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 9. 쌍둥이와 곰인형 (13)
* * *
54.
가이락은잠시 거친 호흡을 내쉬며 이야기를 멈추었다.
빠르게오르락내리락하는그의 가슴이 그가 얼마나분노하였는지 알수 있게 해주었다.
그렇게 잠시 고요해진 방 가운데에 천천히 차를 마시는 소리만이 적막을 깨고 있었다.
조금은 진정된 것일까,가이락은추태를 보여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진압팀의 일부가 지하 통로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245를 상대하기에 수월하도록 작업한 것이었죠. 그러던 도중 지하에 파묻힌 기록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들어있던 내용이 바로 지금 제가 들려드리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 기록을 읽은 진압팀이 분노하여 행동한 것이겠지.
사건의전말이완전히 밝혀지자 머리가 깨끗해진 기분이었다.
진압팀은 이사벨라를 제거하려고 들 것이지만 시설에 알리지는 못했겠지. 아무리 그녀가 기록을조작했다고하더라도 시설에서그것조차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바보는아닐 테니.
오히려 암묵적으로 그녀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녀가 벌이는 짓거리들을 허가해주었을 것이 분명하다. 결과적으로 245를 폭주시키는 것은 여전하였고, 폭주를 막는 것 역시 그녀 홀로 이루어낼 수 있으니. 24시간 내내 붙어있으니 감시까지 가능하다.
감시, 진압, 전담까지 모두 홀로 맡을 수 있는 능력자이니 시설에서 얼마나 예쁘게 보았을까. D급 요원들만 제물로 가끔 바치면 홀로 완벽하게 관리 개체를 관리해주는 요원.
물론 아까말한 듯이멀리서 보면희극인 것이 당사자가 되면 이야기의 장르가 달라지는 만큼, 진압팀 입장에서는분노할 수밖에 없는처지고.
이사벨라라는 요원에게도, 이 사건을 일으키게 된 No.245라는 관리개체에도, 그리고 모든 일을 용납하는 시설까지 그들은 적대하게 되었다.
"마침최근 들어서이곳을관리하는 관리자가 바뀌었더군요. 여성 S급 요원으로 바뀌었는데, 사건의경위를잘 모르는듯했습니다. 그렇게 기회가 찾아온 것이죠. 최근에 다시금 폭주가 일어났고, 또 여러 인원이 죽으면서 새로운 인원이 투입되어야 했습니다.그때전담 요원으로 진압팀 중 한 명이 자신이 일을 맡겠다고 하며 마지막 도화선을 설치했죠. 그렇게 지금의 상황으로 이어진 겁니다."
진압팀이야심 차게준비한 반격.
저택을폭파하고그들의 본거지인 지하 통로로 상대를유도해왔겠지. 아마도 No.245를 이용하지 않았을까?
그러고 보니폭발 이후 관리 개체의 모습은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다. 만약 폭주했다면 245C가 날뛰고 있을 것이 분명한데 상부로부터도 그러한 정보가 넘어오지는 않았으니 이들이 무언가조치를 취했겠지.
"저택을폭파시켜그녀의 심복으로 이루어진 감시팀을무력화시켰습니다. 그쪽 역시 요원들을 보냈으니지금쯤이면불귀의 객이 되었겠죠. `전담 요원`으로 투입된 요원들 역시 사살하였습니다. 모두리빙데드이기에그년이 방심하고 있던 것을 노렸습니다. 사제를 불렀거든요."
삶의 순환을 거부하고 법칙을 일그러뜨리는 존재인언데드인만큼, 신들이 그들을 향한 시선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세계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나가는 신들인 만큼, 그들이 내려주는신성력은언데드에게있어서 치명적인효과를 지니고있었다.
고위의언데드가아니라면 일격에 가루가 될 수 있을 정도로.
그런데 사제가 파견되었다면 지금의 광경을 설명할 수 없었다. 리치를 상대하는 것에 수습사제 같은허접스러운수준의 사제를 부른 것은아닐 테고. 그렇지만 사방에언데드의잔해가 널려있는 것을 보면 정화되지는 않은것인데….
"리빙데드는따지고 보면 살아있는 존재니신성력이먹히지는 않지만 파견된 고위 사제를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독이랑신성력을사용해 상처를고정시키더군요. 들어본 방법이기는했지만, 막상보게 되니 신기했습니다."
신기할 뿐만 아니라 악랄한 방법이기도 하다.
