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이자는 검성의 길을 걷는 것 같습니다-61화 (61/287)

〈 61화 〉 8. 나와 검주의 어사일럼(Asylum) (10)

* * *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 거의 반 년 정도, 나는 어느 지하 투기장의 검투사로 활동한 적이 있다.

지하 투기장이라는 부분이 중요하다. 검투사의 안전을 중요시하고, 소속된 인원 전원이 자유인으로 구성되어 있는 현대의 투기장하고는 다르게, 그 지하 투기장은 현대의 법률에서 허용되지 않는 수준의 피와 잔혹함을 서비스하는 불법 조직이었다.

지상의 투기장과 지하의 투기장은 관객에게 제공하는 서비스 자체가 다르다.

지상의 투기장이 적당히 조절된 수준의 피와 전투, 검투사들의 마이크웍과 스타성을 세일즈 포인트로 삼고 있다고 치면, 지하의 투기장은 지상 수준의 피와 전투에 만족하지 못한 이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예를 들어, 지상의 투기장에서 검투사들이 죽어 나가는 경우는 지독히 드물다. 고도로 훈련된 레프리(refree)와 저지(judge)가 매 경기 마다 입회하는 데다가 실력 있는 의료진이 투기장 내에 24시간 대기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지하의 투기장은 다르다.

참가하는 검투사는 모두 어디에서 흘러 들어온 부랑인이나 목줄이 잡혀 있는 노예이다. 손에 쥐어주는 무기는 가느다란 칼 한 자루 뿐이고, 맞서 싸우는 '적'은 모두 수 미터급의 강력한 몬스터.

지하의 투기장은 애초에 검투사가 이기는 것을 보기 위해서 찾는 자리가 아니었다.

이 세상의 온갖 쾌락이나 즐거움 따위를 탐닉한 끝에 '질려 버린' 인간이 최종적으로 찾게 되는 인간성의 밑바닥. 지하 투기장에서 검투사는 먹이와 동의어였다. 그들은 강력한 몬스터 앞에서 산 채로 사지가 뜯기는 검투사를 바라보며 웃었다.

투기장은 언제나 핏물로 절어 있었고, 시체 소각로는 늘 만석이다.

우리 네 사람은 열 번 이상의 검투를 거치고도 살아남은 유일한 인간이었다. 우리가 오래 살아남으면 살아남을수록 관객석의 야유는 심해졌다. 현실에 지옥이 있다면 이런 곳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지옥 같은 나날 속에서 나를 살아가게 했던 것은 보증할 수도 없고, 아무런 공증도 되지 않는 투기장 오너의 한 마디 뿐이었다. 15승, 15승이다. 열다섯 번의 검투를 거쳐 한 번도 지지 않는다면 자유인으로 풀어주겠다.

아무리 열네 살의 백신현이라도 그런 말을 믿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형태라도 희망은 희망이다.

어둠의 장막이 깔린 비탈길에서 멀리 보이는 빛을 쫓아 걸었다.

죽이고, 죽이고, 살아남고, 살아남은 끝에 손에 넣은 14승.

그런데 그날은 시작부터 뭔가가 이상했다. 평소에는 검투 스케줄이 모두 따로따로 잡혀 있었던 네 사람을 난데없이 함께 투기장에 내보내더니, 준비할 틈도 없이 검투 경기가 시작되었다.

몬스터는 없었다.

14승을 달성한 네 명의 검투사가 마지막으로 죽여야 했던 것은, 14승을 달성한 또 다른 검투사였다.

서로의 연고지도, 서로의 꿈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같은 꿈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신뢰했고, 그 신뢰 속에는 유대 또한 있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순식간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서로 술잔을 부딪치던 열 살 연상의 아저씨가 내게 검을 휘둘렀다. 내게 최초로 검을 가르쳐준 스승이나 마찬가지였던 선배 검투사가 나를 습격했다. 나보다도 훨씬 어린 나이의 소년이 단검을 찔러왔다.

그들은 말했다. 이러고 싶지 않았다, 이러고 싶지 않았다고.

