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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이자는 검성의 길을 걷는 것 같습니다-25화 (25/287)

〈 25화 〉 4. 시원찮은 그를 위한 육성방법 (8)

* * *

"……."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자취방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의식을 잃기 전의 기억이 흐릿해서 상황을 파악하는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보이드의 비장의 카드로 추정되는 '노인의 분신'을 상대로 맞서 싸우고, 버티고, 또 버틴 끝에 간신히 검에게 바톤을 넘기고 의식을 잃어버린 것까지는 기억이 난다. 기억이 나는데…….

그 다음에 어떻게 됐지?

중간에 한 번 정신을 차려서 검하고 대화를 나눈 것 같은 기억도 있고.

일단 내가 사지 멀쩡하게 살아서 자취방 천장을 다시 보게 된 걸 보면, 이기기는 이긴 건가?

목 아래의 모든 부위에 붕대가 칭칭 감겨 있어서 움직이기가 불편하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오른손의 검지를 끝에서부터 조금씩 굽혀보았다. 찌릿, 하고 감전 당한 것처럼 통증이 어깨까지 올라왔다.

"아으……."

"뭐야, 일어났네."

팔꿈치를 모서리에 부딪쳤을 때처럼 오른팔 전체가 찌르르 떨리는 고통에 신음하고 있을 때, 갑자기 코앞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 지금 어디에서 목소리가 들렸다고?

나는 눈을 찌푸리면서 그나마 멀쩡한 목을 뒤로 쭉 당기면서 살짝 들려 있는 이불 안쪽으로 시선을 움직였다.

몸의 반절 정도가 감각이 마비되어 있는 상태라서 눈치채는 게 늦었다.

연금술사가 내 가슴팍을 부드럽게 감싸는 형태로 찰싹 붙어 있었다.

"이건 도대체 무슨 그림이에요?"

"아, 이거."

어마어마하게 놀랐지만, 최대한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질문부터 해본다. 부상이 심한 환자는 절대안정이 기본이라는 걸 모를 사람이 아니다. 이유 없이 이런 일을 저질렀을 리 없다.

연금술사는 오른손으로 내 코어가 있는 위치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면서 대답했다.

"첫 번째 이유는 회복 술식과 네 마력이 갑자기 서로 반발하면서 거부 반응을 일으키기 시작했기 때문에, 최대한 가까운 위치에서 술식을 네 마력과 동조시키기 위해서야. 회복 술식은 잘못 쓰면 세포 재생을 폭주시킬 수도 있으니까."

"첫 번째, 라는 건. 두 번째 이유도 있는 겁니까?"

"응."

연금술사의 말을 듣고 나서 찬찬히 살펴보니까. 정말 그녀의 말처럼 내 안의 마력이 회복 술식과 융화되어 가는 흐름이 보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두 번째 이유를 질문했다.

"두 번째 이유는 내 회복 술식이 네 마력과 반발할 가능성을 확인한 이상, 최대한 가까이에서 집중적으로 경과를 지켜볼 필요가 느껴졌기 때문이야. 확률로 계산하면 회복 술식이 폭주할 가능성은 5% 미만이지만, 그 가능성을 간과할 수는 없으니까."

"그럼……"

"그리고 세 번째."

내 말을 가볍게 끊으면서, 연금술사는 힘을 주어 마지막 이유를 덧붙였다.

"네가 자고 있는데, 갑자기 춥다며 몸을 떨기 시작했거든. 그래서 내 체온으로 좀 덥히려고 한 거야. 마법으로 온기를 더해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회복 술식하고 서로 간섭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제가 그랬다고요?"

"응. 아마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거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오늘까지 해서 나흘 동안 침대 위에서 시체처럼 잠만 자고 있었으니까."

나흘이라.

그렇게 오래 잤구나.

"그래도 생각했던 것보다는 일찍 일어난 편이야. 난 네가 최소한 일주일은 기절해 있을 거라고 짐작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까지는."

