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이자는 검성의 길을 걷는 것 같습니다-15화 (15/287)

〈 15화 〉 3. 이세계에서 신뢰를 추구하면 안 되는 걸까 (4)

* * *

"……잘 하고 있겠죠? 신현이."

"아마도."

루이스는 발을 동동 구르면서 눈앞의 울창한 숲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은 숲의 한쪽을 통째로 벌채한 뒤 성벽을 쌓아 올려서 만든 도시다. 유일한 입구인 거대한 문을 넘어선 그 순간부터 광활한 숲이 펼쳐진다.

백신현은 현재, 저 숲의 가장 깊은 곳에서 아주 거대한 존재와 맞서 싸우고 있다.

완벽하게 성장한 상태는 아니라고 해도 나쟈의 크기가 크기인 만큼, 높은 곳에 올라서서 성벽 너머를 바라보다 보면 멀리에서 쉴 세 없이 움직이고 있는 거대한 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나무에 가려서 백신현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나쟈가 발광을 하면서 몸을 흔들고 있다는 것 자체가 희소식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직 백신현이 죽지 않고 맞서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나쟈도 움직이고 있는 것이라고.

"루이스."

"아, 네."

눈을 찡그린 채로 숲의 반대편을 노려보던 루이스의 등을 연금술사가 팔꿈치로 찔렀다.

루이스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결국 연금술사의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몸을 돌리고 말았다.

사실, 상당히 아슬아슬한 타이밍이었다.

만약 여기에서 조금이라도 늦게 몸을 돌렸더라면, 루이스는 숲의 저편에서 나쟈의 목이 절단되는 모습을 보게 되었을지도 모르니까.

연금술사의 목소리를 듣고 몸을 돌린 그 자리에서 그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색 복장으로 통일한 남자를 발견했다.

"저길 봐, 저 녀석이야."

"……."

허리춤에는 장검이 한 자루 비스듬하게 매달려 있다. 하지만 루이스는 남자의 겉모습이나 무기 같은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의 크기를 먼저 가늠했다.

"마력의 크기만이라면 저보다도 큰데요. 저 녀석이 바로 선생님과 신현이를 습격했던 그 남자의 '본체'인 걸까."

"아마도."

지인에게서 이야기로만 들었던 루이스와는 다르게 연금술사는 저 남자와 동일한 모습을 한 분신을 실제로 만나본 경험이 있다.

느껴지는 마력의 크기는 격이 다르지만, 그 이외의 모든 외적인 특징이 연금술사가 목격한 그 남자와 동일했다. 그리고 그 마력 역시 크기가 다를 뿐 기본적인 성질은 거의 동일하게 느껴진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루이스는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남자의 모습을 살펴보고 있었다.

애초에 루이스와 연금술사가 이 자리에 대기하고 있었던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백신현은 전투에 나서기 바로 직전까지 두 사람과 함께 자신에게 벌어질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을 통찰하고 있었다.

이것도 그 중 하나였다.

백신현은 검에 봉인 술식을 장치해서 적의 추적을 피하고 있다.

만약 이 봉인 술식이 전투 중에 파괴될 경우, 남자의 추적은 다시 시작된다.

백신현도 예비 봉인 술식을 준비해서 전투가 끝난 후 다시 장치할 생각이지만, 운이 없다면 봉인 술식을 다시 장착하기도 전에 습격 당할 가능성도 있다.

그때를 대비해서 루이스는 도시와 숲을 오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에서 자리를 잡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차피 나쟈의 독이 퍼져 있는 숲으로는 나갈 수 없다.

완벽한 대비책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최소한 그 남자가 벌써 이 도시에 도착해 있고, 이 도시 안에서 백신현의 존재를 찾아다니고 있다면…… 이런 식으로 마주치게 될 수도 있다.

성벽 위에서, 연금술사는 표정 없는 얼굴로 질문했다.

"어쩔 생각이야?"

"……어쩌긴요. 얼굴도 모르고 있을 때라면 모를까, 저 꼴을 보고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요. 신현이하고 합류해서 같이 싸우려고 해도, 아직 숲에는 나쟈의 독이 쫙 깔려 있어서 잘못하면 즉사고."

마치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처럼 루이스는 불평한 뒤, 고개를 살짝 갸웃하면서 중얼거린다.