아마 그 말은 진심이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서로가 서로를 해친다고 해서, 그렇게 15승을 달성한다고 해서 우리를 자유인으로 풀어줄 가능성은 희박했다. 하지만 외면할 수 없었다. 어둠의 장막이 깔린 비탈길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희망이 눈앞에 있었다.

검을 휘두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검을, 휘둘러야 했다.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검을 휘두른 끝에, 마지막까지 자리에 서 있었던 건 나 뿐이었다.

하지만 쓰러진 세 사람도 죽지는 않았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죽이는 것보다 살리는 게 더 어려울 텐데, 이상하게 그들을 죽일 수가 없었다.

그들을 죽여본들 달라지는 게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세 사람이 모두 쓰러진 바로 그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거대한 문이 좌우로 벌어졌다.

그 안에서는 내가 지금까지 검투로 쓰러트려온 그 어떤 괴물과도 비교 할 수 없는 존재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전신에 시꺼먼 후드를 뒤집어쓰고 손에는 커다란 낫을 들고 있는, 그야말로 '사신'을 닮은 몬스터.

이름은 '그림리퍼'.

나중에 따로 조사해본 바로는 제 3급의 모험가 정도가 아니면 쓰러트릴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몬스터였다.

애초에 누가 이기더라도, 누가 살아남더라도, 우리를 살려둘 생각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건 '네가 그런 표정을 짓는 걸 보고 싶었다'며 낄낄대며 비웃는 오너의 목소리.

정신을 추스릴 틈도 없이, 사신은 푸른 안광을 번뜩이며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 * *

그때, 나를 공격했던 다른 세 사람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물론 그들이 내게 검을 휘두른 그 순간에는 조금 분노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니다. 진짜로 내가 증오해야 하는 것은 그런 빌어먹을 규칙을 설정해놓은 투기장의 오너와, 그 관객들이어야 했다.

실제로 그들은 유일한 희망이 사라진 그 순간, 내가 알고 있는 그들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배신해서 미안하다며, 넌 여기에서 죽으면 안 되는 인간이라며, 꼭 살아남으라며, 사신의 공격 앞에서 위기에 처한 나의 방패가 되어 베어 죽고 찢겨 죽고 터져 죽었다.

그들은 분명, 내 목숨을 노리고 검을 휘둘러왔었지만.

그들이 몸을 던지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 '사신'을 쓰러트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힘.

힘을 가지고 싶었다.

이 세상의 온갖 불합리한 것과 부조리한 것들을 모조리 박살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싶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강해지고 싶었다.

* * *

천변무궁류?????

제이검?二?

적赤

혜성?

"하아아아아아아앗!!!!"

전신의 마력이 고밀도로 응축되었다. 일반적인 무학??의 세계에서는 가늠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수준의 밀도를 품게 된 마력은 고밀도의 핵과 같이 주변의 모든 마력을 잡아당기기 시작한다.

마력이 모였다. 모여든 마력은 붉은색으로 변질되어 백신현의 신체 능력을 외부에서 증폭시키는 갑옷이 되었다.

검왕검에게 맡겨둔 5분의 싸움은 이 필드 자체를 백신현에게 유리한 형태로 바꿔 놓았다. 대기 중에 요동치는 마력의 기류가 스페트로의 움직임을 방해하고, 백신현의 움직임을 돕는다.

하지만 부족했다. 백신현의 전투 능력은 검왕검과 비교해서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검왕검이 모든 기량을 쏟아서 만들어낸 5분은 두 사람의 차이를 크게 좁혀놓았지만, 좁힌다고 좁힌 차이조차 한계가 있었다.

검왕검이 좁힌 차이에 혜성?을 추가로 더한다.

현존하는 그 어떤 강화 마법 이상으로 높은 증폭률을 가진 기술이 더해지고 나서야 비로소 백신현과 스페트로의 전투는 대등한 형태가 될 수 있었다.

소리는 이미 한참 이전부터 쫓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스페트로와 백신현이 지나간 자리에 잔상이 '선'의 형태로 남는다.

