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이자는 검성의 길을 걷는 것 같습니다-62화 (62/287)

〈 62화 〉 8. 나와 검주의 어사일럼(Asylum) (11)

* * *

스페트로와의 결전 전야에 있었던 일이다.

지금까지 없었던 최대의 강적과의 결전을 앞에 두고, 나는 상당히 긴장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강한 척을 하고 있었지만 솔직히 겁이 안 나면 그게 이상하다. 상대는 마그누스나 스텔라도 쓰러트린 진짜배기 괴물이었으니까.

늦은 밤인데도 잠이 오지 않아서 뒤척이고 있었는데, 머리맡의 창문을 누군가가 두드렸다. 올리비아였다.

"늦은 밤에 도대체 뭣하는 짓이야? 갑자기 사람을 부르고."

공방 바로 근처에 있는 넓은 공터. 깜박거리는 전등 아래에서 올리비아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근처에는 연금술사가 창고 대용으로 쓰는 빈집이 꽤 있다. 올리비아와 샤를로트는 그 중 하나를 쓰고 있었다.

늦은 밤에 샤를로트를 혼자 놓아두고 이렇게 외출하는 건 올리비아의 성격 상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 정도로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나를 호출한 걸까.

어쩌면 다급한 전투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싶어 허리에 검을 차고 나온 나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아, 미안하다. 오래 끌진 않을 테니, 잠시만 내 이야기를 들어다오."

"……주변에 별다른 인기척은 없군. 뭐야, 하고 싶은 이야기라도 있냐?"

하지만 주위를 경계한 결과 별다른 문제점은 발견되지 않았고, 올리비아도 그런 용무로 나를 부른 게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뭘까.

내가 내심 긴장하고 있었을 때, 올리비아는 이상한 말을 입에 담았다.

"어쩌면 내일이 내 인생 최후의 싸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 전에 네게 모든 진실을 말해주고 싶다."

"진실……?"

그건 또 뭐야, 금시초문인데.

여전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대는 나를 향해, 올리비아는 내가 그다지 알고 싶지 않은 진실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나를 스페트로 가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벌여왔던 온갖 사건들에 대해서.

제피로스 정신 병원에서 보이드의 존재를 알게 된 후, 그들은 검왕검의 주인이 루이스라고 잘못 착각했었던 것 같다.

나를 과외 선생 명목으로 끌어들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들의 눈에 나는 루이스의 약점이었고, 유사시에 루이스를 이용하거나 협박하기 위해서 나를 이 판에 끌어들였던 거다.

하지만 내가 생각보다 너무 강했던 탓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상황이었다고 올리비아는 설명했다.

그들이 그런 수까지 써서 검왕검을 손에 넣으려고 했던 이유는 간단했다.

란즈 가주는 겉으로는 정신 병원에 갇혀 있던 '그 존재'에게 굽히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언제나 그를 뛰어 넘어서고 싶어했다.

그는 란즈 가주를 포함한 스페트로 가문의 최강자였지만, 동시에 그의 양부를 해친 장본인이기도 했으니까.

뽑아먹을 수 있는 건 죄다 뽑아먹은 후, 그를 쓰러트리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모양이다.

……뭐, 스페트로 가문에 구린 구석이 있다는 건 예전부터 예측하고 있었다. 처음 들었을 때는 놀랐지만, 사실 그렇게 충격적인 일도 아니었다.

샤를로트야 그렇다 쳐도, 올리비아와 란즈 가주는 상당히 수상했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굳이 내게 할 필요가 없는 말이다. 이미 나는 샤를로트를 통해 내가 스페트로와 맞서 싸워야 하는 이유를 찾아낸 상태였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굳이 내게 진실을 이야기해서 원망을 살 필요가 없다. 평생 모른 척 입을 닫고 살아갔어도 별 문제 없었을 텐데, 굳이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을 꺼내는 그 저의가 의심스러웠다.

나의 질문에 올리비아는 고개를 살짝 돌린 후, 검지 손가락으로 뺨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나는…… 이번 일이 잘 해결된 후에도 너와 쭉 좋은 관계로 있고 싶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네게 모든 진실을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렇지 않으면, 네 앞에서 떳떳하게 얼굴을 들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쓸데없는 행위를 벌인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고 올리비아는 대답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과연 그게 전부일까.

나는 올리비아를 바라보며 살짝 이죽거리며 질문했다.

"글쎄다. 지금까지 꽁꽁 숨겨두고 있다가, 굳이 이런 타이밍에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아무래도 수상한데. 사실은, 내가 그 말을 들어도 널 내치지 않을 인간이라는 걸 확인했기 때문에 하는 말 아냐?"