"근데 저 사람 어디에서 본 거 같은데…… 기분 탓인가?"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저 남자가 백신현을 찾아가기 전에 이쪽이 먼저 선수를 쳐야 했다. 루이스는 망설이지 않고 성벽 아래로 뛰어내려서 남자의 앞을 막아선다.

"그대는?"

"처음 뵙겠습니다. 특급 모험가, 루이스 아우름이라고 합니다."

남자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게 아니면, 놀랄 가치도 없는 상대라는 뜻일까.

특급 모험가를 앞에 두고 있음에도 마치 길가의 돌멩이처럼 대수롭지 않게 바라보는 그 태도.

그 모습에 루이스는 일단 기분이 상해버렸다.

"이건 내가 실수로 애먼 사람을 괴롭히고 있는 걸지도 모르니까 확인을 좀 하려는 건데…… 혹시 성함이 '보이드' 맞으신가요?"

"그렇네만."

"음, 그럼 두 번째 질문. 혹시…… 제가 이리스 지방의 지하에서 발굴해낸, 검집은 까맣고, 검자루는 회색인 마검을 찾고 계신가요?"

남자는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애초부터 그 물건은 내가 가져야 했을 물건이니까."

"그 마검 자신이 선택한, 적법한 주인이 있다 하더라도?"

"그런 건 전혀 상관없네. '그것'의 올바른 주인이 될 수 있는 건 오직 나 뿐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거니까."

그게 그냥 당연한 것처럼, 떳떳한 얼굴로 루이스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그래요? 그럼 뭐, 대화가 통할 여지가 없겠네요."

"적이지만 훌륭하군. 그 청년은. 마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약자인 주제에, 괜찮은 벗을 두고 있잖아."

루이스의 손이 허리춤의 검으로 향한다.

그 순간 양자의 몸에서 터져 나온 살기가 서로 충돌하고, 반발하면서 넓게 퍼져 나갔다. 지독하리만치 농도 높은 살기는 그 자체로 주변의 마력을 자극하고, 일대의 풍경까지 일그러지게 만들었다.

그저 이 자리에서 숨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존재.

진짜배기 초인.

루이스의 입술이 짐승처럼 비틀렸다.

"어디 한 번, 제대로 붙어 보자고."

그 말이 신호였다.

초인과 초인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치며, 진정한 사투의 막이 오른다.

* * *

검을 쥐고 있는 나 자신도 이해하지 못할 만큼 특이하기 그지없는 광경이었다.

지금의 내 눈에는 한 번에 이곳에 있는 모든 적을 쓰러트릴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검을 여러 번 휘두르다 보면 이길 수는 있겠지. 하지만 지금의 내 수준에서는 그렇다.

아마 내가 나쟈와 싸우지 않고 평소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해도 그런 길을 찾아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는 이제 겨우 출발점에 선 것에 불과하다.

검이 휘두른 일격의 편린조차 읽어내기 어려웠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궤적으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검술이 손끝에서 펼쳐진다.

내 손에 들린 검은 그저 허공을 한 번 베어 찢고 지나갔을 뿐이었다.

그뿐인 행위에 사방에서 피가 솟았다. 보이지 않는 질풍의 칼날에 차례차례 모험가들이 쓰러져간다.

『물론, 이까짓 놈들 3초면 충분하지만.』

검이 진자처럼 흔들리며 이죽거린다.

『혹시 모르니까, 일단 해야 할 일부터 먼저 끝내볼까요.』

검이 또다시 내가 생각치도 못한 궤적으로 움직였다. 녀석은 그저 한 번 움직였을 따름이지만, 그 한 번의 행위에 촉발되어 사방에서 비명소리가 울려 퍼진다.

모험가들은 나를 포위하고 있었음에도 내게 손가락 하나 닿지 못했다.

다가오기도 전에 그들의 팔에, 다리에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칼자국이 아로새겨진다.

마법은 궤적을 틀어서 서로를 공격했다.

등 뒤에서 다시 한 번 질풍이 불었다. 내가 등지고 있던 나쟈의 머리를 한 번 스치고 지나가는 질풍. 나쟈의 이마가 위아래로 쫙 찢어지면서 둥그런 구체가 굴러나온다.

"나쟈의 핵!!"

아트룸 교수가 무심코 소리친다. 하지만 사실, 이곳에 있는 이들 중에서 그것을 보고 소리칠 여력이 남아있는 건 그 한 사람밖에 남지 않았다.

그를 제외한 모든 이들은 이미 바닥에 쓰러져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태였음으로.

