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 7. 나와 그녀와 그녀의 건전하지 못한 관계 (6)
* * *
예를 들어 이것을 두 사람이 번갈아서 두는 보드 게임이라고 가정해보자.
보드판을 앞에 둔 두 사람은 각각 흑?과 백白의 돌을 손에 쥐고, 자신의 차례가 돌아올 때마다 돌을 보드판에 올려서 조금씩 진영을 겨루어나간다.
스페트로 가주의 경우, 자신의 차례에 여러 개의 돌을 동시에 놓을 수 있다. 압도적인 완력, 한계 이상의 속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행위를 가능하게 한다.
한편 백신현은 스페트로 가주와 같은 완력도, 한계 이상의 속도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처럼 할 수는 없다. 그저 자신의 차례가 돌아올 때마다 우직하게 한 수, 한 수를 천천히 두어 나갈 뿐이다.
흑?에 비해서 선수?手도 느린 백白의 돌을 쥐고, 한 번에 여러 개의 돌을 동시에 늘어놓는 스페트로 가주에게 맞서 싸운다.
조금이라도 보드 게임에 대해서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니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이러한 양상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격 하나 하나를 단순히 숫자로 세어도 어마어마한 차이가 난다. 백신현이 1, 2, 3, 4를 세고 있는 동안 스페트로 가주는 이미 6, 12, 18, 24를 세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승부는 호각.
추는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고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단 하나.
그와 비교해서 백신현의 검술이 압도적으로 뛰어난 영역에 있기 때문이다.
스테트로 가주의 능력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그의 기교적 능력은 현역 중에서도 최고봉이라 꼽히는 제 1위와 비교해도 뒤쳐지지 않는 수준일 테니까.
하지만 백신현의 검은 인간을 초월한 영역에 있는 특급 모험가의 기교를 훨씬 더 뛰어넘은 경지에 있다.
그야말로 신의 경지라고 부르기에 부족하지 않은 영역에.
천변무궁류?????
제일검?一?
그리고 지금, 스페트로 가주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위협 앞에 높여 있다.
보이드의 분신 술식을 어레인지한 두 번의 페이크. 그리고 스페트로 가주의 시선이 위로 들린 틈을 타서 몸을 낮춘 채 접근한 백신현.
질풍이 부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힘과 속도 모두 스페트로 가주에게 뒤지고 있던 백신현의 칼끝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속도'가 붙는다.
이건 위험하다.
하얀 유성白?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초고속으로 가속된 검은 그 자리에 소리를 둔 채 홀로 나아갔음으로.
* * *
정적이 가라앉았다.
서로의 무기가 정확히 서로의 목을 겨누고 있는 태세였다.
나의 검은 조금만 더 나아가도 스페트로 가주의 목을 날릴 수 있는 위치에 멈춰 있었고, 그의 창도 마찬가지다. 강철로 된 창대가 조금만 움직여도 내 목을 부러트릴 수 있을 것이다.
잘 해봐야 공멸. 그런 상황이 나의 검과 그의 창을 동시에 멈추게 만들었다.
'……미친 놈.'
제한 시간이 끝나기 직전, 백신아는 삼렬성三??을 사용한 연속 페이크로 스페트로 가주의 자세를 완전히 무너트린 상태였다.
절대로 피하지 못하도록 몰아넣은 상태에서 극기의 각오로 휘두른 유성?이었다.
그런데, 그 상태에서 밸런스를 회복하고 창대를 휘두를 줄이야…….
서로의 검과 창이 목을 겨눈 상태에서 시선이 부딪친다.
'……들켜서는 안 돼.'
바닥을 딛고 선 무릎이 후들후들 떨리고, 전신에서 닥쳐오는 고통으로 정신이 몽롱했다. 할 수만 있다면 검이고 나발이고 모두 던져버리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 앉아서 뒹굴고 싶은 기분이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제한 시간이 모두 끝난 지금, 내게 남아있는 최후의 무기는 이 허세였음으로.
