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했더니 촉수괴물-73화 (73/74)

〈 73화 〉 11. 내부자들...? (3)

* * *

72.

흔들흔들.

내 촉수를타고 다니며신나게 움직이는까망이를쓰다듬는다. 푹신푹신하면서도 차가운 감촉이물침대 같아서기분이 좋아진다.

오늘은 슬라임들이 아니라 나랑 놀고 싶은 것인지 방의 중앙으로 찾아와 애교를 부린까망이. 바닥을기어 다니는촉수 위에서 꼼지락대는 그 모습을 보고 어떻게 외면할까.

저 멀리서까망이를바라보며 덜덜 떨고 있는 슬라임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러고 보니저 녀석들은 어디 소속일까.차토구아의권속이라면 특유의 음울한 기운을 가지고 있어야될 텐데구석에 몰려있는 녀석들에게는 어떤 힘도 느껴지지 않는다.

까망이를통해 네트워크에 접속하면알겠지. 그렇게 정신을까망이에게접근시키는 순간.

찰싹.

응?

찰싹, 찰싹.

무언가가 후려치는 감각이 들어까망이를쳐다보니 나를본뜬모양의 촉수를 만들어서 내려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 살피려는데까망이에게뻗어나가던 정신이 무언가에 막힌 듯 나아가지 않았다.

억지로 비집어 들려고 하자 찰싹거리며 나를 후려치는 감각이 거세진다.온몸으로항의한다는 듯이 팔짝팔짝 제자리에 뛰기 시작한까망이. 아무래도 자신의 정신에 접근하려는 것을 막으려고 하는 모양이다.

이렇게 격렬하게 거부하는데 억지로 열어젖힐 필요는 없겠지. 다른 슬라임을 통해서도 충분히 접근 가능하니까.

촉수를 뻗으며 나아가는 감각이 뭔가 어색한 기분이다.그러고 보니최근에는정신체로자주이동하다 보니정작 육체는 자주 다루지 않았었지.정신체일때는어떤 저항도 없이 이동하는 반면, 아무리 유선형의 촉수라고 해도 움직이면 공기저항이 느껴지니까.

그래도 육체는 육체만의 장점이 있는 법. 방의 구석까지 뻗은 촉수로부터 우르르 도망가는슬라임 중하나를집어 든다. 공포로 오들오들 떨고 있는 감각이 말단으로부터 전해진다.

바둥바둥.

미끌거리는몸을 액체처럼 사용해 도망가려고 하지만,까망이녀석을여러 번포획하면서 슬라임을 다루는 방법을 깨우쳤다. 반짝거리는 핵이 신기한지 녀석은 핵을 만지려고 해대서 잡아내느라 골치 아팠지. 어쩌면 하나의 놀이로 인식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마나를 촉수에 두르자 슬라임과 촉수 사이에 얇은 막이 쳐진다. 그 상태로 그릇 모양으로 말단을 꼬아 슬라임을 휘감자 액체처럼 몸을 바꾼 슬라임은 고스란히 그릇에 담긴다.

자신을 속박하는 방법이 바뀐 것을 느낀 슬라임은 유일한 탈출구, 열려있는 위쪽을 통해서 나가려고 한다. 그리고 훌륭하게 실패한다. 액체를 흘리지 않으려면 뚜껑을 잘 밀봉해야지.마나로뚜껑을 깔끔하게 덮고 슬라임을 회수해온다. 열심히마나의막을 뚫으려고 애쓰는 슬라임이지만 어느 순간 자신의 힘으로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축 늘어지며 얌전해진다.

포기가 빠른프렌즈로구나.

딱히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아닌데무서워하니원. 비유하자면 아마 호랑이 앞의토끼 같은느낌이라 그렇겠지. 대적할 수 없는 포식자.

얌전해진 슬라임을 쓰다듬으며 다시 정신을 뻗는다.새침데기까망이와는달리 매끄럽게 동화되는 정신. 드넓은 슬라임의정신세계는언제나 접촉해도 신기하게 느껴진다.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의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느낌이랄까. 게다가 고양이 하나에게 연결되면 온 동네에 사는 고양이들과 연결되니 온갖 세계관들이 충돌하고 섞이는 장면을 볼 수 있지.

