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이자는 검성의 길을 걷는 것 같습니다-36화 (36/287)

〈 36화 〉 6. 진료기록 위의 신창??

* * *

그리고, AM 06:32

"……아, 머리 아파."

좁은 욕조 안에서, 내 허벅지를 깔고 앉은 연금술사가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대며 중얼거렸다.

"아직도 관자놀이하고 하복부가 아플 지경이야. 오늘도 최소 반나절은 앉은뱅이 생활을 해야 할 거 같은데."

"전 사과 안 할 겁니다. 자업자득이라고요, 애초에."

"싫다는 말은 했는데."

연금술사는 물에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귓바퀴 뒤로 넘기면서 대답했다.

오늘도 밤을 꼬박 새고 말았다. 물론, 연금술사와 밤새도록 해댄 탓이다.

문제는 내가 아르바이트 첫날부터 숙소 바깥에서 외박을 했다는 거고, 늦어도 여덟 시가 되기 전까지는 내 방으로 돌아가야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들키지 않을 수 있다는 거지.

내가 이 정도로 유혹에 약한 놈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걸까.

숫총각이었던 시절에는 루이스의 그 풍만한 가슴 앞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던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유혹에 홀라당 넘어가버리는 가벼운 인간으로 전락했단 말인가…….

설마 남자가 동정을 잃으면 약해진다는 게 이런 현상을 은유한 표현이었던 건가.

경악할만한 사실을 한 가지 알게 되었다.

나는 물에 빠진 강아지처럼 머리를 푸르르 흔드는 연금술사의 정수리에 내 턱을 콕 소리가 나게 꽂았다. 이리저리 흔들리던 조그만 머리통이 정지했다.

"누누히 말하는 거지만, 다음주에는 이러지 마요. 내가 점심이 됐든 저녁이 됐든 먼저 찾아올 테니까. 알았어요?"

"나도 네 의견은 존중할 생각이지만, 네가 너무 늦으면 그때는 나도 몰라."

"모르긴 뭘 몰라요. 헛소리 하지 말고요."

연금술사와 말다툼도 하고, 어르고 달래가면서 어떻게든 확답을 받아냈다.

다음 주에는 여기에서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 * *

허리가 빠져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연금술사를 씻겨주고 닦아주며 대충 정리한 뒤, 안락의자에 앉혀놓고 바깥으로 나왔다. 혹시 누가 알아볼 수도 있겠다 싶어 후드도 푹 눌러쓴 상태였다.

저택을 탈출할 때 입고 있었던 잠옷은 어깨에 맨 크로스백에 들어 있었다.

다행히 연금술사의 공방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은 외곽에 있다. 나는 여기에서 시작해서, 사람들이 잘 지나다니지 않은 음습한 샛길만을 이용해서 스페트로 가문의 별장까지 도착하는데 성공했다.

'……좋았어.'

벽 너머에 경비가 제대로 서 있는지 확인한 뒤, 방범 술식을 일시적으로 무력화시키는 술식을 전개했다. 이 술식의 효과는 대략 5분 가량 지속된다. 가볍게 심호흡 한 뒤, 다리에 힘을 주고 벽을 넘었다.

오히려 밤에 탈출할 때보다 경비가 더 느슨한 것 같다. 이것저것 해야 하는 일이 많은 시간대인 데다가, 아침 먹는다고 경비들도 서로 자리를 바꾸는 시간이다보니까 전체적으로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잔뜩 긴장한 상태로 벽을 넘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간단하게, 내 방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지난 밤은 즐거우셨어요?』

"넌 또 무슨 헛소리야."

방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괴상한 환대를 받았다. 오늘 새벽에 탈출할 때는 연금술사를 안고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바쁠 지경이라서 백신아를 챙겨가지 못했었는데, 밤새 나를 기다리던 모양이다.

목소리가 살짝 퉁명하다.

『검주하고 연금술사 선생님이 나간 게 거의 1, 2시 정도였는데 아침 해가 뜨고 나서야 이렇게 돌아오셨잖아요. ……또 잔뜩 하셨죠?』

"……어쩌다보니까."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백신아가 키히힛, 하고 웃음 소리를 냈다.

『역시 젊은 게 최고네요. 혈기도 왕성하셔.』

젠장, 한동안은 이거 가지고 계속 놀려대겠구만.

쉴 세 없이 '밤에 있었던 일'을 가지고 날 찔러대는 백신아의 공세를 계속 피해다니면서 옷을 갈아입는다. 편하게 움직일 수 있는 활동복을 입고, 허리춤에는 백신아를 찼다.

