는 성격이었다.

그저 순수하게 무도의 길을 올곧게 추구하는 구도자라고 해야 할까. 성격 파탄자로 가득한 특급 모험가 중에서 몇 안 되는 정상인이기도 하고.

보디가드로 벽을 세워둔 안쪽으로 들어간다. 그 안에서는 먼저 도착한 루이스가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나와 연금술사를 보더니 오른손을 살랑살랑 흔들면서 인사한다.

둥근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네 명이서 앉는다. 마그누스는 카페에서 나온 시큼한 음료수를 홀짝 홀짝 마셔대면서 앓는 소리를 냈다.

"이번에는 진짜, 다들 고생 많았다. 나도 깜짝 놀랐어. 설마 내가 제1위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패배를 경험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현존하는 특급 모험가 중에서도 최강의 일각으로 꼽히던 그에게 있어서도 이번 싸움의 결과는 충격적으로 다가온 것 같다.

혼자서 싸운 것도 아니고, 스텔라와 함께 쳐들어갔는데도 그 꼴이 났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그 두 사람이 함께 덤비면 설령 제1위라고 하더라도 쓰러트릴 수 있었을 텐데, 둘이서 나란히 세트로 박살나고 말았으니까.

"대충 상황을 보면 알겠지만, 이번 사건은 도저히 숨길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커져 버렸다. 몇 가지 사실을 제외하면 거의 사실대로 공표할 생각이야. 이걸 묻으려고 하면 나는 그렇다 쳐도 스텔라를 비롯한 이 사건에서 얻어터진 다른 특급 모험가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마그누스도 그들 모두의 반발을 억누르지는 못하는 것 같다. 실력은 그렇다 치더라도 특급 모험가들은 모두 가문이나 인맥도 한 가닥씩 하는 인간들이다. 그러한 점에서 문제가 있겠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가문이나 인맥 따위의 도움 없이 순수하게 자신의 실력만으로 특급의 자리에 오른 사람은 거의 없다.

노력이나 재능만으로는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벽이라는 게 있다.

백신아를 얻기 전까지의 내가 연신 삽을 푸고 있었던 것처럼.

"당연히, 란즈 가주가 난데없이 폭주를 거듭한 이유도 사실대로 설명할 생각이고. 그, 기생 술식이라고 했던가? 루이스에게 대충 듣기는 들었는데."

"패러미터를 조사한 자료는 이쪽에 있어. 아니, 지금도 가지고 있지. 언제 또 필요할지 모르니까."

연금술사는 어깨에 매고 다니는 가방에서 두툼한 서류 뭉치를 꺼냈다. 학회에도 자주 다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녀의 자료는 알아보기도 상당히 쉬운 편이다.

어느 정도 전문 지식이 요구되긴 하지만 전공자나 충분한 소양이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읽어내릴 수 있을 정도다.

"원본은 내가 따로 가지고 있으니까, 그 자료를 따로 만질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음, 명심해두지."

마그누스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자료를 확보한 후, 몇 가지 상황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현이 네 처우에 대해서 몇 가지 합의하고 싶은 부분이 있는데……"

내 이름이 나온 순간 나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서 앉게 된다.

일단 들어봐야 알겠지만, 대충 무슨 얘기가 나올지는 짐작이 간다.

"자세한 건 좀 더 따져 봐야 알겠지만, 나와 스텔라가 이번 건을 공표하고 나면 란주 가주의 몸을 차지하던 '그 존재'에게는 특급 재해 판정이 붙게 될 거다. 일단 이 세상에서 쫓아내긴 했지만, 후일 누군가가 흑주대천신공을 쓰면 다시 나타날 수도 있는 거 아니냐."

"그렇겠죠. 비급은 모두 불태웠고, 샤를로트의 몸에 남아있던 검은 투기도 모두 사라졌지만, 힘을 추구하는 사람의 욕망에는 끝이 없으니까요."

두 번 다시 부활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처치를 해두긴 했지만, 그래도 모르는 거다.

스페트로의 피로 이어질 광증에 대한 불안요소도 있고.

물론 그걸 가만히 놔둘 생각은 요만큼도 없지만.