차토구아의흔적을 찾아보지만 보이지 않는다. 시설을 돌아다니며 강제 개종시킨 녀석들과는 달리정신세계에차토구아의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의아하다. 녀석들은 분명 에이본의 서에서 소환된 이후분열했을 텐데, 어떻게된 걸까.

드넓은 정신세계를 따라 이동한다.수많은 슬라임들의생각과 상상력이 맥동하는 이곳. 현실에서의 모습을 그대로본뜬슬라임들이 옹기종기 돌아다닌다. 다른 점이라면 역시 내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에 편안하게 돌아다닌다는 점일까.

어떤 이유로 이들이 바뀐 것일까. 생각나는 경우는 오직 한 가지.새침데기까망이의통솔을 받아서 바뀌었을가능성이 가장 크다. 다만 녀석이 자신의 정신을 열지 않았으니 간접적으로라도 찾아봐야지.

시설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슬라임들을 만나며 알게 된 사실. 네트워크를 통해 모든 개체가 하나의 유기체처럼 활동하는 경우가 대다수이지만, 군체가 아닌 객체로서 자신만의 세계관을 구축한 녀석들도 존재했다. 그리고 그것들은 놀랍게도 내가 받아들인 녀석들이 아닌, 시설 내부로 도망친차토구아소속의 슬라임들만의 특성이었다.

차원을 넘으면서 돌연변이가 된 것일까. 본래 주인과의 연결도 끊고 자유를 추구한 녀석들은 자신들이 동화한 인간에 물들어 있었다.형태 없는자손도, 인간도 아닌 애매한하이브리드.바뀌어버린 만큼일반적인 슬라임과 다른 특성들이 있었는데,그중 하나를알아보기 위해서때아닌탐색을 시작한 것이다. 이지스가 자료 정리를 하는 동안 약간의 시간이남기도했고.

내 격리실 안의 슬라임들은 이끌어가는리더로서의 지위를가진까망이. 당연히 그 흔적은정신세계에도남아있었고,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되고 있었다.

거대한 슬라임. 공중을 날아다니는 슬라임. 높이 뛰는 슬라임. 바닥을 빠르게기어 다니는슬라임.

일반적인 슬라임들이 취할 수 없는 동작을 취하는 슬라임들은 모두 이들이까망이에게서가장 강력하게 느끼는 특성들을 나타낸 것들이겠지. 녀석들에게 있어서는 그런 행동 하나하나가 경외심을 가지고 따를 이유가 되겠지만 나로서는 그저 귀여울 따름이었다.

지금도눈앞에폴짝거리는 슬라임의 모습과 그것을 바라보며 기뻐하는또 다른슬라임의 모습이 보인다. 깜찍한 것들. 문제는 이 깜찍한 것들이 통제되지 않은 순간 인간을뼈째로씹어먹는 끔찍한 것들로바뀌어버린다는것이지만. 그러니 더더욱탈주 닌자들을빠르게 찾아야겠지.

비록 내가 강제로 탐색하는 것은 막았지만,까망이역시 슬라임 네트워크에 한족사를담고 있는 몸. 지금 내가 보고 있는까망이의환상들을 이용해서 역으로 찾아낼 것이다. 그리고 이 방법이 통하기만 한다면 탈주 슬라임들을찾는 데 있어서훨씬 수월해지겠지. 그들 역시 객체로서존재하지만, 네트워크에서완전히 떨어져 나가지는 않았으니까.

이들이 만들어낸까망이의환상을 살펴본다.정신세계에있는 만큼 상상력이 동원되었고, 현실의까망이와는약간 다른 부분들이 보인다. 검은 슬라임을 보고 뭐가 다르냐고 할 수 있겠지만, 내 눈에는 똑똑히 보인다. 마치 일란성 쌍둥이여도 쉽게 알아보는 부모들과 같은 이치.

환상이지만 마냥 상상력만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취급할 수는 없다. 편의상 슬라임으로 부르는형태 없는자손들, 이들은현실뿐만아니라정신세계에서도돌아다닐 수 있으니. 지금 내가 육신을 떠나 이곳에서 돌아다니는 것과 같이 이들 역시 육체를 잠재워두고정신세계에서마음껏활개를 칠수 있다는 것. 즉, 저기 반짝반짝 빛을내는까망이는녀석이 이곳에서 보여주었던 흔적일가능성이 크다는것이다.

