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 8. 나와 검주의 어사일럼(Asylum) (6)
* * *
"……뭐, 심정은 이해한다."
순간적으로 열이 확 치밀어오를 뻔 했지만, 사실 샤를로트의 심정도 이해 못할 건 아니다.
하루 아침에 가주는 그 꼴이 됐고, 본인 안에 정체불명의 광증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그 광증으로 말미암은 공격으로 올리비아도 크게 상처를 입었고.
그런 상황에서 희망적인 관측을 품기에는, '그것'은 너무나도 강한 존재였다. 제 1위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는 2위의 남자와 3위가 함께 쳐들어갔는데도 소식이 끊어졌을 지경이다.
힘들어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고, 눈물을 흘리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이 아이에게 있어선 거의 세계관이 통째로 무너지는 듯한 경험이었을 테니까.
가끔씩 그럴 때가 있다. 도대체 세상이 나한테 왜 이러나 싶을 정도로 가혹한 일이, 쉬지 않고 몰아치는 때가.
그런 의미로 입에 담은 이해한다, 였다.
"하지만, 그런다고 뭐가 해결되진 않을 거야. 물론 그 놈이 네 몸을 빼앗으면 지금보다 더 무시무시한 놈이 될 가능성이 높은 건 사실이지만…… 네 몸을 쓰지 않더라도 그 놈은 이미 충분히 강한 놈이거든."
물론, 그 놈이 샤를로트의 몸을 차지했을 때 얼마나 강해질 지는 아직 미지수긴 하다. 하지만 지금의 그 놈도 충분히 무시무시한 판에 거기까지 감안하고 행동에 들어갈 생각은 없다.
여기에서 나와 루이스가 패배하면 그때는 정말 끝장이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놈을 멈춰세우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애초에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그 놈이 더 강해진다고 해서 그걸 가지고 새삼스럽게 절망할 이유가 없다.
샤를로트의 몸을 빼앗지 않아도 이미 놈 자체가 절망적인 수준에 이르러 있었으니까.
"샤를로트, 너도 진심으로 네가 죽는다고 일이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그 놈의 실력은 너도 잘 알고 있을 거야. 그걸 뻔히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하는 건…… 지금의 네가 그 정도로 힘든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차라리 죽고 싶다. 차라리 죽으면 편해질 수 있을 거야. 사람이 심하게 코너에 몰리게 되면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내가 과하게 침착해서 그렇지, 그런 생각이 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인 건 사실이다. 제 2위와 3위가 당한 상황에서 특급 모험가 말석과 일개 4급 모험가에게 뭘 기대할 수 있을까.
어차피 그 놈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여기에서 죽으면 더 지독한 꼴은 보지 않고 끝날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까.
"잠시 바깥으로 나와볼래? 네 다리로 걸을 수 있지?"
"일어설 수는 있지만……, 저기……, 왜……?"
"승산이 있다는 걸 지금부터 네게 보여줄게. 지금 네 상황에선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쉽게 믿을 수 없을 거야. 솔직히 승산이 있다고 말해도 못 믿을 거잖아. 그 놈의 실력을 너도 잘 알고 있으니까."
"……응, 맞아."
샤를로트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안목이 정확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더하더라도 그 놈에게 당해낼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니까.
회동에서 우리와 그 놈이 싸우는 꼴을 보았다면 더더욱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맞서 싸우고, 발버둥치고,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는데도 그 꼴이 나고 말았으니까.
아무리 얘기를 잘 타일러도 샤를로트의 생각이 쉽게 변할 리가 없다.
샤를로트 또한 무인?人. 말 몇 마디로 생각을 바꿀 정도로 안목이 어수룩하지도 않다.
"무인은 무?로 말해야 하는 법이지. 잘 봐둬. 네가 그런 식으로 속앓이 할 필요가 없다는 걸 보여줄 테니까."
무인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 건 오직 무? 밖에 없다.
그리고 나는, 나의 무?로써 승산을 제시할 것이다.
