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 4. 시원찮은 그를 위한 육성방법 (5)
* * *
『저 사람, 제가 아는 사람이에요.』
검이 얼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표정을 바꾸지 않고 마음 속으로만 질문했다.
'아는 사람이라고?'
『네, 제가 예전에 검주와 연금술사 선생님을 습격했던 저 남자를 보이드의 후예라고 추측했던 적이 있었잖아요.』
'그랬었지.'
상대의 위치를 파악하는 술식을 쓰기 위해서는 표적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마력 패턴이 필요하다. 하지만 검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실전에 나오지 않았는데도, 그 남자는 검의 위치를 추적해서 찾아왔다.
그렇다면 이 검이 제작되던 당시에 동석하던 이들 중 하나의 피를 이어받은 후예일 가능성이 높다.
그것이 검의 논리였다. 루이스가 그 남자와 부딪쳤을 때에도 보이드라는 이름에 반응했다고 들었고.
그런데, 이제 와서 그 추측이 잘못됐다는 건가?
『근데 뭐야, 저 사람. 제가 알고 있는 보이드의 모습 그대론데요? ……제가 제작되던 당시에 얼굴을 보았던 보이드의 모습 그대로예요.』
'그럼 그때부터 죽지 않고 계속 살아있었거나, 아니면 그 옛날의 보이드의 모습을 최대한 흉내낸 거겠지.'
나도 지금까지 들은 정보를 토대로 그럴듯한 가설을 제시해본다. 어차피 이곳은 검과 마법의 판타지 세계. 온갖 기기묘묘한 오컬트로 가득한 곳이다.
불사의 술식을 써서 수백 년 전의 노인이 아직까지 살아있다고 해도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다.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다.
『하지만……』
'너무 신경 쓰지 마. 어차피 정보가 부족해서 제대로 진실을 판명하기도 어려운 데다가…… 그런 건 이기고 나서 들으면 되니까.'
혼란스러워하는 기색의 검을 조금씩 진정시켜 나간다. 그리운 얼굴을 만나서 놀란 건 알겠지만, 저 남자의 정체 같은 것은 현 시점에서는 그다지 필요 없는 정보였다.
저 남자가 누구고, 어디에서 왔는지는 알 바 아니다.
중요한 건 지금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저 남자를 쓰러트려야 한다는 것뿐.
궁금한 게 있다면, 먼저 쓰러트리고 나서 고문으로 알아내는 방법도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살짝 웃으며 검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예시를 들었다.
'애초에 늙을대로 다 늙은 상태에서 좀 오래 산다고 그게 무슨 대단한 건가? 그런 식으로 따지면 연금술사 선생님이 열 배는 더 이상하지. 그 나이 먹고 내 동생처럼 보이는 사람인데.'
『……아, 그래요. 검주의 말이 맞습니다.』
최대한 부드럽게 타이른 것이 효과적이었는지, 검은 금세 쓸데없는 생각을 그만두고 침착함을 되찾았다.
쿡쿡 하고 웃음 소리를 낼 수 있을 정도로 여유를 되찾았다.
『저 인간이 누구고, 어디에서 어떻게 자라왔는지는 제 알 바 아니죠. 어차피, 저보다 약한 놈인데.』
그러니까 마찬가지로, 나는 저 노인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제대로 들어줄 생각이 없다.
발을 강하게 내딛으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연무대 끝자락에 서 있는 그와 나의 거리는 타일 스무 개 정도. 그리고 현재, 내가 보기에 이 자리에 다른 변수는 보이지 않는다.
"……."
나는 그 자리에서 눈을 가늘이며 곧바로 내 육체의 주도권을 검에게 넘겼다. 어차피 현재의 내 실력으로 저 남자를 쓰러트릴 수 없다는 건 우리 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나쟈 때처럼 전투 이후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이상, 비장의 수를 아끼는 건 바보 짓이다.
『좋았어. 3분 안에 끝내줄게요, 검주.』
내게 주어진 시간 동안 나는 몇 번에 걸쳐 검에게 몸을 넘겼고, 그때마다 한결 같은 고통을 느꼈다.
나 아닌 다른 이의 마력에 내 몸이 잠식되는 느낌은 즐길 수 있을 정도로 부드러운 것이 아니었다. 몇 번을 겪어도 처음처럼 소름이 돋는다. 나 자신의 자아가 잠식되는 듯한 느낌.
검이 내 몸의 주도권을 획득한 상태에서 보이는 전투 능력이 만족스럽지 않았다면 나도 하고 싶지 않았다.
