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 4.5. 역시 연금술사의 성지식은 잘못됐다.
* * *
차가운 아침 공기를 쐬면서 왼팔의 붕대를 천천히 풀었다. 하체의 붕대는 벌써 다 풀었고, 왼팔에 감겨 있는 붕대가 마지막이다.
연금술사가 시도 때도 없이 붕대를 갈아주었기 때문에, 가장 마지막에 감긴 붕대는 새 것처럼 깨끗했다. 일주일에 거친 회복기 끝에 간신히 원래 기능을 되찾은 왼손을 천천히 쥔다.
"……아직은 몸이 좀 무겁네. 며칠은 더 있어야 회복되겠는걸."
평소의 상태를 100이라고 치면 지금은 끽해야 70 정도. 아주 몸 상태가 나쁜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제대로된 컨디션인 것도 아니었다.
한동안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몸 여기저기가 아직 굳어 있는 상태다. 계속 움직여주면서 굳은 부위를 풀어줄 필요가 있다.
보이드와의 최종전으로부터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
그리고 최후의 붕대를 풀어헤친 이 순간, 비로소 나의 일상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 * *
보이드를 쓰러트리고 일상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다시 되찾은 일상은 이미 내가 알고 있던 일상이 아니었다.
일단, 지금의 나는 백수다. 이제까지 다니고 있던 식당에서 짤렸거든.
당연한 일이다. 요 며칠 내내 보이드다, 마검이다 하면서 일을 죄다 펑크내고 말았으니까.
이제 와서 직장에 복귀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벌써 나 대신에 일할 사람을 뽑아서 쓰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고.
그나마 내가 뻗어 있는 동안 연금술사가 찾아가서 사정을 설명하고 지금까지 일한 만큼의 급여는 지급 받기로 합의는 됐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건 그다지 심각한 문제도 아니었다. 꼭 이런 형태는 아니더라도 상급 모험가 검정 시점에 합격하면 일을 그만두고 모험가 일만 하면서 돈을 벌 생각이었으니까.
조금 일찍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고 생각하면 크게 문제는 없다.
지금까지 내 발목을 시도 때도 없이 붙잡아대던 체질 문제도 완벽하게 해결된 상태다. 다음 상급 모험가 검정 시험은 하늘이 뒤집어져도 합격할 자신이 있다.
그럼 도대체 뭐가 문제냐고?
그건 바로 자꾸 내 윤리 감각을 시험에 들게 하는 연금술사의 행동 때문이다.
"신현아, 네 정액을 좀 써야 할 거 같아."
"……또요?"
평소의 말투나 나를 대하는 태도는 거의 달라지지 않았지만, 한 번 일선을 넘은 이후로는 거리낄 게 없어졌는지 내게 '특수한 재료'를 요구하는 빈도가 상당히 높아졌다.
사실 그거까지야 그렇다 칠 수 있다. 그런 부탁을 들을 때마다 물러나려는 나를 붙잡고, "껄끄러우면 내가 직접 채집해갈게"라며 수술용 장갑을 끼는 연금술사의 태도도 이해는 가능하다.
정액이 정말로 효율이 좋은 재료인 건 나도 알고 있으니까.
"……역시 한 번으로는 안 가라앉나. 그럼 뭐, 어쩔 수 없지."
"이럴 거 같았어……"
나는 연금술사의 아래에 깔린 상태에서 한숨을 쉬었다.
말은 채집이지만, 그냥 '채집'에서 끝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처음에는 손만 쓰던 연금술사가 조금씩 혀를 쓰기 시작하고, 그런 식으로 두어번 뽑아낸 후에는 내 위에 올라타서 삽입하는 패턴이 반복된다.
그때마다 이유로 갔다 붙이는 건 많다. 내 코어 안에서 동조하고 있는 연금술사의 마력을 재조정하기 위해서라든가, 오늘처럼 자료 부족으로 학회에서 잔뜩 쳐맞고 돌아온 뒤, 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라든가(원인은 보이드 사태를 대처하느라 자료 준비가 미흡했기 때문).
추세로 따지면 거의 하루에 한 번 꼴로 연금술사와 몸을 섞고 있다. 물론 내가 진심으로 거부하면 그녀도 물러나주겠지만, 그런 걸 단칼에 거부할 수 없는 것이 수컷의 슬픈 본능이라는 것이다.
어찌됐든, 그녀의 안은 매우 부드러웠고, 언제나 처음 삽입한 것처럼 내 것을 강하게 조이고 있었다.
기나긴 질내사정이 시작된다.
"으윽……, 후우……, 하아……"
연금술사는 내 위에서 몸을 축 늘어트린 채, 간헐적으로 뜨거운 숨을 내쉬고 있었다. 맞닿은 그녀의 아랫배가 언덕처럼 둥글게 솟아있다. 사정을 한 번 할 때마다 대략 이 정도의 양이 그녀의 안에 들어가게 된다.
