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 7.5. 나와 그녀의 (진짜) 건전하지 못한 관계 (2)
* * *
의무실에 잠시 누워있다가 바깥으로 나왔다. 몸을 좀 쉬게 하고 싶어도 주변이 너무 시끄럽다. 그러고도 남을 상황이다.
회동이고 비무고 나발이고, 4위의 특급 모험가를 포함한 세 명의 특급이 걸레짝이 되서 나가떨어지는 대형사고가 터지고 말았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회동이 제대로 진행될 리가 없다. 회동은 뭐 제대로 진행되지도 않고 끝나버렸고, 의무실 바깥에서는 투덜거리면서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썰물처럼 관중들이 빠져나간 후 나와 루이스는 서로의 몸으로 서로를 지탱하며, 느릿하게 나아가고 있었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이 도시의 토박이만 알 수 있는 비밀스런 통로를 여러 개 경유해서 앞으로 걸어 나간다.
루이스가 건조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어떻게 될 거 같아?"
"회동이 이 꼴이 난 시점에서 아마 조용히 넘어가긴 어려울 거야. 아니, 조용히 넘어가면 더 문제지. 특급 모험가 중 세 사람이 순식간에 박살난 사태가 묻는다고 묻혀질 리도 없고."
관중들 앞에서는 스텔라가 어물쩍 넘겨버리기는 했지만, 세상에 완벽한 비밀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스텔라도 그녀 나름대로 지금의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골머리를 썩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남아있는 특급 모험가 전원을 호출해서 스페트로 가주를 토벌하러 나갈 수도 있고.
20여년 전, 스페트로 가문의 전대 가주를 특급 모험가로 이루어진 토벌대가 찾아갔던 것처럼.
"그럼 굳이 우리가 나설 필요가 없을 가능성도…… 아니, 그럴 리가 없나."
참 신기한 일이다.
마그누스를 비롯한 모든 특급 모험가가 쳐들어간다면 스페트로 가주라고 해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놈과 직접 맞붙어본 전투 경험은 그 자식이 겨우 그 정도로 쓰러질 리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적어도 나와 루이스가 생각하기에 그 남자를 상대로 확실하게 승리를 점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백신아.
그 녀석을 제외한 그 누구도 놈에게는 이기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백신아가 현실에서 싸울 수 있는 시간은 불과 5분에 지나지 않는다.
하다못해 힘과 속도라도 비슷한 수준이었다면 모를까, 기교를 제외한 모든 점에서 뒤떨어지는 상황에서 제한 시간 내에 싸움을 끝내는 건 백신아에게도 어려운 일이었다.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싸움을 이기지 못하는 건 주인이 한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인정하고 얌전히 그 자리에 서 있을 생각이 없었다.
난 백신아에게 선택 받은 검주이니까.
* * *
루이스와 서로를 부축하면서 간신히 연금술사의 공방에 복귀했다.
근래 들어 하도 자주 드나들다보니 이젠 내 자취방보다 여기가 더 정겹다. 한쪽에 내 이부자리가 놓여있는 광경도 익숙하다.
공방에 도착한 후, 연금술사는 나와 루이스에게 각자 알맞은 치료를 끝마친 뒤 바깥 분위기를 좀 살펴보고 오겠다며 외출했다.
바로 조금 전에 있었던 일 때문에 나와 루이스가 돌아다니면서 정보를 수집하는 건 조금 어려울 거라고 판단한 것 같다. 바깥을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로 몸 상태가 괜찮은 것도 아니고.
하지만, 정말 그게 전부일까.
우리를 두고 바깥으로 나가기 직전에 나를 보고 살짝 웃은 것처럼 보였는데, 그건 내 착각이었나……?
평소에 연금술사가 쓰는 넓은 침대 위에서 나와 루이스는 길바닥의 진흙처럼 엎어져 있었다. 숨 쉬는 게 답답해서 이리 저리 얼굴의 각도를 바꾸고 있는데, 그 와중에 루이스와 시선이 마주쳤다.
졸린 안색의 루이스가 나를 보며 질문했다.
"너, 상태는 어때?"
"뭐, 전신이 좀 찌뿌등한 걸 제외하면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야."
