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 10. 드림 랜드 (6)
* * *
62.
부서진 달. 붉은 하늘. 지상을 향해 떨어지는수많은 운석들.
누구나 아포칼립스 세계관의 배경이라고 생각할만한 광경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것을 일으킨 장본인이 나지만.
분명히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종말의 광경을 일으킨 원인은 나였다. 나를 노린정체불명의놈에게 엿 먹이려고 했던 계획이 오히려 역효과를 내버렸다.
너무 흥분했던 걸까. 아무리 폭주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신성력을 어느 정도 통제했다면 달에직격하는일은 벌어지지 않았겠지.
물론, 전혀예상하지않고 있던 부분이었다. 아무리 기운이 넘쳐나더라도 설마 달에 궤도 폭격을 가할 정도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니. 충돌하면서 분열했던 기운의 파편들이 당연히분산할 것으로 생각했다.
설마 출구를 통제해서 파편들을 집중시킬 줄이야.
게다가 출구를 열어놓은 만큼 미지의 기운을집중시켜서창은 막아내 버렸고.
여전히 공중에 떠 있는 백색의 창을 본다. 에이본을 삼켜버린 직후에 창을 날릴 수 있었지만 결국 사용할 수는 없었다.
지렁이에게 삼켜졌음에도 불구하고 에이본이 순식간에 마법을 전개해서살아남았다는사실을 감각으로 인지했기 때문에.
창을 날린다면지렁이 배 속의에이본까지같이 먼지로만들어버릴 테니참아야 했다. 분명 중요한 정보를 들고 있을기어 오는혼돈이라는 존재에게 다가가려면 에이본이 인도해주어야할 테니그의 생존은 필수였다.
다만, 지렁이에게 끌려간 그가 계속 버틸 수 있을지가의문이지만…. 괜히대마도사라는칭호를 단 것을아닐 테니그 부분에 있어서는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 큰 문제는 당연히 무너진 달.
달에 거주하는 문 비스트라는 생물들은 분명기어 오는혼돈을 섬기고 있다고 말했던 것을 들었는데, 의도치 않더라도 그들의 고향과 목숨을 뺏어버린대악당이되어버렸다.
물론 혼돈뭐시기가나를 탐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차토구아나거미 같은동족 계열에 들어가는 것 같은데, 그들은 감시에 실패했으니.
나를 노린 놈은 어떻게 알았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그가 풍기던 이상한 기운이한몫을 하고있지 않은가 짐작만 하고 있다.
마법으로 감지되는 것을 방지하는 모습도 보였으니, 반대로 감지하는 능력 역시 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다만정체 모를놈이 나와 혼돈뭐시기를모두 적대하는 모습을 보였으니 어쩌면 나를 탐지할 수 있도록 악의적인 도움을 주는 경우도 고려해봐야겠지.
문제는 요원.
에이본이라는 길잡이도 사라졌고, 스스로 돌아갈 방법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는데 온갖 괴물과이계의신들이 가득한 세계에 덩그러니 놓인 상태이니.
게다가 전혀 다른차원인 만큼마법이나 제대로 사용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그나마 물리법칙이같아 보이는것을 위안으로삼아야 할까.
원래라면 전혀신경을 쓰지않았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나에게 있어서도 문제였다.
기어 오는혼돈이라는 존재가 애타게 찾고 있는 무언가에 대한 열쇠를 하필이면 이 요원이 쥐고 있었으니까.
시작부터 꼬여버린 관계를 그나마 되돌리려면 상대가 호의적인 반응을 보일수 있을 만한가치 있는 무언가를 건네주어야 할 것이고,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패는 이 요원이었다.
혹시라도기어 오는혼돈이라는 존재가 나를 보자마자 감지를 하고 적대적인 반응을보였을 때요원을건네주면협상의 여지가 생기겠지.
다만 나를 노린 놈 역시 이 사실을 당연하게 알고 있을 것이고, 분명히 요원을 노릴 것이 뻔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방법으로 드림랜드에 거주하고 있는 생물들을 세뇌한 것처럼 보였으니매우 까다로워질것 같다.그중에서는심지어 거미 괴물의 권속들도 있는 것은 물론, 내가파괴한달의 거주민들, 문비스트들마저 있었으니.
도대체 정체가 뭐길래 동족으로 보이는 이형의 신들을 적대하고 있는 걸까.기어 오는혼돈을 조롱하는 것은 물론,거미 일부를세뇌하지를 않나, 이제는차토구아의심복까지 납치했으니.