마치 내 핵처럼 빛을 내는까망이의환상체에다가간다. 깜빡거리며 다양한 색의 빛을 내뿜는환상체. 온통 새까만 녀석들이라 이런 다채로운 색에 끌리는 것일까, 넋을 잃고 바라보는 슬라임이 보인다. 아마 이 녀석이 만들어낸 장본인이겠지. 녀석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조심스럽게 접근해서 기억을 읽어낸다.

빛바랜필름 같은기억들이 흘러들어온다. 멀쩡하게 재생되다 중간에 듬성듬성 비어 있는 기억은 마치 꿈속의 광경처럼 뒤틀려있다. 자신의 기억을 뽑아내어환상체를만들어낸 것이겠지. 자신만의 기억이 존재하지만 동시에 군체로서의 의식을 지녔기에 모두에게 공유되는 이 장소에 기억을 풀어놓았다고 볼 수 있겠지. 역시 인간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살아간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만약 반짝이는까망이를포식한다면 그 기억은 고스란히 나에게로 넘어오겠지. 그리고 군체는 영원히 기억을 잃게 될 것이다.기억 속의공백만이 무언가 있었다는 흔적을남길 뿐. 물론 그러기에는 행복이라는 감정을 뿜어대고 있는 눈앞의 슬라임이 너무 불쌍해지니 다음환상체로넘어가자.

온갖환상체들과슬라임들을 지나치며까망이가지나다녔을 흔적을 추적한다. 중구난방으로 보이지만 점차 유도되고 있는 방향을 따라 움직인다. 반대 방향일 가능성도 있지만 그건 끝에 도달하고 보면 알게 되겠지.

과연군체 의식에서객체로 넘어가면어떻게 될까호기심을 담고 이동하자 정신세계의 끝자락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신의 끝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아니, 애초에정신세계의끝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죽음을 겪어본 나로서는 아무래도정신세계의종말, 다시 말해서 죽음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제는 신으로서 존재하는 나의정신세계에끝이 있을까 생각해보면 부정적이지만. 삶의 끝이 존재하는필멸자와끝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불멸자.

그런 의미에서 참으로필멸자다운이 야생 슬라임들의정신세계의끝자락에 존재하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어이없다는 감정밖에 느낄 수 없었다.

칠흑처럼어두운색으로꿈틀거리는 거대한 장벽.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검은 벽은 자세히 살펴보면 무수히많은 촉수가얽혀 이루어져 있었다. 그 몸에는 끈적거리는 액체가 뚝뚝 흐르고 있는데.

너무나도 익숙한 모습.

나네?

슬라임들은 나라는 존재를 자신들의 종말이라고 여기는 걸까, 혹은 절대 넘어설 수 없는장벽 같은이미지로 다가온 것일까. 정확한 이유야 알 수 없지만 나를본뜬것이정신세계의끝자락에 있는 것은 분명 긍정적인 이미지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보게 되니무언가 기분이 나쁘기도 하다. 내가 뭘 했다고 이렇게나 무서워하는 걸까.쫄망쫄망까망이를따라다니는 게귀여워서 가끔 쓰다듬거나까망이랑놀기 위해서 그들 사이에서까망이를건져낸 정도가 전부인데.

약간은 야속하게느껴지지만, 감정을갈무리하고까망이의흔적을 찾는다. 놀랍게도 그 흔적은 장벽 너머까지 이어져 있었다. 군체 내부에다 자신만의 세계를 만든 것이 아니라 아예 분리되어있는 개념이었나.

연결은되어있지만, 서로를분단하는 것이 정신세계의 끝이라는 것은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존재가 아닌 이상 이동하지 못한다는 것. 즉,형태 없는자손이라는 종족 자체를 초월하는 것이 아닌 이상 반드시 세계 내부 어딘가에 포함되어있다는 말이다.