『이거, 바로 먹을 수는 없죠?』

'어려워. 이대로 복용하면 나쟈의 핵이 가진 마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내 몸이 터져 버릴 테니까.'

몸을 뒤로 물린다. 공중으로 튀어 올랐던 나쟈의 핵을 보지도 않고 공중에서 낚아챈다. 크기는 사과 정도쯤 되고, 색은 푸르다. 내부가 은은하게 비치는 구체가 마치 심장처럼 펄떡펄떡 뛰고 있다.

몬스터는 뼈부터 시작해서 체모나 무기까지도 마력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설령 그들을 쓰러트린다고 해도 놈들의 몸에서 별도의 전리품을 획득하는 건 불가능하다.

숨이 끊어진 그 시점에서 몸을 구성하고 있던 마력이 빠르게 휘발되기 시작하니까.

하지만 나쟈의 핵은 그런 일반적인 경우를 벗어난 특이 케이스였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집중된 마력이 몬스터의 기본 법칙을 무시하고 구체의 형태를 이룬 것.

그것이 바로 나쟈의 핵의 정체다.

"안 돼!!"

나쟈의 핵을 전술 조끼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상자에 수납한 후, 검은 나를 향해 달려들던 아트룸 교수를 후려쳐서 날려 버렸다.

데굴데굴 굴러간 아트룸 교수는 잠시 꿈틀대더니 곧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은 겨우 10초.

이마저도 설렁설렁 하면서 어느 정도 여유를 부린 결과다.

녀석이 처음부터 온 힘을 다해서 싸웠다면 정말로 3초 안에 다 끝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있잖아요, 검주.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어, 왜.'

검은 사방에 쓰러진 인간들을 쓰레기처럼 흘겨본 뒤, 더러운 것을 털어내듯 자신의 몸을 크게 한 번 휘둘렀다. 촤악 하고 흙먼지가 흩어진다.

『검주는 혹시, 이렇게 될 걸 예상하고 마지막까지 제게 몸을 넘기지 않고 싸우셨던 건가요?』

'그런 건 아냐. 처음부터 배신 당할 걸 예상하고 전술을 짜는 인간이 어디 있냐.'

나는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트룸 교수를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이런 식으로 배신 당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럼 어째서죠? 처음부터 제게 몸을 넘겼더라면 검주는 다치지 않고 나쟈의 핵을 얻을 수 있었을 텐데요.』

'……그건 그냥 전투가 끝난 후에 나쟈의 핵을 빼앗길 수도 있겠다 싶어서 그런 거 뿐이야.'

아직 성장이 끝나지 않은 개체라고는 해도 나쟈는 어마어마한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놈이 날뛰다보면 당연히 주변의 이목을 끌기 마련이다.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건 확인이 끝난 상태였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다.

근처에 있던 누군가가 나와 나쟈의 전투를 감지하고 찾아와서, 내가 나쟈를 쓰러트린 직후를 노리고 기습하는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모험은 집에 들어가기 전까지가 모험이야. 아무리 멋진 물건을 얻어내도, 그걸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면 의미가 없지.'

그런 이유로 검의 힘은 최대한 아껴둘 필요가 있었지만, 설마아트룸 교수가 걸려들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치 못했다.

"씁쓸하구만. 내가 구해낸 사람에게 뒤통수를 맞을 줄은 몰랐는데."

내가 도와준 사람에게 통수 맞고, 함께 일하던 사람에게 통수 맞고, 다 끝나고 나서 통수 맞고, 이런 일이 하루 이틀 일이 아니기는 했지만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도대체 왤까.

내가 믿음을 못 주는 성격인가? 내가 먼저 다른 사람을 배신한 적이 있는 것도 아닌데, 희한하게 주변에는 내 뒤통수를 못 쳐서 안달인 사람밖에 없는 것 같다.

이젠 꽤 익숙해져서 겨우 이런 일 가지고 흔들리지는 않지만, 조금 씁쓸한 기분이다.

난 받은 만큼 확실하게 갚아주는 성격이라 먼저 좋게 대해주면 나도 좋게 대해주는데, 왜 사람들은 내 진심을 몰라주는 걸까.

먼저 배신만 안 하면 경조사 같은 거 다 챙겨주고, 힘들 때 도와주기도 하는데, 도대체 왜.

역시 루이스가 말한 것처럼 세상은 좆같고, 인간은 쓰레기가 맞는가보다.