이 정도로 날뛰고 있다는 것은 뒷감당할 자신이 있다는건데….
움직임이 발생해서 시선을 돌리자 요원이 다시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저놈도참신기한 게충격적인 사건을 겪어도 회복이 참 빨라.
몇 걸음 움직이다 이내 무언가 중얼거리더니 마법을 사용해서 공중으로 부유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타차원이어도마법은정상적으로 작동하나 보다.
마법 사용에 대해 에이본이 경고를했던것 같은데, 그 장본인이 납치되었으니거리낄것이 없어진 것일까. 거침없이 마법을 전개하여 신체 강화 주문과 보호막을 두른 요원은 이내 속력을 높이며 쏜살같이 날아갔다.
나 역시 망설임 없이 요원을 따라가기로 마음을 먹고 뒤따라 공중을 날아올랐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신성력의 창 역시 없애지 않고옆에대동하였다. 유사시에 즉각적으로 사용할만한 무기로 유용하겠지.
다행인 것은 요원이 신성력을 감지하지 못한다는 사실 정도일까.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받은 것처럼 주위를 둘러보기는 했지만 결국 명확하게 집어내지는 못하는 듯 보였다.
자,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절대적인 목표는기어 오는혼돈을 만나는 것. 어떤 일이 생길지는 모르겠지만, 내 정체라던가이계의신 역할을 하는 동족들,끔찍한괴물의 형상을 한 자들에 대한 정보를 지닌 것이 분명한 만큼 최우선으로 두어야 한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부수적인 것으로는 요원을 지키는 것이 있겠지. 아무래도 나를 감지할 수 있다면 절대 호의적이지는않을 테니선물로서 챙겨가는 느낌.
또 다른 목표는 나를 노린 놈을 찾아내고 조지는 것.
무슨 억하심정으로 나를 건드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나를 의식하는 것뿐만 아니라 내 계획까지 훼방을 놓으려했으니확실하게 처리해야겠지.
게다가 어떤 힘을 다루고 있는지도분석해야 된다. 내가 지닌 감각으로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미지의힘인 만큼만약 활용할 수만 있다면, 본래 차원으로 돌아가서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겠지.
크게두 가지목표를 세웠으니 이제 실천만 하면 되겠지.
일단, 시작은미친 듯한속도로 날아가고 있는 요원을 따라가며 호위하는 것으로 시작을끊어야겠다.
끌려가 버린에이본은 어느새 지하 깊숙한 어딘가로 완전히 사라져버렸고, 내 감각에서조차 희미해진 것을 보아 그놈이 통제하는 장소로 끌려갔다고 볼 수 있겠지.
차토구아가보호해줄 테니알아서 잘헤쳐 나가겠지. 게다가 애초에 죽일 생각이었다면 집어삼키는 정도로 끝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압도적인 질량에 속도를 더하게 되면 어마어마한 폭력의 현장이 되어버리니까.
굳이차토구아를적대하고 싶지는 않았다던가 무언가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것이라고 생각하며조용히 요원을 따라갔다.
땅으로 떨어지고 있는 수많은 달의 파편들 사이로 비행하는 요원.
대기권이 없는 것인지, 달을 이루고 있는 물질이 마찰과 열에 내성이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떨어지고 있는 크고 작은 돌덩어리들은별다른문제 없이 지상으로곤두박질치고있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지상에 부딪힌 순간 거대한 폭발과 함께 산산조각이 났고. 흰 눈과 회색 돌조각들이 폭발과 함께 사방으로 튀었고,간간이보이는 평범한 생물들은 공포에 떨며도망을 다니는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이번에 저지른 일은기어 오는혼돈을 제외하고도 많은 존재들을자극했을수도 있겠는데.
그래도 큰 피해는 없을 것 같았는데 초토화되고 있는 고원의 모습을 보아하니 다른 지역들 역시 따로 운석을 방어하는 수단이있지 않은이상 고원과 같은 꼴을맞이했을것이라는 생각을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광경을 보며 요원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솔직히 지구에 살던 시절에 이런 모습을 보게됐다면종말이 왔다면서 아수라장이되었을 텐데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는 요원에게는 새삼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멸망적인분위기이기는 하지만, 이대로 아무 일 없이 지나갔으면좋겠는데….
파지직!
플래그를 세울만한 생각을 하자 아니나 다를까 바로 문제가 터졌다.