새로운 사실을 깨닫고 그대로레이나와이지스에게전달한다. 결국 탈주 개체가 연결을 끊었다고 하지만군체로서의 역할은버리지 못한다는 것. 비유하자면 인터넷에서 업로드도 다운로드도 하지 않지만 언제든 접속할 수 있는 컴퓨터 같은 거다. 본인이야 싱글 플레이 게임을 즐기며 남들과 소통을 전혀하지 않을수 있겠지만, 해커라면 보안만 뚫는다면 네트워크를 통해 얼마든지 간섭할 수 있다는 것.

[투입된 요원 중 가장 의심이 가는 행동을보이고 있는자를 다음 목표로 잡겠습니다.]

진압에 투입되었던 요원들을 모두 조사하지 않아도 되니 한결 수월해졌다.다음번만나는 녀석을 통해 탈주한 슬라임들을 모두 찾아낼 수 있으니까. 그 뒤로는반복 작업만하면 된다.

목적은 달성했으니이곳에서머물 이유가 없긴 한데, 무언가 아쉬운 마음이 든다.까망이가정신을 닫은 것을 보아 무언가를 숨기려고 하는 것이 분명한데 말이지. 지금 벽을 넘어가면까망이의정신이 고스란히 드러날 것이다. 인트라넷을 통한백도어라고해야 할까, 이곳으로 접근하는 것은 전혀 의심하지 않고있을 테니까.

아이가 방문을 처음으로잠갔을때 부모님이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걸까. 인간이라면, 특히 남자라면사춘기 때누구나겪었을 만한경험이다. 무언가 켕기는 일이 있다던가, 부모님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광경이라던가. 들키면 사회적으로 아주 민망해지는 무언가를 한다던가.

그리움과 흐뭇한 마음, 그리고 약간의 아쉬움을 느끼며 내 육체로 돌아간다. 종족이 다르더라도 사생활은 존중해주어야지. 사람처럼 사춘기가온 건지부끄러워서인지, 이유야 알 수 없지만 아무렴 어떤가.

부모가 자식을 향해 베푸는 것처럼 사랑과 믿음을가지는 수밖에. 모든 가족이 그렇지는않겠지만, 최소한 나는 부모가 된다면 자식을 수족처럼 부리거나 내가 이루지 못한 꿈의대체재로바라보지 않을 것이다. 자식으로서는 실패했지만, 부모로서는 같은 전철을 밟지 않아야지. 상상이 가는 광경은 아니지만 언젠가는레이나와가정을 이루고토끼 같은자식들을 키울 수도있을 테니까.

신이 인간과 맺어져서 영웅을 낳는 신화는클리셰적이면서가장 근본적인 내용이지. 문제는 나처럼 순수한 촉수 괴물이 신인 경우는 본 적이 없다는 것이지만. 인간화를한다든지무슨 수가 있겠지.

문제는 신적인 힘과유전자 같은부분들인데…. 그쪽은어머니 쪽을 닮길기도하는 수밖에. 내가 신인 만큼 도대체 누구한테 기도를 바쳐야 할지 모르겠지만. 평소라면스스로에게기도를 바치겠지만 이건 민감한 부분이잖아.

가족.

머나먼 꿈같은 단어라서 제대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지. 미래에해야 할일의 목록에 밑줄과돼지 꼬리까지달아놓자. 두근거리며 뛰기 시작한 심장을 느끼며 새로운 목표를 다짐한다.

심장은 없지만.

***

"놈들이 다시 몰려온다!"

"정신 방벽을 펼쳐!"

"보호 마법 준비 완료!"

크리세리아.

수많은 차원들의정점에 위치한세계.

온갖 신들과 초월자들이 모이는낙원 같은장소는 끔찍한 전쟁터로변한 지 오래.

형언할 수 없는 끔찍한 괴물들이 파도치듯 차원의 장벽을 깨고 밀고 들어오는 이곳은 어느새 수많은 신화의 종말이자 영웅들의 무덤이 되고 말았다. 한 차원을 무력으로 통일한 절대자도.수많은 차원을지배하는 제국의 황제도. 그들이 섬기는 신적인 존재도. 모두 재앙 앞에서는 평등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죽음.

한때크리세리아의일원에게 있어서는 통제하에 있던 개념일 뿐이었다.

온갖 차원에서 초월한영웅들인 만큼이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행복이나슬픔 같은정말 기본적인 개념이었다.