"경추 염좌. 우측 쇄골 불완전 골절."

연금술사가 다시 한 번 내 말을 끊었다. 그리고 마치 녹음기 테이프처럼, 한 번도 끊어지지 않고 내 몸에 벌어졌던 부상을 열거하기 시작했다.

"오른팔 불완전 골절. 왼팔 완전 골절. 왼쪽 손목 골절 및 양손의 엄지를 제외한 모든 손가락 골절. 우측 4번, 좌측 3번 늑골 복합 골절. ……상반신만 해도 대충 이 정도야. 하반신으로 내려가면 더 많지."

나도 통각이 있으니까 대충 저 정도로 다쳤겠거니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의 입으로 들으니까 조금 말문이 막힌다.

무기질적인 목소리로 차분하게 열거하는 연금술사의 태도가 조금 소름끼치게 느껴질 정도다.

"이 정도로 심하게 다쳤으면서 겨우 나흘 만에 눈을 뜰 수 있었다는 것만 해도 보통 일은 아니지. 절반은 내 회복술식 덕이고, 나머지 절반은 네 체력 덕이야."

연금술사는 지문이 닳아 없어진 손으로 내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진 뒤, 이불을 걷고 내 곁에서 조금 떨어졌다. 그녀는 늘 입는 검은색 원피스 차림이었다. 내 몸에 붙어있었기 때문인지 여기저기 구겨진 흔적이 보인다.

그리고 연금술사가 내게서 멀어진 순간, 갑자기 한기가 들면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내 체온이 상당히 낮아진 건 사실인가보다.

연금술사는 나를 부축해서 상반신만 일으킨 자세로 조정한 후, 난로 위에서 미리 데운 주전자를 손에 들었다. 뜨거운 물을 머그잔에 쪼르르 따르고 나서 정체불명의 가루를 투입. 그것을 나더러 마시라며 내 입가로 내밀었다.

"마셔. 체온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될 거야."

"잘 마실게요."

펄펄 끓는 물이나 마찬가지인 것을 연금술사의 도움을 받아 가면서 조금씩 마셔나간다. 아, 되게 쓰긴 하지만 묘하게 몸에 스며드는 느낌이라 기분이 나쁘지 않다.

한 잔을 모두 비우고 나니까 묘하게 몸에 열이 오른다. 기분도 노곤노곤하게 늘어지는 것이, 눈만 감아도 금방 잠에 빠질 것 같다.

연금술사가 다시 한 번 나를 부축해서 침대에 눕게 했다. 그리고 연금술사 본인은 침대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서 다리를 꼬고 있었다.

"그걸 마셨으니까 금방 다시 잠들 수 있을거야. 쓸데없는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지금은 몸을 회복시키는데 집중해."

"……알았어요."

루이스는 무사히 이겨낸 건지, 내가 쓰러진 후에 보이드는 어떤 식으로 마무리를 했는지.

물어보고 싶은 건 잔뜩 있었지만, 꾹꾹 눌러참으며 다시 이불을 덮는다.

기분 좋은 나른함이 닥쳐온다.

나는 그 흐름에 천천히 몸을 맡기려다가, 문득 생각난 게 있어서 다시 눈을 뜨고 연금술사를 돌아봤다.

"참, 말하는 걸 잊고 있었는데. 선생님의 마력을 제 코어에 섞은 게 생각보다 크게 도움이 되더라구요."

"내 마력이?"

잠시 벗어뒀던 안경을 다시 쓰고, 독서를 시작하려던 연금술사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네, 천변무궁류의 두 번째 기술은 외부의 마력을 고밀도로 몸에 덧대어서 신체를 강화하는 기술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제 체내의 마력을 먼저 고밀도로 조정해둘 필요가 있거든요."

일정 이상의 질량을 가진 물질이 인력?力을 띄게 되는 것처럼, 천변무궁류의 제이검?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선 나 자신의 몸에 순환하는 마력을 고밀도로 만들 필요가 있다.