"그리고 그 경우, 잘 하면 네게 특급 모험가 자격이 붙을 수도 있겠지."

"……."

갑작스런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사실 당연한 말이다.

특급 모험가에 오를 수 있는 조건은 특급 재해 판정을 받은 존재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는 것인데, 스페트로 가문의 별장에는 나의 마력이 남긴 흔적이 아직 살아 있을 테니까.

요컨데 잘만 하면 특급 위치에 오를 수도 있다는 건데…….

"아뇨, 그 부분은 공표하지 말아주세요. 아직 제가 가지고 있는 실력으로 감당하긴 어려운 자리니까요."

"그런가? 난 네 정도면 충분히 자격이 있다고 보는데."

"아직 멀었어요."

물론, 백신아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힘과 실력을 동원하면 특급 모험가 최하위권 정도는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

특급 모험가 자리에 올라선 순간 쏟아질 수많은 관심과 온갖 위기에 대처하기에는 조금 부족한 수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건 그렇다 쳐도 전투 지속 능력이 문제다. 그것만 아니었다면 생각이 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꼭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머지 않은 시일 내에 올라설 수 있을 테니까요."

"……자신만만한걸. 하긴, 그러고도 남을 정도의 전투 능력이긴 했다만."

마그누스의 시선이 한 순간 내 허리에 걸린 검으로 향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크게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의식하는 듯한 행동이었다.

내 심기를 거스리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일까.

"알았다. 그리고 다른 특급 모험가가 네게 접근하는 것도 일단 내 영향력으로 막아두지. 일반인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비무 때 있었던 사건으로 네게 관심을 가진 특급 모험가들도 많이 있으니까."

그럴 거라고 예측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지금의 나는 현존하는 최강의 특급 모험가에게 버금가는 전투 능력을 가진 실력자로 보일 테니까.

여기는 병원이라서 크게 문제가 없지만, 퇴원하고 집에 돌아가면 감시 따위가 붙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네 뒷정보를 캐려던 녀석들도 있었는데, 일단 그쪽도 정리는 해 뒀다. 네가 크게 신경 쓸 일은 없을 거야."

"솜씨 좋으시네요."

"그렇지, 일단 너희들이 그때 오지 않았으면 나도 죽었을지 모르는 일이니까."

요컨데 지금의 호의는 생명을 구해준 보답이라는 것일까.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나는 물론 알고 있다.

"……그게 다는 아니죠? 이 참에 신현이한테 점수를 좀 따서,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하시려는 게 목적 아닌가요?"

옆에 앉은 루이스가 내 뺨을 집게 손가락으로 잡아당기며 질문했다. 그렇다. 나도 지금 딱, 루이스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이런 일에 잔뼈가 굵은 마그누스는 그런 말에 일일이 반응하지 않는다. 그는 음료수를 또 다시 홀짝인 후 고개를 끄덕이며 힘 있게 말했다.

"그래, 그것도 맞지. 네가 싸우는 걸 봤는데 솔직히 눈독을 들이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지 않나."

마그누스의 얼굴이 옅은 조소를 품었다.

"너를 협박하거나, 약점을 잡아서 어떻게 해보려는 녀석들은 죄다 바보 같은 놈들이다. 넌 그런 식으로 조종할 수 있는 녀석이 아니야."

"하지만 그런 식으로 나오는 것도 이해는 됩니다. 지금까지 그 사람들이 만나왔던 이들은 모두 '그런 방법'으로 누를 수 있는 상대들이었을 테니까."

고개를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나도 힘에 의한 지배가 꼭 나쁜 방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일단 빠르고 편하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장점을 먹고 들어가는 부분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힘으로 누르는 것만이 방법은 아니다. 때와 경우에 따라서 그런 방법이 통하지 않는 상대도 있다.

아무리 누르고, 두들겨패도 절대로 꺾이지 않는 사람이.

"높은 자리에 오르다보니까 다들 오만해진 거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과 권력이면 못할 짓이 없을 거라고 착각하고 있는 거다. 너 같은 사람은 힘으로 누르는 게 아니라 친분을 쌓아서 거래 관계를 구축하는 게 효과적인데."

