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 5. 개와 왕자 (5)
* * *
"어디 보자……."
그리고 그 다음 날 새벽, 내가 지내는 자취집 우체통에 스페트로 가문의 문장이 날인되어 있는 편지가 한 부 도착해 있었다.
시험에 합격했으니까 오늘부터 바로 나오면 된다는 짧은 내용이었다. 다 읽고 나면 이 편지는 자동으로 불타서 없어질 테니까 조심하라는 내용도 추신으로 남겨져 있었…… 아니, 잠깐 뭐라고?
그 내용을 읽자마자 허겁지겁 편지를 구겨서 멀리 던져버렸다. 그 직후 화륵, 하는 소리와 함께 종이에 불이 붙더니, 순식간에 새까만 재만 그 자리에 남았다.
"……돈 많은 사람들의 생각은 이해가 안 돼."
질린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 나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 * *
바로 어제 왔을 때도 그랬지만, 다시 봐도 참 커다란 저택이다. 한 바퀴 도는 것만 해도 일일 거 같다.
난 실내가 너무 넓으면 오히려 진정이 안 되는 성격이라, 사실 이런 구조는 조금 껄끄럽다.
쇠로 된 대문은 어제와는 달리 굳게 닫힌 상태로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내가 잠시 고민하고 있을 때 갑자기 문이 안에서 열렸다.
사람은 없어 보이는데, 기척을 감지하고 알아서 열리는 구조인가? 그런 기술도 있다고 이야기는 들었지만 실제로 쓰는 걸 보는 건 처음이다.
말 그대로 사는 환경이 다른 부자들의 세계에 조금 감탄하면서 안으로 들어간다. 조금 나아간 그 자리에,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청발의 남성이 공손한 자세로 서 있었다.
"어서오십시오. 백신현 님."
"아……, 반갑습니다."
올리비아하고는 이미 안면도 텄고, 말도 서로 놓기로 합의를 한 상태였지만 공적인 자리에서는 이런 식으로 예의를 차리기로 한 모양이다.
정원에는 올리비아만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수많은 고용인들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으니까.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올리비아가 내민 손에 가방을 내민다.
"가주님과 아가씨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쪽으로."
"네."
나는 내심 긴장하지 않은 척을 하면서 정원을 가만히 둘러보았다. 나는 바로 여기, 이 자리에서 올리비아와 한바탕 실력을 겨루었었다. 결과는 다섯 번 붙어서, 다섯 번 모두 전승. 하지만 그 다섯 번의 비무 모두 쉬운 싸움은 아니었다.
나도 그렇지만 올리비아도 뺨에 반창고를 하나씩 붙이고 있었다. 심한 부상은 없었지만 피부가 찢어지고 베이는 등의 상처는 장난 아니게 많았다.
『저희도 돈 열심히 벌어서, 이런 곳에서 한 번 살아보죠.』
'난 지나치게 큰 집은 오히려 안심이 안 돼서."
『히잉…….』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백신아의 말에 차갑게 대꾸하면서 올리비아의 뒤를 따라간다.
란즈 드 스페트로 가주가 있는 응접실까지는 커다란 세 개의 문을 지나쳐야 했다. 잘못 밟으면 빚쟁이 인생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고급스런 융단을 밟고 걸으면서 앞으로, 좀 더 앞으로.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문이 열린 순간, 나는 강렬하게 느껴지는 마력의 잔향에 눈을 찌푸릴 뻔 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 정도의 마력과 투기는 루이스나 그 늙은 보이드에게서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아니, 그들과 비교하면…… 살짝 떨어져 보이는 거 같기도 하고……?
강한 조명을 쓰는 건지 방의 불빛이 살짝 눈부셨다.
내 자취방보다 넓은 크기의 응접실에 4, 50대 즈음으로 보이는 중년인이 조용히 서 있었다. 조금 떨어진 위치의 소파에는 저번에도 한 번 보았던 라임색 머리카락의 소녀가 보인다.
내 앞에 서 있던 올리비아가 허리를 아래로 굽히면서 그에게 예의를 차렸다.
"가주님. 백신현 님을 데려왔습니다."
"수고했네."
살짝 색이 바랜 잿빛 머리카락을 뒤로 묶어서 넘긴, 사람 좋은 인상의 문인 같은 남자. 나는 이미 작년에 있었던 '회동'의 비무에서 그의 얼굴을 본 기억이 있었다.
란즈 드 스페트로.