반 정도는 농담이었다.

물론 그런 생각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란즈 가주가 내게 무리한 손속을 두지 않고 얌전히 있었던 건 올리비아가 브레이크를 잡아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난 당연히, 올리비아가 늘 그렇듯 당황하면서 그 말을 부정할 줄 알았다.

"……그럴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 그런 게 맞을 거다."

이런 식으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 가능성은, 10% 이하라고 생각했었는데.

"물론 나는 네가 지적하기 전까지 그런 가능성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어. 하지만, 하필이면 이 중요한 국면에 네게 그런 말을 건넨 나의 심리의 깊은 곳에는…… 그런 너의 성격을 이용하려고 한 음습한 욕망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올리비아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은 후, 고개를 깊이 숙였다.

"지금의 내가 그 어떤 말을 해도 내 진심이 네게 전해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까, 앞으로 내 평생에 걸쳐 너와 너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벌어진 이 사건에 대한 보상을 갚아 나갈 생각이다. 용서 받을 수 있는 그 순간까지."

아주 깊이, 머리를 숙인 후 올리비아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또 하나, 네게 말해주고 싶은 것이 있다. 사실, 사과보다는 이쪽이 본론이야."

올리비아가 주머니에서 수첩을 하나 꺼내서 네게 건넸다. 아주 낡고 헤진, 오래된 수첩이다. 겉으로 보았을 때, 연도는 대략 20년 전의 것일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내일 우리가 싸우게 될 '그 존재'가 쓰고 있는 것은 란즈 가주님의 몸이다. 그렇다면 한 순간 그 존재의 움직임을 방해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

란즈 가주는 스페트로의 진짜 정체를 끝까지 알지 못했다. 올리비아와 샤를로트가 광증의 정체가 빙의술이라는 것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그의 몸이 스페트로에게 넘어간 이후였다.

"란즈 가주님은 본인이 광증에 잠식되었을 때를 대비해서 스스로의 몸에 코어를 일시적으로 정지 시키는 구속 술식을 심어 두셨다. 물론 그 존재가 구속 술식을 이미 해제했을 가능성도 존재하지만…… 운이 좋다면 쓸 수 있을지도 몰라."

그 말을 듣고,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20여년 전 그 존재가 란즈 가주의 전대인 템페스트 가주의 몸을 차지하고, 온갖 특급 모험가들에게 토벌 당했던 당시의 전투 기록이다.

그때, 최후의 공방에서 템페스트는 스스로 광증에서 해방되어 코어를 정지시켰다고 알려져 있다.

어쩌면 그때도 이것과 같은 술식이 사용되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네 말이 맞다면, 마지막 순간까지는 함부로 의존하지 않고 아껴두는 게 좋을 거 같아. 지금의 스페트로가 이 술식을 해석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으니까."

"그렇겠지, 20여년 전 그를 패배로 몰아넣은 술식과 완전히 동일한 것이니."

잘 해봐야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 동안 경직을 거는 게 한계가 아닐까 싶다.

아무리 1초를 무수히 쪼갠 시간 속에서 벌어지는 게 초고수들의 전투라지만 솔직히 효과를 볼 가능성은 애매하다.

하지만 효과가 있든 없든, 일단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이 하나 늘어난 것만으로도 소득은 있다.

"……내일 벌어질 결전에서, 나는 아마 그다지 필요 없는 존재가 되지 않을까 싶다. 루이스 님조차 끼어들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한 전장에서 나 따위가 할 수 있는 일은 끽해야 길을 안내하는 정도일 테니까."

스스로의 전력을 냉정하게 파악한 올리비아는 내 어깨에 오른손을 얹었다.

"네게 모든 것을 맡길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군. 친구여."

"친구……, 라. 우리가 언제부터 친구였는데?"

난 농담하듯이 살짝 웃으며 이죽거렸다. 올리비아도 농담이라는 걸 알았는지, 마주 웃으며 대답했다.

"두 남자가 뒤섞여서 뜨겁게 주먹다짐도 했고, 이렇게 가슴 속에 남아있는 비밀조차 허심탄회하게 쏟아내었지. 그렇다면 이미……, 우리는 친구가 아닌가?"

"넌 여자잖아."

"그런 건 사소한 문제다. 중요한 건, 우리 사이에 이미 우정이 생겨났다는 거지."

올리비아가 팔을 움직여서 내 목에 걸고 그대로 헤드락을 걸었다. 그 과정에서 이런 저런 부드러운 것이 닿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입에 낼 만한 타이밍이 아닌 것 같다.

"그러니까……, 함께 살아남자. 친구여."