현재 시각, 오전 7시 50분.

여러 가지 일이 있었던 밤이 지나가고, 제대로 된 하루의 막이 오른다.

* * *

처음에는 샤를로트의 실력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고 여러 번 삽질을 거듭했지만, 그것도 한 나흘 정도 지나니까 상당히 익숙해졌다.

오전에는 내가 알고 있는 이 지역의 검술 고유의 특징을 가르치고, 오후에는 샤를로트가 공격하는 걸 최대한 받아내고, 흘려보내면서 최대한 체력을 빼는 방식의 커리큘럼을 진행했다.

무예는 입으로 하는 게 아니다. 아무리 이론이 빠삭해도 직접 써보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샤를로트는 월도, 극, 검, 톤파 순으로 무기를 쉴 세 없이 바꿔끼면서 내게 덤벼들었다.

호흡이 거칠다.

콰직, 맞받아친 목검이 톤파를 후려치고, 샤를로트의 몸을 그 자리에서 몇 미터 정도 밀어보냈다. 처음에는 샤를로트가 다치지 않게 힘 조절을 하는 게 무척이나 어려웠었는데, 이것도 하다 보니까 상당히 익숙해졌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서로의 간격을 견제하던 와중, 문득 샤를로트가 나를 향해 고개를 들고 이렇게 질문했다.

"신현 씨는…… 제대로 검을 배우지는 않았다고 했지……?"

"어, 그랬지."

샤를로트의 말투가 살짝 변한 것처럼 느껴진다면, 정상이다. 무인은 세치 혀가 아니라 손에 들고 있는 무기로 말을 하는 법.

이 쪼끄만 소녀는 나와 며칠 동안 검을 부딪치면서 꽤 친밀감을 느끼게 되었는지, 어제부터 내게 허락을 받고 편하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예의도 바르고 부끄러움도 많이 타는 아이지만, 의외로 이 소녀는 진짜 친한 사람에게는 말을 놓는 경향이 있다.

나도 뭐, 의외로 성격이 서로 잘 맞아서 많이 놀랐다. 나이치고는 상당히 어른스러운 성격이라 대화도 잘 통하는 편이고.

나는 물론이고 이 소녀도 꽤 성격이 괜찮은 편이라서 이렇게 되는 거다. 괜찮은 사람끼리 서로를 존중하면서 대화를 나누다보면, 사이가 좋아지는 건 당연한 거잖아.

『풉. 검주도 참, 농담도.』

내 성격이 뭐가 어때서.

나는 손바닥으로 검자루를 두번 두들긴 뒤, 다시 고개를 들어서 샤를로트의 말에 집중했다.

"신기하다……. 명가의 자제도 아니고, 제대로 된 스승도 없이 그렇게 강해질 수 있다니……."

정확히 말하면, 지금은 스승이 있는 상태다.

단순 검술 능력만 치면 내가 알고 있는 그 누구보다도 대단한 실력자가 내 허리춤에 걸려 있으니까.

하지만 이 스승과 함께 한 시간은 아직 한달도 채 되지 않은 상태다.

그 이전까지는 루이스에게 배우고, 남의 검술을 눈으로 훔치면서 실전 속에서 실력을 키워 왔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대답했다.

"그런 사람도 있는 거지, 뭐. 세상에 있는 그 어떤 유파라도, 제일 처음에는 시조??의 독학에서 시작하잖아."

"아, 그건 그렇다……."

그리고, 굳이 샤를로트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무예가 가장 크게 발전하는 건 피와 철이 오가는 전투 속이다. 그 싸움 속에서 죽지만 않는다면, 전사는 상당히 많은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다.

내 전투 능력의 뿌리에는 그런 것이 있었다.

명가의 가르침처럼 세련되진 않아도, 투박하고 거친 실전의 교훈은 내 몸의 골수까지 박혀 있다. 그리고 그것이 누대를 이어서 쌓아올린 명가와는 또 다른 형태의 강함을 낳는다.

스페트로 가주가 전자라면 나와 루이스는 후자에 해당하는 무인이었다.

파르네제 가문의 검술이라는 기초는 있었지만, 그것을 실전 속에서 발전시켜온 것은 우리들이다.

괜히 루이스가 자존심이 높은 게 아니다.

나는 이래저래 현실 앞에서 많이 치이고 살아온 탓에 자존심과 자신감도 상당히 깎여 나간 상태였지만, 루이스는 나보다 늦게 검을 쥔 주제에 누구보다도 빠른 속도로 높은 경지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으니까.

