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 4. 시원찮은 그를 위한 육성방법 (3)
* * *
"……큭."
끝을 헤아릴 수 없는 새하얀 공간. 검이 만들어낸 그 장소에서, 나는 천장을 보며 대자로 쓰러져 있었다.
녀석은 쓰러진 내 목에 검을 겨눈 상태였다.
하지만 그 녀석의 모습은 이제까지와 다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까만 남자, 보이드의 모습으로 나를 쓰러트렸으니까.
이것은 루이스와 연금술사에게 전해 받은 전투 데이터를 바탕으로 최대한 재현한 '또 다른 보이드'의 모습이다.
사용하고 있는 무기나 생김새, 복장 등은 내가 대결했던 보이드와 전혀 차이점이 없었지만, 마력의 크기나 신체 능력은 차원이 달랐다.
검극도 상당히 날카롭다.
내가 맞붙었던 보이드가 이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과연 나는 그 싸움을 버텨낼 수 있었을까.
"역시, 검주에게는 아직 좀 일렀나. 너무 낙담하지 마세요. 제가 보기에 검극의 수준은 거의 비슷하거든요."
"결국 마력의 차이라는 건가."
나쟈의 핵을 확보함으로써 나는 이제까지의 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신체 능력을 손에 넣었다.
마력을 통한 신체 강화 마법은 본래 육체가 가진 근력에 비례하는 법. 마력을 가지기 이전부터 한계에 가까운 영역까지 몸을 단련했던 나와는 궁합이 좋다.
하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마력의 차이가 너무 크다.
내가 마력을 얻어서 강해진 것 이상으로, 그 남자의 분신 또한 강해져 있었던 것이다.
이전에 비해서 묘하게 높아진 검술의 역량까지 포함하면 오히려 처음 붙었을 때보다도 더 차이가 커진 상황이다.
"그래, 나는 그렇다 치고. 너는 어때? 너는 이길 수 있을 거 같아?"
"저요?"
그 말을 들은 직후, 녀석이 얼굴을 바꾸었다.
보이드의 얼굴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검은 코트를 걸친 은빛 머리카락의 여인이 나타난다.
굳이 다른 사람의 얼굴을 쓸 필요가 없을 때, 녀석은 언제나 저 얼굴로 있는다.
자세한 이유는 몰라도, 마음이 차분해지는 느낌이라고.
검 자신은 부정하지만 상당히 오만한 표정이 잘 어울리는 얼굴이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그렇게 웃고 있거든.
"당연히 이기죠. 별 쓸데없는 질문을 다 하시네요."
호잇, 하고 녀석이 검지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킨 순간 그 자리에 보이드와 완전히 같은 모습을 한 분신이 나타난다.
눈에 초점은 없다.
하지만 이 가상 공간 속에서 느껴지는 마력의 파장은, 틀림없이 보이드의 그것이다.
녀석은 은발 여인의 모습에서 다시 한 번 형태를 바꾼다.
새하얀 손이 뺨을 스치고 지나간 바로 그 순간, 녀석의 얼굴은 나와 완전히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싸움이 시작된다.
비록 가상 공간에서 생성된, 귀로 들은 스펙을 그대로 재현했을 뿐인 가짜에 불과하다고는 해도 내 실력으로는 손도 제대로 댈 수 없었던 상대였다.
그러나 검은 나와 완전히 같은 신체 능력과, 완전히 같은 마력을 써서 가볍게 압도하고 있다.
나와 완전히 같은 몸, 나와 완전히 같은 마력을 써서 저 정도의 성과를 얻어내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나로선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는 기술과 전투 감각으로.
지도대련에서 나와 부딪치던 모습과 비교하면 천지차이다. 지도대련은 지도대련일 뿐, 진짜 결투는 될 수 없다.
현재 나의 눈에 비치는 건 녀석의 뒷모습에 불과한 상태인데도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강렬한 살기와 투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잠시 열패감을 느꼈지만, 곧 가슴 속에서 뜨겁게 향상심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저 녀석도 할 수 있는 일을 내가 할 수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애초에, 검도 내게 말하지 않았었나. 내가 가지고 있는 자질이 기준을 만족시켰기 때문에 검을 뽑을 수 있었던 거라고.
내게 숨겨진 자질이 있다는 말은 솔직히 아직도 잘 믿기지 않지만.
적어도 검은 내게 '검왕의 경지'에 도달할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내게 힘을 빌려줬다.
제한 시간을 넉넉하게 남겨두고 검은 보이드의 분신을 마무리했다. 내가 생전 처음 보는 조합의 검술이 보이드의 사지를 차례로 날려버린 후, 마지막으로 머리와 몸통을 통째로 찢어버린다.
아주 잠시, 검술의 극?을 목도하게 된 기분이다.
"어때요?"