그리고, 다시 현재.

"……."

조용히 검을 늘어트린 채 고개를 돌린다.

천변무궁류와 흑주대천신공이 교차한 바로 그 직후, 나와 스페트로의 위치가 서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스페트로가 서 있던 자리에 멈춰섰고, 스페트로는 내가 서 있던 자리에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정적이 흐른다.

당연하지만, 올리비아가 내게 전해준 란즈 가주의 구속 술식은 전혀 효과를 보지 못했다. 스페트로도 일류다. 이미 밝혀진 약점을 그대로 방치하는 얼간이는 아니었다.

스페트로는 내가 올리비아에게 전해 받은 구속 술식의 트리거를 중얼거린 순간, 나를 비웃고 있었다.

그렇게 될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체가 노림수였다. 그 순간 그의 마음 속에서 발생한 아주 사소한 여유. 매우 미세한 빈틈.

그로써 창극을 아주 조금 무뎌지게 하는 것이야말로 나의 진짜 노림수였으니까.

"……훌륭하다……."

등을 돌린 스페트로가 한탄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결국……, 최후에는 무인으로서의 마음가짐에서 승부가 갈렸나……."

호흡 소리조차 사라진 정적의 끝에서, 스페트로의 몸이 천천히 앞으로 쓰러져갔다.

* * *

눈을 감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낯선 천장이 시야에 들어오고 있었다.

내게 익숙한 연금술사의 공방은 아니다. 도시에 있는 병원인가? 거기다가 호화스럽기 그지없는 1인실. 창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기분 좋다.

"……."

침대에서 상반신만 일으킨 나는 오른손으로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렸다. 오늘 며칠이지? 몸이 전체적으로 심하게 아픈 걸 보면 꽤 오래 잠들어 있었던 것 같은데.

"아, 신현 씨."

멍하니 열린 창문을 통해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을 때, 병실의 문이 열리면서 톤 낮은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임색 머리카락을 양갈래로 묶은 샤를로트가 품에 꽃을 안고 있었다. ……음, 그런데 병실에 꽃 놔두는 거 안 좋다는 말을 예전에 어디에서 들은 거 같은데. 흙하고 뿌리가 세균의 온상이라든가.

"샤를로트, 내가 며칠 동안 자고 있었어?"

"3일……. 오늘로 3일 째야."

엄청 오래 잤구나.

어쩐지 온몸이 아프더라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양반다리로 앉은 상태에서 팔을 위로 쭉 뻗으면서 기지개를 켠다.

몸 여기저기에서 울려 퍼지는 뚜드득 소리가 심상치 않다.

3일을 내리 누워 있었다지만 사실 그 정도로 짧은 기간에 회복할 수 있는 부상은 아니었다. 아직도 내 몸 여기저기에는 거즈와 붕대가 감겨 있고, 침대의 머리맡에는 '절대 안정'이라는 글씨가 달필로 쓰여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늘어져라 하품을 한 뒤,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기면서 샤를로트를 돌아봤다.

"몸 상태는 어때?"

이 모양, 이 꼴이 되어 있는 지금의 내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샤를로트의 상태가 상당히 신경이 쓰였다.

안색도 멀쩡한 걸 보면 제대로 해결된 거 같긴 하지만, 그래도 샤를로트의 입으로 확답을 듣고 싶었다.

"아, 응, 아주 괜찮아. 침식하고 있던 '검은 투기'도 모두 사라졌고."

샤를로트는 꽃병에 꽂혀 있던 꽃을 교체한 후, 어색한 표정으로 팔을 들어서 알통을 만들었다. 물론 빼빼 마른 샤를로트가 그래봐야 시원찮기만 하다. 근육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말로 설명하기는 조금 어렵지만……, 신현 씨의 손에 '그 존재'가 쓰러지던 그 순간 내게도 신호 같은 게 왔거든. 기생충처럼 들러 붙어 있던 검은 투기가 일제히 불타서 사라지는 듯한…… 그런 느낌이."

그 말을 듣고 샤를로트의 상태를 잠시 탐색했다.

녀석이 말한 것처럼, 지금의 샤를로트에게서 검은 투기는 한줌도 남지 않고 전부 사라져 있었다.

천변무궁류가 제대로 효과를 본 모양이다.

"그럼 이제 창을 잡는 것만 피하면 광증 걱정은 없는 건가?"

"아마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

샤를로트를 침식한 검은 투기의 원흉은 쓰러졌지만, 스페트로의 핏줄에 대대로 이어진 광증 그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물론 흑주대천신공도 아직 남아있다.

이 부분은 따로 해결을 봐야 할 것이다. 샤를로트가 다시 광증에 휘둘릴 가능성은 없어졌다고 봐도 무방하지만.