솔직히 말해서 내가 지금까지 이 저택에서 본 스페트로 가주의 수준을 보면 그가 이번 '회동'에서 루이스에게 이기기는 좀 어렵지 않을까 싶다.

그 정도로 루이스의 재능은 가공할 것이라서, 사실 샤를로트의 재능도 내 눈에는 그다지 차지 않는 수준이었다.

일반인의 시선으로 보면 이 아이도 어마어마한 천재인데 말야.

"……? 저기, 왜 그래……?"

"아, 너처럼 재능 있는 놈을 후계자로 두고 있는 가주님이 참 복 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거짓말은 아니었다.

아무리 가지고 있는 무예가 대단하다고 해도, 그 사용자가 수명이 다해서 죽으면 그 무예는 사라진다.

그래서 이 바닥에서 제일 중요한 건 후계자를 잘 두는 건데, 샤를로트는 누가 봐도 최고 수준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 진짜배기 원석이었다.

이 아이라면 장차 스페트로 가주조차 넘어서서,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지 모른다.

"……."

내 나름대로 칭찬을 해주고 싶어서 한 말인데, 이상하게 이 말을 들은 샤를로트는 오히려 뭔가 탐탁치 못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야,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나는 눈을 깜박이면서 질문했다.

"샤를로트, 너 갑자기 왜……"

"백신현."

그때, 갑자기 바로 등 뒤에서 허스키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다. 팔짱을 낀 올리비아가 나를 보고 있었다.

묘하게 표정이 굳어 있다. 어째선지는 잘 모르겠다.

"뭐야, 갑자기 왜."

평소보다 조금 딱딱한 표정으로 올리비아가 입을 열었다.

"별 건 아니고, 내일 있을 커리큘럼을 취소해줄 수 있겠나?"

"응?"

"왜?"

나는 물론이고 샤를로트도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박거렸다. 올리비아는 샤를로트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인 후, 다시 나를 보면서 말을 시작했다.

"내일 이 별장에 중요한 손님이 오시는데, 그분께서 이 연무장을 쓰게 될 예정이거든. 그 대신 너는 아가씨와 좀 놀아주지 않겠나? 저택 바깥으로 나가도 좋아. 아니, 오히려 가주님은 그러기를 바라고 계실 거라고 생각한다."

"연무장을 쓸 만한 손님이라면……, 무인이야?"

"그렇다고도 볼 수 있지."

되게 애매한 표현이다.

하지만 음, 뭐, 커리큘럼이 쉬면 오늘 분의 급여는 어떻게 되는 거지? 속물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나한테는 그게 더 중요한데.

"물론 내일 분의 급여는 제대로 나갈 예정이다. 아니, 오히려 더 쳐서 나가게 될 예정이라고 가주님께서 말씀하시더군."

좋아, 난 그거만 지켜주면 아무래도 좋다.

이제 중요한 건 샤를로트의 의향인데…….

"아가씨는 괜찮으시겠습니까?"

"나? 나는……, 나도, 괜찮아. 나도 별장에만 있으니까 좀 심심했고, 바깥을 한 번 돌아다녀보고 싶어."

"……그렇다시는군. 백신현, 네게 부탁해도 되겠나?'

음, 나야 뭐, 상관은 없는데.

놀면서 돈 벌 수 있는 거니까, 최고지.

"근데 내가 얘하고 좀 친해진 건 맞지만, 나 같은 놈에게 중요한 아가씨를 맡겨도 되겠어? 얘하고 친한 사람 없나?"

"보통 너처럼 아가씨를 편하게 대하는 사람은 없지. 아가씨가 붙임성이 그리 좋으신 성격도 아니고."

올리비아는 딱 잘라서 말했다. 내가 눈을 돌려서 샤를로트에게 확인을 요청하니까, 녀석도 조금 창피해하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진짜로 그런가? 난 오히려 상당히 친해지기 쉬운 성격이라는 인상을 받았는데.

"물론 너한테만 아가씨를 맡겨둘 수는 없으니까, 보이지 않는 형태로 호위가 몇 명 붙기는 할 거다. 하지만 멀리 떨어져서 지켜보기만 할 테니까, 그렇게 불편하지는 않을 거다."

난 눈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난 누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불편한 느낌이 팍팍 들지만…… 됐어 뭐. 이것도 업무의 연장이라고 생각하지 뭐."

관광 가이드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될 거 같다.

이 도시가 부잣집 영애 아가씨 입맛에 맞을 지는 잘 모르겠지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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