이전의 보이드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모종의 수작질로 백신아의 힘을 쓰지 못했던 그때와는 다르게, 지금의 우리는 쓸데없이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전투 태세에 들어갔다.
이 싸움에서 내가 한 것은 루이스가 절명하기 전에 비무대에 설치된 막을 파괴하고, 스페트로 가주의 공격을 받아낸 그 한 번 뿐.
그 후로는 확실한 승리를 손에 넣기 위해서 백신아에게 몸을 넘기고 지켜보는 위치에 있었다.
힘과 속도, 그 이외의 모든 것이 불리한 상황에서도 여기까지 상황을 끌어온 백신아의 실력에는 경이로움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길 수 없었다.
백신아에게 주어진 시간은 끝이 났고, 마법은 이제 풀렸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무리한 전투 속행에 의한 수많은 부상을 짊어진 채 필사적으로 이 자리에 서 있다.
어중간한 형태로 끝난 싸움을 마무리짓기 위해서.
"오늘은 이쯤 해두지."
서로의 숨통을 붙잡은 상황에서 먼저 입을 연 건 스페트로 가주 쪽이었다.
"보아하니, 네 몸을 차지하고 있던 '다른 존재'도 힘이 다한 모양이고."
들킨 건가.
역시, 최고 수준의 특급 모험가를 속이는 건 무리였나보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심장이 멎을 거 같았지만 나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스페트로 가주를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는 당신도 '다른 존재'인 건 마찬가지인 거 같은데."
"호?"
"넌 스페트로 가주님이 아니야. 그렇지?"
루이스와 부딪치는 모습을 보면서 확신을 느꼈고, 백신아에게 몸을 넘겨준 상태에서 쉴 세 없이 부딪치는 동안 그 확신을 뒷받침해줄 증거도 여러 개 확보했다.
틀림없다.
이 남자는 스페트로 가주가 아니다.
몸뚱이는 틀림없이 스페트로 가주의 것이 맞다. 하지만 그 안을 차지하고 있는 내용물이 다르다.
그렇다면 현재 스페트로 가주의 몸을 대신 차지하고 있는 저 마귀 같은 존재는 도대체 무엇인가……?
떠오르는 이름이 있다. 흑주대천신공??大???, 그 창술을 본 순간 연상되는 이름이 하나 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스페트로 가주는 내 목에 겨누었던 창대를 먼저 아래로 내리며 말했다.
"정확히 보았어. 그래, 맞다. 어떻게 알아낸 거지? 단순한 전투 능력의 차이로 넘겨 짚은 건가?"
"당신의 마력 속에서 이따금씩 특이한 마력 패턴이 감지됐어. 어딘가에서 느껴본 적 있는 마력 패턴이다 싶었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니까 내가 예전에 논문에서 본 적이 있는 마력 패턴이더군. ……'마력을 통한 인체 조작에 관한 연구' 말이야."
"그런 논문도 있었나. 내가 감옥에 있는 동안 나온 모양이군. 체크하는 걸 깜박했어."
오래 전의 일은 아니다.
루이스에게서 눈을 뜨기 전의 백신아를 넘겨 받고, 연금술사와 함께 내용물을 조사하던 과정에서 찾아냈던 논문에서 보았던 내용이니까.
내게도 꽤 익숙한 마력 패턴이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백신아가 내 몸의 지배권을 획득해서 대신 싸워주는 일련의 구조 또한 '마력을 통한 인체 조작'에 해당하는 내용이니까.
어쩌면 이 남자가 나와 백신아의 스위치를 쉽게 눈치챈 것도 같은 계통을 다루는 사람으로서의 직감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그'가 스페트로 가주의 몸을 움직이는 방식과 백신아가 내 몸을 움직이는 방식은 거의 동일했음으로.
"멋대로 남의 몸을 차지해서,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그다지 거창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야. 목적이 있어서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니거든. 그저 무량의 세월을 살아가면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니까."
그는 뻔뻔한 목소리로 말했다.