훈련생 시절에 나를 좀 가르친 가닥이 있기 때문인지, 마그누스는 제법 나의 성격을 잘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았다.

힘이나 권력 따위로 누르려고 들면 나는 오히려 강하게 반발한다. 하지만 나라고 언제나 미친 개처럼 사람을 무는 건 아니다.

상대방이 어느 정도 말이 통하는 인간이고, 거래에 알맞는 보수를 지급해줄 수만 있다면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열과 성을 다해서 그 일을 해내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다.

현재 마그누스가 하고 있는 건 바로 그것이었다. 내게 어느 정도 '빚'을 지워두면서 스스로가 말이 통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어필하고, 내게 허튼 짓을 하지 않겠다는 사인을 온몸으로 발산하고 있다.

마그누스가 먼저 이렇게 나오면 나도 그에게 굳이 덤벼들 이유가 없다.

말이 잘 통하는 거래 상대라고 생각할 뿐.

물론 마그누스가 신경 쓰고 있는 건 나 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루이스의 노려보는 시선과 눈을 맞추며 밝은 표정으로 너스레를 떨었다.

"루이스 너도 그렇게 쳐다볼 필요 없다. 어차피 네게서 신현이를 빼가는 게 불가능한 일이라는 건 나도 잘 알아. 하지만, 거래 상대 정도로 함께 하는 건 괜찮지 않겠냐."

"그거야, 그렇죠."

루이스는 툴툴거리면서도 그의 말에 어느 정도 납득한 얼굴이다. 내가 그런 것처럼, 이 녀석도 마찬가지다.

상대방 쪽에서 건수를 주지 않으면 절대로 먼저 물지 않는다.

"……아, 뭔가 편하구만.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은."

그러던 중 마그누스가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했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조금 진심이 담겨 있는 듯한 말투였다.

"무슨 소리죠?"

"아니, 그 말 그대로다. 너희들도 사회 생활을 해봤으니까 알겠지만, 세상에는 진짜 별의별 이상한 인간들이 많거든. 아무리 논리적으로 얘기를 해도 안 들어먹는 사람이 너무 많아."

아, 그건 나도 공감할 수 있을 거 같다.

나도 지금까지 그런 인간을 잔뜩 마주쳐왔으니까.

대화로 풀면 되는 걸 굳이 폭력으로 덤벼들다가 나한테 역으로 얻어터지고 나가떨어진 인간들.

아트룸 교수나, 보이드 같은 놈들 말이다.

"그런데 너희들은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하면 잘 알아듣는 데다가, 행동거지도 똑바르잖냐. 나는 그게 참 보기 좋은 거야. 아직 젊은 애들인데도 똘똘하니까 보기도 좋고."

똘똘……, 누가 나이 든 사람 아니랄까봐 표현 하고는.

저거 거의 10년만에 들어보는 거 같은데.

"너희 같은 애들이 힘에 취하지 않고, 똑바로 살아가는 게 우리에게 있어선 큰 행운이지. 특히 신현이 너."

또 다시 내 이름이 나왔다. 난 갸웃하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네가 어디에서 어떤 경위로 그런 힘을 손에 넣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가지고 있는 힘은 현존하는 그 어떤 특급 모험가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능력이다."

"……."

"네가 그 힘을 엇나간 방향으로 사용한다면, 이 세상은 진짜 끝장나겠지."

마그누스가 조금 진지한 시선으로 나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그 힘을 손에 넣은 경위를 묻지 않는 것은 내 심기를 함부로 건드리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힘의 근원이 이 검에 있다는 걸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그 증거다.

"그야말로…… 신도 악마도 될 수 있는 힘이라고 할까."

* * *

마그누스와 대략적으로 이야기를 마친 후,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카페 테라스를 나서려던 바로 그 순간 나는 이 병원에 입원해 있던 또 다른 한 사람의 특급 모험가와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

피차 허울 없이 대하는 사이는 아니라서 대충 인사만 하고 지나치려는데, 바로 그때 스텔라가 우리를 돌아보며 등뒤에서 말을 걸었다.

"오랜만입니다. 아이샤."

그건 나를 향한 말이 아니었다.

"……."

옆에서 걷고 있던 연금술사의 발걸음이 한 순간 멈췄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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