* * *
너무 멀리 나갈 필요가 없었다. 바로 옆에 있는 창고에서, 나는 샤를로트를 그 자리에 세워둔 채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샤를로트 앞에서 여러 번 검을 휘둘러왔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온힘을 다해서 휘두르는 모습을 보여준 적은 없다. 천변무궁류가 아직 원숙한 수준에 이르지도 않았는데 함부로 유출해서 좋을 게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뭐, 언젠가 양지로 나아가서 위로 올라가기 시작하면 나의 검술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야 하는 일이 자주 벌어질 것이다. 그때를 위한 연습이라고 생각하며, 천변무궁류를 펼치기 시작했다.
샤를로트가 지금 입고 있는 헐렁한 체육복은 연금술사의 것이다. 물론 성인인 연금술사가 입는 옷은 샤를로트에게 많이 헐렁했지만, 손목이나 발목, 허리 같은 부분을 끈으로 고정해서 흘러내리지 않게 임시로 고정해둔 상태였다.
역시 샤를로트는 무예에 깊이 빠져 있는 소녀이기 때문인지, 내가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면서 다시 눈을 빛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나의 검술과 그 놈의 창술을 비교하고 있는지, 금세 축 쳐진 표정으로 내 검술을 바라보고 있다.
씁쓸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 놈과 비교해서 기술적으로 앞서 있는 건 내가 아니라 백신아니까.
내가 순수한 수련으로 그 놈의 경지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앞으로 얼마나 긴 수련 기간이 필요할까. 적어도 10년이나 20년 정도의 수련으로는 턱 없이 부족할 거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하압……!!"
몇 번이나 말했듯이, 나는 그 놈보다 강해지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그 놈을 이기는 것이 나의 목적이고, 이것은 그것을 위한 준비 단계다.
마력이 몰아치기 시작한다. 일점에 집중된 마력은 소용돌이나 폭풍처럼 맹렬하게 회전했다.
"아……."
그때쯤 되어서 샤를로트도 뭔가를 눈치챈 것 같다.
이성이나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인의 감각이 샤를로트를 뭉근하게 누르기 시작했다.
유성?이 빛나고 혜성?이 내달린다. 거성巨?이 준동??할 때 샤를로트는 압박을 느꼈는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 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칼끝에 걸린 천변무궁류가 청명하게 빛난다.
이것은 단순히 지금까지 내가 익혀온 술수를 보여주는 자리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익혀온 술수를 바탕으로, 내가 어떤 식으로 그 놈과 맞서 싸울 지 그 구체적인 플랜을 보여주는 행위이다.
물론 아직은 나의 기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상의 플랜을 완벽하게 실행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줄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이 그 놈에게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도, 내가 이상의 플랜을 실행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갖추는 것이 아주 불가능하지 않다는 사실도 모두 전달했다.
나의 입이 아니라, 검으로.
무예는 입으로 하는 게 아니니까.
유성, 혜성, 거성 순으로 천변무궁류의 기본 3식을 쉬지 않고 연달아서 펼친 후, 나는 창고 바닥에 신발 밑창을 미끄러트리듯이 길게 끌었다. 조금 전에 펼친 3식을 이번에는 역순으로 진행시켜나간다.
거성이 빛난다. 나의 모든 마력은 검 한 자루에 집약되었다. 혜성이 이어서 전개되었다. 고밀도의 마력은 인력?力을 띄게 된다. 대기 중의 마력이 끌려와서 칼끝에 모여든다.
그리고 유성.
칼끝에 모인 마력을 모조리 한 방향으로 때려 박는다.
천변무궁류의 필살검, 초신성???.
기본 원리는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형태만이라면 재현하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그 기세는 상당히 시원찮다. 칼끝에서 시작된 한 줄기의 가느다란 섬광은 불과 몇 미터도 나아가지 못하고 흩어지고 말았다.
기술의 수준이 부족하고, 밀도의 정도가 낮고, 유지력마저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래서는 도저히 실전에서 쓰기 어렵다. 준비 과정도 위력도 모두 자격 미달. 필살검이라고 부르기도 아깝다.
백신아의 수준으로 기술을 펼치고, 백신아의 수준으로 밀도를 높이고, 백신아의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어야 비로소 이것은 필살검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위력을 품게 된다.
현재의 내겐 머나먼 경지다.
