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 9. 쌍둥이와 곰인형 (15)
* * *
56.
슬라임이 언어 능력을 구사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는 도중 대답이 이어진다.
"위대하신 분께서 보호하라명을 내리신인간이 마음에 들었기에 원활한 소통을 위해 적응하였습니다. 위대하신 분을 향한 신앙심이 아주 독실하더군요."
어….
솔직히 왜 믿고있는지도 모르겠고뭘 해준 적도 없는데 광신도처럼 행동해서 오히려 당황스러울 뿐인데.
레이나의말에 따르면 진리의 문을 보았다고 하는데, 내가그런 걸 보여줄능력이 있으면 진작에 스스로 엿보지 않았을까싶을 정도로사기스러운능력이었다.
구경하는 것만으로 마법의 경지를 올려주는 문이라.
인류애 없이 형제간의 돈독한 관계를 보여준 만화가 생각나는데.
분명 혹독한 대가를치러야했지. 신체를 통째로 잃었었던가?
그렇다면 내가 보여줬다 하는 진리의 문에 대한 대가는 무엇일까? 신들이 존재하는 세계인 이상 그들이 만들어낸 다양한 법칙들로 세상을 유지하고있을 텐데어떤 조건도 없이 경지가 상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흔히들 인과율로 표현하는 법칙. 원인 없는 결과는 있을 수 없으니.
아마 저 광신적으로 보이는 모습이그중 하나가아닐까 싶다. 존재만으로 광기를 뿌리고 다니니 신으로 섬기게 되면 그를 닮아가는 것이겠지.
인신 공양을좋아하는 신을 섬기는 마법사 에이본 역시인신 공양을받는 것처럼.
현재 슬라임이 뭘 하고 있나 봤더니 온 능력을 다해서 심장을 재생시키고 있었다.
수술을통해심장만적출해낸듯 텅 비어있는 공간에 자리를 잡은 채 심장을 대신하여역할을 수행하고있었다.
당연하지만, 인간의 심장과 다른형태를 띠고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듣도 보도못한 것이라고해야 할까. 동물의 심장을 본 적이 있는 것은아니지만, 그모습이 보석처럼 빛나는 형태는 절대 아닐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호기심이 생겨서 물어보았다. 언어 능력이 생긴 것은 참 좋네.
"그건 무슨 생물의 심장이지?"
"드래곤입니다.이세계에살아가는 생물 중에서 육체적으로 가장 발달한 생명체이기에 그 형태를본떴습니다."
응?
내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겠지?
분명 슬라임이 살아가던 세계의괴랄한생물체에 관한 내용을들을 줄 알았더니, 친숙한 단어가 들려왔다.
드래곤이라면역시이세계클리셰중의클리셰.
어느 순간부터 전투력 측정기나 고등급의 재료를 제공해주는 셔틀 느낌으로변질 되었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마족이나 천사와 더불어 최강의 생명체로서 군림하는 것은 확실했다.
그런데너가드래곤에대해서 어떻게 알아? 지금 있는 요원이나 알파3이라는 요원이나드래곤 하트를보았다는 기억은 없었는데?
"드래곤에대해서는 어떻게 알고있는 거지?"
"위대하신 분을 섬기게 되며알게 된지식입니다. 내려주신 힘을 받아들이며다양한 지식을얻게 되었습니다. 다양한 생명체들에 관한 내용을 알게 된 만큼, 그것들을 활용하여 숙주로 삼은 요원을강화한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그냥신성력을내려주는 과정에 저런 혜택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건가?
1+1행사도아니고 무슨사은품처럼지식이더해지냐?
광기와 촉수의 신이 아니라 지식의 신이었나?
지식의 신으로 유명한신이라면…. 아테나가있네. 저주를 받아서 이런 괴물의 몸으로 변한것일 수도. 만약 그렇다면 죽고싶곘는걸.
뭐, 그럴 일은 없겠지만.
지금 내 육체는남성체나여성체라는표현이 모두 적합하지 않았다. 굳이 표현하자면무정체라고도할 수 있고양성체라고도할 수 있다고해야 하나.