독에서 오는 고통을 느끼며 죽어가지만,신성력이상처를 회복시키며 그 죽음을 지연한다. 결과적으로끊임없는고통에 시달리며 주입한신성력이메마를 때까지 서서히죽어 나가게되는 것이다.
그들 역시 고문하거나 정보를뽑아낼 때비슷한 방식을 사용한 적이 있기에알 수 있는 방법.
그렇게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듣던 도중, 여전히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델타1이 벌떡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내 동료들에 대해서는 언제얘기할 거지? 사정은 알겠다만 하소연까지 들을 시간이 있지는 않은 것 같은데. 아까 말하지 않았나?우리역시 괴물에 쫓겼다고. 그 괴물이 여기 도착하면 모조리 전멸하는 데 5분도 채 걸리지 않을 거다."
참을성 없고 성급한 저새끼 때문에돌아버리겠네.
급발진한 놈 때문에 역시 주변에 서 있는 요원들의 표정이 굳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어서 처리해야지 원.
"괴물이라….그러고 보니그분들역시 괴물에게습격당했다고했지요. 안 그래도그들에 대해 얘기를 하려했습니다. 저 역시 궁금하여 질문하려는내용이있기도 하고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가이락이델타1의 무례한 언동을 크게신경을 쓰지않는다는 점일까.
진압팀의 요원이 그를 잘 따르는 것도 그렇고 여태 보이는태도 같은것을 보았을 때 좋은 리더인 것 같다.
알파2 또한 그랬지. 먹혀 버렸지만.
가이락이인상 좋은 미소로 말하자 델타1 그 모습에 역시 대놓고 짜증을 낼 수는 없었는지 거칠게 자리에 앉으며 차를한입에넘겼다.
그걸로부족했는지 무언의시선으로 주위 요원들을쳐다보았지만, 그들이새로 차를부어주는 일은없었다.
이제는 전매특허 수준의 똥 씹은 표정과 함께 찻주전자에 손을 뻗어 잔을 가득 채운 그는 다시 차를 원샷으로 넘겼다.
마법 주전자라뜨거울 텐데.
아니나다를까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있었지만, 자존심때문인지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는듯했다.
병신.
"그녀가 다시 한 번 245를 폭주시키려고 하기에 두 쌍둥이를 제압하여 다른 곳으로 이송했습니다. 지하 통로 깊숙한 곳에서 철저하게 관리 중이니 그녀가 다시는 그들을 볼 일은 없겠지요. 무엇보다 살아있지도 않을 테니."
아까보다는 가라앉은목소리로 얘기하고있지만, 목소리에서는 숨길 수 없는 증오가 드러나고 있었다.
오히려 차분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설명하면서악귀 같은표정을 짓고 있는 지금이 더욱 무서운 인상을 주고 있었다.
"지원을 온 두 요원 또한 같은 결말을 맞이하겠죠. 아무것도 모르는가 싶었더니 그녀를 돕는 것으로 보아 시설에서지원해 주려는것이 분명합니다."
목표가 딱히 그런의도가 있지는않을 텐데. 뭐, 오해를 해주는 것은 고맙지만.
이미 그들을 속이고 있는 이상, 연기에 충실해야 한다.
"시설에서 알아차린 것인가요?"
"처음에 그들의 수준을봤을 때는모르는것처럼보였지만…. 아무래도정보를 숨겼었나 봅니다. 몇 명의 요원이죽었는지…. 그녀말고도 복수할 대상이 생겼죠."
그들의 수준으로 가능할 리가 없겠지만, 알파3은 위로의 말을 전하였다.
인간은 빈말으로도감정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이 참 편했다.
"너무 기다리게 했군요. 관심을 가지시던내용에 관해 설명하겠습니다. 보셨다면아시겠지만, 이장소에서 그녀와 전투를 벌였습니다. 고위 사제가 있던 만큼 전투는 손쉬웠고 그녀는 오랫동안 저항했지만 결국 큰 상처를 입고후퇴할 수밖에 없었죠."
들려온 내용과 보이는 결과가 다른 것에 의문이 들었다.
손쉬운 전투와 방을 가득 메운 환자들은 전혀 매칭되지 않는 단어들인데.
"그런것치고는부상자가 너무 많은것처럼보입니다만. 특히나언데드의잔해가 남아있는 점이 의문입니다. 고위 사제라면 잿더미로정화시켜버렸을텐데요."
후우.
한숨을 내쉰가이락이느껴지는 괴리감을 설명하였다. 씁쓸한 표정으로부터 어떤 얘기가나올지 짐작이갔지만.