"잘 봤고, 그 모습 풀지 말고 잠시 있어봐. 다시 한 번 붙어보자."
"네네, 얼마든지요. 검주가 강해지기 위해서 그렇게 노력을 하고 계시는데, 저도 당연히 함께 해드려야죠."
검이 나의 얼굴로 웃으며 돌아선다.
"제게 검주를 하루아침에 고수로 만들어드릴 수 있는 편리한 능력은 존재하지 않아요. 제가 검주에게 해 드릴 수 있는 건, '강해지는 방법을 알려드리는 것' 그 하나 뿐."
거울에 비친 것처럼 서로가 서로를 향해 동일한 기수식을 잡는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할게요. 제가 시키는대로만 하면, 검주는 틀림없이 최고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길은 아주 험난하고 어렵겠지만…… 그 사실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어요."
"간다."
또 다시, 새하얀 세계에서의 수행이 시작된다.
* * *
새하얀 세계에서 수행을 끝마친 뒤에는 현실 세계에서 감각을 다시 조율한다.
아무리 현실에 가까운 형태라고는 해도 가상 공간은 가상 공간. 실제 현실과 혼동하면 곤란해진다.
가상 세계에서 실컷 수행한 이후에도 현실 세계에서 자꾸 몸을 움직이면서 감각을 적응시킬 필요가 있다.
"윽, 너 진짜, 뭐냐고 그 검술!"
루이스가 눈꼬리를 파르르 떨면서 검을 휘두른다. 이전에는 피하는 것 이외에 선택지가 없는 공격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천변무궁류?????
제일검?一
하얀 유성白?
힘에는 힘.
특급 모험가의 마력이 가득 실린 일격을, 초고속의 참격으로 받아친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나와 루이스의 검이 부딪치고, 주변 일대의 나뭇가지에 붙어있던 모든 나뭇잎이 일제히 추락했다.
새벽의 공원이 아니라 시가지에서 부딪쳤다면 근처에 있는 모든 창문이 부서졌을 것이다.
"이쯤에서 그만할까……."
루이스는 쯧, 하고 검의 마력을 거둔다.
이 이상 출력을 높이는 것도 가능하지만 시가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공원에서 쓰기에는 조금 위험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나도 동감한다.
특급 모험가가 제대로 힘을 쓰면 어마어마한 후폭풍이 따라오니까.
"아, 너하고 적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적으로 돌리면 제일 상대하기 까다로운 유형이야."
공원의 잔디 위에 털썩 주저앉은 루이스는 굳은 어깨를 움켜쥐고 팔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다.
골절부상에서 회복된지 얼마 되지도 않은 데다가 어느 정도 출력을 낮춘 상태라고는 해도 나를 확실하게 누르지 못한 것이 조금 충격적으로 느껴진 모양.
위와 같은 말을 투덜거리면서 내뱉고 있다.
"마치 사람이 아니라 늪하고 싸우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힘으로 누르려고 해도 묘한 반발력 때문에 잘 안 되고, 공방을 길게 이어갈수록 검도 점점 무거워지는 느낌이고."
늪이라.
천변무궁류를 아주 적절하게 표현한 말이다.
이론 상, 극의??에 이른 천변무궁류의 검사는 장기전에서 무적이다.
전투가 길어질수록 조금씩 힘이 빠지고, 예리함을 잃어가는 다른 유파의 검사와는 다르게 천변무궁류의 검은 싸움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새로운 힘을 추가로 얻게 된다.
검에게 내 몸을 지배하는 제한 시간이 없었더라면 아마 나쟈의 핵 같은 걸 얻지 않더라도 루이스나 보이드를 쓰러트릴 수 있을 것이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유파.
난 태어나서 지금까지 천변무궁류와 같은 유파를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200년 전의 검술임에도 불구하고 그 정도로 완벽하다는 의미이다.
"네가 써도 이 정도로 강한데, 그 검이 네 몸을 써서 천변무궁류를 사용한다면…… 그 남자 정도는 쉽게 이기겠지."
보이드와 검, 양쪽 모두와 한 번씩 겨루어본 경험이 있는 루이스도 이렇게 표현한다.
승산은 있다.
아주 차고 넘칠 정도로.
"그래도 준비는 철저하게 하는 게 좋아. 이 참에 미리 말해두는데, 내일 공격에는 나도 나갈 거야. 적어도 방해는 안 될 자신이 있어."
그럴 생각으로 재활을 하고 있는 거라고 루이스는 강한 목소리로 말한다.
루이스의 골절상은 평범한 골절이 아니었는지, 회복하는데만 거의 며칠이 걸렸다. 그리고 내가 결정한 습격일까지 불과 하루를 남겨둔 상태에서 아슬아슬하게 골절을 회복하고, 새벽 일찍부터 나와서 재활에 열중하는 중이다.