잔상이 잔상을 찢고, 잔상이 또 다시 잔상을 찢었다. 수십 명의 백신현과 수십 명의 스페트로가 수백 자루의 검과 창을 휘두르면서 부딪친다.

소리가 울려 퍼지기 전에 다음 격돌이 시작되고, 또 그 소리가 울려 퍼지기 전에 격돌이 시작된다. 미처 울려 퍼지지 못한 소리가 뭉치고 뭉친 끝에 기괴한 한 줄기의 비명으로 압축되었다.

기기기기기기기기기기!!!!

바로 그때, 스페트로의 손에 쥐어진 창이 수십 자루로 분열하였다. 잔상하고는 다르다. 그 하나 하나가 물리적인 형상을 유지하고 있는 살기등등한 '진짜'였다.

수십 자루의 창이 저마다 서로 다른 흑주대천신공에 의해 발사 되었다. 그 하나 하나의 속도는 총알이나 초고속의 탄환조차 능가했다. 그것은 궤적조차 명확하게 그릴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복잡다양한 궤도로 쏘아지는 이기어창????.

그것은 차라리 벼락에 가까웠다. 보이드도 비슷한 기술을 사용했었지만, 그 속도는 비교할 것이 되지 못했다. 수십 줄기의 빛이 새장처럼 백신현의 퇴로를 가로막았다. 피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

하지만, 빈틈이 없다면 만들어내면 그만이다. 백신현은 오른손은 그대로 둔 채 자유로운 왼손을 움직였다. 왼손이 허리춤의 검집을 뽑아든다. 혜성의 보조를 받은 완력을 써서 투검??했다.

소리는 늦었다. 초고속이 검집이 수십 자루의 창 중 하나에 접촉했다. 이기어창의 궤적이 틀어진다. 그리고 방향이 틀어진 창과 또 다른 창을 서로 부딪치게 해서 간섭하게 만든다.

이기어창과 이기어창이 서로 간접하면서 방향을 바꾸는 현상이 연쇄적으로 퍼져 나간다.

그 끝에서 백신현은 아슬아슬하게 통과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안전지대를 만들어냈다. 그 속으로 빠져나간다.

하지만 스페트로는 그 앞에 있었다. 검과 창이 부딪친다. 그리고 그 틈을 타서 궤적이 틀어졌던 이기어창이 다시금 백신현을 노리고 방향을 틀었다.

앞에는 스페트로, 뒤에는 이기어창.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수많은 창이 백신현의 몸을 관통했다.

하지만 이상했다.

감촉이 약하다.

이윽고 스페트로는 이것이 천변무궁류의 제사검이 펼쳐진 신호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

이전에 있었던 검왕검과의 전투에서도 보았던 기술이다. 보이드의 기술을 응용한 것으로, 한 순간이나마 그 자리에 질량이 있는 분신을 발생시켜 상대의 감각을 혼란시킨다.

천변무궁류의 제사검, 삼렬성三??. 물론 백신현의 수준은 검왕검과 비교하면 수준이 미진하다. 삼렬성이 아니라 이렬성二??까지가 한계. 펼칠 수 있는 분신도 하나 뿐이다.

하지만 이 순간에는 충분히 유효했다. 수십 개의 이기어창을 모조리 빗겨내고 스페트로의 의표를 찌른다.

이때, 이 순간 이미 백신현은 스페트로의 배후로 돌아 들어가 있었다.

쿵!!

스페트로가 딛고 있던 대지가 통째로 뒤집어졌다. 검이 꽂힌 그 자리로부터 십수 미터 가까이 되는 범위가 부채꼴의 형태로 파괴되어 있었다.

하지만, 스페트로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부채꼴로 파괴된 범위 중에서 오직 스페트로가 딛고 서 있는 자리만이 부서지지 않았다. 칼날은 창대에 막혀 있었다.

"……겨우 이 정도인가. 전체적인 속도와 힘은 높아졌지만, 역시 조금 전이 더 어려웠다."

