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이자는 검성의 길을 걷는 것 같습니다-9화 (9/287)

〈 9화 〉 2. 어떤 청년의 계획목록

* * *

"……."

검왕검이라고?

검왕에 대해서는 나도 알고 있다. 이 대륙, 아니 이 세계에서 무학??에 대해서 공부하다보면 한 번은 마주치게 되는 이름이니까.

무학의 역사를 깊이 공부한 사람들 사이에서 그 이름은 '현대 무공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검왕의 대두를 전후로 개개인의 느낌과 감각에 의존하고,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필설로 표현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얼버무렸던 고전적 무공의 흐름에서, 철저하게 이론화된 계산과 합리성으로 대표되는 현대 무공의 흐름으로 넘어왔기 때문이다.

그 이전까지 중구난방이었던 무공의 원리를 하나부터 열까지 철저하게 해체한 뒤, 총 십수 개의 커다란 분류로 다듬은 것도 검왕의 공적이다.

마치 무?라는 이름의 여러 가지 색으로 칠해진 종이를 잘게 분해한 뒤, 각각의 색깔을 따로 떼어내서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이론으로 정리한 셈이라고 해야 할까.

말로 풀면 간단하지만 무공을 구성하는 하나 하나의 요소를 하나도 빠짐 없이 이해하고 있지 않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이건 신빙성이 없는 야사이지만, 그 시절의 기록에 의하면 검왕이 자신의 이론을 학회에 발표한 이후 정체 단계에 놓여 있던 수많은 젊은 무인들이 '다음 경지'에 대한 단서를 얻어서 순식간에 절세고수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일화도 있다.

현대의 무인들은 보통 검왕이 정리한 십수 개의 흐름 중 하나를 선택해서 평생에 걸쳐 수행하는 식으로 경지를 수양한다.

그 점을 고려하면 현대의 무인 중 99%는 모두 검왕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나와 루이스도 마찬가지고.

조금 전에 지나가듯이 나왔던 명공 루키우스의 이름 또한 역사책에서 본 기억이 있는 이름이다.

……이걸 바로 믿어도 될까.

갑자기 너무 유명한 이름이 튀어나와서 현실감이 없다.

아니 뭐, 일단 질문이나 한 번 해보자.

"검왕…… 이라면 당연히 그 검왕, 혹은 무왕?王이라고 불리던 그 사람을 말하는 거겠지. 그럼 검왕의 검이라는 건 네가 실제로 검왕이 사용했던 검이라는 소리인가?"

『아, 그런 건 아니에요. 저를 루키우스에게 제작해달라고 의뢰한 건 검왕이지만, 검왕께서는 따로 쓰던 검이 있었거든요. 저를 실제로 쓴 건 여기 계시는 검주가 처음이세요.』

그럼, 그 검왕이라는 사람은 쓰지도 않을 검을 당대 제일의 대장장이에게 부탁해서 제작했다는 건가? 검집에는 특급 모험가도 뽑을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한 봉인까지 걸어둔채?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그런 일을 벌인 거지?"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 부분만 의도적으로 도려내진 것처럼 정보가 없거든요.』

의심스럽다.

나는 이때, 이 세계에 오기 전에 즐겨 읽던 SF 소설에서 들어본 '인공 지능'의 개념을 떠올리고 있었다.

인간의 손에 의해서 제작된 가상 인격.

그렇다면 당연히 제작자의 의도에 따라 정보가 누락되어 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아, 하지만 한 가지 알고 있는 건 있어요. 검주께서 저를 뽑아내셨다는 건…… 검주께서 루키우스와 검왕이 걸어둔 조건을 만족했다는 사실입니다.』

"검왕이 걸어놓은 조건?"

실력…… 은 아닐테고, 그럼 뭐지?

마력을 다루는 능력이 없는 건 둘째 치더라도, 순수한 검술에 있어서도 나는 아직 루이스에게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 루이스는 뽑아내지 못했고, 나는 뽑아냈다.

그런 결과가 나온 이유를 나는 여전히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 안에 기록되어 있는 정보에 의하면, '검왕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조건이 명시되어 있는데요.』

"검왕의 경지라고?"

나도 검왕에 대해서 깊이 판 건 아니지만, 검왕이라고 하면 그 시대는 물론이고 현대에서도 고금제일인으로 꼽히는 사람이다.