요원의 보호막에 무언가 부딪히며 스파크가 튀었고, 바로 반응하여 고개를 돌리자 지팡이를 들고 무언가 소리를 지르고 있는대여섯 명의인영이 보였다.
털이 수북한 인간 형태의 괴물들.
마치 말의 발굽과도 같은 발을 바닥에 쿵쿵 찧으며 소리를 지르던 그들은 이내 지팡이를 다시 하늘을 향해 겨누고 마법을 발사하였다.
파직!파지직!
허나어떤 마법도 요원의 보호막을 뚫지 못하였고, 요원 역시 무언가를 중얼거리더니 불의 화살들을 소환하여 반격을 시도하였다.
공중에서 비처럼 내리는 불의 화살들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지은 무리 역시 보호막을 전개하여 화살을 막아내었고, 갑작스럽게 일어난 교전은 잠깐의소강상태를이루었다.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요원과 괴물 무리.
공중에서 담담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괴물들을 내려다보는 요원의 모습은 무척이나 건방져 보였다. 내가 봤을 때는 그저똥폼잡고있다고 생각하지만.
당당한 모습으로 위압감을 주려고 하는것일 수도있겠다. 마치 하이에나 무리 사이의 사자처럼, 한꺼번에 덤빈다면 분명 이길 가능성이 충분하지만 압도당하여 그첫걸음을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것과 같이.
그사이 빠르게괴물들을훑어보았지만괴상한 기운이 느껴지지는 않는 것을 보아 그냥 순수한 괴물들인 것 같았다. 괴물들을 순수하다고 표현하는 것이 조금 이상했지만.
여전히 굳어있는 괴물 집단에서 느껴지는 감각을 보아하니 이들이 거미들이 그토록극혐한다는렝인들인것이 분명했다.
현 고원의 지배자 종족.
그래봤자 문비스트들에게노예로 착취당하는 신세이지만. 그렇게 보면 달이 부서진 것은 이들에게는 좋은소식이려나? 아니, 어쩌면 혼란이 가라앉은 뒤에 이들에게화풀이할수도 있으니 최악의 상황일지도.
언제나 어디서나 노예들이 취급당하는 신세는 최악일가능성이 다분했으니. 하물며 인간도 아닌 괴물들이라면 오죽할까.
하여간 세기말의 풍경 아래에서 유지되던 대치는 다시금 지상으로부터 마법이 날아가는 것으로 깨지게 되었다.
가뿐하게 옆으로 몸을 날리며 마법을 피한 요원은 이번에는꽤길게 마법을 캐스팅하며 공중에서 회피기동을 거듭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마법이 완성된 순간 대지에서 가시가뻗어 나오며괴물들의 가슴을 관통하였고, 심장이 모조리터져 나가버린괴물들은 즉사하였다.
아무래도 바닥에서 마법이튀어 나갈줄은생각 못 했던것일까?
무언가 전투가 허망하게 끝나서 약간은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나름 최상의 관중석에서마법사들 간의전투를 볼 수 있을 줄 알았더니만.
그런데 고원의지배자치고는너무 약한 것 아니야? 문비스트들에게노예취급당한다고는하는데 아무리 그래도 괴물 거미들을 쫓아낼 정도의 실력으로 보이지는 않는데.
이상하다고 여기던 도중, 요원이 공중에서 내려가 시체를 살펴보기 시작하자 나도 가까이 가서 구경해보았다.
예티처럼수북한 털. 얼굴부터 몸까지 가득히 덮은 털은 푹신해보이기보다는뻣뻣해서 만지고 싶지 않은 형태의 것이었다. 털 밑의 피부 역시 인간의 피부보다는 동물의 가죽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었고.
죽어서 서서히 식어가는 시체의 관통상으로부터는 붉은 피가 줄줄 흘러내려 땅을 적시고 있었다. 피가 빠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라비아 행상인 느낌의 복장 밑의 피부는어두운색을 유지하였다.
괴물이어도 역시 인간의 형태라 그런지 붉은 피를 흘리는구나. 피의 색깔은 철이 산소랑 만나는 무슨 화학작용으로 붉게 보인다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피의 성분이비슷한가 보다.
그렇게 시체를 분석하고 있던 도중, 쓰러진 시체로부터 흘러나오는 피에 요원이 손가락을 잠깐 찍은 뒤 허공에 대고마법진을그리기 시작하였다.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다 말고 공중에 둥둥 뜬 상태로 마력과 섞이며 느리게 퍼져나가더니 이내 완벽한 원의 형태를 그려냈다.