죽음을 겪어도 부활하는 능력. 죽음이라는 개념을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자. 이미 죽음을 겪고 생명을 부정하는 육체를 가진 초월자. 죽음을 관장하는 신.

이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죽음이란 본인이 선택해서 맞이하는 길중 하나일 뿐이었고, 그마저도 억겁의세월 동안삶에 무료함을 느낀 극소수의 신들만이 택하는 최후였다.

자신의 삶과격을 모두 버리고 아예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환생의 길을 택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으니 죽음을 선택한 그들이야말로 별종이라고불리우는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세상은 변하였고, 과거 죽음을 선택한 자들이야말로 현명하게 안식을 취한 자들이 되어버렸다.

"아, 안돼…. 끄르르르륵."

전장의 어딘가,주변보다 돌출된진형이 결국 괴물에게 무너지고 한 존재가희번덕거리는눈알이 가득 박힌 회백색의 촉수에 휘감긴다.

어느 차원에서 태양을 관장하던 신. 찬란한 문명이 세워질 수 있도록 선구에서 이끌어나가던 한 세계의 주신은 최후의 단말마도 제대로 내뱉지못 한 체밀려오는 괴물의 파도에 사라진다.

찬란한 빛줄기가 촉수 사이에서 빠져나오던 것도 잠시, 빛은 어둠에 먹혀버리고 그의 주위에 같이 전투를 벌이던 다른 존재들은 침통한 얼굴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자리를 이탈하자마자 휘감겨 있던 촉수가 누런 점액을 흩뿌리며 터져나간다.

태양과도 같은 밝은 빛을 가진 인영이 나타난다. 너무나도 밝은 빛에 인간 비슷한 형상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만 간신히 보일 정도로.

허나격을 가진 이들이 빛을 꿰뚫어 본다면 알 수 있으리라.

조각상 같은얼굴에는수십 개의눈이 번뜩이고, 그림에 나올듯한 신체에서는 꿈틀거리는 촉수와 내장이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을.

인간을 따뜻하게 비추어주던 빛은 그들의 존재를 불사르고 끔찍한 존재로 바꾸어버리게 변했다는 사실을.

"Ph`ngluimglw`nafhCthulhuR`lyehwgah`naglfhtagn!"

드르륵거리며 갈리는목소리로 이해할 수 없는 언어를 내뱉는 빛은 자신을 덮친 괴물들의 반열에 합류하여 끔찍한 빛을 내뿜기 시작한다.

수많은 영웅과초월자, 신적인 존재들이 살아가는크리세리아지만분명하게 힘의 차이는 존재했다.

왕중왕,영웅 중의영웅,신중의 신.

하지만 그들을 덮친 재앙은 모두에게 공평한판결을 내렸고, 약한 자들이 먼저스러질 수밖에 없었다.

태양처럼 밝은 빛, 언제나등 뒤를받쳐주었던 빛은 이제 그들을 무너뜨리는 재앙의 일원이 되었다.

최전방을 맡고 있던 신인 만큼 그 힘은 역시 강력하였고, 보호받지 못한 이들은 끔찍한 몰골로 녹아내렸다. 그리고,변질되었다.

"그르르륵!"

빛에 녹아내린 육신에서 불길한 검은 기운이 흘러나오며결손된육체를 대체한다. 그리고방금 전까지동료였던 이들을 덮쳐간다.

마치 어느 하위 차원에서 벌어진 종말처럼, 괴물로 변한 자들은 동료를 덮치고, 그들 역시변질하여주변을 공격한다. 대열이 무너지기 시작하니 전선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 패배가 아른거리는 그 순간.

무너진 전선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한마법진이나타난다.

온갖 형이상학적인 도형들이 빛을 내고 회전하며 원을 이룬다. 원에서또 다른원이 나오며수많은 동심원이만들어지고 일그러진다.

마침내 거대한 만다라를 만들어낸마법진이입체적으로 펼쳐지며 힘을 발휘하기 시작하자 차원이 진동하기 시작한다.

"시간 역행."

시동어가읊어지고, 기적이 발현된다.

오염된 자들의 육신이 회복되고 괴물들은 먼지로 화한다. 짓밟힌 대지는 다시금 생명력을 되찾고 부러진 무기는 다시 본래의 말끔한 모습으로 돌아간다.