독자적으로 정립한 무론을 바탕으로 전대미문의 경지에 올랐으며, 지금도 검왕 계열의 학파에서는 그 경지를 복원하는 것을 숙원 사업으로 여기고 있다던데.

『……이 정보에 대해서도 대답해드릴 수는 없지만, 이건 기록이 아예 없다기보다는 기록이 의도적으로 잠겨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접근 권한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정해진 권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열람할 수 없도록 굳게 닫혀 있는 기록.

하지만 이런 식의 구조가 늘 그러하듯, 찾아보면 빈틈은 나오는 법이다. 해킹을 통해서 정보를 빼내는 것처럼, 이 검에 대해서 조사하다보면 보안을 돌파해서 정보를 열람할 수 있는 방법이 나올지도 모른다.

나는 입술을 햝으며 다시 질문하려고 했다.

"그럼……."

"신현아. 너 지금 누구하고 대화하고 있는 거야?"

대화하는 소리가 들린 것일까. 손만 씻고 나온 듯, 연금술사가 물을 털면서 나를 보고 있었다.

"손만 씻고 나오신 거 같은데, 꽤 늦으셨네요."

"오래 걸릴 만한 일이 있었어."

욕실에서 도대체 뭘 한 거야.

나는 고개를 갸웃한 뒤,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 오른손으로 바닥에 쓰러진 검을 가리켰다.

"검이에요. 저 검이 제게 말을 걸고 있더라고요."

"너의 목소리는 들렸지만, 다른 사람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는데."

"그래요? 나 말고는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건가?"

내가 들으라는 듯 중얼거리자 쓰러져 있던 검이 방바닥에서 몸을 비비적댔다.

『그죠그죠. 검주가 아니면 제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어 있어요.』

"지금 검이 말하고 있는데, 저 말고는 아무도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어 있다네요."

"……아, 그런 타입. 가끔씩 있지, 그런 무기가."

연금술사는 꽤 오랜 세월을 살아온 만큼 다양한 지식을 습득하고 있다. 이 정도는 크게 놀랄 일도 아닌가보다.

"응, 잘 됐네. 나는 들을 수 없지만, 어찌됐든 검이 말하는 목소리를 네가 들을 수 있다는 건 '마력'이 '파장'의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는 뜻이야. 즉 그 '파장'을 포착하고 분석할 수 있다면 나고 그 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빠삭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연구자 답게 연금술사는 짧은 대화만으로도 검의 성질을 파악하고 해체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보다도 신현이 네 몸을 닦아주는 게 먼저야. 검……, 그 아이에게도 전해줘. 하고 싶은 말이 있겠지만, 지금은 잠시 참아달라고."

"아마 지금도 듣고 있을 거에요."

"그래? 그렇다는 건 마력을 넓게 펼쳐서 시각과 청각을 대신하고 있다는 소리구나. 연구 주제가 하나 더 늘었는걸."

연금술사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내 허리에 감긴 붕대로 손을 뻗었다.

* * *

내가 스스로의 다리로 일어나서 걸을 수 있게 된 건 여섯 시간이 지난 이후였다.

여전히 팔과 다리에는 잔뜩 붕대가 감겨 있었지만 조금 전처럼 심하게 몸을 압박하는 형태는 아니었다. 나는 거의 열두 시간 만에 자리에서 일어난 뒤, 팔다리를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상처가 벌어질 걱정은 하지 않았다.

연금술사의 술식은 지극히 고도의 기술로 만들어진 치료 술식이다. 눈에 띄는 상처는 이미 사라진 상태라고 봐도 무방했다.

"효과 죽이네요. 앞으로는 좀 더 뒷일 걱정 없이 몸을 쓸 수 있겠는데."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까치발로 눈높이를 올린 연금술사가 손날로 내 이마를 후려쳤다.

"치료 술식도 아무한테나 쓸 수 있는 게 아니야. 육체의 상처를 재생시키는데는 효과적이지만 그만큼 치료 받는 환자의 체력을 소모하는 방식이니까. 너처럼 강인한 육체를 가진 사람이 아니면 오히려 말라서 비틀어졌을 거야."

"아, 그럼 지금 느껴지는 이 묘한 탈력감이."

