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화 〉 1.5. 마검님이 보고 있어
* * *
나는 느릿하게 의식을 되찾았다.
"……."
눈을 다시 떴을 때, 그곳은 어두컴컴한 공간이었다.
처음에는 조금 생소한 분위기라서 위화감을 느꼈는데, 주변의 풍경이 눈에 익기 시작하니까 여기가 어디인지 알 것 같다.
이곳은 연금술사 소유의 자취방이었다.
1년 365일 내내 공방에 틀어박혀서 연구만 할 것 같은 인상의 연금술사지만, 그녀도 가끔씩 외출할 때가 있다.
이 자택은 연금술사가 외출을 마친 후 공방까지 돌아가기 귀찮을 때 사용하는 공간이었다. 연구 시설이면서도 수면실이나 세탁기가 갖춰져 있는 공방하고는 다르게 이쪽은 철저하게 숙식하는 용도다.
"윽……, 아야야……"
고통 때문인지 부분적으로 떠오르는 기억이 희미하다.
단편적으로 떠오르는 기억으로 추측을 해보면, 검을 다시 검집에 돌려놓고 잠금쇠를 돌린 직후, 그 자리에 쓰러져서 그대로 기절한 거 같은데.
연금술사가 여기까지 옮겨온 건가?
"어머, 일어났네."
목 아래로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고개만 움직여서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졸린 인상의 녹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인다.
얇은 차림의 연금술사가 한손에 커피를 들고 있었다.
평소에 늘 걸치고 다니던 흰 가운은 어디에 벗어두고 왔는지, 지금은 주황색 캐미솔 위에 군청색 원피스 한 장만 걸치고 있다. 치맛단이 짧은 탓에 훤히 보이는 허벅지가 눈부시다.
왼쪽 어깨에는 거즈가 붙어있다. 칼에 맞아서 찢어졌던 그 부위다.
"네가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 데려오느라 고생 좀 했어. 엉망이 된 내 공방보다는 여기가 나을 거 같아서 이쪽으로 옮겼는데…… 잠자리가 불편하지는 않으셨는지?"
"그런 걸 느끼지 못할 정도로 아픈 상태라서요. 음, 뭐, 괜찮은 거 같은데요."
조금 갑갑한 느낌이 들어서 살짝 돌아봤는데, 손끝이나 발끝 같은 말단 부위를 제외한 모든 부위에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침대의 쾌적함을 따질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다.
연금술사가 손가락을 움직이자 방에 불이 들어왔다.
그녀의 자택은 사용한지 오래 되었는지 생활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 덕에 오히려 지저분한 느낌은 덜한 편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어요?"
"그 후로 네 시간 정도. 나는 네가 족히 열 시간은 기절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편한 차림으로 앉아 있었던 거야, 연금술사는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의자에 걸려 있는 흰 가운을 가리켰다.
연금술사는 나를 부축해서 상반신을 잠시 일으키게 한 다음, 찻잔에 따른 액체를 내게 내밀었다.
목 아래로는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태라 고양이가 우유를 햝듯 조금씩 마실 수밖에 없었다. 아, 이건 진통제인가? 목구멍 안쪽으로 삼켜서 넘긴 순간 몸 상태가 조금 편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걸 마신 상태에서는 오히려 누워 있는 게 몸에 안 좋아. 앉아있을 수 있겠어?"
"네, 할 수 있어요."
연금술사가 침대를 조정했는지, 침대의 위쪽 부분이 덜컥거리면서 움직이더니 부드럽게 올라왔다. 병원 침대처럼 각 부분의 높이를 조절할 수 있는 구조 같았다.
비스듬하게 올라온 침대 시트에 등을 기댄다.
아, 조금 자세가 편해졌다.
"몸이 단련되어 있어서 그런가, 생각보다는 낯빛이 괜찮은걸. 몸을 그렇게 막 쓴 것도 강인한 육체를 가지고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었어?"