『검주? 뭐 하고 계세요? 얼른 저한테 몸을 넘겨주셔야, 저도 싸울 수 있는데.』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어어, 저기, 검주?』
평소와 늘 같은 감각으로 전신의 감각을 열고, 검에서 마력이 올라올 수 있도록 신호를 보내고 있는데, 이상하게 평소의 그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다.
다급하게 검과 나 사이에 이어진 선을 점검한다. 제대로 연결되어 있다. 검의 목소리도 제대로 들린다.
모든 부분이 정상인데, 이상하게 검에게 내 몸을 넘겨주는 그 기능 하나만이 작동하지 않았다.
마치 내부에서 막혀 있는 것처럼.
"이제야 눈치챘나?"
연무대의 반대편에서 노인은 여유로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득이양양한 얼굴이다.
나는 표정을 바꾸지 않고 노인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본다. 이전에 내가 대결했고, 루이스와도 한 번 충돌했던 '보이드'와 완전히 같은 옷차림. 그런데 지금은 다른 것이 보인다. 그의 정장 벨트에 걸려있는 은색 방울이다.
그것이 딸랑, 하고 흔들린 순간 나는 정체 모를 소름에 몸을 움찔 떨었다. 소리 자체는 결코 나쁘지 않았지만, 그 사이에 섞인 마력의 파장이 매우 껄끄럽게 느껴진다. 손톱으로 칠판을 긁는 듯한, 생리적인 거부감을 느끼게 하는 소리.
그리고 나의 감각이 반응했다.
저 방울에서 울리는 소리가 검의 기능을 일부 봉인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 검왕검?王?에게 이야기를 들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것'이 제작되는 자리에 함께 있었거든."
새까만 정장의 노인, 보이드는 자신의 검을 느긋하게 뽑아내며 입을 열었다.
"그 어떤 도구에도 빈틈은 존재하는 법. 완벽한 도구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건 검왕이 설계하고, 명공이 제작한 검왕검 또한 마찬가지지."
딸랑.
벨트 끝에 걸린 방울이 흔들린다.
"지금까지는 구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완성하지 못했지만, 실제로 '그것'이 주인의 몸을 장악할 때 발생하는 고유 파장을 습득한 게 큰 도움이 되었다. 제한 시간 없이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분신을 잃은 대신 얻게 된 유일한 성과지."
제한 시간 없이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분신.
나와 연금술사가 최초로 부딪쳤던 '보이드'를 말하는 건가. 말하는 투를 들어보면 전투 능력은 다른 분신에 비해서 떨어지는 편이지만 그 나름대로 장점이 있었다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때의 전투에서 정보를 획득한 건 우리 뿐만이 아니었다.
상대 역시 우리의 정보를 획득해서, 그것을 역으로 이용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지금부터 그대는 그 검에게 몸을 넘길 수 없어. 그 기능 하나만을 노려서 봉인시킨 것이니."
갑자기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그때 이미, 저 자리에 보이드는 서 있지 않았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내 옆을 스쳐지나간 뒤, 한쪽 다리를 축으로 잡아서 회전. 몸을 180도 돌려서 나의 배후를 점했다.
발차기가 날아온다.
"……!!"
나는 아슬아슬하게 몸을 돌려서 그 공격을 받아냈지만, 내 다리가 그 공격을 버텨내지 못했다. 두 다리가 공중에 떠오르면서 나는 순식간에 연무대의 반대편 끝까지 날아갔다.
팡!!
조금 늦게 소리가 터졌다. 인간의 몸으로 소리의 속도를 뛰어넘은 증거, 원형으로 퍼지는 공기의 충격파가 굉음을 일으킨다.
소리가 간신히 귓전에 맴돌았을 때, 그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보이드, 새까만 정장의 노인은 지면과 평행하게 날아가던 나보다 높은 위치에서,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듯이 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도 방어는 아슬아슬하게 따라잡았다.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연무대의 타일에 내 등이 처박히고, 그 주변의 타일이 파도처럼 출렁이면서 뒤집어졌다. 쾅!!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바닥에 번개치듯 날카로운 흔적이 아로새겨진다.
"크……"
개미지옥에 말려들어간 사람처럼 나는 중앙이 옴푹 들어간 연무대의 바닥에 등부터 꽂혀 있었다. 하지만 보이드는 나를 기다리지 않는다. 이번에는 머리를 노리고 떨어지는 뒷꿈치 찍기.
머리를 급하게 틀어서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하고, 검을 쥐지 않은 왼손으로 술식을 전개한다.
