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 4. 시원찮은 그를 위한 육성방법 (7)
* * *
"아─ 진짜 죽겠다."
루이스는 지면에 털썩 주저앉은 상태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직 소녀티를 벗지 못한 뺨에는 일자로 긴 상처가 남아있고, 그 이외에도 겉으로 노출된 팔뚝이나 스타킹에 감싸인 다리 등에도 크고 작은 생채기가 보인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상처에 비해서 실제로 크게 다친 곳은 없다. 바로 어제 깁스를 풀었던 팔이나 다리도 잘만 움직인다.
한쪽 무릎을 세운 채, 장검을 비스듬히 품에 안은 루이스는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떨어진 보이드의 상반신을 보고 있었다.
상반신과 조금 멀리 떨어진 위치에 그의 하반신이 힘 없이 쓰러져 있다.
당연히 루이스의 일격에 의한 것이다.
"……말도 안 돼……"
멀리서 들려온 소리에 루이스가 고개를 갸웃하며 눈을 깜박인다. 사실 루이스에게도 그렇게 쉬운 싸움은 아니었다. 두 명의 특급 모험가급 존재가 남긴 격돌의 흔적은 연무대 뿐만 아니라 이 공간의 벽이나 천장 같은 장소에도 참혹한 파괴를 남겼으니까.
그리고 그 끝에, 결판이 났다.
루이스의 검이 보이드의 허리를 절단하는 형태로.
"분명, 속도도 힘도…… 기술마저도…… 내가 앞서고 있었는데……"
"속도가 빠르고, 힘이 세고, 기술이 뛰어나면, 무조건 이기는 건가?"
물론 최초로 나타난 보이드는 가슴팍에 거대한 바람 구멍이 뚫렸음에도 죽지 않고 살아있었지만, 그것은 연금술사와 백신현이 분신의 성질을 간파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실수였다.
정체만 알고 있다면 두려울 게 없다.
보이드라도 재생할 수 없는 지독한 파괴를 그 몸에 수도 없이 때려박았다.
저것은 이제 더 이상 싸울 수 없다.
"결국 전투는 수 싸움이야. 아무리 강한 기술에도 강한 점과 약한 점이 있고, 그걸 알 수 있다면 속도가 느리고, 힘이 약하고, 기술이 부족해도 충분히 파고들 수 있지. 나의 강점을, 상대의 약점에 부딪치는 식으로 말이야."
루이스는 살짝, 미소를 지어보이는 여유마처 보이면서 이렇게 말했다.
"첫 싸움에서 나를 죽이지 못한 시점에서 이미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고. 난 지금까지, 같은 상대와 두 번 붙어서 진 적이 없거든."
이길 수 있는 싸움을 지는 건 삼류다.
이길 수 있는 싸움을 이길 수 있는 것이 이류.
그리고 진짜배기 초일류는,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고 해도 뒤집어서 승리를 손에 쥘 수 있다.
바로 지금처럼.
"아……"
얼굴도, 체형도, 성격마저도 전혀 닮지 않았지만 보이드의 뇌리에는 한 순간 그 검에게 선택 받은 남자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전혀 닮지 않은 두 남녀의 실루엣이 겹친다.
자신과 비교해서 모든 면에서 크게 뒤지고 있었음에도 그 결과를 뒤집고, 기어이 정해진 승패마저 엎어버린 신세대의 강자 두 사람의 모습이.
그리고 그 위에 보이드는 또 다른 한 사람의 이미지를 겹치고 있었다.
강인한 체구, 끝을 알 수 없는 저력을 숨긴 검은 눈동자.
한때 검왕이라 불리던 남자의 모습을.
흐읍, 하고 루이스는 마치 무릎에 고장이 난 노인처럼 힘을 줘서 몸을 일으킨 뒤, 상반신만 남은 보이드의 머리를 가볍게 짓밟았다. 피는 없었다. 뼈도 보이지 않았다. 애초부터 그런 존재라는 것을 루이스도 알고 있었다.