어차피내 의지대로 변형하는 것이니성별 같은특성은 언제든고를 수 있는 것이다.
굳이 남성으로서의 정체를 버릴 생각은 없었지만. 20대헬반도남자로서 그런 취향은 없다.
흥미가 아예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질만한호기심 정도의수준일 뿐이다.
무엇보다 인간의 형태도 취할 수없는 만큼육신이여성체가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얼마나 많겠냐 싶다만은.
만약에라도 변한다면촉수녀라….
별로 만나고 싶지는 않은데. 촉수를 가진 여자와 남자가 엮이는 만화나 소설에서 좋은 꼴을 본 적이 없다.
대부분 작품에서는남녀의 입장이 역전되었지. 취향은 존중하지만, 내가 당사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뭐, 만날 일은 없겠지.
...없겠지?
정체 모를 동족이한가득이니가능성을 마냥 부정하고만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 괴롭다.
그래,안 그래도그것과 관련된 내용을 알아내기 위해서 지금 동화한 것이 아닌가.
일단 내 정체부터 알아내고,그다음에는연계되어있는 존재들에 대해서 차근차근 알아내야겠지.
그러다 보면레이나의고향을 침략한 존재들에 대해서 알아낼 수도 있을 거고.데일에게도도움을 줄 수 있겠지.
두 명에 대해 생각하자 무언가 마음이 따뜻해지는 감각이 들었다.
이세계로넘어오며 생긴 첫 연인과 친구.
과거에 다짐한 것처럼 스스로가 변해가고 있다는 사실에 약간 감격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아직은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만, 결말이 난 이야기가 아니라 과정을 밟아가고 있는 도중이니 더 열심히 노력해야지.
무엇보다 지구로 돌아갈 수도 있는 가능성이 생긴 이상, 가족과 친구들에게 속죄할 기회 또한 분명 존재했다.
쓰레기 같던과거의 행태는 둘째치고 지금 모습만으로도거품을 물고쓰러지겠지만.
언젠가는…. 그래, 언젠가는 용서를 빌어볼 수 있겠지. 설령 용서해주지 않는다고 하여도상관없다. 내 양심이나 마음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니까. 내가 저지른 짓들에 대해서는평생 속죄하는마음으로 살아갈 생각이다.
결국, 돌고돌아 지구와의 연결점, 즉 마법사 에이본에 대한 정보를알아야 하는것이 핵심이지만.
그 핵심에 접근하게 해 줄 장본인이 심장을 잃어버린 체 뻗어 있는 것이 문제다.
무려 소설 속 최강의 보석,드래곤 하트를몸에 박아넣었음에도정신이 깨어날 조짐을 보이지 않는다.
강제로 깨워야 하나?
몇 시간도 안 지나서 깨어날 것이분명하지만, 이번만큼은조바심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내 정체에 대한 정보. 그와 연결된 동족들에 대한 정보. 지구와의 연결점.
머나먼 미래의 목표로 삼았던 것들이 눈앞에 있다고 생각하니 절로 마음이 급해질 수밖에 없다고해야 하나.
나 하나만이라면 몰라도 다른 사람들과도연관되어 있는만큼 더더욱이나 욕망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감성과 이성이 충돌하던 도중, 결국 승리를거둔 것은감성이었다.
그래, 이런 중요한내용들은최대한 빨리 알아내야지.데일의고향은 현재진행형으로 침략받고 있지 않은가? 아마 정보를 알아낸다면 분명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자, 마음을 정한 이상 이성을 동원하여 냉철하게 판단을 내려야 한다.
우리 동화 속 공주님처럼 잠들어 있는 건방진 놈을 어떻게 깨울 수 있을까.
슬라임이 몸의 회복에 온 기능을 전념하고 있는 이상 신체적인 문제는 아니다. 내가 준 점액의 양은 애초에 신체의 절반이 날아가도 치유할 수 있을 정도를 상정하고 넣어주었기에 부족할 리도 없고.
그렇다면 정신적인 문제인데, 과한 마법을시전한부작용으로 뻗은걸까, 정신적인휴식이 필요하여 평범하게곯아떨어진걸까, 그도 아니면 심장과 관련되어 정신 또한 제물로서 넘어간 것일까.
