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 8. 나와 검주의 어사일럼(Asylum) (12)
* * *
"왜 나한테 샤를로트를?"
고개를 갸웃했다. 용건은 들었는데, 아직 설명이 좀 필요할 거 같았다.
올리비아도 추가로 설명할 필요성을 느꼈는지 고개를 살짝 끄덕인 후, 자세한 이야기를 덧붙이기 시작했다.
"루이스 님이 말한 것처럼, 진짜 최악까진 아니더라도 이번 사건으로 우리 가문이 크게 위기에 몰려 있는 건 사실이다. 수많은 특급 모험가가 휘말린 사건이니까."
올리비아의 표정이 조금 어둡다.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나와 루이스의 싸움은 스페트로를 쓰러트린 것으로 끝을 맺었지만, 올리비아의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아마 이 틈을 타서 평소에 우리 가문에 앙심을 품고 있는 이들이나, 기업 비밀 따위를 훔치기 위해서 노리는 적들이 마구 튀어나올 가능성이 높아. 그리고 이때, 표적으로 주로 노려지는 대상은 샤를로트 아가씨가 되겠지."
그 말에는 나와 루이스도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어른들 싸움에 어린애가 휘말리는 건 질색이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샤를로트가 노려질 가능성은 충분했다.
나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스페트로 가문을 노린다고 친다면 나 또한 샤를로트를 노려서 빈틈을 파고들 것이다.
모든 윤리나 도덕을 무시하고, 목적을 이루는 데 집중한다면 말이다.
"아가씨는 무예에 있어서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계시지만, 아직 나이도 어린 데다가 이런 쪽의 경험이 거의 없기 때문에 휘말릴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 그러니까…… 나보다 강한 네가, 아가씨를 좀 맡아줬으면 좋겠다."
"내가?"
"그래, 나보다 강한 네가."
올리비아는 마치 강조하듯 정확히 같은 말을 반복했다.
"물론 네게 아가씨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맡기겠다는 소리는 아니다. 그래서도 안 되고. 근처에 내가 아는 수녀원이 있는데, 아가씨의 신변은 그쪽에 부탁할 생각이야."
근처에 있는 수녀원이라.
이 도시에 있는 수녀원이라면 아마 내가 아는 곳 같은데, 내가 지금 떠올리고 있는 거기가 맞겠지?
아직 이야기도 다 듣지 않았는데, 수녀복 차림의 샤를로트가 벌써부터 눈에 선하다.
"다만, 신현이 네가 주기적으로 아가씨를 찾아가면서 상태를 좀 봐주거나, 무술을 좀 지도해줬으면 좋겠다. 그곳의 원장도 소싯적에 좀 날렸던 실력자이긴 하지만 너와 비교하면 좀 쳐지는 수준이니까."
결국 얼마 전까지 샤를로트를 상대로 과외하던 것과 큰 차이는 없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보수는 네가 아가씨를 상대로 과외하던 그때와 비슷하게 측정했다. 확인해보겠나?"
"어, 줘봐."
올리비아가 미리 작성해서 가져온 용지에는 란즈 가주의 서명이 필기체로 쓰여 있었다. 결제 통과도 거의 다 된 모양이다.
애보기 아르바이트치고는 꽤 나쁘지 않은 보수인데.
서류의 내용이 신경 쓰였는지, 루이스가 스리슬쩍 내쪽으로 돌아와서 함께 내용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눈으로 내용을 쭉 훑던 루이스가 팔꿈치로 나를 가볍게 찌르며 말했다.
"보수는 꽤 후한 편인데?"
"그렇지. 괜찮아 보이는데."
꼭 이게 아니더라도 원래부터 샤를로트는 좀 챙겨주고 싶었고.
거기다가 돈까지 얹어준다고 하면 내쪽도 만만세다.
"그런가. 그럼 나중에 정식으로 계약서를 가져와서 사인을 하지. 그쪽이 피차 안심할 수 있고 좋지 않을까?"
"뭐, 그게 좋겠다."
대충 합의를 한 후, 올리비아가 내민 손을 마주잡았다.
"급한 일은 마무리했으니 난 먼저 나가 보겠다. 이번 사건의 배상 문제로 제 2위의 특급 모험가와 조율 중이거든."
"잘 풀렸으면 좋겠다. 이건 진심이야."
"설령 가산이 모두 바닥난다고 해도 이번 사태를 완전히 정리할 수만 있다면 큰 문제는 벌어지지 않을 거다."
올리비아가 주먹을 꾹 쥐어 보이며 덧붙였다.
"애초에, 무인의 가치는 돈이 아니라 이 주먹에 있는 거잖나. 이 주먹만 살아 있다면 우리 가문은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 * *
올리비아가 무슨 선전포고 같은 말을 남긴 직후 샤를로트가 의사 선생님을 데리고 왔다.