나도 루이스가 함께 싸워준다면 든든하다.
내게 있어서는 검의 스승이나 마찬가지인 사람이고, 지금 이 도시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강한 힘을 가진 특급 모험가니까.
『음음, 루이스 아씨 정도면 제 보조로 뛰는 데 부족함이 없죠. 저하고 루이스 아씨가 힘을 합친다면 그 남자 정도는 30초도 안 되서 떡으로 만들 자신이 있어요.』
내 허리춤의 검도 루이스의 의견을 긍정했다. 그 자리에서 진자처럼 몸을 흔들어댄다.
검의 말을 그대로 전달했더니, 루이스도 그럴 것 같았다는 듯 씨익 웃는다.
"그래? 요 녀석이 그렇게 말했다고? 당연하지. 능력 있는 사람은 능력 있는 사람을 알아보는 법이거든."
하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루이스는 검을 뽑아내지 못한 걸까.
검이 루이스를 보고 내린 평가나, 내가 알고 있는 루이스의 실력을 생각하면 역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근데, 있잖아. 백신현."
"왜?"
"너 언제까지 요 녀석을 '검'이나 '녀석'이라고 부를 생각이야?"
"이 녀석을 말하는 거야?"
나는 허리춤의 검에 손을 얹은 채 대답했다.
루이스는 응응, 하고 소리를 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걔. 이름 같은 건 없어? 그래도 인격체인 애한테 자꾸 검, 검 하니까 느낌이 좀 이상한데."
"그런 게 꼭 필요한가?"
"필요하지. 헷갈릴 수도 있잖아."
그다지 필요성은 안 느껴지는데. 지금까지 그거 가지고 불편한 적도 없었고.
하지만 루이스의 말을 듣고 나니까 나도 갑자기 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나는 현재 요 녀석을 반려 무기 정도로 여기고 있는데, 그럼 이름을 붙여주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이런 상황에서는 본인의 의견을 먼저 들어봐야지.
나는 검자루를 손으로 두어번 두드리면서 질문했다.
"그렇다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이름─── 이요. 음, 저도 지금까지 신경 쓴 적은 없지만, 구분할 수 있는 이름이 있으면 좋기는 할 거 같아요. 검주나 루이스 아씨가 지어주시면 좋을 거 같은데.』
이쪽도 나와 비슷한 의견이다.
음, 이름이라.
내가 이름을 짓는 감각은 좀 떨어지는 편이라서, 그다지 자신은 없다. 나는 내 작명감각이 얼마나 처참한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인간이다.
그렇다면…… 그래, 이렇게 하는 편이 좋겠다.
"그럼 내일, 보이드부터 작살낸 다음에 지어줄게."
『내일이요? 그렇게 기다리긴 싫은데. 지금 바로 지어주시면 안 되나…….』
검은 불만스러운 목소리였지만 나는 침착하게 이유를 설명했다.
"어쩌면 평생 쓰게 될 지도 모르는 이름인데, 작명서도 좀 사고, 고민도 좀 하면서 멋진 이름으로 지어주는 편이 좋잖아. 대충 막 지어주는 것도 좀 그렇고."
이왕 할 거면 진지하게 고민해서 지어주는 편이 낫지 않을까.
어차피 지금까지도 별 신경 안 쓰고 지냈는데, 며칠 더 기다린다고 문제될 건 없잖아.
『……으음, 그렇게 들으니까 또 그럴듯 하네요. 검주 말을 믿어볼까……』
녀석은 내 얼굴을 보아 넘어간다는 듯, 투덜거리면서도 내 말에 납득했다.
이름 없이도 잘 지내던 애가 이제 와서 이러는 것도 좀 웃기다.
진짜 종 잡기 어려운 놈이라니까.
* * *
지금까지 쭉 기다려온 시간이었지만, 생각외로 마음은 차분했다.
의지할 수 있는 힘이 손안에 있기 때문일까.
나는 상당히 이른 새벽에 눈을 뜨고 말았다. 침대 옆에서 모로 누워있는 연금술사의 앞머리를 잠시 쓸어넘기다가 옷을 가볍게 걸치고 바깥으로 나온다.
차갑고 습한 새벽의 공기가 폐에 직접 스며드는 느낌이다.
그러다 갑자기 머릿속으로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온다. 검의 목소리였다.
『검주, 기분은 어떠세요?』
"음, 살짝 흥분한 상태야. 꼭 소풍하는 날 아침 같네."
『너무 긴장하신 건 아닌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겨우 그 정도 상대로 긴장하면 좀 그렇잖아요.』
"겨우 그 정도 상대라."
나는 살짝 웃은 뒤,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면서 대답했다.
"맞는 말이야."
6일째 아침.
반격의 순간이 찾아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