루이스보다 한 단계 급이 높은, 제 12위의 특급 모험가. 대대로 실력 있는 무인을 배출해낸 스페트로 가문의 현 가주이며, 창술로는 어디 가서 지지 않는 유명한 실력자이기도 하다.
아직도 루이스와 그의 비무가 눈에 선하다. 시간 제한까지 끌고 간 다음, 루이스를 상대로 판정승을 얻어낸 모습도 인상 깊었고.
이런 형태로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사람의 인연이라는 참 신기하다.
"작년에 있었던 회동에서도 한 번 봤었지. 란즈 드 스페트로일세."
"백신현입니다."
란즈 가주가 먼저 내민 손을 붙잡고 악수한다. 겉으로 보면 상당히 흐릿한 인상의 사내지만, 손의 굳은살만 봐도 하루 이틀 창을 쥐고 수행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는 국가에서 공인한 명실공히 최고 수준의 창수였다.
맞잡은 손이 떨어진 후, 란즈 가주는 몸을 돌려서 라임색 머리카락을 양갈래로 묶은 소녀를 가리켰다.
"……."
겨우 그뿐인 행동에 소녀의 어깨가 움찔했다.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걸까. 상당히 유약해보이는 인상이다. 입고 있는 옷은 고급스러운데, 하는 행동은 허드렛일 하는 하녀 같다고 해야 하나.
소녀는 상당히 피부가 흰 편이라 살짝 얼굴을 붉힌 것 뿐인데도 그 변화가 눈에 띈다.
"내 딸아이, 샤틀로트일세. 내가 의뢰를 모험가 길드에 건 것도, 우리 딸아이에게 이 지역의 풍토 검술을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이지."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소녀는 우물쭈물 거리면서도 겨우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가볍게 고개만 끄덕여서 인사했다.
풍토 검술이라. 그런 걸 정말로 구분할 수 있는 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게 있다면 나는 이번 일에 상당히 적합한 인선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 쭉 이곳에서 살았고, 이곳에서 검을 배워왔으니까.
애초에 유파도 뭣도 없는 노예 검투사식 아류??지만.
"이쪽 지방은 특히 몬스터의 발생이 잦은 편이라 몬스터를 상대하는데 특화된 방향으로 무기술이 발전했다고 들었네. 이번 일이 딸아이에게 좋은 경험이 되었으면 좋겠군."
"알겠습니다."
다행히도 그쪽은 내가 특기로 삼는 영역이다. 노예 검투사 시절에도 검 한 자루로 몬스터와 싸우면서 흥을 띄우는 역할을 주로 맡아왔었으니까.
"일단 솜씨는 우리 가문의 2인자인 올리비아와 호각 이상으로 맞붙은 시점에서 검증이 되었다고 봐도 충분하고, 우선 자네의 약력에 대해서 좀 알고 싶군. 다른 세계 출신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듯, 나 같은 사람은 그렇게 드물지 않다. 다른 세계에서 하루아침에 이 세계로 떨어진 인간들 말이다.
그리고 그 중 9할이 처음 일주일을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잃는다.
일단 떨어지는 위치가 완전히 랜덤이라는 게 문제다. 그나마 바다에 떨어지는 케이스는 없지만, 사람이 사는 도시에 떨어지지 않으면 여기저기 쫓겨다니다가 몬스터에게 잡아먹히는 경우가 부지기수니까.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서, 겨우 겨우 도망쳤더니 노예 상인들과 마주쳐서 검투사로 끌려가는 나 같은 경우도 있고.
"별로 재미는 없을 겁니다."
나는 눈을 두어번 깜박인 뒤, 재미 없는 과거 이야기를 하나씩 되짚어나가기 시작했다.
* * *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사실 내 인생이 어느 정도 정상적인 궤도에 올라선 건 그다지 오래 되지 않은 일이다.
이 세계에 떨어진 직후에는 상황 파악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혼란에 빠져 있었고, 그 상태에서 노예 상인들에게 픽업 당해서 꼬박 반 년 동안 노예 검투사로 뼈빠지게 굴러댔었다.
다행히 내가 싸움에는 좀 소질이 있었는지, 동기들이 죽고, 검의 기초를 일러준 선배들이 줄줄이 죽어 나가는 와중에도 내 몸뚱이 하나는 어찌어찌 지켜낼 수 있었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조금씩 검이 내 몸의 일부처럼 느껴지고, 지금까지 죽어나간 동료들의 얼굴도 하나둘씩 희미해져갈 때 즈음.
"나하고 별 나이 차이도 안 나 보이는데, 저런 애도 검투사로 싸우는 거야?"