"굳이 목적이 있다면, 이 세상 누구보다도 강해지는 것이라고 해 둘까. 수명의 한계를 비롯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온갖 불합리한 제약을 넘어서서, 영원토록 최강의 자리에 군림하는 것. 그것이 내 목적이다. 그 어떤 짓을 하더라도, 그 어떤 수를 써서라도 말이야."
영원토록, 최강의 자리에 군림하겠다…….
매우 우스운 일이지만 한 순간 그의 말에 공감하는 내가 있었다. 물론, 공감따윈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지만 나 스스로는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강함 그 자체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온 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음으로.
물론 그렇다고 그가 행해온 모든 것을 인정할 생각은 없다. 이해는 하지만 그것 뿐. 쓰레기 짓에 이유가 붙는다고 쓰레기가 아니게 되는 것도 아니니까.
"불만스런 표정이군. 하지만 네가 이 자리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도 나의 이 성격 덕이라는 것을 명심해라. 방금 전의 싸움이 조금이라도 만족스럽지 않았다면…… 이런 식으로 널 봐주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때였다.
창을 아래로 거두었던 스페트로 가주의 몸에서 작게 파문이 일어난다 싶었을 때, 갑자기 그의 자세가 변해 있었다.
찌르기 자세, 온다, 창을 회전시키면서 발해지는 초고속의 찌르기……!!
『검주!!』
흑주대천신공??大???
혈견나선질주血?????
나의 대응은 늦었을까, 아니면 늦지 않았을까.
그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내가 검을 아래로 내린 바로 그 순간, 나의 몸은 이미 수십 미터를 일주해서 비무대의 벽에 처박혀 있었음으로.
천변무궁류?????
제삼검?三?
청
거성巨成
늦지 않게 펼쳐진 천변무궁류의 제삼검을 써서 간신히 그 공격을 멈춰세웠다. 조금이라도 방어가 늦었다면 아마 검을 들어올린 오른팔째로 상반신이 분쇄되었을 것이다.
"영 비실비실하게 보여서 그냥 검왕검을 손에 쥐는 거치대에 불과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움직이는 걸 보니 싹수는 있군. 완전한 불의의 기습이었는데, 그걸 막아냈나."
"……그러는 그쪽도 한계인 모양인데."
늦지 않게 기술을 펼쳐서 받아내긴 했지만, 내 몸은 그대로 쭉 밀려나서 등이 벽에 처박힌 상태였다. 신발 밑창이 바닥에 접한 상태로 미끄러졌기 때문에 내가 밀려온 자리에는 타이어 자국처럼 시꺼먼 흔적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나는 천변무궁류의 제삼검을 유지한 상태로 대꾸했다.
"조금 전에 쓰던 기술에 비하면 위력이 약해. 물론 그 상태로도 어지간한 특급 모험가 수준은 되겠지만…… 그쪽도 상당히 지친 상태같군. 그게 아니면 이렇게 아무런 피해 없이 받아낼 수 없었을 거야."
오른팔이 부러질 것처럼 아파왔지만, 어찌됐든 내 수준에서 받아내는 게 가능했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나처럼 상태가 심각하진 않았지만, 저 남자도 충분히 지쳐 있다.
괜히 물러나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피차 이번에는 승부를 미뤄두자는 것이지. ……조금 전의 그 기교는 명확히 내 수준을 초월한 것이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내 실력이 삼단 뛰기로 늘어난 듯한 느낌을 받았어."
스페트로 가주가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다시 한 번 보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너를 살려주는 것은 그 때문이라고 생각해라."
그는 담백하게 몸을 돌린 채 멀어져갔다. 나는 당장이라도 무릎에서 힘이 빠질 것 같았지만, 그 남자가 반대쪽 통로로 나갈 때까지 이를 악물고 버티고 있었다. 허세는 마지막까지 완수한다.
그 남자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그 자리에 버티고 있던 나는, 간신히 호흡을 수습하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어찌된 연유인지, 내가 밀려나간 위치에는 앞으로 쓰러진 루이스가 있었다. 한쪽 무릎을 꿇은 김에 루이스의 오른팔을 내 목에 걸고 부축해서 일으켰다.