마력의 밀도가 높아지는 과정에서 그 색채는 붉은색으로 변질된다.

붉은색.

연금술사의 마력과 같은 색채로.

천변무궁류의 두 번째 기술과 연금술사의 마력의 색채가 같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연금술사의 마력은 일반적인 마력에 비해서 높은 밀도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천변무궁류의 제이검?二?에 쉽게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내 코어에 섞여 있는 연금술사의 마력이 나를 돕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승산을 높이기 위해서 나와 몸을 섞었던 연금술사의 선택은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그 덕에 살았어요. 진짜로요."

"잘 됐네."

연금술사는 눈을 가늘이며 살짝 푸근하게 웃은 뒤, 조용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내 처녀가 무의미하게 쓰이지 않아서 다행이야."

눈을 감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눈앞에 연금술사는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에는 루이스가 앉아서 발을 나뭇바닥에 딱딱 부딪치고 있다.

내가 의식을 되찾은 걸 눈치챘는지, 루이스가 "오"하고 소리를 냈다.

"선생님은?"

"경찰 쪽에, 사정청취."

"……?"

내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자, 루이스는 가볍게 한숨을 쉰 뒤 내가 의식을 잃고 쓰러진 후에 벌어진 사건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일단, 보이드는 죽지 않고 경찰 측에 넘겨진 모양이다.

최대한 그 존재를 알리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루이스도 상당히 소모된 상태라서 도시의 방범을 뚫고 몰래 들어가는 건 불가능했고, 내가 죽기 직전의 중태였기 때문에 도시의 정문을 지키던 경찰에게 보이드를 맡기고 도시 안에 들어가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 정도로 무시무시한 범죄자를 경찰이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루이스의 말에 의하면 자기가 난입하기 전에 이미 검이 보이드의 코어를 아예 박살내서 두 번 다시 마력을 쓸 수 없는 몸으로 만들어버렸다고 하니, 걱정할 필요는 그다지 없어 보였다.

그리고 연금술사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잠시 경찰서에 간 상태라고, 루이스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보이드고 나발이고 그냥 그 자리에서 죽이고 떠나고 싶었는데, 그 영감을 그 꼴로 놔둔 건 네가 아니라 검이 한 일이잖아. 무슨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나도 살려서 경찰에 넘겨준 거야."

"경찰에 넘어간 그 자식이 쓸데없이 입을 나불거리면 어떡하지?'

"아, 그건 괜찮아."

지극히 지당한 나의 의문에 루이스는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대답했다.

"경찰에 맡기기 전에 나도 한 번 상태를 살짝 봤는데. 그 영감탱이 완전히 정신이 나간 상태더라고. 그 지하에서 지상까지 옮기는 동안 10년은 늙었더라. 미쳐버린 것 같던데."

"그 정도로 충격이 컸던 건가."

"나야 모르지. 너나, 네 검이 무슨 짓을 저지른 거 아니었어?"

말투를 보아하니, 검의 의중을 알고 싶어도 대화가 통하지 않다보니 지금까지 잠자코 있었던 것 같다.

연금술사의 약 때문인지 평소보다 몸상태가 조금 좋다. 나는 잠시 입술을 우물거린 뒤, 눈을 감고 검을 호출했다.

'다 듣고 있었지?'

『네, 검주.』

창가에 비스듬히 놓여 있던 검이 내 부름에 답했다.

'보이드를 살려둔 건, 놈이 우리가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야?'

『네, 맞아요. 맞아요. 근데 그냥 살려두면 쓸데없이 입을 나불거릴 수도 있을 거 같더라구요. 그래서 일단 코어를 부수고, 제 검술로 심령心?을 제압해둔 상태에요.』

아, 무슨 뜻인지 알겠다.

그래서 보이드가 미쳐버린 것 같다는 소리가 나온 건가.

심령을 제압된 인간은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하고, 기초적인 대사만 반복할 뿐이니까.