『검주도 참, 고생하시네요.』

"됐어, 뭐. 그래도 나는 그렇게까지 최악은 아니니까, 신경 안 쓴다."

나는 검에게 몸의 지배권을 돌려받은 뒤, 어깨를 느릿하게 돌리면서 대답했다.

"적어도 내게는,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세 명이나 있으니까."

* * *

하숙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숲에 있는 맑은 연못에서 몸과 옷을 한 번씩 물로 씻었다.

후덥지근한 날씨라서 차가운 물에 몸을 담그고 싶은 기분이기도 했고, 전투 과정에서 몸 여기저기에 나쟈의 독이 묻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미리 불안 요소를 제거해두려는 목적도 있었다.

햇빛이 뜨거웠기 때문에 옷은 순식간에 말랐다.

이제 슬슬 돌아가볼까. 다들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나쟈의 핵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품 안에 단단히 고정한 뒤, 도시로 들어가는 유일한 입구로 나아간다.

"……?"

그런데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다.

마치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입구를 포함한 그 일대의 성벽이 흔적도 없이 가루가 되어 있었다.

성벽은 도시의 방위를 지키는 핵심이기 때문에 지구대를 포함한 수많은 공무원들이 현장에 나와서 성벽의 빈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모험가 자격증을 신분증으로 제시하고 일단 통과한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최근 들어 나를 중심으로 벌어진 흉흉한 사건들 때문일까, 느낌 상 지금의 참사도 나와 연관이 있는 사건처럼 느껴져서 조금 신경이 쓰인다.

'설마'

눈앞에 펼쳐진 상황과 머릿속의 지식, 기억을 대조한다. 모험가로서 살아온 세월 때문일까.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을 때, 나는 가장 부정적인 가능성을 제일 먼저 떠올리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전장에 나서기 전까지 부지런하게 예상하고 있었던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가 떠오른다.

나도 모르게 그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옷으로 점철되어있던 그 기분 나쁜 남자.

보이드의 얼굴이.

지친 몸, 질질 끌면서 나아가던 다리에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선생님! 루이스! 무사해요?"

"……아, 신현이 왔구나."

문이 열린 순간, 안쪽의 거실에서 연금술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은 의자에 앉아서 오른발만 책상 위에 올려놓은 채 발목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절대 정상적인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 모습을 보고 어깨에 들어간 힘이 쭉 빠졌다. 나도 모르게 앞으로 쓰러질 뻔 했다.

나는 눈을 찌푸리며 질문했다.

"발목, 어떻게 된 거에요? 어쩌다가 다친 겁니까?"

"괜찮아. 난 루이스에 비하면 좀 나은 편이니까. 난 멀리에서 보조하다가 눈먼 공격에 몇 대 얻어맞은 게 전부거든."

연금술사는 전혀 엉뚱한 소리를 하며 엄지 손가락으로 거실 소파에 앉은 루이스를 가리켰다.

"아, 뭐야. 벌써 왔어? 아직 깁스 덜 감았는데."

루이스는 평소의 경갑을 모두 벗어던진 채, 상의는 검은색 탱크톱, 하의는 검은색 스타킹 차림이었다.

그리고 왼쪽 다리에는 상당히 두꺼운 깁스를 감고 있다. 팔도 부러졌는지 오른팔에도 부목을 댄 상태다.

……이 녀석이 저 정도로 심하게 다치다니. 드래곤이라도 나타난 게 아니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인데.

루이스가 굳은 표정으로 팔에 깁스를 감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 남자가 나타났었어. 보이드…… 라고 했었지? 너하고 연금술사 선생님을 습격했다던 그 녀석. 역시나 벌써 이 도시까지 침입해왔더라고."

"그래서, 싸운 거야?"

역시, 나도 모르게 그 말이 목구멍에서 턱 걸렸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너한테 쳐들어갈 거 같았거든.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놈인지 궁금해서 한 번 붙어봤지."

부러진 오른팔의 다섯 손가락을 천천히 쥐었다 펴면서 루이스는 대답했다.

"꽤 강하더라."

"……."

"잘은 모르겠지만, 그 녀석은 싸울 수 있는 시간에 제한이 걸려 있는 것 같았어. 어느 정도 붙은 뒤 '이대로라면 위험하겠군'하고 말하면서 갑자기 물러나더라고."

"물러났다고?"

루이스의 팔과 다리를 하나씩 부러트려놓고 갑자기 물러난다는 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싸울 때는 확실하게,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밟는 게 원칙일텐데.