"평범한 사람이라면 몸살 감기와 비슷한 증상이 나타나면서 며칠은 꼬짝도 못하고 누워 있었을 거야. 네가 아니면 함부로 쓸 수 없는 강도의 술식이지."

마법은 만능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편리한 게 아니었다.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는 술식에는 반드시 그 효과에 동반되는 리스크가 존재한다. 연금술사가 시술한 술식도 체력이 부족한 사람에게 시도하면 오히려 쇼크 증상이 나타날 수도 있을 만큼 강력한 치료 술식이다.

쉽게 말해,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뜻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후 나는 각 부위의 근육을 자극하는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겉으로 드러난 팔과 다리에는 아직 단검이 꽂혔다가 뽑힌 흔적이 남아있다.

스트레칭을 마치고 나서 검을 들고 바깥으로 나왔다.

나는 드물게도 조금 들떠 있는 상태였다. 거울은 보지 않았지만, 부모님이 준 선물상자를 뜯어보는 소년 같은 얼굴을 하고 있을 게 틀림없다.

당장이라도 이 검을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연금술사는 그런 나를 말리려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내 팔뚝의 흉터를 가리키며 주의를 주었다.

"너무 심하게 움직이면 겨우 아문 상처가 다시 터질 수도 있어.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알았어요."

이곳은 2층 짜리 건물에 여섯 개의 원룸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연립 주택 구조였다. 연금술사의 집은 2층 복도 제일 끝에 있는 구석의 방이다.

문을 열고 오른쪽에 있는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빨래를 널 수 있게 줄이 설치된 옥상으로 나올 수 있다.

지금은 연금술사가 자기 손으로 빨아 놓은 내 옷이 널려 있다.

단검에 뚫려서 여기저기에 구멍이 뚫려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연금술사는 바느실에도 능숙한지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바느질한 흔적이 보이지 않을 만큼 완벽하게 고쳐져 있었다.

그 검은 정장과의 전투가 끝난 직후 꽤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하늘은 벌써 새까맣게 어두워져 있었다.

달이 밝다. 별빛도 멋지게 반짝이고 있다.

"……."

이 세계에 떨어진 뒤, 불편한 부분도 있었고 편리한 부분도 나름 있었다.

맑은 공기와 아름다운 밤하늘의 풍경은 이 세계에서 날 즐겁게 해주는 몇 안 되는 존재 중 하나였다.

10년 전에는 밤중에도 침대에 드러누워서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지금은 별빛을 흠뻑 받으며 밤하늘을 관찰하는 게 취미가 되었다.

스으, 하아. 맑은 공기를 최대한 만끽하면서 나는 오늘 있었던 전투를 복기하기 시작했다.

나의 반대편에 맞서 싸우는 상대가 있는 것처럼 자세를 잡고, 혼자서 검을 휘두른다.

위험한 싸움이었다. 물론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전투가 오늘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로 압도적인 상대와 맞서 싸운 경험은 거의 없었다. 지금 돌이켜봐도 내가 사지 멀쩡하게 살아있는 것이 기적처럼 느껴질 정도다.

상당히 괴롭고, 까다로운 싸움이었다.

하지만 그런 전투였기에 얻을 수 있었던 것도 있다.

모의전에서는 얻을 수 없는, 패배가 곧 죽음으로 이어지는 싸움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경험이다.

'현대의 검술과 비교해서 체계가 조금 달랐어. 처음 경험해보는 타입의 적이었지. 고전적인 느낌의 검술……, 그래, 아마 이런 느낌……'

검술의 맥을 파악하기까지 시간이 소요된 것도 그 때문이다.

현대의 검술 또한 고전적인 검술을 바탕으로 발전해온 만큼 근본적인 부분에서는 공유하고 있는 점이 있었지만, 체계가 상당히 달라서 읽어내는데 상당히 애를 먹었다.

그 덕에 혈관은 부서지고 척추는 비틀리는 등, 연금술사의 치료 술식이 아니었다면 재활에만 긴 시간이 걸렸을 부상이 몸 여기저기에서 발생했었다.

하지만 그 검술도 이겨냈다.

비록,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지면서 그 검술을 이겨놓고도 꼼짝 없이 죽게 될 상황에 처하기는 했지만.

"그러고 보니까 미처 묻지 않은 게 하나 있는데."