"그런 건 아닌데요. 아무리 몸을 단련해도 막 굴리다 보면 인대도 닳고 관절도 부서지고 하면서 순식간에 못 쓰게 되잖아요. 당연히 저도 어지간하면 안 다치고 싸우는 게 좋아요."
진짜로.
물론 어지간한 손상은 후유증 없이 고쳐줄 수 있는 이 세계의 의학 기술을 믿고 벌인 일이지만, 할 수 있으면 안 다치고, 몸도 아껴가면서 싸우는 게 나도 좋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걸 고려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대였다. 나도 어느 정도 각오를 하고 전투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관절이 부서지고 뼈가 망가지더라도 죽는 것보다는 확실히 나으니까.
"그거야 그렇다고 쳐도, 진심으로 다치는 걸 감수하면서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 하지만, 이번에는 다행히 큰 후유증 없이 고칠 수 있을 거 같으니까…… 이쯤에서 용서해줄까."
"아, 진짜요?"
솔직히 손가락 한두 개 정도는 못 쓰게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검과 검이 부딪칠 때마다 관절이 부서지고 인대가 닳아 없어지는 게 느껴질 지경이었다고.
내가 솔직하게 대답하자 연금술사는 검지 손가락으로 내 미간을 푹 찔러댔다. 깜짝 놀라서 얼굴이 찡그러졌다.
"내가 아니었다면 이 정도로 후유증 없이 회복시킬 수는 없었을 거야. 그리고,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아마 중간부터 마검이 네 몸을 빼앗아서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었지? 그 과정에서 인대가 재생되거나 끊어졌던 힘줄이 다시 이어진 흔적이 있어."
"서비스 좋네요."
"태평하기는."
검이 멋대로 내 몸을 지배하고 휘둘렀다길래 조금 걱정하고 있었는데, 후유증도 크게 없는 거 같고, 몸을 돌려주는 과정에서 생각치도 못한 선물도 남겨주고 간 거 같다.
연금술사와 나도 살아 남았고.
이보다 더 좋은 결과가 나올 수는 없다.
"하지만 아직 아는 게 하나도 없으니까 검은 내가 잠시 봉인해줄 거야. 그리고 네 몸에 이상이 없는지 정밀 검사도 해봐야 겠지."
연금술사는 원룸 벽에 비스듬히 쓰러져 있는 검을 가리켰다. 지금은 검집과 검자루를 가리지 않고 붕대를 칭칭 감아둔 상태다.
하얀 붕대 위에는 나조차 해석할 수 없을 만큼 수준 높은 마법 문자가 빼곡하게 쓰여 있었다.
자세한 건 알 수 없지만 상호 간섭을 틀어막는 봉인식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 옆의 책상에는 여러 개의 시험관이 순서대로 놓여있다.
시험관 안에 들어있는 내 머리카락과 혈액이 보인다. 불이 붙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광경이 기막히다.
"저걸로 지금 제 머리카락이나 혈액에서 마력의 잔재가 남아있는 걸 보고 있는 거죠?"
"맞아."
"뭐가 좀 보이긴 하나요?"
"그다지? 네 몸을 타고 흐른 마력이 너무 적어서 머리카락이나 혈액에서도 검출이 되지 않을 정도였어."
역시 그런가.
나도 검에게 몸의 주도권을 빼앗긴 그 순간에 눈치챈 거지만, 그때 내 팔을 타고 올라왔던 마력의 크기는 결코 많은 양이 아니었다.
신체 능력에도 유의미한 변화를 거의 주지 못할 수준의, 아주 미약한 크기의 마력이었다.
그것이 어떤 원래로 내 몸을 탈취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정도로 적은 양의 마력이라면 내 신체 조직에서 잔향이 검출되지 않을 법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 치면, 내 몸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지 않나?
연금술사는 어쩔 생각이지?
"그래서 그런데…… 네 정액을 좀 가져가고 싶어."
"음, 지금 잘 못 들었는데요?"