연무대의 타일 아래, 그 안쪽에서 단단하게 굳어 있던 흙의 구조가 붕괴되었다. 지금 내가 술식의 범위로 삼은 것은 나를 중심으로 한 3미터. 그 일대의 지면이 일제히 내려앉았다.
술식의 발동까지 필요한 이론 상의 최소요구시간조차 무시하고 빠르게 집행한 마법이었지만, 보이드는 재빠르게 지면을 걷어차고 그 효과의 범위에서 벗어난다. 하지만 놀라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렇게 나올 거라고 예측하고 사용한 술식이니까.
주변의 지면이 내려 앉는 과정에서 내 몸을 붙잡고 있던 타일의 구속이 느슨해진다. 그 틈을 노려서 구조가 불안한 지면을 딛고 도약. 술식의 효과가 미치지 않게 조정해둔 타일 위로 내려선다.
나는 그 틈을 노려서 다시 한 번 공격이 날아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보이드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내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조용히 살피고 있었다.
희끗희끗한 머리를 올백으로 넘긴 노인이 툭, 내뱉었다.
"표정에 변화가 없군."
"……."
"'이전의 몸'을 사용할 때는 그 얼굴에 속아서 실수를 했지. 느껴지는 힘은 분명 미약하건만, 그 어떤 고통 앞에서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철저하게 대응하는 그 모습으로부터 압박감을 느꼈다."
나와 노인의 사이에는 몇 미터나 되는 빈 공간이 있었지만, 그의 검은 거리에 관계 없이 움직였다. 마력을 이용한, 하늘을 나는 참격일까. 초승달처럼 끝 부분이 굽어 있는 시꺼먼 참격이 지면을 타고 질주했다.
오른쪽 다리를 축으로 몸을 반 바퀴 뒤로 돌려서 아슬아슬하게 흘려보낸다. 참격이 지면을 쪼개는 과정에서 발생한 돌조각이 내 뺨 위로 쏟아진다.
"하지만 이젠 속지 않는다. 자네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동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도 아니야. 그저 아무리 고통스럽고, 놀라운 일을 경험하더라도 표정 근육을 단단하게 굳히고 있을 뿐이지."
그는 그런 형태의 기술을, 지면을 타고 질주하는 원거리 참격을 몇 번씩 쉬지 않고 쏘아대면서 내 움직임을 견제했다.
"아마 그것도 자네의 전략 중 하나겠지.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그대는 이 세계에서 약자의 위치에 서 있는 인간이다. 마력을 쓰지 못하는 나약한 몸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마력 이외의 모든 요소로부터 힘을 끌어올 수밖에 없어."
대꾸하지 않는다. 보이드의 말을 들으면서도 나는 차분하게 전장의 상황을 관조하며 머릿속의 스위치를 번갈아서 누르고 있었다.
이것은 검술이 유리한 국면, 그리고 이것은 마력이 유리한 국면.
피할 수 있는 공격은 피하고, 내가 직접 부딪치는 것으로 긍정적인 흐름을 이끌어낼 수 있는 공격은 검으로 받아치면서.
그저 조용히, 때를 기다린다.
"……이건."
하지만 이상하다.
마력의 흐름의 윤곽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다.
천변무궁류를 펼칠 때마다 손끝에서 느껴지던 마력의 흐름을 이 손으로 틀어쥐는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렇다는 건.
"이쯤되면 이상한 점을 느꼈을 텐데, 여전히 자네의 표정은 변하지 않는군. 아직도 희망을 느끼고 있나? 자네의 감각은…… 이미 자네가 가지고 있는 모든 수단이 봉쇄되었다는 걸 감지하고 있을 텐데?"
역시, 저 남자의 수단인가.
"천변무궁류를 너무 믿었군. 확실히 그 검술은 현대의 무공을 기준으로 보아도 궁극무적, 천하무쌍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지만…… 그 후로 200년이 흘렀다. 아직까지도 천변무궁류가 절대무적의 아성??을 유지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
"적어도 '내 앞'에서 천변무궁류는 통하지 않아."
충격적인 사실이 제시되었음에도 나는 최대한 표정을 유지한 채, 담담한 얼굴로 받아넘기기 위해서 죽을 힘을 쓰고 있었다.
오히려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지 못한 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소리치는 검 쪽이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요! 저는 보이드를 압니다! 천변무궁류는 절대로 저 남자 수준의 능력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검술이 아니에요!』
검이 외치는 소리는 너무나도 필사적이었기 때문에, 듣는 나까지 귀가 따가워질 정도였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다.