일종의 식물인간과 비슷한 상태다.

물론 멀쩡한 인간의 심령을 제압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고, 정신적으로 크게 타격을 입은 상태가 아니면 유효한 효과를 보기도 어렵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효과를 본 셈이다.

어차피 우리 쪽에서 보이드를 제압해서 데려온다고 해도 관리해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니까.

말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서 경찰에게 관리를 맡기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전달했더니, 루이스는 감탄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한데. 그런 짓도 할 수 있구나, 그 녀석은."

『히히.』

루이스의 반응이 즐겁다는 듯 검은 개구지게 웃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다.

녀석은 갑자기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는 듯 『아! 맞다!』 하고 높은 목소리로 기성을 내질렀다.

귀청이 따끔따끔하다. 나는 눈을 찌푸리며 질문했다.

'갑자기 뭐야?'

『제 이름이요, 이름! 보이드 그거 쓰러트리고 나면 제 이름 지어주신다고 했었잖아요!』

'참, 그랬었지.'

해주기로 했었는데, 겨를이 없어서 지금까지 잊고 있었네.

하지만 그렇다고 대충 막 지어주기도 조금 그렇고. 아, 일단 작명서부터 좀 사서 공부를 좀 해볼까.

대충 지어주는 것도 좀 그렇고. 이왕 할 거면 제대로 준비해서, 확실하게 끝장을 봐야지.

"루이스. 혹시 할 일 없으면 작명서 좀 사와줄 수 있냐."

"아, 그거라면."

내 부탁을 듣고, 루이스는 영문모를 소리를 입에 담았다. 의자에 앉은 채, 검지를 쭉 뻗어서 내 머리맡을 가리키고 있다.

검지가 향하는 곳으로 머리를 돌렸더니 그 자리에 작명서가 한 권 놓여있었다.

표지에는 팔괘가 그려진, 동양식 작명서다.

뭐야, 이게 왜 이런 데 있지.

"연금술사 선생님이 네가 일어나면 찾을 거 같다고 거기 놔두고 가셨는데."

"……아, 그러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준비성 하난 끝내주는 사람이다.

표지에 팔괘가 그려진 건…… 그 사람의 출신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도 아니고. 그 사람은 연금술사이면서도 연단술사의 일면 또한 가지고 있으니까.

그럼 일단, 이걸 가지고 열심히 머리를 굴려보실까.

"일단 내가 지어줄 생각이긴 하지만, 내 센스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거든. 그러니까 루이스 너나, 검의 의견도 한 번씩 들어보면서 짓고 싶어. ……그래, 말 나온 김에 한 번 물어볼까. 검 너는 어떤 이름이 좋냐?"

『저요?』

이런 질문은 생각하지 못했는지, 벽에 기댄 검이 그 자리에서 살짝 움찔했다.

음음, 하고 검은 한참을 달그락거리면서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럼 검주랑 비슷한 이름으로 하고 싶어요. 검주 같은 이름이 여기에서 흔한 건 아니잖아요. 특별해보이기도 할 거 같고. 전 그런 이름이 좋아요.』

"알았어. 그럼 일단, 네 마음에 드는 단어부터 하나씩 짚어가면서……"

* * *

저벅, 저벅.

나는 끝없이 펼쳐진 새하얀 공간 속을 걷고 있었다. 표지판도 없고, 목표지점도 보이지 않는 허허벌판이었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에 망설임은 없었다.

그냥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이 보였다.

한참을 걷던 나는, 비로소 멀리 떨어진 곳에서 등을 돌리고 서 있는 한 사람의 인영을 찾을 수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은발. 오른손에는 길게 뻗은 장검.

내가 찾던 사람의 뒷모습이다.

"도착하셨나요. 검주."

"그래."

내 기척을 느끼고 은발의 여인이 돌아선다. 길게 쭉 뻗은 속눈썹, 장난기를 가득 품은, 달이 반사된 호수처럼 빛나는 푸른 눈동자.