끔찍한 빛을 줄기줄기 뿌리며 누군가의 시체를 씹고 있던 괴물의 입으로부터 시체가 떨어지고, 살이 재생되며 영혼이 되돌아온다.

괴성을 지르며 빛을 내뿜는 괴물이대마법에저항하기도 잠시, 마침내 빛의 장벽이 부스러지며 그 역시 멀쩡한 모습을 되찾는다.

순간적으로 정적이 흐르지만 이내 뜨거운 함성과 희망찬 목소리로 가득 찬다. 박빙을 이루던 전선은 순식간에 역전되어괴물 측이밀려나기 시작한다. 그 선두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진다.

하지만 기적을 일으킨 장본인의 얼굴은 마법이 가져온 어마어마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어둡다.

"기적을 펼쳐낸 자가 그런 표정을 하면 되나. 저들은 모두 자네 덕분에 생명을 건졌다고."

온몸에찬란한 황금빛 갑주를 두른 거인이 친근하게 말을걸지만, 여전히마법사의 표정은 어둡다.

희망 가득한 전장과 달리 불안감에가득 찬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의 표정을보자 거인역시 표정을 굳힌다.

"무언가 잘못되었어요. 시대가 바뀐 뒤로부터 시간이라는 개념은 다룰 수 없었죠. 극소수만이 직접적인 허가를 받고 사용하던 힘. 인과율에 묶여버린 이후에는 전혀 다룰 수없었는데…."

"방금 사용하지 않았나?"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 거인. 방금 전장에기적 같은결과를 불러온 마법이 시간을 다룬 것이 아닌가?

"네. 그러니 무언가 어긋났다는 것이죠. 얽매인 규칙이 풀려버렸고, 인과율이 비틀어졌어요. 하지만 이전 시대로 회귀하지는 않은 상태, 즉 규칙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인데 저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있죠."

"암묵적인 허가를 내려준 것이 아닌가? 안 그래도 전황이 밀리고 있는데 아무리그…라고 해도규칙을 붙잡고 있을수는없었겠지."

꺼림칙한 존재를 떠올린 듯말끝을 흐리는거인의 표정은 어느새 마법사처럼 변해있었다.

"그건 절대로 불가능합니다.그…는규칙 그 자체. 세워둔 법을 어기는 것은 자기 자신을 근본부터 부정하는 행위니. 하지만 시간이라는 개념이풀려났다면…."

"저 괴물들에게 법칙이 뒤틀렸거나 어디선가 인과율이 크게 어긋난 것이겠지. 어긋난 반동으로 일시적으로 권한이 풀려버린 것이고. 생각해보니시간 관련제한이 완전히 풀려버렸으면 지금쯤 난리가났었을 텐데말이야."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저는 확실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저 말고도 어떤 존재들에게 권한이 생긴 것인지가중요한데…."

말을 꺼내던 도중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순식간에 전투 태세를 갖추고 마력을 끌어모으기 시작한다.

황금의 거인 역시 날카로운 표정으로 혈류를가속시키고근육을 가다듬는다.

"아아, 들리는가."

끔찍하고도 불쾌한 목소리가퍼져나간다. 이상할 정도로 공명하듯이 울리는 목소리는 마치 동굴에서 울리는 듯하게 들리지만 두 존재가 서 있는 장소는 훤하게 트인 바깥이다. 게다가 어떤 마법적이거나 주술적인 조치조차 되어 있지 않은, 순수한 본인의 목소리라는 것을 깨달은 둘은 경계심을 더욱 높인다. 하지만 목소리의 근간, 아주 미세하게 잡히는 발성의 특징은 어떤 생물과 놀랍도록 닮았다.

"당신은…. 누구죠?크리세리아에이런 목소리를 가진 인간이 있다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어요."

새로운 자극을 환영하는크리세리아인만큼이런 특색있는 목소리를 가진 자가 있었다면 분명 알려졌을 것이다. 게다가 더욱 기이한 것은 그의 목소리로부터 아주 익숙하고도 불길한 마력이 느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 저전쟁터를뒤덮은 괴물들과도 같은.