『아, 네. 말씀하세요, 검주.』

"오늘 나와 싸웠던 그 남자는 너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눈치였어. 그리고 너를 휘두르는 나를 보면서도 '검에게도 자격을 인정 받지 못한 애송이'라고 표현했지."

또한, '그런 걸 검집에서 뽑아냈기 때문에 나 같은 인간이 나타나고 말았으니까'라고도 말했다.

말을 들어보면 마치 이 검이 검집에서 해방된 순간 그것을 추적해서 찾아온 느낌인데.

『아, 그거요. 그건 제가 말해드릴 수 있는 정보 같은데요.』

"그래?"

다행이다.

또 무슨 정보를 열람하는데 제한이 있다고 말하는 건 아닐까 솔직히 좀 걱정했었는데.

『하지만 그 전에, 저도 검주에게 하고 싶은 질문이 하나 있는데, 대답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내가 대답해줄 수 있는 질문이라면."

『아마 어려운 질문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부담 가지지 말고 물어봐. 생명의 은인이 하는 질문인데 뭐."

그때, 바로 그 순간.

이 녀석이 갑자기 눈을 뜨고 내 몸을 지배하지 않았더라면…… 솔직히 좋은 미래가 그려지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도구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조금 이상하지만 이 검은 내게 있어 생명의 은인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나와 연금술사가 습격을 당한 것도 이 녀석 때문일 가능성이 높긴 하지만…… 됐어. 사소한 건 넘어가자. 살아 남았으니까.

『솔직히 말씀 드리면, 전 검주께서 검의 길을 걷고 계시는 게 잘 이해가 안 되거든요.』

"무슨 소리야?"

『물론 검주에게는 자질이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검집의 잠금쇠는 검주에 의해서 돌아갔을테죠. 하지만 검주께서 지금까지 걸어오신 검의 길은 정말로 어려운 길이었을 거예요. 검주에게서 마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으니까요.』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검이 내게 무슨 뜻으로 말을 걸고 있는지 그 이유를 이해했다.

루이스는 물론이고, 연금술사에게도 자주 들었던 말이다. 꽤 익숙한 문답이다.

『솔직히 말해서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요. 마력을 다루지 못하는 이상 한계는 명확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정도 수준에 이르기까지 포기하지 않고 이 길을 걸어올 수 있으셨는지……』

사실 그 두 사람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비슷한 말을 들어왔다. 네 실력이 있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마력을 전혀 다루지 못하는 몸으로 이런 길을 걷는 건 너무 어렵고 가혹하지 않느냐.

이 길을 포기하고 조금 더 편한 길을 찾아가도 되지 않겠냐.

아, 최근에도 들었었지.

상급 모험가 검정 시험의 모든 관문을 통과한 뒤, 마지막 면접에서도.

그때를 생각하니 술도 안 마셨는데 또 다시 속이 쓰려왔다.

"음, 그러고 보니 네게는 말을 안 했나? 난 이 세상 사람이 아니거든."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요……?』

"그래. 여기하고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세계에서 '전이'해온 거야. 나만 그런 게 아니라 가끔씩 그런 인간들이 줄줄이 튀어나오곤 하지."

드물기는 해도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일이라, 관련 법률도 있다.

나 같은 경우에도 '이세계인 특별 관리법'의 혜택을 받아서 성공적으로 여기에 정착할 수 있었다.

"내가 태어난 곳은 마력이 없고, 마법이 없는 세계야. 그리고 그 세계에서 여기에 전이해 온 내 시점에서 보면 이 세계는 솔직히 지옥이나 마찬가지로 보여."

대부분의 인간이 마력이라는 힘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손쉽게 사람을 상처 입히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세계.

나는 솔직히 이 세계를 상당히 두려워하고 있었다.

"나도 스스로 어렵고 위험한 길을 걷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위험이라는 건 내가 피하고 싶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이 세계에서 나는 절대적인 약자의 위치에 서 있고, 내게 닥쳐오는 위험 하나도 제대로 제거할 수 없을 정도로 나약한 인간이야."

마력을 쓰지 못하는 내가 도달할 수 있는 한계는 정해져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얌전히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 자신의 안전을 지켜낼 뿐만 아니라,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마력을 쓰지 못하는 내가 약자라는 건 인정하지만, 그래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거든. 오늘 있었던 사건도 내가 하루라도 수련을 게을리 했다면 이겨내지 못할 위기였어. 그 위기를 이겨냈다는 것 자체가 나의 10년이 무의미하지 않았다는 증거지."