"하지만 머지 않은 시일 내에, 핏줄로 이어져 내려온 광증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이번 일을 계기로 광증의 진짜 원흉에 대해서 알게 되었으니까."

샤를로트의 말에는 강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이번의 사건은 우리 모두에게 커다란 상처와 고통을 안겨 주었지만, 그것을 넘어선 끝에 얻어낸 것도 있었다.

나 또한 스페트로와의 일전을 통해 최소 반 년 이상의 수련치를 확보했다고 본다.

강적과의 사투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있다.

"아!"

"뭐야,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그래."

그 자리에서 한참 동안 서로의 상태에 대해서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샤를로트가 꺅 소리를 내질렀다. 나는 순간적으로 무슨 문제라도 벌어진 줄 알았다.

"신현 씨가 일어났으니까…… 의사 선생님 데려와야지! 의사, 의사 선생님! 금방 데려올게!"

샤를로트가 시끄러운 발소리와 함께 도도도 달려서 사라진다. 쟤 저러다가 발을 헛디뎌서 엎어지진 않을까 걱정이 드는 수준이다.

그렇게 엎어진다 쳐도 오히려 병원 복도의 바닥 타일이 깨지겠지만.

멀리 사라져가는 샤를로트의 뒷모습을 웃으면서 바라보고 있는데, 이번에는 또 다른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진다. 이번에는 둘이었다.

오른팔을 시작으로 어깨까지 깁스를 한 루이스와 그에 못지 않게 붕대를 칭칭 감은 올리비아였다.

"쟤도 참, 병원에서 저렇게 뛰면 쓰나."

"죄송합니다. 아가씨도 신현이 이 녀석이 자고 있는 동안 많이 안절부절 하셔서."

루이스가 샤를로트의 뒷모습을 보며 살짝 웃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꽤 기특하게 보는 모양이다.

올리비아는 이 와중에도 여전히 남장이다. 녀석의 남장은 단순히 편하자고 하는 게 아니라 그녀 자신의 수행을 겸한 행위이기 때문에,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너희들도 꼴이 아주 가관인데."

"미리 말해두는데, 내 부상의 9할은 모두 그놈의 초신성 때문이라고."

루이스가 툴툴 대면서 입꼬리를 비틀었다.

초신성의 여파에 휩쓸렸을 뿐인 올리비아는 전체적으로 가벼운 화상과 염좌 정도로 그친 것 같았지만, 루이스는 달랐다. 화상은 물론이고 오른팔과 어깨를 비롯한 반신이 아예 작살이 나서 치료에 좀 시간이 걸린다는 것 같다.

완벽한 초신성도 아니고, 최대 위력의 절반에 불과한 수준의 초신성을 휘두른 것만으로도 저 꼴이다.

전장 속의 기류가 모두 루이스의 초신성을 돕기 위해서 휘몰아치고 있었는데도, 어마어마한 수준의 리바운드가 찾아온 것이다.

자격이 없는 사람이 천변무궁류를 휘두르면 저렇게 되는 것일까.

하지만 그런 대가를 감수하지 않으면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그 정도로, 스페트로는 무시무시한 존재였다.

"몸 아픈 거야 그렇다 치는데, 검이 아예 못 쓰게 된 게 큰일이야. 내 힘을 버티는 검은 아무래도 드무니까."

루이스가 허리춤에 걸린 가죽 주머니에서 손잡이만 남은 검을 꺼냈다. 저게 아마 녀석이 지금까지 쓰고 있던 애검일 것이다.

특급 모험가의 출력에도 견뎌낼 수 있는 수준 높은 명검이었는데, 초신성의 부담을 견뎌내지 못하고 아예 칼날 전체가 가루가 되어 버렸다.

"……그건 저희 쪽에서 어떻게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루이스의 말을 옆에서 듣고 있던 올리비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물론 저희 가문의 정보력이나 자금력으로도 특급 모험가 수준에 맞는 무기를 찾는 건 어렵겠지만…… 아니, 꼭 찾아내 보이겠습니다. 이번 사태는 전적으로 저희 쪽의 관리 부실입니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지요."

올리비아가 주먹을 꾹 쥐고 말했다. 하지만 어째선지 루이스는 시큰둥한 눈치다.

"찾아주면 나야 신경 안 쓰고 좋지만, 그럴 여유가 나올 거 같진 않은데요? 안 그래도 이번 회동 관련 문제나 다른 특급 모험가들의 보상 처우 문제로 가문 자체가 아예 폭삭 주저 앉을 상황 아닌가?"