보이드의 능력이 검의 능력을 뛰어넘었든, 아니면 보이드가 예상밖의 기연으로 자신의 수준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천변무궁류를 해석했든지간에, 그런 건 전혀 상관이 없는 문제다.
중요한 건, 보이드가 천변무궁류를 해석해서 그 발동을 저하시키는 모종의 능력을 쓰고 있다는 것이고.
내가 일주일 동안 쌓아올린 모든 힘이 순식간에 무력화되었다는 사실 뿐이다.
하지만 나는 표정을 바꾸지 않는다.
마음 속은 미친듯이 쫄리고 있음에도, 표정을 굳힌 채 철저하게 가면을 연기했다.
물론, 이렇게 해도 저 남자에게는 통하지 않겠지만.
나는 아직 나의 승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아직도 표정이 변하지 않았군. 그래, 이전에도 그 눈빛이 거슬렸다. 하늘이 두쪽으로 갈라져도 이길 수 없는 상황인데도, 이상하게 눈빛은 살아있어서 날 꺼림찍하게 만들었거든……."
뭔가를 결심한 것처럼, 보이드는 늙은 머리를 가볍게 끄덕인다.
"하지만, 이제 어쩔 테냐. 운 좋게 검왕검에게 선택 받았을 뿐인 애송아."
* * *
『검주, 방법이 있어요? 어차피 도망치는 것도 안될 거고, 아, 젠장, 이건 진짜 최악 중의 최악의 가능성이었는데!』
머릿속에서 속사포처럼 검의 목소리가 쏟아진다.
녀석이 말한 것처럼, 이 가능성 역시 우리가 예상하고 있던 최악의 가능성 중 하나였다.
단적으로 말해서 내가 믿는 구석은 검이 가지고 있는 우수한 전투 능력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 능력이 봉인될 가능성도 염두는 해 두고 있었다.
하지만 염두는 해 두었다는 것이, 꼭 해결책이 있다는 것과 이어지지는 않는다.
애초에 검 자신도 자신을 묶어둘 수 있는 방법을 모르는 상태다. 그리고 검이 정보를 해금하지 않는 이상 그 점은 나도 마찬가지. 대처 방법을 강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검 자신도 '자신을 묶어둘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자신했었고.
……그래, 침착한 것처럼 보여도 나 또한 거의 패닉에 가까운 상태였다.
젠장, 젠장, 왜 하필 생각했던 것들 중에서도 가장 최악인 가능성만 줄줄이 나타나는 거지. 확률로 치면 1% 이하의, 고려할 가치도 없을 정도로 낮은 가능성이었는데.
하여튼 진짜, 재수도 없지.
『어떡하죠 검주? 기책, 그럴싸한 기책 같은 건 없을까요?』
'없어'
『없…… 아니, 지금 그게 없으면 안 되죠! 그거 안 되면 여기서 다 죽는다고요!』
'하지만 없는 건 없는 거야. 기책 같은 건, 없어.'
기책은 없다.
내가 예측했던, 1%의 가능성을 실제로 실행하고 성공시킨 시점에서 보이드도 알 만한 건 다 알고 있다고 봐야 한다.
예전에는 상대방이 예측할 수 없는 기책 같은 게 충분히 있을 수 있었고, 통하기도 잘 통했다. 전략의 폭이 그렇게 넓지도 않았던 데다가, 정보가 전달되는 속도도 느려서 데이터가 축적되기 어려웠으니까.
하지만 요즘은 물을 구할 수 없는 곳에서 산 위에 진을 구축하면 망한다는 건 상식 수준이고, 진지를 길게 구축하면 화공에 쉽게 당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현대의 인간이 과거의 인간에 비해 뒤쳐진다는 소리가 아니다. 선인?人들의 무수한 삽질로 축적된 데이터가, 후대의 사람들이 가진 지식의 폭을 넓혀준다는 뜻이다.
현대의 전투에서, 더 이상 예상할 수 없는 기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데이터의 축적에 의해 누구나 알고 있는 전략을, 상식에 맞게 휘두를 뿐.
그리고 현 시점에서 내가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보이드 역시 알고 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 방울을 파괴해서 검에게 육체의 주도권을 넘겨주는 것 이외에 승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이기는 건 이쪽이 될 수 있다. 천변무궁류를 쓸 수 없다고 해도, 검이 가지고 있는 전투 능력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녀석은 굳이 천변무궁류를 쓰지 않아도 보이드를 쓰러트릴 수 있을 정도의 전투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보이드 역시 알고 있다.