수십 초 가까이 길게 이어지는 사정 후, 연금술사는 절정의 여운을 느끼면서 잠시 동안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경련하는 성대를 다시 가다듬고, 민감해진 몸이 서서히 평소의 상태로 돌아가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연금술사의 사연풀이가 시작된다.
오늘은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고, 이런 점이 스트레스였다. 그 년은 다음 번에 반드시 뭉게버리고 말겠다, 이런 식의 사소한 투정이다. 그리고 사연풀이가 끝난 후에는 다시 한 번 위에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한다.
연금술사가 나와의 행위에 집중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일단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목적이 제일 큰 것처럼 보였다. 그녀를 모르는 사람은 구분하기 어렵겠지만, 오래 알고 지낸 나의 시선으로 보면 행위를 하기 전과 끝난 후의 표정이 명확히 다르다.
여러 번 반복된 절정으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 연금술사로부터 주도권을 넘겨 받은 뒤, 나는 그녀의 아래에서 음경을 찔러 올리기 시작했다. 힉, 하고 연금술사의 몸이 떨렸다.
지나치게 하는 게 안 좋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허리를 움직이는 나도 참 머저리 같은 놈이다.
나도 중간부터 갑자기 불이 붙었다.
늘 그렇듯, 이번에도 연금술사가 뻗어버릴 때까지 잔뜩 해댄 후, 나는 침대의 끄트머리에 걸터 앉아서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있었다.
연금술사는 침대에 누워서 이불을 입이 가려지는 높이까지 당겨서 덮어쓰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좀 적당히 하는 게 좋겠어요."
"지금까지……, 실컷 즐겨놓고…… 그런 말을 하다니……"
"그건 저도 아는데요."
결국, 최종적으로 나와 연금술사의 관계는 언제나 화간이었다. 시작은 언제나 연금술사가 끊지만 그걸 거부하지 않고 얌전히 받아들인 시점에서 나도 공범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나도 연금술사를 규탄하거나 꾸중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꺼내고 있는 게 아니었다.
둘이 같이 힘을 모아서, 적당히 횟수를 줄여보자는 말을 하고 있는 거다.
"스트레스를 푸는 건 좋은데, 너무 과해도 이게 안 좋다니까요. 한 번 이런 식으로 몸을 섞을 때마다 소모되는 시간도 적지 않고요."
"그런가. 듣고 보니까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적당한 성관계는 마음을 치유하는데 도움을 주고, 정서적으로도 안정감을 느끼게 해 주지만, 이걸 적당히 조절하지 못하고 과하게 해대는 순간 곧바로 정신 위생에 적신호가 켜진다.
나도 피눈물을 흘리면서 하는 말이다. 마음 같아서는 나도 좀 더 하고 싶은데, 사람이 너무 본능에만 휘둘려도 못 쓰는 법이다.
"……알았어. 그럼 네 말대로 횟수를 줄이도록 하고…… 그건 좋은데, 본격적으로 횟수를 줄이기 전에 시도해보고 싶은 일이 하나 있어."
"시도해보고 싶은 일이요?'
"응. 너도 지금까지 실컷 해대면서 느꼈겠지만, 함께 몸을 섞어도 항상 내 쪽에서 먼저 뻗었으면 뻗었지. 네가 뻗은 적은 없었잖아."
"그건 그렇죠.'
뭐지,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든다.
나는 살짝 말을 떠듬으면서 연금술사의 말을 기다렸다.
"시험해보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혹시 내일 시간은 있어?"
"시간은 있죠. 저 일 그만뒀잖아요. 지금 백수에요."
아니다. 지금은 거짓말을 해서라도 다른 일이 있었다고 말을 했어야 했나? 하지만 낙장불입. 한 번 내뱉은 말은 다시 주워담을 수 없다.
"그렇지. 응, 잘 됐네."
하지만 연금술사도 내가 백수라는 건 벌써 알고 있다. 그녀는 이불에 반쯤 가려진 얼굴로 고개를 살짝 끄덕인 뒤,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객관적으로 보면 매우 사랑스러운 광경인데, 왜 그 미소를 볼 때마다 자꾸 소름이 돋는 걸까.
혹시 내가 연금술사의 손에 죽게 된다면, 사인은 복상사일지도 모르겠다.
* * *
그리고 바로 그 다음 날.
나는 연금술사의 공방 앞에서 한참 동안 서성이고 있었다.
아직 연금술사가 지정해준 시간까지는 조금 여유가 남아 있다. 도착하기는 한참 전에 도착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느낌이 좋지 않아서 공방에 들어가지 않고 여기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시간을 죽이고 있는 중이다.
"뭐야, 신현이 너 벌써 도착했었네. 안 들어오고 뭐 해?"
당연히 이런 모습은 매우 눈에 띈다. 예고 없이 안쪽에서 벌컥 문이 열리고, 평소처럼 검은 원피스 위에 하얀 가운만 한 벌 걸친 연금술사가 나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
"어서 들어와. 준비는 대충 다 끝났으니까."
준비, 라는 단어에 괜히 두려움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떨떠름한 표정으로 연금술사의 반지하방으로 내려간다.