그럭저럭 커다란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이라 실력은 있었지만, 나로써는 연금술사의 실력이 조금 그립다.
의사가 최대한 몸에 부담을 주지 않고 치유 술식을 부여한다고 치면, 연금술사는 몸에 들어갈 부하 따위는 완전히 무시하고 무식하게 시술을 해버리니까.
하지만 내 체질에는 아무래도 의사보다는 연금술사의 솜씨가 더 잘 맞는다. 그래서 조금 아쉽다. 차라리 나중에 연금술사한테 몰래 치료를 부탁해볼까.
올리비아와 샤를로트가 병실을 나간 후, 오른팔과 어깨에 걸쳐 크게 깁스를 한 루이스가 내 침대에 털썩 앉았다.
"뭐야 너, 저 사람하고 언제부터 친구 먹었어?"
"음, 며칠 전부터?"
솔직하게 대답했더니, 루이스가 치 하고 소리를 냈다.
"보면 저 사람, 약한 주제에 은근히 수완은 있는 거 같아. 최악의 상황에서도 너하고 나와 너하고 인맥을 튼 데다가, 샤를로트를 미끼로 계속 인연을 유지하게 만들었잖아."
"괜히 저 나이에 스페트로 가문 같은 거대 조직의 2인자로 올라간 게 아닐 테니까."
단순히 힘이 있다고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싸움 실력은 물론이고 판단력이나 지식을 비롯한 종합적인 능력이 균형 있게 발달한 사람만이 올라설 수 있는 위치다.
올리비아는 나보다 겨우 두 살이 많을 뿐이다. 스물여섯이라는 나이에 저 정도의 능력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보통 노력으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다지 마음에는 안 들어. 자꾸 내가 침 바른 놈 빼가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것도 그렇고."
루이스가 나를 흘겨보면서 중얼거린다.
여기에서 말하는 '침 바른 놈'은 내 얘긴가.
능력이 있다는 게 꼭 상대에게 호감을 살 수 있는 건 아니다. 특히, 루이스는 내가 다른 세력에 넘어가는 걸 경계하고 있으니까.
요 며칠 들어서 나와 꽤 가까워진 올리비아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나로써는 그렇게 내가 믿음이 없나 싶은 심정이지만.
"……뭐, 됐어. 그것보다도…… 기분은 어때? 이전 세대의 특급 모험가 중에서도 최강으로 꼽혔던 남자를 쓰러트린 기분은?"
루이스가 씨익 웃으며 내게 질문해왔다.
기분, 기분이라……
난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뭐, 끝내주지. 나 혼자서 이긴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긴 건 이긴 거잖아."
보이드 때하고 다르게 이번에는 나도 꽤 열심히 싸웠으니까. 뿌듯하게 생각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치? 나도 기분은 좋더라구. 어찌됐든, 우리보다 아득히 윗줄에 있는 적을 상대로 이긴 거니까."
옆모습만 보인 루이스가 킬킬대며 웃었다. 그러다가 팔이 아픈지 윽, 하고 칼에 찔린 사람처럼 몸을 굽히면서 신음한다.
"그리고 내가 끝이라고 생각했던 영역이, 겨우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도 알았고."
루이스의 시선이 병실 벽에 비스듬히 세워진 검에 고정되었다. 검왕검, 백신아. 녀석의 싸움은 그 자리에 있는 수많은 무인들에게 강렬한 영감을 전해주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가상 공간 속의 전투가 아무리 현실에 가까워도 가상 공간은 가상 공간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나 또한 스페트로와의 전투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 정도로 많은 것을 얻은 싸움이었다.
"다들 꽤 재밌었던 모양이네. 나도 그 자리에 있을 걸 그랬나?"
둘이서 그때의 전투를 복기하며 서로의 실수나 잘못된 부분을 상의하고 있었을 때, 병실의 문이 열리면서 흰 가운 차림의 연금술사가 나타났다. 어깨에는 의사들이 가지고 다닐 법한 갈색 가죽 재질의 왕진 가방이 걸려 있다.
연금술사와 눈이 마주친 그때, 루이스가 내 옆구리를 팔꿈치로 살짝 후비면서 소근거렸다.
"……네가 깨어날 때까지 3일 내내 옆을 지키고 계셨어. 그러다가 짐 좀 챙기고 오겠다며 잠시 자리를 비우신 사이에 네가 일어난 거야."
"루이스, 다 들려."
"아."
소리를 줄인다고 줄인 모양이지만, 잘 안된 것 같다. 루이스가 무안한 표정으로 물러선다.
"고마워요."
"감사를 받을 만한 일도 아냐. 애초에 멀쩡한 사람은 나와 그 여자애 뿐이었는걸. 내가 옆을 지키는 게 당연한 거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 연금술사는 왕진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은 후, 내쪽으로 다가와서 손바닥으로 체온을 측정했다.