"그녀가 후퇴한 뒤에 승기를 잡은 우리는 인원을 나누어 그녀를 쫓았습니다. 첫 전투로 일어난 부상자들과 그들을 돌봐줄 사람들 이외는 모두 그녀를 쫓으러 갔죠. 그리고 그것은 아주 잘못된 선택이었습니다. 제가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말았죠."
"아닙니다,가이락대장! 그 사악한 년이 그런 방법을 쓸 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무엇보다도 그녀의 목숨을 끊는 것이 가장 중요한 법, 설령 저희가 전멸하더라도 그녀를 완전히 소멸시킬 수만 있으면 여한이 없습니다!"
"맞습니다! 기운 내십쇼!"
그의 회한 어린 말을 들은 요원들이 황급히가이락을위로하는 말을 쏟아내었다.
그들의 격정적인 반응을 보아하니 역시 좋은 리더인 것이 분명하다.
가이락역시 그런 요원들의 말을 듣고 기분이 좀 나아졌는지 미약한 미소를 지었다. 전체적인 표정은 여전히 굳어있었지만.
"위로는 고맙지만 내 책임이 맞는일이지…. 리치의마법을 너무 쉽게 봤어. 비록 갈취한 생명력을 사용했더라도 사람의 모습을 유지할 수준이니 더 경각심을 가졌어야하는데…. 얘기로돌아가자면 저를 포함한인원 대부분이그녀를 쫓았습니다. 그리고 비극은 저희가 이곳을 완전히비웠을 때일어났죠."
"그녀가 소환해두었던 시체들은분명히 정화하고갔지만, 영혼까지는 미처 생각하지못했습니다. 그것도 살아있는 사람을 사로잡을 줄이야.도주하던와중 그녀를 따르는 영혼을 통해서 부상자에 빙의하여 죽음까지이 끌은뒤에 그 시체를 통해 다시금사령술을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저희는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죠."
손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주먹을 굳세게 쥔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이미…. 늦었죠. 부상자들은 대부분 전멸했고, 당연히 시체로 되살아나 저희를 상대했습니다. 끔찍한 순간이었죠. 뭐, 우울한 얘기와 하소연은 여기까지만 할까요. 드디어 찾아온분들에 관해 얘기할수 있겠군요."
의도적으로 밝은 목소리를내려 하고있지만, 별로 성공적이지는 못하였다.
네크로맨서가과거 배척받던 가장 큰 이유.
같이 전투를 벌이던 전우가 죽자마자 좀비로 변하여 습격하는 모습은 트라우마가 되고도 남을 경험.
죽어도 죽지 않는 그들이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토막을 내야하기에 더더욱 고통스러운 과정.
저 바깥에 썩어가는시체 중에는그들의 동료들의 것 또한 존재하겠지. 시체가 많지 않았던 것을 보아 따로 모아서 장례를치러주거나화장을 했을 수도 있겠지만.
"다시 일어난 전투가소강 되고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나타났습니다. 처음에는 전신 슈트에 헬멧까지 쓰고 있어 정체를 알 수가 없어서경계했습니다.지원을 온두 놈처럼그들 역시 그녀를 지원하러 온 사람들일 수도 있으니까요.한데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더군요."
알파3은 세세한 단서 하나 놓치지 않기 위해 대화에 더욱 집중하였다.
델타 팀의 나머지 인원들에 관한 내용이었으니.
"절뚝거리며 비틀거리기도 하고 휘청거리는 것을 보아하니 상태가 정상적이지는 않더군요.멈춰 세우자한 분은 흐느적거리면서 넘어질 정도로힘들어했습니다."
이어지는 설명을 듣자 델타1의 얼굴이 급속도로 굳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델타5 역시 여전히 말이없었지만, 표정이밝아 보이지는 않았다.
알파3은 상황을 지켜보며 문득 생각이 나 알파1을 쳐다보았다.
점차 창백해지던 표정은 어느새 완전히 하얗게 질려있었고, 손으로 꾹 누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팔이 덜덜 떨리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불안해하는것이 분명하게 보이는 표정.
아무래도 슬라임과 관련된 부상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겠지.
그를 쳐다보자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이 보였다. 여기서 쉬다 보면 좀 나아지겠지.
"그들에게 물어보니 아까 말해주신 것과 같은 내용을 얘기하시더군요.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에 습격받았다고. 제가 질문하고 싶은 내용도 그에 관련된것이다만…. 일단그들의 행방부터 알려드리죠. 여태껏 보신 것처럼 그들은 현재 여기에 없습니다."