물론 그 이외의 이유도 있다.

최고의 자리에 서고 싶은 사나이의 철없는 야망.

나 자신에게 재능이 없다는 걸 인정할 수 없었던 열네 살 소년의 치기 어린 반항심.

실리적인 목적과 여러 가지 감정적 이유가 혼합되어서 내 검술의 뼈대를 구성하고 있었다.

"충분한 대답이 되었을까?"

『네, 듣다 보니 꽤 그럴 듯하네요.』

검의 목소리에 아주 조금 흥미가 더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 대답이 만족스러웠던 것일까.

『괜찮네요. 재능은 있는데, 기회가 없어서 그걸 살릴 수 없었던 사람을 최고의 검사로 키워내는 것도 재미있겠죠. 좋아요, 같이 한 번 일해봅시다.』

검이 나의 손 안에서 낮게 진동했다.

『함께, 최고가 되어보자구요.』

* * *

"이 이야기는 이쯤 하고."

『네.』

"슬슬 조금 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고 싶은데."

이 녀석은 연금술사를 습격했던 검은 정장의 남자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떠다 보니까 이야기가 옆으로 잠시 샜는데, 그 검은 정장의 남자에 대한 정보는 꼭 들어두고 싶다.

그를 쓰러트리기는 했지만 그걸로는 부족하다. 나는 아직 그 남자가 그런 짓을 저지른 이유도 모르고 있었으니까.

『제 예상이 맞다면 그 사람은 제가 제작될 당시 기술 지원 명목으로 동석했던 검사들 중 하나의 후예일 거에요. 검왕께서는 당대제일의 무인이었지만, 검왕께서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실력자들이 여기저기에 존재하고 있었거든요.』

"그렇게 추측하는 근거는? 인상착의에 단서가 있었던 건가?"

『그런 건 아니고요. 그 검은 정장의 남자는 검주가 저를 검집에서 뽑아내고 얼마 되지 않아서 나타났었잖아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건 그랬었지. 마치 위치를 추적하는 술식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상당히 빠르게 나타났었어."

그 남자와의 첫 조우는 내가 검을 처음 뽑아낸 시간에서 거의 열두 시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우연일 가능성은 없다. 당연히 검의 위치를 알고 찾아왔다고 생각하는 게 합리적이다.

『검주도 알고 계시겠지만, 제 위치를 추적하기 위해서는 제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마력 패턴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전 공방에서 완성된 후 누구에게도 쓰이지 못하고 보관되어 있다가 사고로 지층에 갇히게 되었거든요.』

"즉, 오늘 있었던 전투가 첫 실전이었다?"

『네. 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사람들 앞에 노출되지 않은 무기예요. 그런데 그런 제가 검집에서 빠져나온 그 순간 발생한 마력을 수신해서 추척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당연히 제가 제작되던 당시 그 자리에 동석했던 사람들과 연이 있는 인간이라고밖엔 생각할 수 없죠.』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검은 지금까지 이 세상에 탄생한 이후로 단 한 번도 검집에서 나와보지 않은 무기이다.

다시 말해 마력을 발산한 적이 없다.

그러한 과거를 고려했을 때, 검이 검집에서 해방된 순간 발산된 마력을 감지할 수 있고, 또한 그 마력이 검에서 발생한 마력이라는 걸 알아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처음부터 이 검의 제작에 참여한 사람밖에 있을 수 없다.

혹시 200년 전에 제작되었던 검에 대한 정보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유실되지 않고 계속 전승되고 있었다면, 그리고 그 후예들이 이 검을 노리고 있다면 오늘 벌어졌던 일을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오늘 검주와 부딪쳤던 습격자가 그 일당이라는 걸 뒷받침하는 정보가 제 안에 들어 있어요.』

"뭐지?"

『그 검은 정장의 남자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형태를 하고는 있었지만, 거죽 안에는 사람의 피와 근육이 아니라 시꺼먼 진흙 같은 게 있었잖아요.』

"그랬었지."

내가 그를 쓰러트리지 못하고 위기에 몰렸던 것도 놈이 인간이라고 착각하는 바람에 전략을 잘못 세웠기 때문이다.