이 세계에서 '녀석'이 선택한 모습이다.

"아직 몸은 회복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수행을 쉴 수는 없잖아. 이제 겨우 출발선에 섰는데."

"바람직한 마음가짐입니다. 검주는 그런 면이 참 좋아요. 강해지고 싶어서 환장한 것 같은 그 태도가, 제 마음에 쏙 들거든요. 검사로 태어났으면 그 정도 패기는 있어야죠."

"……당연하지. 결국 난, 이번 보이드와의 싸움에서 한 방도 제대로 먹이지 못했으니까."

주먹을 천천히 쥔다.

그것을 느릿하게 펴고, 다시 한 번 쥐면서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오른손을 움직여서 보이지 않는 허공을 움켜쥔 그 순간 그 자리에서 검이 쭉 뻗어나왔다.

"그런가요? 루이스 아씨와 연금술사 선생님의 복수는 해 드렸는데요."

"할 수 있다면 내가 하고 싶었어."

"실질적으로 그 남자의 술식과 작전을 모두 파괴하고 한 방 먹여준 건 검주신데, 욕심이 과하시네요."

"욕심이 많거든. 힘도 없는 주제에."

그 자리에서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살짝 웃으며 오늘 막 새로 붙이게 된 녀석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자, 그럼 슬슬 시작할까? 백신아白??"

백신아가 씨익 웃는다.

"흐, 좋은 이름이네요."

"그래? 어릴 적에 보던 만화가 생각나서 장난 삼아 말해본 이름인데, 네가 이거에 꽂힐 줄은 몰랐어."

아무거나 붙여줘도 좋아할 것처럼 굴더니, 이 녀석의 취향은 진짜 더럽게 까다로웠다.

이것도 맘에 안 든다. 이것도 별로다. 이건 좀 고급스러운 느낌이 부족한 것 같다.

그런 식으로 한참 동안 까탈스럽게 굴다가, 갑자기 꽂힌 게 이 이름이다. 내 이름, 백신현白??에서 한 글자만 바꿨을 뿐인데 무조건 이걸로 해달라면서 떼를 써댔다.

모르는 사람이 이 녀석의 이름을 들으면, 내 동생처럼 생각할까.

본인이 마음에 듣다고 하니 나도 거기에 맞춰주긴 했지만, 솔직히 지금도 이것이 최선이었을까 의구심이 좀 든다.

"검주, 검주, 한 번만 더 불러주세요."

"그래, 신아야."

"히히, 좋네요 이거. 좀 더 일찍 지어달라고 부탁할 걸 그랬어요. 제 안에서 뭔가, 보이지 않는 뿌리가 단단하게 내린 듯한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지금 느낌이 되게 좋아요."

내 눈이 이상한 건가.

이전에 비해서 백신아의 모습이 평소보다 조금 더 진해진 것 같은 느낌이 풍긴다.

느껴지는 마력의 충천??함도 보통이 아니다.

이름을 지어준 것 뿐인데, 더 강해진 건가?

아니 뭐,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백신아가 정말로 강해진 거라면 내게 있어서도 희소식이니까.

벽은 높을수록 좋은 법.

백신아의 변화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천변무궁류의 기수식을 취한다.

"갑니다, 검주. 아무쪼록 검주께서 실망하지 않으시도록, 최선을 다하겠어요."

"그래, 언제든지 와라. 백신아."

"히히."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좋은지, 녀석은 한동안 진지한 표정을 무너트린 채 생글생글 웃고만 있었다.

하지만 언제라도 공격은 올 수 있다. 백신아의 검술에 따른 몇 가지 대응 패턴을 상정한 뒤, 자세를 단단하게 굳힌 상태로 기다린다.

시작 신호를 알리는 심판은 어디에도 없었지만, 백신아와 나는 서로 미리 정해두기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천변무궁류의 흐름이 서로 얽히고 뒤엉켜, 하나의 거대한 폭풍이 되어 몰아쳤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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