"……동정 받아서 살아남은 느낌이야……"
고개를 숙인 루이스는 아직 의식이 남아 있었다.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맹수처럼 갸르릉 울고 있다.
"……분하드아……"
"동정은 아닐 거야. 애초에 이 자리에서 나를 죽여버린다고 치면 저 남자도 살아나가지 못했을걸. 여기에 지금 깔려 있는 특급 모험가가 몇인데."
이번 회동에 제 1위는 부재 중이었지만, 지금 관객석에는 제 2위부터 11위까지의 특급 모험가가 모두 앉아 있다. 아무리 스페트로 가주가 잘났어도 저기에 있는 전원과 싸워서 살아남을 수는 없다.
그러니까 그쪽도 우리를 죽이지 않고 나름대로 수위를 조절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루이스를 진심으로 찔러 죽이려고 했던 때와는 양상이 다르다.
컨디션이 만전일 때의 그라면 특급 모험가들의 포위진조차 빠져나갈 수 있었겠지만, 백신아와의 전투에서 그도 상당히 소모된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 특급 모험가에게 포위되면 그라도 살아남기 어렵다. 그래서 어느 정도 손속을 두어 특급 모험가들이 끼어들기 어중간한 상황을 만들어놓고 빠져버린 것이다.
허세와 연기에 속아서는 안 된다.
그의 행동은 지독히 합리적이었으니까.
뭐, 아무튼, 쉽게 말해서.
'네 덕인 거지. 신아야.'
『……하지만 이기지 못했어요. 분하다……』
이쪽도 루이스와 같은 말을 하고 있다. 그 꼴이 제법 우습다.
천하제일의 검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녀석의 내면은 실로 어린애 같았다. 도대체 어쩌다가 발생한 괴리인지 모르겠다.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루이스와 함께 통로를 나아간다. 그런데 느낌이 이상하다.
수상한 인기척이 여럿 느껴지는데, 그 하나하나의 기운이 루이스에 필적했다.
루이스보다는 살짝 쳐지는 사람도 있는 거 같긴 한데…… 루이스보다 강한 사람도 둘 정도 있다. 이 정도 기운을 발산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여기에 있는 것이 최소 특급 모험가 급의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멋대로 비무에 난입해서 난장판을 만들어 놓고,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인기척은 총 넷.
그리고 그 하나 하나의 얼굴이, 내가 익히 보아온 이들의 얼굴이었다.
"특급 모험가 여러분이 여기엔 어쩐 일로?"
조금 전까지 관객석에서 구경만 하던 이들이, 지금 이 자리에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중 제일 선두에 서 있는 소녀가 조용히 앞으로 나섰다.
머리카락은 갈색. 어깨 부근에서 단정하게 잘라서 정리했는데, 전체적으로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어서 동글동글한 인상이다.
눈동자는 바다처럼 푸르다.
알고 있는 얼굴이다.
제 3위의 특급 모험가, 현존하는 전투계 마법사 중에서 최강의 일각으로 꼽히는 여자.
"파괴된 경기장, 막이 파괴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리바운드로 다친 1급 모험가 열다섯 명, 막을 부순 상태에서 전투의 충격을 그대로 덮어쓰는 바람에 부상을 입은 민간인……. 상황을 이 꼴로 만들어놓고 멋대로 사라지는 건 용납할 수 없습니다."
홍련의 마법사, 스텔라.
"모두, 변상해 주셔야겠습니다."
* * *
"그 피해는 내가 모두 배상하지. 그거면 되겠나?"
"당신……?"
바로 그때, 그들이 서 있는 것보다도 훨씬 뒤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자네들도 그다지 떳떳한 입장은 아니지 않나. 얼른 나서서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으면서도, 저 어마어마한 초강자들의 밑천을 보고 싶다는 이유로 구경만 했으니까. 뭐,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만."
제 2위의 특급 모험가.
거완의 마그누스가 걸어오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