스페트로가 창대에 힘을 주고 앞으로 밀었다. 백신현의 균형이 흔들린다. 이때, 스페트로는 이미 공격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전투 기술은 특급 모험가 중에서 중하위권 수준이지만 '다음 수를 읽는' 능력이 매우 발달되어 있군. 힘과 속도를 제외한 순수한 기량은 특급 모험가 기준으로 중위권 정도이려나."

한 호흡에 열일곱 번의 찌르기가 꽂혔다. 백신현은 그 중 절반 가까이를 받아냈지만, 나머지 절반은 가차 없이 몸에 꽂혔다.

마력을 갑옷처럼 두르는 혜성의 특성상 전체적인 방어력 또한 높아진 상태였기 때문에 상처는 깊지 않았지만, 꽂힌 그 자리에서 핏줄기가 터져 나왔다. 찌릿한 고통이 전신으로 퍼져 나간다.

"큭……!!"

"하지만, 잊은 건 아니겠지? 난 특급 모험가 중 제 1위였던 남자다. 특급 모험가 중위권 정도의 기량으로는 상대 할 수 없단 말이다!"

또 다시 방어가 늦었다. 창대가 옆구리에 꽂힌다. 백신현의 입속에 피맛이 느껴졌을 때는 이미 수십 미터를 날아가 있었다.

한참을 날아간 끝에 바닥에 부딪치고, 바닥에 붙은 상태로 또 한참을 밀려나간다. 그 와중에도 공격은 계속되었다. 위에서 아래로 찌른다. 찌른다. 찌른다. 스페트로의 창은 마치 빛줄기 같았다. 소리 없이 꽂힌 후, 한참 뒤에야 폭음이 울려 퍼진다.

몸을 내던지듯이 일어선다. 검과 검집을 동시에 써서 대응에 들어간다. 하지만, 그렇게 막아도 막지 못하는 공격이 있었다. 백신현의 팔과 다리에 무수한 구멍이 발생했다.

핏물이 튄다. 공격의 흐름을 끊어야 한다. 천변무궁류의 제일검, 유성이 매섭게 삼연속으로 내질러졌다.

하지만 그 공격은 이미 몇 번이나 보아온 것이다. 세 번의 참격을 세 개의 찌르기로 모조리 상쇄한다.

혜성으로 강화된 유성조차 파고들 수 없다.

스페트로는 이미 이전의 회동에서 보았던 그가 아니었다. 그때 있었던 검왕검의 싸움은 안 그래도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었던 그의 기량을 더더욱 높은 경지로 밀어올리고 말았다.

검왕검. 그 속에 비장되어 있던 심득이란 스페트로조차 쫓아갈 수 없을 만큼 아득히 높은 영역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높은 수준의 기예는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무인의 많은 것을 변화시킨다.

그러한 검왕검의 기술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부딪치고 체험한 스페트로의 무학은 예전 이상의 빠르기와 예전 이상의 힘을 가지게 되었다.

아무리 모든 조건이 불리한 전장이라고 해도 쉽게 무너트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스페트로는 이미 혜성의 한계를 파악하고 있었다.

'나로써도 불가능한 수준으로 마력을 응축시킨 후, 그 초고밀도의 마력으로 외부의 마력을 끌어들여서 갑옷처럼 두른 것이군. 당연히 어마어마한 고통이 지금 이 순간에도 쏟아지고 있을 것이고, 원리상 지속 시간도 길지 않을 것이다.'

길어야 1분.

그 누구에게도 말해주지 않은 혜성의 한계 시간을, 그는 오직 자기 자신의 안목만으로 알아보았다.

스페트로는 자신의 전투 능력이 이미 전대미문의 영역에 도달했음을 스스로 이해했다.

그 어떤 특급 모험가라도 이제 그를 이길 수는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와 동등한 영역에 있었던 마그누스조차 쓰러졌다. 아마 제 1위가 나타나더라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템페스트!!"

멀리에서 이전에 쓰던 이름이 들려왔다. 언제 지하 감옥에서 해방되었는지, 마그누스와 스텔라가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엉망진창인 몸뚱이로 간신히 무기만 챙겨서 올라온 것 같다.