귀족가의 영애 신분로 검투 경기에 초대 받은 소녀와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
그것이 나와 루이스의 첫 만남이었다.
* * *
"오늘은 이 정도로만 하고, 내일부터 정식으로 나와주길 바라네. 조금 전에도 말했듯이, 과외 기간 동안에는 여기에서 머물러야 하니까 개인 짐은 알아서 준비해오고."
"알겠습니다."
가볍게 내 약력도 소개하고, 저택 내의 구조도 소개 받은 뒤 오늘은 이만 퇴근하게 되었다. 본격적인 과외는 내일부터, 그리고 2주 정도 되는 과외 기간 동안에는 이 저택의 손님용 방 중 하나를 빌려서 사용하게 된다.
과외가 진행되는 동안 내가 주의해야 하는 사항을 몇 가지 설명한 뒤, 나는 스페트로 가문의 저택을 뒤로 하고 다시 연금술사의 공방에 복귀했다.
날이 많이 더워진 탓인지 연금술사는 백의를 벗고 검은 원피스 차림이었다.
겨드랑이가 그대로 보이는 데다가 등도 확 패여 있는 옷이라서 은근히 노출도가 높다. ……혹시 지금 날 유혹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연금술사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서, 어디까지나 추측의 레벨이긴 하다. 물론, 무표정한 얼굴의 연금술사에게서 감정을 읽어내는 건 아무래도 어려운 일이다.
루이스도 공방 한쪽에 앉아있다. 전체적으로 푹푹 찌는 여름 날씨인 와중에 연금술사의 공방은 비교적 서늘한 편이라서 피서라도 온 것처럼 축 늘어져 있다.
상반신을 테이블에 앞으로 기댄 상태이기 때문에 풍만한 가슴이 부드럽게 눌린다. 루이스는 땀에 젖어서 목덜미가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하나씩 떼어내면서 고개만 이쪽으로 돌렸다.
"그럼 그 동안에는 외출도 못하는 거야?"
"점심 시간이나 저녁 이후에는 자유 시간이 있는 모양이지만, 너무 바깥에 싸돌아다니는 것도 좋지 않을 거 같은데."
검술을 가르친다고 해도, 그날 그날 느낌에 따라서 가르칠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커리큘럼 내용도 어느 정도 생각해둬야 할 거 같고.
이미 선금으로 어느 정도 돈을 받은 시점에서 일을 대충 처리할 생각은 없었다. 은혜와 원수는 반드시 받고, 계약 내용은 철저하게 준수한다. 그게 바로 내 방식이다.
"……노파심에 말하는데, 그쪽으로 홀랑 넘어가진 마라?"
"갑자기 뭔 소리야."
루이스가 갑자기 도끼눈을 뜨고 말했다.
"내가 지금까지 너한테 쏟은 돈과 시간이 얼만 줄 알아? 투자금 회수도 못했는데 네가 다른 쪽으로 넘어가면 곤란하다고."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애초에 누구 밑으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도 없고."
담백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리고 루이스가 말한 것처럼, 내가 루이스를 내버려두고 어디로 홀랑 넘어가더라도 받은 만큼은 갚아주고 가는 게 맞는 거지.
따지고 보면 이 백신아도 루이스의 손을 거쳐서 내 쪽으로 넘어온 거고.
뭐, 말은 이렇게 하지만 사실 내가 일방적으로 루이스에게 도움을 받아왔던 건 절대 아니다. 내가 루이스에게 이런 식으로 도움을 받기 시작한 건 최근 2, 3년 동안의 경향이고, 그 이전까지 치면 내가 루이스에게 해준 게 많으니까.
목숨도 몇 번이나 구해줬었지.
지금은 희대의 천재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루이스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아직, 루이스가 검의 길을 걷기 전의 일이다.
사실 순수하게 검을 수행해온 햇수로만 치면 내가 루이스보다 더 오래됐다. 성과는 하늘과 땅 차이지만.
루이스가 한쪽 눈을 살짝 감았다.
"……뭐, 그 정도로 네 가치가 많이 높아졌다는 거지. 원래 가지고 있던 능력에 마력이 더해진 것만으로도 눈에 띄게 강해졌으니까. 눈독을 들이는 사람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가죽 장갑에 싸인 검지 손가락만 펴서 허공에 대고 빙글빙글 돌린다.
"마지막 부품(마력)이 빠져서 헛돌고 있던 톱니바퀴들이, 이제 하나씩 힘을 받기 시작한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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