"미열이 있네. 치료 술식의 시술 때문에 대사가 활발해져서 그런 걸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요."
꼭 연금술사가 아니더라도 술식에 의한 치료는 상당히 대중적인 치료법이다. 그 중에서 특히 연금술사가 시술하는 술식이 효과도 높고, 몸에 걸리는 부담도 높은 것뿐.
대부분의 경우에는 치료에 오랜 시간을 요구하더라도 부작용이 크게 없는 수준으로 술식의 효과를 낮춰서 시술하는 게 기본이다. 의료 사고가 발생했을 때 누가 대신 책임져 주는 게 아니니까.
다만 내가 가지고 있는 체력이나 약물에 의한 내성이 상당히 높은 편이기 때문에 연금술사의 술식과 궁합이 좋은 것뿐.
의사가 이미 한바탕 내 몸 상태를 체크해갔지만, 연금술사는 스스로의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지 내쪽으로 다가와서 자신의 방식으로 내 몸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연금술사의 손이 스치는 거 때문에 느낌이 간질간질하다.
이미 여러 번 몸을 섞은 관계이기 때문일까, 예전이라면 전혀 신경도 쓰지 않을 부분에서도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리게 된다.
"……."
연금술사는 전혀 관심도 없는 시선이었지만, 옆에서 보고 있는 루이스의 눈에는 그게 이상하게 보였는지 시선이 조금 차갑다.
……아, 맞다. 나중에 연금술사 만나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는데.
"근데 있잖아요, 선생님."
연금술사가 고저가 드러나지 않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왜?"
"제가 스페트로하고 싸울 때, 이상한 현상을 본 적이 있었는데요."
"이상한 현상?"
그 말에 오히려 루이스가 눈을 깜박였다. 자기가 보기에는 별다른 특이점이 없는 것 같았는데,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고 싶어하는 얼굴이다.
"전투 중에, 갑자기 스페트로의 팔이 축 늘어져서 움직이지 않은 순간이 있었어요. 저는 물론이고 스페트로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는지 많이 당황하는 눈치였고요."
내가 루이스에게 초신성을 토스한 후, 내 몸으로 창을 받아서 붙잡고 있었을 때 벌어진 현상이었다.
나는 그때, 내게서 창을 뽑아내려던 스페트로를 견제하기 위해서 올리비아에게 전달 받았던 구속 술식을 발동시키려고 했다.
효과가 없을 거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 술식을 외는 것만으로도 스페트로를 방심시킬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트리거를 입으로 외우기 직전에, 갑자기 스페트로의 팔이 축 늘어지면서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독에 중독이라도 된 것처럼.
그리고 그때, 누구보다도 스페트로의 지근거리에 서 있던 나는 그의 마력으로부터 또 다른 사람의 기척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잘 알고 있는 소녀, 샤를로트의 마력을.
그때는 워낙 급한 상황이라 깊이 생각하지 않고 넘어갔지만 이것은 사실 이상한 일이다.
마력으로 보아하니 샤를로트가 스페트로의 몸에 간섭을 한 건 틀림없다. 하지만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샤를로트의 침식도는 58%. 겨우 그 정도로 스페트로의 몸에 간섭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으니까.
여기까지, 내가 겪었던 일에 대해서 설명한 후 나는 연금술사에게 대답을 부탁했다.
혹시 그쪽에서 무슨 수를 쓴 건 아니냐고.
"……내가 만약, '그렇다'라고 대답하면 어떡할 거야? 날 책망할거야?"
"그런 건 아니……"
하지만 그때, 내 대답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갑자기 얼굴을 가까이 밀어붙인 연금술사가 순식간에 내 입술을 빼앗은 뒤, 그대로 사정 없이 혀를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읍─?! 잠깐만, 뭣하는 짓이야?!
아무리 내가 연금술사보다 강하다고 해도 지금의 나는 환자였다. 쉬이 떼어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우와……"
루이스에게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는지, 얼굴을 붉힌 채 꼼짝도 못하고 지켜보고 있다.
혀가 한참 동안 내 입속을 구석구석 훑은 뒤, 연금술사의 얼굴이 멀어진다. 그녀와 내 입술 사이에 새하얀 침으로 이어진 다리가 나타난다.
……뇌수가 녹아내리는 줄 알았다. 도대체 뭐야 이거.
"푸하……, 루이스."
"아, 네, 넷?"
연금술사의 시선이 획 움직였을 때 루이스가 흠칫했다. 이쪽도 조금 쫄아든 모양이다.
특급 모험가를 말 한 마디로 쫄게 만든 연금술사는 어쩌면 내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인물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흐릿한 동공 앞에서 루이스는 쩍 굳어 있었다.
"잠시……, 자리를 비켜줄 수 있을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