괴물로 변한 인간일까. 하지만 마냥괴물 측이라고만생각할 수는 없었다. 지금껏 오염된 자들이 이성을 가지고 대화를하는 경우는 없었으니. 괴물들 역시 이성적인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존재들이기에 지금 들리는 목소리의 정체는 더더욱 불가해하였다.

가능성은두 가지. 이성을 가진 괴물이거나 이제 괴물들은 오염시킨 영웅들에게 광기가 아닌 이성을 부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전자든 후자든 그들에게 있어서 좋은 현상은 아니었다.

물론 그들의 고민이 깊어지는 것과는 달리 상대는 태연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던위치의공포… 의쌍둥이 형제. 아쉽게도 나는 녀석만큼 악명을 쌓지못했기에따로 별칭이 존재하지는 않지. 그래도 지식의 마녀 ■■■와 불멸의 거인 ■■■■■■■에게 말을 걸 정도의지위 정도는있다고 생각해달라고."

진명이불리자 경악과 당황 그리고 하늘을 찌를 듯한 적개심이 줄기줄기 뿜어나온다.

"워워,진정하라고친구들. 싸우러 온 것이 아니야.웨이틀리가의 명예를 걸고 약조하지."

"들어본 적 없는 가문이다. 네놈, 도대체 정체가 뭐지."

사방에서 울리는 듯한목소리 때문에위치를 특정하기힘들었지만, 거인은대화를 유도하는 사이에 감각을 세밀화하여 상대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후웅!

어떤 경고도 없이 인간 신장의 4배는 될 정도로 거대한 도끼가 허공을 가르며 일격을 날렸고, 분명아무것도없던 장소에서 마치 유리가 부서지는 듯이 공간이부서져 나간다.

"얕았다."

거인의 행동과 함께 마녀 역시 공간에 마법을 사용했지만 어떤 저항도 없이 공간을 꿰뚫고 지나갈 뿐이었다.

"이런 취급을 받다니 너무하구먼.웨이틀리가의 이름이 이토록 땅에 떨어지다니. 아무리 근친을 많이했다고하지만 초면에두 동강낼 정도로 큰 죄는 아니잖아? 형제자매도 꼴리면 할 수 있지."

여전히 활달한 목소리임에도 불구하고 두 존재는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섬뜩함을느낄 수밖에 없었다. 공간을 무너뜨릴 정도의 일격과 시간을 다룰 수준의 마법을 고스란히 흘려낼 정도의정체 모를실력자. 게다가 괴물들과 연관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만큼 더욱 경계심은 높아졌다.

어쩌면, 이 자리에서 여정의 끝이 보일지도.

마음속으로각오를 다지는 두 인물과는 달리 공격을 받았음에도 상대는 유들유들한 태도로 대화를 요청하였다.

"내 정체라면 너희들이 오히려 잘 알고있을 텐데? 봉인에서깨어나 보니세상은 개판이고 다른 놈들은 작정하고 공격하고있더만. 나는엘더갓 말고도 얘네가 이렇게단결되어서협력하는 꼴을 본 적이 없단 말이지? 내가 생전에크툴루랑하스터가협력하는 꼴을보게 되다니말세로다말세야."

"그르르륵."

"뭐 어때, 지금 여긴 없는데. 아버지도 깨어난 이상 날 어떻게 해볼 수도없을거고."

이 자리에 나타난 또 다른 목소리와 대화를 나누는 상대는 이제는 둘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마음껏 떠들었다. 아무리 봐도비밀스러운이야기를 대놓고 하는 경솔하고 경박한 태도가 진심인지 본래의 천성이그런지는 알수 없었지만.

거인은 도끼를다시 한번감각을 집중하여 상대를 탐색해나갔다. 이미 한 번 탐지된 만큼 더욱 치밀하게 자신을숨겼지만, 오히려그렇기에 위화감을 통해 위치가 드러난다. 노련한 자라면 저지르지 않을 실수. 그러나 정보가없는 만큼상대가 의도적으로 드러낸 허점인지꽤어리게 들리는 목소리가 반증하듯 경험이 부족한것인지에 관한 판단은보류할 수밖에 없었다.