다시금 델타1이 일어서려고 하는 것을 델타5가 재빠르게 붙잡는다.
진작에 좀 말릴 것이지. 그래도 분위기를 또 깨지 않아서 다행이랄까.
점점 찢어 죽이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기가 힘들어진다. 부글거리는 속을 가라앉히며 살기를 잠재운다.
아직, 아직은 아니다.
"조금 전에말한 대로한 분이 크게 다쳐서 치유를 필요로 해 보였습니다만 저희가 가진 방법으로 돌볼 수 없는 종류의 것이기에 사제에게 안내해주었습니다. 사제가 그녀를 쫓아간 만큼, 그들 역시그쪽에합류했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델타1은 델타5의 손조차 뿌리친 채 성큼성큼문밖으로나갔다.
아니, 어디로 간지도 모르는데 저래도 되나?
델타5가 고개를 숙여 대신 사과한 뒤 그의 뒤를 따라 방에서 나갔다.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에 다들 황당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뭐, 밖에 인원들에 알아서 수소문해서 찾아가겠지. 알파3은 처음부터 그들과 합류할 생각이 없었다.
"으음…. 동료애가꽤 깊은 분인가 보군요. 바로 떠나시는 것 같은데 합류하지 않아도 되나요?"
"동료기는 하지만, 다른 소속이라고해야 할까요…? 저는남겠습니다. 안 그래도 이곳의 상황 역시좋아 보이지도않고 일손 역시 부족하신 것 같고요. 무엇보다 아까부터 말한 괴물들이 쳐들어왔을 때전투원도 부족해 보이고요."
알파3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하였고, 아니나 다를까 대답을 듣자 요원들의 표정이 밝아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훈훈한 광경을 보며 기분이 좋아진 그는 이어서 알파1을 바라보며 얘기를 꺼내었다.
"자네는 어떻게 할 것인가? 저쪽을 따라가는 것도 나쁜 선택지는 아닌 것 같다만? 아직도 상태가좋아 보이지않는데 사제와 함께라면 큰 도움이 될 거고."
핼쑥한얼굴로 그를 쳐다보던 알파1은 그 말이 끝나자 안색이 완전히 새하얘졌다. 사람의 피부가 저토록 혈색이 없을 수 있나 싶을 정도로하얘진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그, 저, 저도 여기 남겠습니다. 사, 사람들 도울게요. 그래, 마법, 마법도 쓸 줄 알고요."
"으음…. 괜찮겠나? 정말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괘, 괜찮습니다! 정말로요! 마나를 조금 많이 사용해서 지친것뿐입니다. 아,알…. 아니,제이크랑 함께하겠습니다."
알파1의 대답을 듣자 알파3은 묘한 미소를 지은 채 그를 쳐다보았다.
선택을 내린 것이 마음에 든 것일까,힘들어하면자신이 그를도우겠다며가이락에게너털웃음을 터뜨린 이후 사소한 잡담을 나누기 시작하였다.
불행 가운데 잠깐의 안식을 찾아서일까,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여러 요원이웃고 떠드는 가운데 알파1만이 자리에 얼어붙어 조용히 떨고 있었다.
***
라일이생각하던 것과는 달리키라누는`잘` 버티지 못하고 있었다.
광장의 한복판, 거대한 불꽃과 어둠으로 이루어진마법진의중앙.
키라누는제자리에못 박힌채 식은땀을 흘리며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모든 집중을 어딘가에 쏟아붓고 있는 듯한 표정.
라일이보았다면 똥이라도 싸고있냐고물었겠지만, 지금의키라누는그런쓰레기 같은질문에도 대답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문 너머에서 엿본 지식으로 만들어낸마법진.
대략적인 내용은 알았지만 실제로 펼쳐보기 전까지 그 기능에 대하여 정확히 알 수 없었던 것을 펼쳐내자 새로운지식이머리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소환진.
그것도이계의존재를 불러내는소환진이었다.
부들거리며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는 잠시 과거를 회상했다.
광기로부터 이성을어느 정도회복한 그가 처음 본 광경은 검은색이었다.
장소도, 인물도 아닌 그저 검은 색깔만이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순간 자신이 죽은 것이 아닐까 착각했지만, 검은 그것은 이내 움직이기 시작하며 제 정체를 알렸다.
슬라임. 같은 것.