치료 술식도 시술 받고, 몸도 잠시 쉬고 있으니까 조금씩 활력이 도는 느낌이다. 전신에 걸쳐서 충격을 세게 받은 건 사실이지만, 요 근래 내가 겪어왔던 부상 정도에 비하면 이건 가벼운 수준이다.
한편 루이스의 경우, 마지막 라운드까지 스페트로 가주가 설렁설렁 전투에 임한 덕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본인에겐 참 굴욕적인 일이겠지만.
괜히 조금 전부터 "분하드아……" 하고 중얼대는 게 아니다.
내가 루이스 입장이었어도 속이 뒤집어졌을 상황이니까. 거기다가 나하고는 다르게 패배에 익숙하지도 않으니.
"……."
사이 좋게 침대 위에 엎어진 상태에서 다시 눈이 맞았다. 사이 좋게 꼼짝할 수 없는 상태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입을 가지고 조금 전의 전투를 함께 복기해나가기 시작했다.
현 시점에서 백신아는 나와 루이스를 아득히 능가하는 영역에 있는 실력자였다.
하수의 입장에서 고수의 전투를 복기하며 그 행동 하나하나에 담긴 의미를 나름대로 해석해나간다.
「아, 제가 그때 그런 식으로 움직였던 이유는요……. 그리고 스페트로 가주는 아마 이런 의도로 이 기술을 썼을 거에요…….」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백신아의 의도를 파악하고, 그래도 도저히 알아낼 수 없는 부분은 백신아의 도움을 받아서 해석했다.
바로 조금 전에 뼈아픈 패배를 경험했기 때문일까. 그래서 더더욱 복기하는데 의욕이 솟는 기분이다.
그 후에는 서로 번갈아 가면서 "그때 나라면 이런 식으로 했을 거다", "나는 이런 식으로 해보고 싶다", "그런데 그때 그런 식으로 행동했으면 이 꼴이 났을 거다", 하며 입으로 하는 가상 전투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때마다 우리는, 우리가 입으로 만든 스페트로 가주에게 패배했다.
우리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그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연금술사의 술식은 제대로 효과를 발휘했다. 나도 루이스도 건강과 체력으로는 어디 나가서 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몸, 체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버틸 수 없는 지독한 술식을 버텨가며 조금씩 회복되어 나가는 육체를 인식한다.
"루이스."
"어, 왜?"
그리고 어느 정도 일상적인 행동이 가능한 수준까지 체력을 회복한 뒤, 나는 루이스를 돌아보며 질문했다.
"난 이제부터 검왕검 내부에 있는 가상 공간 속에 들어갈 거야. 이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어."
무엇보다도 급선무는 오의의 습득이다.
스페트로 가주가 다른 특급 모험가들에게 쓰러진다면 나야 만만세지만, 현실이라는 게 그렇게 나 좋을대로 돌아가진 않을 거라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초신성은 내가 생각하는 승리 조건에 필요한 가장 최소한의 필요 요소다.
여기까지, 나는 내게 필요한 일을 잠시 머릿속으로 정리한 뒤 조용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넌 어쩔 생각이야?"
"어, 어쩔 생각이냐니."
루이스가 답지 않게 조금 말을 더듬거렸다.
큰일이다. 이 녀석이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니까 살짝 재미있다.
"같이 할 거면 같이 하고, 하기 싫으면 하기 싫다고 말해야 나도 방침을 정할 수 있잖아. 너도 조금 전에 신아한테 들었지? 가상 공간을 쓰기 위한 조건."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거 아니야? 뭐야, 너, 나보다 조금 빠르게 첫 경험 뗐다고 광고하는 거야?"
"그런 건 아니고."
하지만 내가 생각해도 조금 신기하다.
연금술사 앞에서는 처음 총각 딱지 떼기 전까지 엄청 우물쭈물 거렸었는데, 왜 이 녀석 앞에서는 이런 말이 술술 나오지.
알게 모르게 총각 딱지를 뗀 게 내 심리에 영향을 끼친 건가?
큰일이다. 수치심을 느끼는 감각이 무뎌지기 시작한 거 같아.
"너도 사실 속으로는 엄청 고민하고 있잖아. 안 그래? 이걸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타산적으로는 하는 편이 나을 거 같지만, 그런 타산적인 감정으로 첫 경험을 마치는 것도 껄끄러울 테니까."