두쪽으로 갈라진 분신의 몸이 하나씩 기능정지 하는 모습을 살펴본 뒤, 루이스는 아직도 저릿저릿한 어깨를 잡고 팔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중얼거렸다.
"자, 나는 이렇게 끝냈는데. 신현이는 잘 끝났을라나. ……그놈의 자식이 질 거라고는 요만큼도 생각하지 않지만."
* * *
"……음?"
피투성이의 백신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의 목을 감싸쥐었다.
정확히 말해서, 지금의 그 몸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백신현이 아니다. 평상시에는 검 내부에 잠재되어 있던 또 하나의 인격이 한 번 쓰러졌던 몸을 꼭두각시처럼 조종하고 있었다.
같은 얼굴, 같은 몸뚱이임에도 현재 그 몸을 취하고 있는 정신이 다르다. 단지 그뿐인 변화임에도 지금의 백신현의 얼굴은 상당히 평소와 동떨어진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이 싸움은 나의 주인에게 바치는 싸움이니라'? 뭐야 이거, 이거 내 말투 아닌데?"
검 자신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차갑고, 오만한 목소리였다. 자신의 의지를 통해 나온 소리인데도 스스로 위화감을 느낄 지경이다.
하지만 막상 그 말을 내뱉었던 직후에는 큰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 말투가 당연한 것처럼 흘러나왔다.
몸을 차지한 검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다.
"에이, 몰라. 나중에 생각하죠 뭐.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상황이 아닌 거 같으니까."
백신현의 몸을 차지한 검이 철판교의 수법으로 상반신을 뒤로 눕힌다. 바로 그 자리에 보이드의 검 끝이 짓쳐들어왔다.
지금 상황에 대한 의문 같은 것은 일이 다 끝난 후에 생각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검은 머릿속에서 피어난 먹구름을 쫓아낸 후, 더 없이 맑은 정신과 목소리로 백신현의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삐걱……. 그저 몸을 움직이는 행위에 백신현의 몸이 지독한 부담을 받고 있었다. 검이 눈을 찌푸린다. 그에게 통각은 존재하지 않지만, 지금 차지하고 있는 몸이 어떤 상황인지 구분할 수 있을 정도의 지식과 감각은 있었다.
이미 한계에 달했다, 그런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한계 지점은 이미 한참 이전에 지나친지 오래다. 한계를 넘고, 그 한계를 넘고, 또 다시 넘어간 끝에 도달한, 최후의 데드라인.
어떻게 이런 몸으로 지금까지 쓰러지지 않고 버티고 있었던 건지 의문이 들 지경이다.
도대체 무엇이, 백신현의 다리를 지탱하고 있었을까.
보이드의 공격을 부드럽게 회피해나가면서 하나씩 백신현의 현재 상태를 체크해나간다. 이미 쇼크사로 숨이 끊어졌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부상 상태. 하지만 그 정도로 육체가 소모된 것에 비하면 마력은 생각보다 여유롭게 남아있다.
나쟈의 핵을 통해 코어를 획득하긴 했지만, 그렇게 획득한 백신현의 마력은 보통 사람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조금 나은 수준밖에 되지 못헀다.
그런 상황에서 이 정도의 마력을 쓰지 않고 남겨두었다는 건 검에게 주도권을 넘길 때를 대비해서, 마력의 소비를 상당히 자제했다는 뜻이다.
팔이 꺾이고, 다리가 부러지고, 어쩌면 내장까지 짓이겼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오직 승리만을 바라보면서.
"이봐요, 솔직히 이쯤되면 당신이 말한 소리가 개소리라는 건 충분히 증명된 거 아닌가요?"
"무슨…… 소리냐……."
보이드의 검격은 조금도 느려지지 않았다. 1초에 수십 번씩 내지른 찌르기가 빗줄기처럼 연무대의 타일을 때린다.
폭격처럼 쏟아지는 공격 앞에서도 검은 여유롭게 백신현의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산산히 파괴되어가는 연무대 안에서 오직 그 하나만이 자유롭다.