당연히 내가 실행할 수 있는 온갖 전략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예측이 끝난 상태라고 봐야겠지.
보이드의 허를 찌를 수 있는 기책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예상치 못한 수로 파고드는 것을 기책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보이드는 그 어떤 기이한 수도 모두 예상하고 있을 테니까.
『……그, 그러면.』
'이 경우, 당연한 전술을 통하게 하기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어.'
조금 전의 공방에서 입 안쪽이 터졌는지, 피 맛이 씁쓸하게 올라온다.
'그 첫번째, 다양한 방법을 시간차를 두지 않고 마구 사용해서 내 진짜 의도를 속인 다음 허를 찌르거나.'
당연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안 그래도 모든 스펙에서 뒤지고 있는 상태인데, 다양한 방법을 시도해볼 시간이나 나올지 모르겠다. 한 번이라도 선택지를 잘못 고르면, 그 순간 즉사할 수도 있다.
나는 조용히 입술을 비틀었다.
'그리고, 두번째는……'
『으, 그걸 하겠다고요? 진짜?』
검은 내 대답을 들은 직후 질색하는 목소리로 바들바들 떨었다.
바로 그때 보이드의 공격이 시작됐다. 호흡과 자세가 완전히 일체화된 찌르기. 잘못 받아냈다면 상반신에 구멍이 뚫리는 정도가 아니라 상반신이 통째로 날아갔을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호흡과 자세를 완전히 일치시킨 화경을 통해 부드럽게 흘려보낸다.
'그리고 그래, 마침 잘 됐어.'
『……뭐가요. 이 이상 나쁠 수가 없는 최악의 상황인데.』
쾅!!
보이드와 나의 검이 부딪친다. 당연히 밀리는 건 이쪽이다. 몸의 자세가 멋대로 무너지면서 수많은 빈틈이 노출된다.
빈틈을 노리고 쏟아지는 열한 개의 다중참격을 한 번의 호흡으로 모조리 회피한 뒤, 나는 보이드의 배후를 노리는 자세로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스치지도 않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공격.
검을 세워 받아냈지만, 미처 받아내지 못한 참격이 각각 내 뺨과 옆구리와 허벅지를 조금씩 찢는다.
'보이드, 이 녀석은 내게 있어 중요한 사람들을 상처 입힌 놈이야. 내가 제때 현장에 도착하지 않았더라면 연금술사 선생님은 죽었을지도 모르고. 루이스도 팔과 다리가 아작 났었지.'
눈을 찌푸린다. 하지만 현실의 공격은 턴제 게임하고는 달라서, 내가 호흡을 가다듬을 시간도, 두뇌를 굴리며 전략을 짜낼 시간도 주지 않는다.
피하고, 피하고, 걷어낸다. 그때마다 나의 팔과 다리에는 조그만 상처 자국이 남았다. 마력으로 강화된 신체 능력으로도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마력의 차이.
나쟈의 핵을 얻었을 뿐, 그것을 단련하지도, 강화하지도 않은 나의 마력은 기껏해야 보통 사람 정도의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버텨낸다. 허릿심을 써서 견딘다.
카그가가가가가가가가각───!!!!
'솔직히, 찝찝했거든. 물론 이길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은 처음부터 네게 몸을 맡기고, 나는 구경하는 것뿐이지만……. 사실, 본심을 말하자면.'
버텨내지 못했다면 내 머리를 꿰뚫었을 공격이 아주 조금 옆으로 틀어졌다. 잘려나간 머리카락 가닥이 하늘하늘 나부낀다.
'───내 손으로, 내 힘으로 한 방 먹여주고 싶었어.'
그것은 지금의 내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솔직하게 인정하지 못하고 미련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순전히 내 자존심 문제였다.
『……그런 것치고는, 마음의 소리가 덜덜 떨리고 있어요. 검주.』
'당연하지. 난 목각인형이 아니야. 얼굴이 조금 굳은 것 뿐이라고. 솔직히 지금도 겁이 나고, 싸우는 것도 무서워.'
힘이 빠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솔직히, 어이 없는 말이라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얌전히 죽어줄 수는 없잖아. 그러니까 싸울 거야. 이 악물고 맞서 싸워서, 제대로 된 한 방을 먹여주고 말겠어.'
현재, 검의 도움을 기대할 수는 없다.
천변무궁류도 마찬가지.
일주일에 가까운 시간 동안 쌓아왔던 모든 힘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상태였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힘은 그게 다가 아니다.
캉!!
"……!!"
백신현의 힘은, 그 정도가 아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