놈이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면 나도 다른 식으로 전략을 세웠을 텐데, 아쉬운 실수였다.

『그건 사용자의 힘을 일부분 떼어내서 만들어낸 분신이에요. 저의 제작에 참가했던 검사 중 한 사람이 도플갱어 술식을 전문적으로 다루고 있었는데, 오늘 붙었던 남자와 그 검사의 기술은 거의 대동소이한 형태였습니다.』

"……잠깐만."

그 말을 듣고 정신이 퍼뜩 들었다.

그러니까 지금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 남자를 쓰러트렸다고 그게 끝이 아니라는 소리가 되는 거 아닌가?

즉.

"그 남자의 본체가 아직 살아있다는 거야?"

『틀림없어요. 물론 분신이 부서지면서 본체도 어느 정도 충격을 받았을 것이고, 분신이 소멸하면서 사라진 힘도 하루 이틀만에 돌아오진 않겠지만…… 본체는 아직 살아 있어요. 그걸 처치하기 전까지는 끝이 아닙니다.』

검이 낮게 진동했다.

내게는 그 소리가 거의 짐승의 하울링처럼 들렸다.

『쉽게 말해서…… 검주가 죽을 힘을 다해서 열심히 수련해야만 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는 소리죠.』

검은 씁쓸한 티를 내며 말했다.

『솔직히 지금의 저와 검주의 능력으로는 이기기 어려운 상대일 거에요. 실력이야 그렇다 쳐도 솔직히 마력을 쓰지 못하는 만큼 한계가 너무 명확하거든요.』

"……쫓기듯이 수련하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닌데."

하지만 내가 원하지 않아도 검은 이미 뽑아졌다.

그리고 그 남자는 이 검을 빼앗기 위해서 반드시 나를 찾아올 것이다.

조금 당황스럽지만 내게 주어진 상황은 대략 이해했다.

정말, 재수도 더럽게 없지. 간신히 새로운 힘을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그게 오히려 나를 위험에 빠트리는 함정 카드였을 줄이야.

하지만 얌전히 죽어줄 생각은 없다. 내가 지금까지 쌓아올린 게 얼만데, 이런 거 하나에 무너질 수는 없잖아.

이것이 새로운 힘을 얻기 위해서 준비된 시련이라면 기꺼이 뛰어 넘어 주겠다.

나는 약해질 것 같은 마음을 다잡으면서 검에게 질문했다.

"그 습격자의 이름을 뭐라고 부르면 될까? 계속 그 남자, 하고 부르는 것도 영 느낌이 이상한데. 부르는 이름 정도는 있어야 하잖아."

『……아. 잠깐만요, 기다려보세요. 검주.』

기억을 되짚고 있는 듯, 검은 잠시 동안 입을 닫은 채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목소리가 확 밝아졌다. 뭔가 떠오른 것 같다.

『보이드. 그렇게 부르면 될 거예요.』

"보이드?"

『네. 200여년 전, 저의 제작에 참여했던 어느 검사의 이름입니다.』

* * *

그다지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언제 찾아올지 모를 습격에 대비해서 준비를 해둘 필요가 있다.

당장 급한 문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위치를 추적 당하고 있을 검의 마력이 더 이상 감지되지 않도록 대책을 세우는 일이었다.

이건 비교적 간단한 일이었다. 검에게 협력을 요청해서 그 고유의 마력 패턴을 알아낸 후, 검의 마력만 집어내서 차단하는 결계 술식을 제작했다.

연금술사의 어드바이스가 있기는 했지만 술식을 제작하는 것 자체는 내 실력으로도 가능한 부분이었다.

원래 이런 술식에서 제일 귀찮은 과정이 마력의 고유파장을 알아내서 기록하는 부분인데 나는 이 부분을 통째로 넘겨버렸으니까.

술식을 빼곡하게 기록한 부적을 여러 장 제작해서 검의 날에 잔뜩 접착시켰다. 이렇게만 해도 검을 검집에서 뽑아 내더라도 마력에 추적 당하는 걸 방지할 수 있다.

두 시간에 걸친 작업을 끝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때, 갑자기 원룸 문이 덜컥 소리를 내면서 열렸다.

"선생님, 저 왔어요."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건 현재, 이 도시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진 특급 모험가였다. 성깔 있어 보이는 날카로운 눈매에 오른쪽으로 틀어서 묶어 올린 금발이 찰랑찰랑 흔들린다.