"그러니까, '운 좋게 검에게 선택 받았을 뿐인 애송이' 어쩌구 했던 그거요."
공간 내의 마력의 밀도와 대역을 일정 수준으로 조정하던 술식은 이미 파괴된 상태다. 보이드는 더 이상 수단을 아껴두지 않았다. 그가 오른손을 한 번 옆으로 빠르게 떨쳐낸 순간 백신현의 머리 위로 수백, 수천 개의 단검이 배치된다.
백신현의 몸을 차지한 검의 시점에서 보면 연무장의 천장이 가려져서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 숫자가 많다.
하지만 검은 여전히 자유로웠다.
백신현의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오만한 표정이 표면 위에 떠오른다.
"물론 검주께서 저를 검집에서 뽑아낸 것 자체는 '자질'이 있으니까 가능했던 일이겠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건 당신도 알고 있을 텐데요."
"……."
"'자질'을 통해 검을 검집에서 뽑아낸다고 해도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량'이 조건을 만족하지 못하면, '저'는 눈을 뜨지 못해요. 그런 구조로 되어 있죠."
세상은 넓다. 검은 아직 백신현밖에 만나보지 못했지만, 마력의 흐름을 감지하는 감각을 가진 사람이 전 세계에 백신현 한 사람밖에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 감각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 일단 '1차 시험'에 합격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검을 검집에서 뽑아낸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검을 뽑은 사람에게 충격적인 힘을 부여하는 것도 아니고, 검의 인격도 아직 눈을 뜨지 않은 상태이니까.
오히려 백신현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 상황에서, 검이 봉인에서 풀린 순간을 감지하고 찾아온 보이드에게 습격을 당하는 불상사까지 경험했다.
'자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위험에 처하게 된 셈이다.
백신현에게 자질이 없었다면 애초에 보이드도 찾아오지 않았을 테니까.
"이건, 검주께서 의식을 잃어버린 상태니까 할 수 있는 말이지만."
보이드가 포효한 순간 단검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벌레 새끼 하나 빠져나갈 수 없을 만큼 첨예한 검막??이었지만 검은 모든 상식과 물리 현상을 무시하고 그 하나 하나를 일일이 회피해나간다.
마치 아지랑이를 때리는 느낌이다. 저 자리에 서 있는 건 틀림없는데, 모든 공격이 그냥 통과해버린다.
지나치게 고도의 수준에 오른 보법이 그런 눈의 착각을 일으키는 것일까.
수많은 단검이 타일에 꽂히는 과정에서 어마어마한 굉음이 발생했다. 폭격처럼 쏟아지는 소리 속에서 검의 목소리 같은 건 희미에서 잘 들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보이드는 눈에 핏발이 올라올 것 같았다.
"만약 그때, 검주가 자신의 '기량'을 증명하지 못했다면, 검주는 거기에서 죽었어요. 애초에 제가 눈을 뜨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저 재수 좋게,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편리한 힘이 아니다.
오히려 백신현은 그 '자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불합리한 습격을 경험했고, 그 자리에서 '기량'을 증명하지 못했다면 그대로 끝장이 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 사실을 알지 못할 정도로 멍청한 건가요? 그게 아니면, 알면서도 일부러 모른 척 하는 건가? 검주께서 지금까지 쌓아올린 노력 같은 건 하나도 모르는 주제에, 멋대로 입을 놀리면 짜증난다고요. 쓰레기 같은 것."
슥, 백신현의 다리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그리고 눈앞에서 백신현의 모습이 사라졌다.
일부러 들으라는 듯, 목소리는 등 뒤에서 들려왔다.
"하긴, 그렇게 생각하면 편하긴 하겠다. 검주를 운 좋게 성공한 놈으로 매도하면, 최소한 '검왕'에게 인정 받지 못한 자기 자신이 조금은 덜 비참해보일 테니까."
"너……, 이 자식!!!!"
"이제야 좀 기억이 나네요. 아, 분신 술식의 대가, 보이드. 검왕의 말년에 천변무궁류를 계승하고 싶어서 찾아갔다가 '자네에겐 어울리지 않네'라는 소리를 듣고 사법??에 뛰어든 병신새끼."