"……윽."
정곡을 찔렸는지 루이스가 얼굴을 팍 붉혔다.
일일이 생각해볼 것도 없는 문제다.
지금 내가 한 말은 내가 연금술사와 처음으로 몸을 섞을 때 했던 생각이니까.
"……그래, 맞아.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하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느낌이야. 솔직히, 무슨 느낌인지 조금 궁금하기도 해. 내 또래 친구 중에서 경험 없는 건 나 뿐인 거 같고 말야."
아, 그건 그렇다.
이 세계에선 보통 나와 루이스 정도의 나이가 적령기로 취급된다. 내 또래의 남자들도 절반은 벌써 기혼자이고, 나머지 절반도 약혼자가 있을 정도니까.
루이스와 이야기가 통하는 동갑내기 여자들도 비슷하겠지.
그리고 루이스는 갑자기 먼 곳을 바라보며 "어제까지 나랑 디저트 가게 찾아다니던 애가 다음날 약혼 반지를 약지에 끼고 나타났을 때는 나도 큰 충격을 받았었지……" 하고 중얼거렸다.
잘은 모르겠는데, 뭔가 어마어마하게 충격적인 일이 있었나보다.
"그런데, 신현이 너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좀 섬세하게 말해줄 수는 없어?"
"내 성격 알잖아."
"그래, 잘 알지. 재수 없는 놈인 거."
루이스가 표정을 팍 구기면서 이를 드러냈다.
하지만 나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서 저지른 행동이다.
"그리고 내가 굳이 그렇게 말한 건, 네가 최종적으로 나하고 몸을 섞을 거라고 결론을 내릴 거 같아서 그런 거야."
"……무슨 근거로."
"네 성격을 근거로."
나는 담백하게 대답했다.
"넌 특급 모험가잖아. 그리고 최대한 합리적으로 생각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성격이야."
여기에서 포인트는, 합리적인 성격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생각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성격'이라는 부분이다.
그런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어떤 결론을 내릴 때 자신의 개인적인 심경이나 찝찝함을 최대한 도외시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게 바로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하면서.
루이스를 오래 보아온 나다. 그 정도는 알고 있다.
"그러니까 넌, 틀림없이 마지막에는 '찝찝하긴 하지만 승산을 조금이라도 높이는 편이 좋으니까'하고 결론을 내릴테지."
"……."
루이스는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수치심에 물들어서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나름대로 귀엽기는 하지만 하루 이틀 보아온 얼굴도 아니다, 난 아직도 소녀 같은 얼굴을 한 루이스를 보며 조용히 덧붙였다.
"네 성격을 잘 아는데, 내가 순수한 척 빼봐야 꼴이 우습잖아. 어차피 너나 나나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도 아니고, 타산적으로 생각했을 때 몸을 섞는 편이 합리적인 것도 사실이고."
말로 잘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그런 심리가 내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어차피 루이스가 최종적으로 그런 결론을 내릴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는 상황에서 나 혼자 순수한 척, 루이스를 생각해주는 척 몸을 빼는 건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좀 비겁한 게 아닐까 싶다.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루이스가 입술을 우물거리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끄으으, 백신현 주제에. 내 마음을 다 읽은 것처럼 건방지게……"
거 되게 불쾌한 말인데.
애초에 백신현 주제에가 뭐야.
내가 눈을 찌푸리고 있자, 루이스가 흥! 하고 콧김을 씨근거리면서 상반신을 일으켰다. 역시 특급 모험가, 몸을 회복하는 속도가 빠르다.
"그래, 맞아. 내 성격 잘 아시네. 네 말처럼, 난 마지막에는 반드시 그렇게 판단할 거야. 그렇잖아? 조금 부끄럽고, 조금 찝찝하다고 해서 승산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포기할 수는 없으니까."
푸, 하고 루이스는 입술을 삐죽대면서 숨을 토해냈다.
"그러니까 너하고 할 거야. 그래, 너하고 하긴 할 건데……! 잘 들어……!"
녀석의 얼굴은 오래 알고 지내온 나도 거의 보지 못한 정도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승산을 높이기 위해서 하는 거야……! 사무적 행위, 그뿐이라고……!"
다음 순간, 루이스는 내 뺨을 양손으로 잡고 입술을 맞춰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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