하지만 그 누구도 10초를 버텨내지 못했다.

애초에 정상적인 컨디션도 아니었다. 스텔라와 루이스가 일초만에 바닥에 쓰러지고 올리비아는 손짓 한 번에 날아갔다. 마그누스가 대검을 사용해서 9초를 버텨냈지만 이윽고 낮은 신음 소리와 함께 나가떨어졌다.

쓰러진 그들을 스페트로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이 시점에서 제일 중요하고, 최우선적으로 제거해야 하는 것은 검왕검의 주인이니까.

이때, 혜성의 유지 시간은 불과 5초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창이 움직일 때마다 천지자연이 진동했다. 대지가 찢어지고 하늘이 부서진다. 흐름을 타고 이어지는 찌르기의 속도는 횟수가 거듭될수록 가속되어갔다.

이젠 그 어떤 공격도 무용지물이었다. 혜성에 돌입한 상태에서도 그저 한 수, 한 수 방어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흘려보낸 충격은 그대로 일직선으로 쭉 날아가서 대지를 찢거나, 천공의 구름을 날려 버렸다.

혜성에게 주어진 마지막 시간이 허무하게 사라져간다.

"……!!"

그리고, '그때'는 비로소 찾아왔다.

혜성의 효과가 끊어지기 직전, 백신현은 남아 있는 힘을 짜내고 또 짜내서 스페트로의 몸을 멀리 뒤쪽으로 밀어 보냈다.

그것이 혜성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스페트로의 몸이 멀리 밀려나간 직후, 백신현의 몸에 남아있는 무수한 마력이 흩어지면서 모든 힘과 속도가 사라졌다.

백신현의 무릎이 휘청거린다. 혜성은 그 높은 효과와 반비례하는 짧은 지속 시간과 강력한 리바운드를 가지고 있었다.

저 멀리까지 밀려나간 스페트로의 창이 머리 위로 올라간다.

흑주대천신공의 오의가 시작된다.

흑주대천신공??大???

초량낙화??花

공기가 떨린다.

바로 그때, 스페트로의 창이 수백 미터 단위로 증폭되었다. 창날의 두께만 해도 수십 미터. 검왕검과의 싸움에서 최후에 펼쳐졌던 기술이, 이번에는 그 검주를 노리고 쏘아진다.

회피는 불가능. 그리고 그 질량과 속도를 감안했을 때, 이 기술이 꽂힌 순간 별장은 물론이고 이 별장이 서 있는 언덕까지 붕괴하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근처에 있는 도시까지 통째로 날아갈지도 모른다.

차라리 소행성의 충돌을 닮아있는 흑주대천신공의 최대 오의 앞에서, 검왕검의 주인은 도대체 어떤 식으로 맞서 싸울 것인가.

바로 그때, 검을 양손으로 틀어쥔 백신현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절망을 모르는 눈으로.

"───"

……이때, 스페트로는 단 한 가지 사실을 잘못 알고 있었다.

백신현의 온몸에서 붉게 변질된 마력이 흩어진 그 때, 스페트로는 이미 혜성이 종료된 상태라고 판단했다.

그것은 틀렸다.

물론 혜성의 지속 시간은 한계에 달한 상태였다. 하지만 몇 초 정도 혜성을 지속시킬 수 있는 여유는 남아 있었다.

그 남아 있는 여유를 단 하나도 남기지 않고 검에 때려 박았다.

검왕검은 붉은 마력을 은은하게 휘어 감고 있었다.

그 붉은 마력의 아래에는 푸르게 빛나는 마력이 별도로 존재했다. 혜성의 요결을 휘어감기 전에 먼저 진행하고 있던 거성巨?의 요결이다.

청과 적, 서로 다른 색채의 마력이 서로 반발하면서 부딪친다. 그것을 힘으로 아슬아슬하게 누른다.

이제부터 시작되는 천변무궁류의 필살검은, 현재의 백신현의 역량으로 도저히 펼칠 수 없는 기술이다.