"뭐야, 신현이 너. 다쳤어?"

나는 실내에서 편하게 입는 반소매 차림이었다. 그리고 내 팔과 다리는 연금술사가 새로 감아준 붕대로 묶여 있는 상태다.

푸른색 눈이 가늘어진다.

루이스는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상태로 천천히 의자를 당겨서 그 자리에 착석했다.

아직 묻지도 않았는데 루이스는 본인의 입으로 자신이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오게 되었는지를 구구절절 늘어놓기 시작했다.

"선생님. 일단 선생님이 공방에 남기고 간 쪽지를 보고 찾아오긴 했는데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에요? 공방은 난장판이 되어 있지, 바닥에는 피까지 떨어져 있지…….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구요."

말하는 걸 들어보니까 연금술사가 기절한 나를 옮기면서 공방에 쪽지를 두고 온 모양이다. 어차피 루이스도 검의 연구 결과를 듣기 위해서 한 번은 공방에 들려야 했으니까. 그걸 고려해서 메세지를 남겨둔 거겠지.

연금술사는 루이스에게 커피를 내려주면서 간단하게 설명했다.

"말로 설명하기는 좀 길어. 천천히 설명해줄게."

"신현이 쟤도 좀 다친 거 같고…… 보통 일은 아니었던 거 같은데."

루이스의 시선이 예리하다. 그리고 그때, 루이스의 시선이 피 묻은 붕대로 가득 찬 쓰레기통으로 움직였다.

쓰레기통으로 접근한 루이스는 지뢰탐지견처럼 눈을 감은 채 한참을 킁킁대고 있었다.

"근데 이 냄새는 또 뭐지? 피하고는 살짝 다른…… 뭔가 좀 찝찔하고 기분 나쁜 냄새도 나는데요? 붕대에서 나는 냄샌가? 피 냄새는 아닌 거 같은데."

루이스는 벌써 쓰레기통에서 붕대를 꺼내 손에 꽉 쥐고 있었다.

그리고 붕대에 아직 남아있는, 피와는 다른 누런 색의 얼룩에 코를 가져가서 킁킁 맡아댄다.

…….

어, 잠깐만. 그거 설마.

"썩은 우유 냄새 같기도 하고……. 밤꽃 냄샌가 이건? 되게 많이 묻어있네."

"아, 그거 신현이 정……"

"약품이야. 손에 묻으면 쉽게 안 지워지니까 빨리 손 씻고 와."

연금술사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헛소리를 시작하기 전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다행히 루이스는 연금술사의 말을 끝까지 듣지 못한 얼굴이다.

루이스의 검지와 엄지 사이에 누렇고 찐득찐득한 액체가 잔뜩 묻어 있었다.

그 액체에 흥미가 생겼는지 루이스는 한참 동안 냄새를 맡고 있었지만, 다행히도 그걸 입 안에 집어넣지는 않았다.

루이스가 손을 씻기 위해서 욕실에 들어갔다.

"루이스에게는 그 얘기 하지 마요."

"왜? 루이스에게도 알 권리는 있잖아."

"안 돼요. 쟨 저렇게 보여도 순수한 구석이 있으니까."

쑥맥이라고 해야 하나. 하여튼 그런 게 있다.

하지만 연금술사는 본인이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얼굴이다.

여러모로 글러먹은 인간이다.

욕실에서 한참 동안 손바닥을 문지르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갑자기 소리가 뚝 끊어졌다.

루이스가 손에 묻은 물기를 털면서 나왔다.

"선생님, 저거 뭐예요? 몇 번을 씻어도 잘 안 지워져서 고생했어요."

"인간 남성의 체액 베이스거든."

"또 신현이 피를 뽑아서 뭘 했나 보네요?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네."

루이스는 손에 묻은 액체의 정체에 대해서 전혀 짐작가는 바가 없는지 가볍게 어깨만 한 번 으쓱이고 말았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표현은 이런 때 쓰는 말이 아닐까 싶다.

별다른 일이 없는 이상 나는 오늘의 일을 무덤까지 가지고 가게 될 것이다.

"그럼 설명해주세요. 공방은 왜 그런 꼴이 됐는지, 그리고 신현이 너는…… 어째서 그렇게 상처투성이가 되어 있는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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