가볍게 혀를 찬 후 검을 천천히 아래로 내린다. 어느 세 내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대충, 이런 식으로 그 놈과 맞서 싸워볼 생각이야. 물론 내 기량으로 지금의 흐름을 완벽하게 끌어올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지만…… 네가 회동에서 보았듯, 내게는 불과 5분 남짓한 시간 동안 날 대신해서 싸워줄 수 있는 괴물 같은 실력자가 함께 있어. 너도 봤지?"
"응……"
샤를로트가 고개를 끄덕인다.
눈이 옹이구멍이 아닌 이상에야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 하물며 샤를로트의 재능은 상당히 우수한 수준이니까.
내가 보여준 것 이상의 사실을 목격했을 것이다.
"그 녀석과 내가 조금 전의 그 기술을 함께 쓴다면 어떻게 될 거 같아? ……승산이 꽤 있어 보이지 않나?"
"그건…… 인정하지만……"
"그럼 됐잖아. 어차피 너 하나 죽는다고 나아질 상황도 아닌데, 쓸데없는 소리 해서 사람 힘 빠지게 하지 마. 분명 그 놈은 강할지도 모르지만, 난 그 자식보다 더 강한 아군의 도움을 받고 있어."
이것은 이제 일종의 신앙에 가까운 영역이다.
백신아는 강하다.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내가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이유는 오직 백신아를 향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녀석은 여전히 정체불명에, 제작내역도 수상한 존재이지만.
그 강함 하나만큼은 믿는다.
순수한 기량으로 따졌을 때, 녀석은 최고였다.
백신아가 있기 때문에 나도 힘을 낼 수 있다.
"샤를로트. 난…… 아니, 나와 '이 녀석'은 정말로 그 자식을 쓰러트릴 생각이야. 전 최강의 특급 모험가든 뭐든, 그런 건 상관 없어."
정말로, 쓰러트리고 싶다.
나는 주먹을 쥐고 그것을 샤를로트의 앞에 가져가며 말했다.
"너도 사실은 그러고 싶을 거야. 하루 아침에 낮도깨비처럼 나타나서 네 아버지를 그 꼴로 만들고, 올리비아도 그렇게 고생시킨 놈이잖아. 너도 당연히,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겠지. 당한 만큼 갚아주고 싶다고 생각하는 게 정상이야."
"……."
"하지만 아직은 받은 만큼 갚아주기에 네 힘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지. 그러니까, 이번에는 너를 대신해서 네가 당한 모든 고통을 갚아줄게. 대신, 너도 두 번 다시 그런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마."
주먹을 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리고 샤를로트의 어깨를 두어번 두드린 후 돌아선다.
"난 네가 죽지 않았으면 해서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 거니까. ……그런데 네가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하냐, 듣는 사람 힘 빠지게."
"……."
이제 와서는 나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겨야 하는 싸움이 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싸우는 이유가 꼭 그게 전부인 건 아니다.
샤를로트도 그것을 알아줬으면 했다.
……등을 돌린 뒤편에서 낮은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있잖아, 신현 씨……. 솔직하게 말하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어, 말해봐."
샤를로트의 눈시울이 팅팅 부어 있었다. 딸꾹질이 요란하다. 당연히 얼굴도 벌겋다. 젠장, 괜히 이상한 말을 했나. 멀쩡한 애를 울린 거 같아서 마음이 좀 불편하다.
"어쩌면 신현 씨도 알고 있을 지 모르겠지만…… 내 마력에서 평소와 다르게 검은색으로 변질된 부분이 보일 거야……."
샤를로트가 오른손으로 자신의 목을 부드럽게 감싸쥐었다. 말하지 않아도 조금 전부터 보고 있었다. 이제까지의 샤를로트에게선 찾아볼 수 없었던 '검은 투기'.
광증에 사로잡힌 샤를로트가 나를 습격한 그 때부터 눈에 띄기 시작한 부분이다.
지금까지는 코어 깊은 곳에 숨어 있었던 걸까.
"……검은색으로 변질된 부분이 점점 더 넓어지고 있어. 이곳의 환경이 좋기 때문인지,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 지금은 넓어지는 속도가 많이 느려진 상태지만……"
손톱을 세운 다섯 손가락에 샤를로트의 목이 살짝 찢어진다.
"어쩌면 이게 내 모든 마력을 침식한 그 때가…… 내 마지막일지도 몰라……."
* * *
샤를로트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살려줘. 신현 씨."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