검이 소리도 없이 움직인다.
바로 다음 순간, 보이드의 팔과 다리가 하나씩 찢어져서 하늘을 날았다.
"정신 좀 차려요, 이 영감탱이야. 당신은 검주의 '자질'을 제외한 순수한 실력에도 미치지 못해요."
"아아아아악!!"
물론, 백신현에게도 재능은 있었을 것이다. 이 나이에 이 정도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재능이 반드시 필요하니까.
하지만 그 재능이 꽃을 피우고 하나의 실력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그가 단 하루도 발전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력이 없다는 컴플렉스를 품에 안은 상태에서도, 모두가 안 된다며 고개를 내저어도 포기하지 않았다.
백신현의 몸을 완전히 제어하고 있기 때문일까.
현재, 검의 시선에는 백신현의 기억이 단편적인 형태로 하나씩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오래 전의 일도 아니다. 정체불명의 검을 해석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어깨와 상반신을 베인 스승의 모습을 보았을 때, 팔이 부러지고 다리가 꺾인 친구의 모습을 보았을 때의 기억이 눈앞을 스쳐지나가고.
바로 그때, 주도권을 완전히 넘겼을 백신현의 팔과 다리에 멋대로 힘이 들어갔다.
"……."
검 자신의 의지는 아니었다.
이 몸의 진짜 주인이 순간적으로 스쳐지나간 기억에 반응했다.
"……참, 단순한 분이셔."
검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있었다.
언제나, 한 순간도 가만히 있지 않고 자신의 예상을 재미있는 방식으로 깨부숴나가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는 듯.
어떻게 보면 제자의 성장을 기뻐하는 스승 같은 얼굴로.
"지금, 그 팔과 다리는 루이스 아씨의 몫입니다."
"뭐……?"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자세를 잡는다. 검을 뒤로 당긴 상태에서 상반신을 앞으로 숙인 돌격검의 자세.
이 자세에서 나올 수 있는 천변무궁류의 기술은 현재 단 하나 뿐이다.
검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기술에 돌입했다.
질풍이 등을 밀었다.
"───!!!!"
천변무궁류?????
제일검?一?
하얀 유성白?
"……컥."
"이번에는 연금술사 선생님의 몫이에요. 검주의 의향이 반영된 만큼, 특히 넉넉하게 넣었습니다."
그 자리에 멈춰선 검은 벌레 보는 듯한 시선으로 보이드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오른쪽 어깨부터 왼쪽 옆구리까지, 순식간에 절단된 보이드의 몸이 연무대 위에 털썩 쓰러진다.
검신을 비스듬하게 어깨에 기댄 상태로 백신현의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어때요, 이제 좀 기분이 풀리셨나요? 검주."
『더 괴롭히지 않고 곱게 끝내준 게 조금 아쉽긴 하지만, 됐어. 내 속은 시원해졌으니까.』
의식 깊은 곳에서 들려온 대답을 듣고 검이 입술을 조용히 비틀었다.
바닥에 쓰러진 보이드의 육체가 무너져내린다. 역시, 이쪽도 분신이었나. 검과 백신현의 마음 속 목소리가 한 순간 겹쳐졌다.
잠시 그 방향을 바라보고 있던 검은 이내 '본체'를 향해 몸을 돌렸다.
연무대의 끝.
투명한 유리관 안에서 특수한 수용액으로 육체를 유지하고 있는, 비쩍 말라 비틀어진 노인을 향해서.
"……."
그 상태로도 의식은 있었는지, 지금은 눈을 부릅뜬 상태로 이쪽을 보고 있다.
하지만 그 노인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게 전부였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갈 때마다 수용액 속의 얼굴에 두려움이 깃든다.
"잠깐, 기다려. 난 이대로 죽을 수 없……"
노인이 무어라 소리치려고 했지만 검은 그 말을 끝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검이 유리관을 파괴하고, 수용액을 뚫고 나아가, 노인의 몸에 꽂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