어떤 마법을 사용하고 있는 걸까. 아무리 마법에 대한 지식을 공부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형태의 마법을 보자마자 완벽하게 분석하는 것은불가능했다.
그나마 내 정신 내부 어딘가에 존재하는 지식의 창고로부터 약간의 힌트를 얻을 수 있는 정도랄까.
괴물의 피를마법진의매개체로 사용한 것을 보니 괴물들과 관련된 마법일 것이고, 그렇다면 추적 용도로 사용할 것이라는 예측을 던져볼 수 있겠지.
요원은붉은색으로빛나는 마법의 원 내부에 복잡한 도형과술식을그려 넣기시작하였고, 마침내 완성된마법진은번쩍이더니 허공으로 반짝거리며 사라졌다. 아니, 마치 사라지는 것처럼 가루로 변한마법진은모여들어 어디론가로 향하기 시작하였다.
역시 예상이 맞았나. 빛나는 가루가 안내해주는 방향으로 다시금 몸을 띄워 날아가는 요원. 나 역시 그 뒤를 쫓으며 미리 초감각을 통해 가루의 이동 방향을 수색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가루의 진행 방향으로 몇km 떨어진 근방에 자그마한 촌락이 보였다. 촌락 내부에 거주하는 생물들은 역시나렝인들이었다. 다만, 다들 무언가 상태가 이상했다.
귀까지 찢어진 흉측한 입꼬리의 생김새와는 달리 벌벌 떨리고 있는 몸. 공포에 가득한 표정을 지은 채 마을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녀석들의온몸에는상처가 가득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대재앙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만약 떨어지는 파편에 맞았더라면 흔적도 없이온몸이터져버린 채 즉사해버렸겠지. 그렇다면 저 상처들은 분명 다른 생명체에게 입은 것일 것이다.
렝인들을증오한다는 거미들의 짓일까? 아니나 다를까 거미의 독에 당한 듯 고통스러워하며 누워있는 놈들도 보였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무언가에 베인 듯한 상처부터 불에 탄 듯한 흔적. 관통상을 입은 녀석들도 있었고, 무언가에게찢겨나간듯 팔다리의 일부가 없는 놈들도 존재했다.
하나의 생명체에게 당한 상처라고 하기에는 종류가 너무 다양한 흔적들.
마법...이라면가능하겠지. 그러면 내분이 일어난 것일까? 하지만 내분이 일어났다고 하기에는 그들이온몸으로표출하고 있는 공포심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내분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동족들에게 저 정도로 겁을 먹을 리가.
그럼 뭐지?
점점 가까워지는 마을을 향해 나아가며 고민을 거듭하다가 문득 한 가지의 가능성이 떠올랐다.
하나의 생명체가 아니라 다수의 생명체에게 동시에 당했다면 어떨까. 고원에수많은 생명체가살아가는 만큼 각 상처와 생명체들의 생김새와 특징을 대입해본다면 가해자를 추론해낼 수 있으니.
베인 듯한 상처는 거미에게 베였거나 인간이나 다른렝인들에게검으로 베인것.
불에 탄 흔적은 당연히 마법을 통해 입은 상처겠지. 내가 살펴본괴물 중에서브레스를뿜는 녀석은 없었기도 하고.
팔다리가찢겨나간상처는 무언가가 잡고 그대로 육포 찢듯이 찢긴 것 같은데, 아무래도 공중에 날아다니는 괴물 새라면충분히 가능해보이는 일이었다. 옷이 찢어진 흔적으로 보아 완력으로 그대로 뜯어낸 것 같은데 덩치에 걸맞게 힘도강력한가 보다.
관통상은 문 비스트의 얼굴에 달린 촉수와 굵기가 비슷한 것으로 보아 촉수에 그대로 꿰뚫린 것처럼 보였다.
독이야 뭐 당연히렝거미들일 거고.
그 외에도각양각색의상처들은 하나하나따지고 보니고원에 살아가는 생명체들로부터 입은 것이라고 충분히 추론할만한 근거들이 존재했기에 이들이 이 장소에서 당한 것은 분명했다.
다만 단 하나의 집단이 이토록 다양한 생물들에게 당했다는 것이 이상할 뿐.
그것도 서로 협력한 것처럼 보였기에 더욱 수상한 광경이었다. 흔적을 보아하니 이들이 상처를 입은 시점으로부터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는 않은 것 같았는데, 그렇다면 동시에 당했다고가정할 수밖에 없지.