"아, 미안하게됐네. 아무래도 일어난 지 얼마 안됐다 보니형제랑이야기하는 게즐거워서. 아무튼, 내가 온 거는물어볼 게 좀 있어서왔지.거어기이쁜 마녀 아가씨. 우리 아버지가 어디계신 지알고 있나?"

"왜 저에게 묻는 것이죠."

"그야 아버지의 힘을 다루고 있으니까? 좀 전에도 나한테 써먹으려고 했으면서 시치미 떼기는."

귀찮다는 듯이 돌아오는 대답을 듣고 둘은 깨달음을 얻었다. 아주 불길한 깨달음을.

알려야만 한다.

언제나 전장에 모습을 드러내면 압도적인 능력을 발휘하던고대신과도같은 개체들. 각자 특정한 권능을 지배하고 있기에 괴물임에도 불구하고 신으로 불리는 대적. 그들 중에서도 지금 이들에게 `아버지`라고 불리는 자의 권능이라는 어마어마한 정보를 알아냈다.

시간.

새 시대가 찾아오고 우주의 법칙이 재정립되며 봉인되었던 힘이 돌아오기 시작했다.허나피아를가리지 않고 찾아온 옛 힘은 축복이 아니었다. 기존의 법칙을 뒤틀어버리고 오염시키는 괴물들처럼, 이제는 세계의 근간마저 뒤틀어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절대로 변하지 않을 불변의 진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둘은말없이시선을 주고받은 뒤 쏜살같이 도시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상대 역시 공간을 다루는 자, 그것도 수준을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경지가 높은 자인만큼 마법이나주술 등을통한 이동은 금물.

상대가 지배하는 공간을 떠나기만 한다면정신파를통해 연락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최후의 수단으로 죽음을 겪더라도 영혼을 통해 전달하면 되는 법.

순식간에 자리를 박차고 도주하는 둘의 뒷모습은 순식간에 거대한 황금빛 보호막 너머로 사라졌고, 텅 빈 자리에서는 허탈한 목소리만 흘러나왔다.

"아니, 오랜만에아버지 좀보겠다니까 왜 저리 무서워하지?"

"그르륵."

"하긴 무섭기야 무섭겠지만 시간을 다루는 것을 허용하신 것을 보면 그래도어느 정도관심을 받고있을 텐데? 아버지를 이해할 수는 없어도 최소한 적대적인 뉘앙스는 취하시지않으셨을 텐데말이야."

공간이 뒤틀리더니 허공에서 한 인영이 나타난다. 라틴 계열의 인간으로 보이는 청년. 사교계에 나갔다면 영애들을 울릴 만한 말끔한 외모를 지니고있었지만, 잠깐잠깐공간에노이즈가낄 때마다 보이는 모습은 나이도, 얼굴도, 심지어 몸도 전혀 다른형태를 띄고있었다. 회백색의 촉수가 구불거리는 덩치가 3m는 될 정도로 거대한 중년의.

"아무래도 뭔가 이상해. 아버지와 연결이 끊긴 것도,그레이트올드원들이 이 난리를 피우는 것도, 지식의 문이 닫혀 있는 것도. 저놈들 역시네크로노미콘에서조차언급된 적 없는 존재들이야. 알아봐야겠어. 가자, 형제여."

무언가에 타고 있는 듯한 사내가 발을 옆으로 툭 건드리자 공간이 일렁거리더니 무언가가 드러난다.

오징어도, 지네도, 거미도아니지만, 술통처럼굵은 수많은 다리가 부스럭거리는.

온몸이두리번거리며 껌뻑이는 눈으로 뒤덮여있으며 끔찍한 회색 입이 뻐끔거리는

푸른색과 자색의 고리가 코끼리의 코처럼 생긴 굵은 촉수를 수놓은.

그런데도흰 머리와 붉은 눈, 알비노의 특징을 지닌 인간의 머리 반쪽이 미소를 짓는.

그것은 무어라고 불러야 할까.

두 인간은,

두 괴물은,

밝은 미소를 지으며 공간 너머를 향해 나아갔다.

끔찍하도록뒤틀린 액체와 냄새를 풍기며 권능을 사용하였다.

아우터갓을 찾는 임무는 오로지 한 존재만이 가능하다.

보라색 연기를 남기고 공간 너머 뒤틀린혼돈 속으로두 형제는 사라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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