"숙주가 왜 안 깨어나고있는지 알고있나?"
딱히 대답을 기대하고 질문을 던진 것은 아니었지만, 슬라임은 성실히 대답해주었다.
"육체에 정신이 머무르고있지 않은것을 보니저쪽으로넘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쪽?"
"제 전 주인님께서 계신 곳을 말합니다.크느얀(K`nyan)의깊디깊은지하에 존재하는 동굴,은카이. 혹은그분의제1사도가거주하는사이크라노쉬로갔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장소더라도 차원의 너머에 있으니 돌아오기전 까지는육신이 깨어날 수가 없습니다."
마도서에서 본 지명들이네.사이크라노쉬라면토성이었지?
역시, 참을 수가 없다. 빨리 깨우든 해야지.
"이쪽으로 불러낼 방법은 따로 없나?"
"위대하신 분께서 부른다면 가능성이 있겠지만, 아무래도 차원을 넘은 만큼 명이 전달되지 않을가능성이 큽니다."
역시 차원을넘는 것은 쉽지않은 일인가.데일이자유자재로 돌아다니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 지 새삼 느낀다.
근데 나도 격이 낮은 것은 아닌데 못할 것은 없지 않나?
아니 잠깐만.
내가 차원을 넘는다고?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던 방법을 떠올리자 머리가 저절로 가능성과 방법을 따지며 계산한다. 순식간에 내려진 결론.
되겠는데?
생각해보면 나는 이미 차원을 넘어본 경험이 있다. 그것도 한두 번이아니고.
가장 먼저는 지금 이 몸에 내 정신이 깃들게 된 과정부터가 차원을 넘은 것. 뭐,그때는의도적인 사항이 아니었으니 넘어가고.
바로 지금, 슬라임과 동화하고 있는 내 정신은 분명하게 차원을 넘고 있었다.
내 육체가 갇혀 있는 시설의 어딘가는 분명 공간뿐만 아니라 차원적으로도격리되어 있는어딘가였다.
하지만 내 정신은 그 벽을 가뿐하게 무시하고 시설 내부에 존재하고 있었으니 차원의 벽을 건너온 셈.
그렇다면 지구와이곳을가로막는 차원의 벽 또한 정신만이라면 넘을 수 있다는 것이나다름없다.
방법은 조금 더 까다롭겠지만, 문제는 없다.
슬라임에게동화한 것 역시 연결되어있는 감각을 통해 따라온 것이고, 그렇다면 요원에게 역시동일한방법을 취하면 된다.
미약한신성력으로이루어진 길.
육체로부터신성력이전해진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신앙심이라는 것은 육체가 아닌 정신이 품는 것.
지금까지 빌리고 있었던 슬라임의 감각이 아닌, 온전한 내 정신의 감각으로신성력을추적한다.
쓰러진 요원의 중심으로 펼쳐진 거대한마법진. 그것의 `너머` 어딘가로부터 이어지는신성력의끈이 느껴진다. 아니, 보인다.
내가 지닌 절박함이 자극하고 있는 초월적인 감각은 차원을 이루고 있는 결을 분석하고 그 틈으로 흘러나오는신성력이펼쳐내는 황금빛의 길을 시야에 담아준다.
저 길을 탄다면 고향을 향해 넘어갈 수 있는 것일까.
오랜만에 두근거리는 기대감을 느끼며정신체를슬라임으로부터 분리하여신성력을따라 움직인다.그러고 보면정신체를아예 분리해서 이동해본 적은 없는데, 뭐별일있겠나?
"다녀오십시오, 위대하신분이시여. 부디 원하시는 바를 이루고 돌아오시길."
슬라임이 건네는 마지막 인사를 들으며 의식을 완전히 분리한다. 슬라임의 감각, 요원의 감각으로 각각 보았던 거대한 광장의 내부를 직접 둘러본다.
어느새마법진에영향을 받아 어둡고 칙칙하게 물들어 버린 광장.
끈적이는 점액과 타버리고 남은 재로 이루어진 거대한마법진이빛을 발하고 있는 바닥을 제외하면 기존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질적인 것은 역시 허공에 뭉쳐 있는 회백색의 덩어리.