"뭐야, 부상 때문에 청각 기능에 고장이라도 일어난 거야? 정액, 줘. 혈액하고 머리카락에서 검출되지 않았다면 그 다음에는 정액을 봐야 해."
그 후 연금술사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면서.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뽑아내서 검사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본인의 동의가 있어야 할 거 같아서 일부러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었어. 물론 네가 지금 깨어나지 않았더라면…… 자고 있는 사이에 취할 생각이었지만."
"자고 있는 사이에요!?"
몸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지나치게 흥분한 탓일까. 갑자기 현기증이 팍 닥쳐왔다.
"지나치게 시간을 끌면 잔재조차 남지 않고 사라져버린단 말이야. 그 전에 할 수 있는 검사는 다 해봐야지. 당연한 걸."
연금술사는 짜증이 치밀어 오를 정도로 담담했다.
"오히려…… 멋대로 채취 하지 않고 지금까지 기다려준 것만 해도 네 사정을 많이 봐준 거야. 네가 부끄러워할 거 같아서 눈을 뜰 때까지 참아준 거지. 나치고는 꽤 많이 배려해준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걸 '배려'라고 표현하는 시점에서 뭔가 글러먹은 느낌인데!
물론 그게 필요한 행위라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잠시만 기다려봐. 마음의 준비가,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고!
"……왜 그렇게 정색을 하고 그래. 너도 이제 스물 넷이고, 겪어볼 만한 건 다 겪어본 나이잖아. 무슨 꼭, 경험이 한 번도 없는 사람처럼……"
아, 하고 연금술사는 낮게 소리를 내더니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설마?"
"아, 왜요!"
사람이 바쁘게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으, 잠깐만. 흥분한 탓에 또 다시 현기증이……
하지만 연금술사는 드물게도 무척이나 미안해하는 얼굴로 눈썹을 찌푸렸다.
"나도 모르게 꽤 실례를 저지르고 말았네. 내가 잘못했어. 설마, 네가 그 나이에 아직까지 숫총각일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거든."
그녀답지 않은 배려에 오히려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애써, 신경 쓰지 않고 모른 척 버티고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갑자기 배려를 받으니까 충격이 더 크게 꽂히는 느낌이랄까.
"근데 얼굴도 괜찮고, 좀 음흉한 구석이 있기는 해도 그럭저럭 보통 사람처럼 행동할 줄도 아는 애가 왜 아직까지 숫총각이지? 혹시 남색?"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냥 바쁘게 살다 보니까 그럴 여유가 없었던 거 뿐이에요."
최근 몇 년 동안은 앞뒤 가리지 않고 계속 일에만 집중하고 있었으니까.
그것보다도 지금 뭐야. 나한테 도대체 무슨 음흉한 구석이 있다는 거야. 허 참, 사람한테 할 말, 못할 말 구분 못하고 막 던지시네.
"루이스도 그렇고, 너희들은 참……. 나야 그럴 기회가 없어서 평생을 이렇게 살았다지만 너희들까지 이렇게 살 필요는 없는데."
쯔쯔, 하고 연금술사는 드물게도 어른스러운 태도로 말했다.
"아무튼, 네가 그 나이까지 숫총각으로 살고 있는 건 동정하지만 이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야. 겨우 부끄럽다는 이유 하나로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의료 행위에 가까운 일이니까."
"으."
"아픈 환자에서 손을 써서 직접 뽑아내라고 무리하게 요구할 생각은 없어. 내가 흔들어주면 그만이니까."
연금술사는 이불을 옆으로 걷어서 정리한 후, 내 허벅지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어디에서 꺼내왔는지 모를 수술장갑을 꺼내서 양손에 낀다.
"게다가 애초에, 기절한 네 옷을 벗기고 상처를 치료하고 붕대를 감아준 게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이제 와서 부끄러워할 것도 없으니까 얌전히 있어."
말릴 틈이 없었다.
연금술사가 헐렁한 환자복 바지를 아래로 잡아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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