"내가 보기에는 아마 그것도 분신 같았어."

등뒤에서 연금술사가 발목에 붕대를 감은 후 일어났다.

"분신에 강한 힘을 넘겨줄수록 유지하는 난이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지지. 분신을 만드는 술식이 아직 미완성이거나, 그게 아니면 능력이 부족해서 분신을 더 이상 유지하지 못하고 후퇴한 걸지도 몰라."

"하긴, 분신이 불안정해진 상태에서 파괴되기라도 하면 새로 만드는 것도 일이니까요."

"그래. 그러니까 아마도…… 그 남자의 분신은 한동안은 네 앞에 나타나지 않고 술식을 재정비하는데 시간을 가질 가능성이 높아."

연금술사가 루이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루이스."

"네, 여기 있어요."

루이스가 부러지지 않은 손을 써서 나를 향해 뭔가를 던졌다.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붙잡는다.

"뭐야, 이거…… 나침반이에요?"

"싸우던 도중에 루이스가 수를 써서, 그 남자의 마력 패턴을 기록시켜뒀어. 해석하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걸 쓰면 며칠 안에 그 남자가 현재 있는 위치를 찾아낼 수 있을 거야."

그 말을 듣고 루이스를 다시 돌아본다.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면서 루이스가 대답한다.

"……그래도 명색이 특급 모험간데, 이 정도는 해야지."

아무래도 혼자 힘으로 그 남자를 이기지 못했다는 게 조금 창피한 모양.

나와는 달리 거의 실패하지 않고 승승장구해온 인생이기 때문에, 부끄러워하는 심정이 이해는 간다.

연금술사는 루이스를 보며 잠시 누그러진 표정을 지은 후, 다시 나를 돌아보며 질문했다.

"우리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하고, 네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건 당연히 목표를 이루었다는 소리겠지. ……전리품을 보여주겠어?"

"아, 여기 있어요."

나는 허리춤에서 나쟈의 핵을 꺼내서 연금술사에게 보였다. 연금술사는 물론이고 루이스도 감탄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다.

"수고했어. 너도 이제야 비로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겠네."

"네, 이제 시작이죠."

아트룸 교수의 배신 때문에 조금 뒷맛이 안 좋긴 했지만, 몇 년 동안 삽을 푸면서 노력해온 결과, 간신히 목표에 도달할 수 있었다.

눈물이 흘릴 정도로 감격스럽지는 않지만, 솔직히 좀 뿌듯하긴 하다.

"그럼…… 신현아."

연금술사가 내 소매를 살짝 쥐면서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잠시, 저쪽에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 * *

연금술사는 루이스가 쉴 수 있도록 수면 유도 효과가 있는 약품을 건네준 뒤, 나와 함께 거실 옆에 있는 침실로 들어갔다.

침대에 앉은 연금술사는 나를 올려보며 말했다.

"넌 이제 나쟈의 핵을 얻었지. 그럼 이제 바로 그걸 복용할 생각이야?"

"할 수 있으면 그러고 싶지만 체력은 좀 회복하고 나서 진행하고 싶어요. 잘못하면 마력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폭주할 수도 있으니까."

용도를 벗어난 마력은 아주 위험한 독이다.

그래서 영약을 통해 마력을 흡수할 때에는 강인한 정신과 수준 이상의 마력이 요구된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영약이 품은 마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오히려 지금까지 쌓아올린 힘을 모두 잃어버릴 수도 있다.

나는 마력을 전혀 쓰지 못하는 만큼 순수하게 나의 정신과 능력만 가지고 영약의 마력을 견뎌내야 한다.

마력을 흡수한 후에도 코어와 내 몸을 동기화하기 위해서 길을 들이는 작업이 필요할 테고.

"그렇겠지. 아마 네가 나쟈의 핵을 섭취한 후, 자유롭게 마력을 다룰 때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릴 거야. 그러니까…… 네게 제안하고 싶은 게 하나 있어."

연금술사는 잠시 손끝으로 자신의 입술을 문지른 뒤, 나를 올려보며 말했다.

"나와, 성교를 해서 마력을 섞어보는 건 어떨까."

"네?"

나는 눈만 깜박거렸다.

내 태도에 연금술사는 조금 주저하면서도,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성교를 통해서 내 마력을 네게 섞는 방식으로…… 나쟈의 핵을 안정시키는 건 어떨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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