그렇기 때문에 편법을 썼다.

스페트로는 알지 못했다.

지금까지의 모든 전투는, 지금의 일격을 백신현의 역량으로 펼치기 위해서 존재해온 것이었다는 것을.

필살검을 위해서 마력의 흐름이 백신현을 보조하는 공간을 만들었다. 지금까지 이어진 무수한 공방. 수도 없이 펼쳐진 천변무궁류.

그 모든 것이, 조금이라도 필살검을 다루는 조건을 완화하기 위해서 준비되어온 싸움이었다.

바람이 불었다.

그 흐름은 뒤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기류다. 그리고 그 기류의 끝에는 흑주대천신공의 오의를 전개한 스페트로가 있다.

파직!!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검왕검의 칼날이 일그러졌다. 실제로는 검왕검이 품고 있는 초고열의 열기가 주변의 풍경을 왜곡시키고 있는 것 뿐이었다.

천변무궁류?????

일식필살검一?必??

홍?

초신성???

분사한다.

분사된다.

고밀도의 마력을 휘어감은 검이 둔중하게 움직였다. 위에서 아래로 찍어 내리듯이 휘두른 참격의 끝에서 고밀도의 마력이 일직선으로 사출되었다.

그것은 섬광 같은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색채를 응축한 극채색의 오로라. 좌우로 펼쳐진 직경만 해도 수십 미터의 굵기를 가진 빛의 기둥이 칼끝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흑주대천신공 따위는 상대조차 되지 못했다. 초량낙화는 한 순간도 버티지 못하고 분쇄되었다.

애초에 서로 비교할 수 있는 위력이 아니었다. 초량낙화의 원동력은 고작해야 스페트로 그 자신의 마력 뿐. 천지자연의 모든 마력을 끌어모아서 발사하는 초신성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알기 쉽군."

그러니까 애초에 스페트로는 그것에 대항조차 하지 않았다.

미리 올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종이 한 장 차이로, 초신성을 피해냈다.

처음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정확히 무슨 기술이 날아올 거라고는 예측하지 못했지만, 숨겨둔 수가 있을 거라고는 짐작하고 있었다.

백신현은 승산 없는 싸움에 도전하는 광전사가 아니다.

검왕검의 실력은 대단했고, 혜성에 들어선 백신현의 전투 능력에는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의심이 들었다.

고작 이 정도인가?

그는 겨우 이 정도의 전투 능력으로 이 스페트로를 쓰러트리려고 했던 것인가? 아니다. 그럴 수는 없다.

틀림없다.

숨겨둔 최후의 한 수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것을 예측하고 있었기 때문에 피할 수 있었다. 초량낙화는 1초 제대로 버티지 못했지만, 그 반의 반 초도 되지 않는 지연 시간이 스페트로의 생명을 구했다.

"커……, 헉……!!"

하지만 그 여파를 뒤집어 쓴 것만으로도 스페트로의 상태는 심각했다. 그의 왼팔을 비롯한 반신이 찌릿찌릿 구워지는 듯했다.

그러나 피해냈다. 그리고 백신현은 천변무궁류의 필살검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쿵!! 스페트로의 두 다리가 대지를 강하게 딛으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초신성이 끊어진 바로 그때를 노려서 백신현의 배에 창을 꽂았다.

"크……!!"

창이 등을 뚫고 나온다. 피가 사정 없이 터져 나왔다.

'뭐지……?'

이번에는 삼렬성을 사용한 가짜도, 잔상도 아니었다.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감각이 생생하다.

그런데 스페트로의 표정이 오히려 의문에 찬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창이 꽂힌 순간 기다렸다는 듯 그의 손목을 틀어쥔 백신현의 움직임에 있었다.

갑작스런 간섭에 창의 궤적도 비틀렸다. 본래는 심장을 노리고 쏘아졌던 창이 위치를 바꾸어 옆구리에 꽂혔다. 그것도 주요 장기를 모두 빗겨나가는 위치. 노리지 않으면 이 위치에 맞추는 건 불가능하다.