"아니, 그건……"

올리비아의 말문이 턱 막혔다.

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대충 알겠다.

"보아 하니 이번 회동이 무산된 것부터 시작해서 제 2위, 3위, 4위…… 그 이하의 특급 모험가에 대한 보상 문제까지 너희 쪽에서 독박을 쓴 건가?"

"……아, 그렇다. 정확히 말하면 독박은 아니고, 당연히 내야 하는 보상이지만."

아주 금시초문인 이야기는 아니었다. 나와 루이스의 싸움은 스페트로를 쓰러트리는 것으로 끝이 났지만, 올리비아와 샤를로트의 싸움은 오히려 지금부터가 진짜니까.

스페트로가 이번 사건에서 주변에 입힌 피해는 어마어마한 수준이다.

재기불능 수준으로 망가진 사람은 없었지만, 특급 모험가의 손짓 한 번, 몸짓 한 번에 매겨지는 가격을 생각하면 13명의 특급 모험가 중 여섯 명을 개박살내고 병원에 보냄으로써 발생한 피해는 거의 천문학적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원이 부상을 치료하고 재기할 때까지 최소 2주일은 걸릴 텐데, 그 동안 특급 모험가들이 영업을 중지함으로써 발생하는 금액적 손실은 아무리 스페트로 가문이라도 쉽게 보상할 액수가 아닐 것이다.

루이스의 말처럼 진짜 그거 때문에 가문이 폭삭 주저 앉지는 않겠지만, 이 건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가문의 몰락이 시작될 가능성도 높다.

돈도 돈이지만 사업의 신뢰도에도 큰 영향이 미칠 테니까.

"오히려 보상을 못 내겠다고 뻗대다가 다른 특급 모험가들의 심기가 불편해지면 그게 우리로써는 더 커다란 문제야. 스페트로 가문이 아무리 크고 강력한 조직이라고 해도, 모든 특급 모험가를 적으로 돌려서 살아남을 수 있는 수준까진 아니니까."

란즈 드 스페트로 가주라고 해봐야 열세 명의 특급 모험가 중 겨우 12위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그 정도의 보상으로 다른 특급 모험가들의 분노를 거둘 수 있다면 크게 남는 장사인 건 틀림없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네 일검을 맞고 란즈 가주님도 광증에서 해방되었다는 점일까. 물론, 한쪽 팔을 잃어버린 만큼 특급 모험가 자리는 내놓아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한쪽 팔을 잃어버린 정도로 뭘. 겨우 그 정도로 좁힐 수 있을 만큼 1급하고 특급의 차이가 좁은 건 아니에요. 끽해야 나한테 말석 자리를 넘겨 받는 정도겠죠."

아, 그 사람도 그렇게 됐나. 올리비아의 말처럼 진짜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 사람마저 재기불능으로 전락했다면 진짜로 스페트로 가문은 끝장났을지도 모른다.

"어째서 템페스트 전대 가주님 때와는 다르게, 란즈 가주님께서 무사할 수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 원인을 파악할 여유도 없는 상황이다. 그저 천운이라 생각하고 감사할 따름이야."

듣고 보니 그것도 좀 이상하긴 하다.

스페트로가 패배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여년 전, 그는 란즈 드 스페트로 가주의 양부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을 피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고, 그 결과 특급 모험가로 구성된 토벌대에 의해서 토벌 당한 전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싸움에서 템페스트 전대 가주의 몸을 차지하고 있던 스페트로는 어디로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저 큰 피해를 입고 구속되었을 뿐.

천변무궁류의 일검에 맞고 아예 란즈 가주의 몸에서 소멸해 버린 지금의 스페트로와 비교하면 명백히 다른 현상이다.

도대체 무슨 차이일까. 공격의 위력이 다른 걸까. 그게 아니면 란즈 가주의 몸을 차지한 세월이 길지 않아서 이렇게 된 것일까.

그게 아니면…… 혹시, 천변무궁류 때문에?

천변무궁류의 일검이 20여년 전의 그때보다도 더욱 더 강하고, 깊게 스페트로의 영혼에 데미지를 입힌 건가?

아니 뭐, 이 이야기는 일단 접어두자.

어차피 나도 자세한 건 모르는 상황이니까.

"그건 그렇고, 백신현. 부탁하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난 헛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나한테 바라는 게 너무 많은 거 아니냐?"

"당연히, 마땅한 보수는 지급될 것이다. 친구 사이인 것과는 별개로, 그건 당연한 거니까."

고개를 살짝 돌려, 샤를로트가 사라진 복도로 시선을 맞춘 올리비아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아가씨를 네가 잠시 맡아주지 않겠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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