감각을 확장하여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다양한 생물들이 모여있는 집단은 발견할 수 없었다. 문 비스트와렝인이같이 있는 것을 제외하면 다 제각각무리를 지어서살고 있거나 혹여나모여 있더라도서로죽일 듯이싸우고 있을 뿐이었다.
이상한데…. 그러고 보니새로이 얻은 능력이라면 단서를 발견하기 쉽겠지. 과거를 볼 수 있다는 점은 탐정에게 있어서는치트키급의능력이니까.
이미짐작 가는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이들이 왔던 장소부터 특정한 뒤에 역으로 따라가서 전투의 흔적을 살펴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겠지.
다만 먼 원거리에서는 발동하지 않는 것을 보아하니 가까이 가야 쓸 수 있는능력인가 보다.
다행히 빠르게 날아온 덕분일까 어느덧 육안에 보일 정도로 가까워진 마을의 모습이 시야에 잡혔기에 바로 사용하였다.
초감각과는 또 다른 느낌의 감각.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하나의 공간에 동시에 투영되어겹쳐 보이는현상. 가까운 미래에 이 집단이 어떻게 될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일단 미래와 현재의 시야를 지우고 과거에 집중하였다.
어디까지 볼 수 있을까. 현재 눈에 들어오는 과거의 광경은 그다지 먼 시간대가 아니었다. 상처에 감겨 있는 천이라던가어느 정도아물어있는 상처가 벌어져 있는 것을 보아하니 마을에도착한 지 얼마 되지않았던 시간대인 것 같다.
조금 더 과거로넘어 가볼까. 정신을 집중하고 감각을 마치 바다에 잠수하는 듯한 느낌으로 깊게 활성화하자 보이는 과거의 광경에 더욱더 먼 과거의 광경이겹쳐지더니이내 완전히 대체하였다.
그리고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온갖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광경. 하늘에서는 괴물 새들이 날아다니다 쏜살같이 습격하여 팔다리나 머리를 뜯어가고, 지상에는 문비스트들과렝인들이다른렝인들을촉수로, 마법으로 공격한다.
마을의 건물들 위와 사이사이에는 거미들이 거미줄을 친 상태로 주민들을 덮치거나 원거리에서 실로 묶어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최후를 선사해주었다.
그야말로 현세에 지옥이 도래한 듯한 광경.
비명을 지르며 어떻게든 대항해보는렝인들이지만괴물의 연합군 앞에서는 하염없이 미약한 반항일 뿐이었다. 그렇게 하나씩 서서히 쓰러져가는 마을의렝인들. 시체조차 남기지못한 채괴물들의 뱃속으로들어가 버리는신세는처량해 보이기까자 하였다.
렝인마을이 이대로 전멸하나 싶었던 순간, 살육의 잔치를 벌이고 있던 괴물들이 갑작스럽게일사불란하게물러나기 시작하였다. 누군가 통제하는 것처럼 질서정연하게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한 괴물들은 이내 순식간에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남겨진 것은 그저 생존을 `당한` 주민들 뿐.상처 입은육체와 정신을 지닌 그들은 습격자들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상처를 돌보거나 애도하는 것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허망한 표정으로 무너지는 하늘을 쳐다볼 뿐.
운석이라도 떨어졌다면 어쩔 수 없는 자연재해에 당했다고 생각을했을 텐데말이다.
그렇게 멍하게 있다가 이내 주섬주섬 뒤처리를 시작한렝인들. 부상자를 돌보고 전투의 흔적을 청소하는 그들을 바라보다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이런 대규모의 습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큰 흔적이 남지 않았다는 것.
그러고 보니처음살펴보았을 때주변 건물에는 어떤 영향도 없었기에 마을에서 습격당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이는 광경은 정반대. 오히려마을에서 습격받았음에도불구하고 어떤 공격의 흔적도 남지 않은 것이다.
의문스러운 마음에 조금 더 집중해서 살펴보자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마을에 쳐들어온 괴물들 역시 수는 적지만렝인들의반격으로죽은 놈들이 있었는데 남아있어야 할 시체가 존재하지를 않았다.
뿐만 아니라건물들 사이에쳐져 있던거미줄들 역시 괴물들이 퇴각함과 동시에 사라졌고, 사방에 튄 체액이나 신체 부위들 역시 전혀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다시 시간을 조금 돌려 그 부분들을 살펴보자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알 수 없는 기운. 나를 습격한 놈이 두르고 있던 기운이 괴물들의 시체와 흔적들을 휩쓸더니 이내 지워버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