초신성이 빗나간 순간, 전혀 망설이지 않고 그 기술을 포기한 후 스페트로의 손목을 붙잡았다.

마치…… 초신성이 빗나가는 것을 읽고 있었다는 것처럼.

지금까지 있었던 백신현의 모든 움직임은 오직 초신성을 위해서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었을텐데도.

'설……, 마……'

바로 그때, 스페트로는 바로 등 뒤에서 피부가 타들어가는 듯한 열기를 느꼈다. 뭐야, 초신성? 하지만 그 공격은 틀림없이 허공을 찢었을 텐데……?

그리고 스페트로도 눈치챘다. 마주선 백신현의 등 뒤, 저 멀리에 쓰러진 네 명의 전사 중 단 한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루이스가, 없다.

도망쳤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스페트로가 다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까지 스페트로가 서 있던 그 위치에, 검을 치켜든 루이스가 서 있다.

그 칼끝에는 조금 전과 비교해서 절반 가까이 약해진 초신성이 걸려 있다. 빗나간 것을 그대로 붙잡은 것일까.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강하고 뜨겁다. 그야말로 태양처럼,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도 그 열기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 열기를 가까이서 느끼고 있음에도 스페트로는 오히려 전신의 피가 차갑게 얼어붙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스페트로가 백신현을 얕보지 않았던 것처럼, 백신현 또한 스페트로를 얕보지 않았다.

초신성이 빗나갈 것을 예측하지 못했다면 절대로 벌어질 수 없는 일이다.

천변무궁류의 필살검이 가지고 있는 막대한 에너지는 루이스 정도의 기량으로 다룰 수 있는 위력이 아니다.

그런데 그것을, 비록 상당 부분 위력이 손실된 상태라고는 해도 제대로 붙잡고 있다는 것은 이 필드의 환경 자체가 루이스를 적극적으로 보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설마!!'

마력의 기류를 다루는 것.

그것이 천변무궁류의 본질이다.

어쩌면 그들도 예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스페트로의 실력이라면 그 어떤 공격이라도 빗나갈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까, 일부러 창에 맞아서 움직임을 멈춰 세운다.

초신성이 빗나갈 것을 예측한 뒤, 그것을 반대편에서 잡아낸 후 확실하게 명중시킨다.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공방이 처음부터 그것을 노리고 이루어진 전투였다.

스페트로는 백신현의 옆구리에 꽂힌 창을 뽑아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지나치게 깊이 꽂혔다. 그가 신뢰하는 최고의 무기가, 지금 이 시점에서 오히려 그를 붙잡아 묶는 말뚝이 되었다.

'아니, 당황하지 마라. 힘은 이쪽이 압도적으로 우위다. 당황하지 않고 잡아 빼면……'

하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다.

스페트로의 오른팔에서 부자연스럽게 힘이 빠졌다.

그것이 침식도를 높인 끝에 역으로 그의 육체에 간섭한 샤를로트의 소행이라는 것을 그는 최후까지 알지 못할 것이다.

"윽……!! 젠장!! 이 자식……!!"

스페트로는 처음으로 여유를 잃고 다급한 목소리로 백신현을 떼어내려 했지만,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초신성은 이미 코앞까지 도달한 상태였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앗!!!!"

루이스의 실력으로도 그것을 제대로 제어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초신성은 휘두르기도 전에 이미 채찍처럼 길게 분사되고 있었다.

빛이 달린다.

빛이 가속한다.

회피는 불가능했다.

굳어 버린 스페트로와 백신현의 머리 위로, 초신성이 떨어했다.

* * *

초신성이 지면에 꽂힌 그 순간, 그것은 대지를 송두리째 깎아내면서 앞으로 쭉 뻗어나갔다.

완만한 언덕을 타면서 질주한다. 그것은 초원 위를 달리는 멧돼지를 닮았다. 하지만 지나간 자리에 발자국을 남기는 멧돼지와는 다르게, 초신성은 그 앞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깎고 파괴하면서 무작정 나아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끝없이 질주하던 초신성은 언덕에 평생 사라지지 않을 깊은 흔적을 남긴 후에야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했다.