영혼.
알파3으로의태한슬라임이 먹어 치운 인간들의 영혼이 하나의 덩어리로 뭉쳐진 체 고통스러운 신음성을 흘리고 있다.
온갖 인간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라지는 표면은 물결처럼 흐르고있었지만, 전체적인형태는 공중에 둥둥 떠 있는 상태로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기괴하고 끔찍한 모습이었지만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나는별다른감정이 들지 않았다.
공포 영화의 귀신이 차라리 더 무섭지, 저 영혼의 덩어리는 그냥 불쌍한 인간들의 말로라고 인식될 뿐이었다.
아니, 오히려 약간은 탐스럽게 느껴진다고해야 하나. 인간의 영혼이라면 충분히실험해 볼 만한것들이 많을 텐데.
무엇보다 평범하게 있을 수 있는 것은 저들의 육체 또한 내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알파3으로의태한슬라임은 분명 요원 내부에잠들어있었지만, 이제는나를 섬기고 있는 만큼 그 제물을 바치는 대상 역시차토구아라는전 주인이 아닌 나였다.
결과적으로 나는수십 명에달하는 인간들의 육신을 손에 넣었고, 그것들은 현재 슬라임이 내부에 보관하고 있다.
아니, 정확히는 반쯤 보관하고 있다고해야 하나.
제물로 나에게 바친 만큼 나 역시 그들의 육체들을 느낄 수 있었는데, 현실의 공간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슬라임의 의식과 내 의식 사이의 어딘가에 실제 육신들이 보관되어있는 느낌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정신세계에실존하는 물질이 들어 있는 이상하게 보이는 현상이었지만, 생각해보면납득할수 있는 일이었다.
원래 세계에서도 제물을 불태우며 바치는 의식이 많은데 그것이 재를 바치기 위한 행동은 아니지 않은가.
지구의 신들이 재페티쉬가있는 것이 아닌 이상 불타버리고 남은 동물의 잔해를 달라고 할 리가 없겠지.
그러고 보니지구에도 신들이 있을까.
현대는 물론 과거 기록들만 합해도 수십 명이나 달하는 신들의 존재.
이곳에온 이상 비록 느낌은다르지만, 신들이존재한다는 것은 알게 되었으니, 지구 역시 어떤지 궁금해진다.
결국, 이 역시넘어간다면 답을 찾을 수 있겠지.
황금빛 길을 따라서 움직이자고 의식을 하자정신체가신성력의빛줄기를 따라 이동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울부짖는 영혼을 지나치고 음산한마법진을따라 흘러가는 의식은 마침내 차원의 틈을 향해 나아갔다.
벌어진 결을 따라 의식이 넘어가자 무언가 형언할 수 없는 감각이 느껴지며 분명하게 `달라진` 느낌이 들었다.
흔히들 외국 여행을 나간다면 공기가 달라진다고들 한다. 몸이 감각적으로 느끼는 변화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차원을 넘는 것 역시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슬라임에 의식을 동화시킬 때와는 또 전혀 다른 감각이다.
비유하자면…. 슬라임에의식을 동화시키는 것은 텔레포트 하는 느낌이라고해야 하나. 즉각적으로 의식이 내 육체에서 슬라임으로 이동하는 것이라 차원의 벽을 넘었다는 의식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워터슬라이드를 따라 나가고 있는 기분이 들고 있었다.
흐름을 타고 몸을 맡긴 채 나아가는 상태. 어두운 터널 끝에 밝은 풀장이 기다리는 것과는 달리 아예 다른 차원이 존재하는 것이지만.
이게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터널이라는 것일까.
그렇게 점점 무언가 바뀌는 감각이 든다. 나의근간을 이루는법칙들이바뀌어가는느낌.
마침내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듯,정신체에느껴지는 압력이 점차 강해지더니 무언가 통과를 하는 느낌이 들며 새로운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공간. 인식하는 방식을 바꾸자 검은 하늘과 그곳에 찬란하게 박힌 보석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광활하게 펼쳐진 우주의 장엄한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나는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