보이드에 의해서 완전히 작살났던 게 얼마 전의 일인데, 공방은 벌써 새 것처럼 말끔해져 있었다. 연금술사의 주요 속성이 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마법을 써서 해결을 본 거겠지.
너저분한 연금술사의 공방 안쪽에는 그녀가 침실 겸 서제로 쓰는 좁은 방이 하나 있다. 바로 어제도 연금술사와 몸을 섞었던 침대가 보인다.
연금술사는 침대 앞에 있는 의자로 나를 데려온 후, 포에 싸인 정체불명의 환약과 잔에 담긴 수상한 액체를 하나씩 내밀었다.
내가 영 못 미덥다는 듯 쳐다보자, 연금술사는 검지를 튕기면서 입을 열었다.
"이건 네 정액을 분석해서 네 체질에 맞게 만든 약이야. 아, 실제로 네 정액이 재료로 쓰인 건 아니니까, 찝찝하게 여길 필요는 없어."
정말로 내 기분을 배려했다면, 아예 그런 말을 안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을.
나는 씁쓸하게 표정을 굳힌 후 새하얀 환약과 보라색 액체를 가리키며 질문했다.
"효과가 뭔데요?"
"네 감도를 높여주는 효과를 가지고 있어. 이걸 마시면 굳이 내 겨드랑이를 보지 않아도 흥분 상태에 들어갈 수 있을 테고, 감도도 높아져서 아마 평소보다 더 빠르게 사정할 수 있을거야. 당연히 평소보다 좋겠지."
"미약이잖아요."
내가 뭘 잘못 들었나 싶어서 귓구멍을 후비고 다시 한 번 물어봤지만, 두 번, 세 번 들어봐도 결과는 같았다.
아무리 봐도 미약이잖아 이거.
도대체 뭘 만든 거야.
"이걸 저한테 먹게 해서, 뭘 어쩌시려고 그래요?"
"당연히 네 한계를 보고 싶은 거지. 얼마나 해대야 네가 나처럼 뻗게 될 지 궁금해졌어."
거 참, 더럽게 쓸데없는 호기심이구만.
나는 표정을 팍 구겼지만 오히려 연금술사는 그런 내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눈을 깜박였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불공평하잖아."
"불공평이요?"
"응, 나는 실신할 때까지 기분이 좋아지는데, 너는 그러지 못하니까."
연금술사 딴에는 이것도 선의에서 우러난 행동이라는 건가.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그런 거 가지고 불평한 적은 없었는데……. 참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다.
"그리고 네가 그걸 마시고 나면, 난 이걸 내 몸에 주사할 거야."
"주사…… 그건 또 뭔데요?"
"성감을 둔화시키고, 체력을 일시적으로 증강시켜주는 물건이지. 네 성감만 높인다고 한계를 볼 수 있을 거 같진 않으니까. 내 몸에도 따로 준비를 해두려는 거야."
연금술사가 백의의 헐렁한 소매를 걷어 올려서 가느다란 자신의 팔뚝을 가리켰다.
"고무줄로 묶은 다음에, 팔이 접히는 부분에 주사하는 거지."
……주사하는 비주얼이 되게 범죄적인데.
감각을 둔화시키고, 체력을 증강시켜준다…… 이건 아무리 봐도 마약류의 효과 아닌가? 저거 진짜 안전한 거 맞아?
잘못 썼다가 몸에 이상이 오고 그런 건 아니겠지?
내가 이렇게 질문했더니, 그녀는 여러가지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 대답을 입에 담았다.
"이 정도는 해독할 수 있으니까 문제 없어."
그럼 그거, 평범한 사람이 쓰면 문제 있다는 소리 아닌가. 지금이라도 연금술사를 경찰에 신고해야 하나.
"그것보다도,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거야? 마시고 싶다면 마시고 싶다, 마시기 싫다면 마시기 싫다고 확실하게 대답해줘."
"솔직히 조금 찝찝하긴 한데요."
"……."
연금술사의 표정이 쩍 굳는다.
솔직하게 말하래서 솔직하게 말한 거 뿐인데, 반응이 왜 이러지.
나는 종이포에 싸인 환약을 손바닥에 얹은 채 연금술사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저도 제 한계를 알고 싶은 건 똑같거든요. 재미있어 보이니까……, 연금술사 선생님이 시키는대로 해보는 것도 괜찮을 거 같은데요?"
조금 전에는 찝찝하니 어쩌니 말을 하긴 했지만, 실제로 사람한테 해코지 할 만한 물건을 만드는 사람은 아니다.
최악의 경우라도 며칠 앓다가 끝나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환약을 입에 넣고, 잔에 담긴 액체를 단숨에 꿀꺽 삼켜버렸다.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 순간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가슴을 중심으로 열이 확 퍼지는 게 느껴졌다.
"어?"
갑자기 시야가 옆으로 확 기울어지더니, 그대로 털썩 쓰러졌다.
……혹시 오늘 내가 죽는다면, 사인은 약물중독 아니면 복상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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