절반 가까이 되는 위력이 날아간 상태였음에도 이 정도였다.

"쿨럭!! 쿨럭! 쿨럭! 쿨럭!"

초신성의 행사가 끝난 직후, 루이스는 곧바로 그 자리에 쓰러져서 피기침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절반 가까이 되는 위력을 포기하고 제어에 들어갔는데도 이 꼴이었다. 이미 검왕검 내부에 있는 가상 공간에서 수십 번 넘게 합을 맞춰본 연계였지만, 가상 세계 속의 연습과 실전의 고통은 전혀 느낌이 달랐다.

아주 잠시 손을 댄 것만으로도 시야가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검이."

앞으로 쓰러진 루이스의 오른손에는 그녀의 애검이 들려 있다. 하지만 날 부분이 통째로 날아가서 없고 손잡이만 남은 상태다.

초신성이 안겨 주는 부담을 제대로 견뎌내지 못한 탓이다.

"일어나실 수…… 있겠습니까……."

옆에서 다가온 올리비아가 루이스를 부축했다. 그녀 또한 지근거리에서 초신성의 여파를 몸으로 맞았기 탓에 꽤 충격을 받은 인상이다.

루이스는 흐릿한 안색으로 고개를 들었다.

1급 모험가조차 여파를 조금 쐰 것만으로도 이 꼴이다.

아무리 스페트로라고 해도……

그때, 뭉게뭉게 피어나던 모래 먼지 속에서 뭔가 소리가 들렸다.

"아……."

모래 먼지가 걷히면서 나타난 광경에 루이스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쪽 팔을 잃고, 그 이외에도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스페트로가 그 자리에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루이스의 눈이 크게 뜨인다.

하지만 등을 돌린 스페트로는 이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앞으로 든 상태로 반대편을 보고 있었다.

"……."

모래 먼지의 저편에는 백신현이 서 있었다.

여기저기가 그을린 상태였지만 스페트로와 비교하면 신체의 손상은 적어 보였다. 아마 그의 몸을 방패로 삼은 것이 효과를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쪽도 심각한 건 마찬가지다. 몸에 꽂혀 있던 창이 충격에 의해 억지로 뽑혀나가면서 옆구리가 아예 옆으로 뜯겨진 상태였다.

등을 돌린 스페트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제야 조금 알 것 같군. 그대가 어째서 검왕검에게 선택 받게 되었는지."

백신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나는 아주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 ……실수했어, 그대를 얕보아서는 안 되었는데."

스페트로가 자세를 취한다. 왼팔은 아예 날아간 상태. 하지만 없으면 없는대로, 외팔이가 취할 수 있는 가장 공격적인 자세에 들어간다.

그런 것을 본능적으로 취할 수 있는 진짜 일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20년 후의 세계에서 만나게 된 나의 호적수여. 최후의 공방에 들어가기에 앞서…… 부디, 그대의 이름을 듣고 싶다."

대답이 돌아오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 자리 선 백신현은 한참 동안 호흡을 고른 끝에, 흐릿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천변무궁류, 백신현."

"좋은 이름이다."

스페트로가 창술의 자세에 들어간 직후, 백신현이 천변무궁류의 기수식에 돌입했다.

파앗───.

기나긴 대치 끝에 스페트로의 몸이 한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의 전신이 흑주대천신공의 요결에 따라 가공할 만한 속도로 나아갔다. 표적은 오직 하나. 몇 미터 앞에 선 백신현의 심장이다.

백신현 또한 조용히 검을 잡아당겼다. 찔러 들어오는 공격에 맞춰서, 한 발 먼저 베어내기 위한 자세다.

흑주대천신공과 천변무궁류.

호흡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정적 속에서 천하제일의 창술과 검법이, 한 순간 교차했다.

하지만 들려온 소리는 하나 뿐.

스페트로의 몸이 피를 뿜으며 앞으로 쓰러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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