빛의 기둥이 그에게 꽂힐 때 그는 분명 준비가 되지않았었다. 그가 역시 문 너머의 지식으로 소환한 안개는 집중된 빛의 포를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재빠르게 불러낸마나의방벽은어째서인지 빛에 닿자마자 그대로 흩어져버리고 말았다.
그 빛을 바라보며 그는 오랜만에 두려움을 느꼈다. 죽는 것 때문이 아니라 위대하신 분을 제대로 섬기지도 못한 것과 그를더이상돕지 못하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
그리고 그 순간, 검은 슬라임이 그의 몸 내부에서 튀어나오며 빛을온몸으로받아냈다.
언제부터 그의몸속에서살았을까, 알 수는없었지만, 그것이위대하신 분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은 확신할 수 있었다.
희미한 기억으로 그가 마도서를 통해 소환하는 내용이 비눗방울처럼 떠오르다 터지며잊혀졌다.
그분께서지켜보시고 계셨구나.
온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경외심과 환희에 절로 미소를지을 수밖에 없던그는 다시금 몸에 스며드는 슬라임을 느끼며 짜릿한 느낌을 받았다.
무언가 온전해진 느낌.
영혼이 충만해지는 기분은 그의 감정을 더더욱 자극하였고, 잠시 눈을 감고 그 감각을 만끽하던 도중 무언가가 방해하는 것을 느꼈다.
살의.
그를 향한 살의가 예민하게 퍼져 있는 감각에 걸렸고, 그로 인해 트랜스 상태에 빠질 정도의 집중력이 풀리며 강한 불쾌감을 주었다.
마침내 눈을 뜬 그는 이성과 광기가 동시에 존재하는 상태가 되어스스로의의지하에 문 저편의 지식을 탐구하여 마법을지어냈다.
처음에는 그저흑마법을변형시켜 사용하려고 하였다.
그를짜증 나게한 만큼, 고통을 주기 위한 완벽한 마법. 상대를 마계의 늪으로 빨아들이는 마법을이계의지식과 섞어서 사용하였다.
그렇게시전한마법을 조종하며 영역을 확장하던 도중 그를 거슬리게 하는놈들 중하나가 마법을 사용했다.
그때신기한 현상이 발생하였다. 마법의 발동이 느리게 보였다.
마치 누군가 시간을 늘린 것처럼 마법사가시동어를외우고, 마나를 배열하여 마침내 마법을 발동시키는 모습이 아주 느릿느릿하게, 영상을 감속시킨것처럼천천히 단계별로 흘러가는 모습으로 보였다.
당연히 그에 간섭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고, 마법의 통제권을 완전히 빼앗아버린 그는 생각보다 큰 규모의 마법이었기에 놀랐다.
최소5서클이상의 마법으로 보였는데 이토록 쉽게 통제권을 뺏다니. 어떻게 하면 이를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까 생각을 하던 그는 갑자기머릿속에떠오른마법진을확인할 수 있었다.
정확한 내용은 모르겠지만 무언가를 소환하는 것이 분명한마법진.
어마어마한 마력이 들어가기에 집중을 하여 마법을 펼쳐내던키라누가문득 떠올린 것은 불꽃의 원천이었다.
마침 그를 공격한 벌레가 불꽃을 만들어냈으니, 그의 마력을쥐어짜내어보탠다면 훨씬 편리할 것이 분명했다.
생각을 바로 실천으로 옮겨그놈의마력을 모조리 강탈하여 마법에때려 부었다. 마법사라면 역류 현상을 겪고 어쩌면 폐인까지 될 수 있는금기 급의의식이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당연히 상대는 순식간에정신줄을놓아버렸고, 그는 마지막 남은 마력까지 긁어마법진에사용하였다.
그렇게 불꽃을 조종하여마법진을완성하던 순간, 또 다른 벌레가 그를 향한 공격을 날렸다.
역시 느리게 날아오는 마력 화살을 바라보고, 그것을 쏜 건방진 놈 역시 바라보았다.
건물 내부에 경악하는 듯한 표정을 한 놈이 보였다. 아까 전부터 전투를 벌였던 놈. 그와 눈을 마주치자 순식간에 시야 밖으로 쓰러지는 모습을 확인하며마법진을완성하였다. 화살은 당연히 공중에서부터 흩트렸고.
그렇게마법진을완성하자 그의 머리에 지식이 가득 들어왔다.
정확하게소환진이라고부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제물을 바치고, 어떤존재와 소통을 할 수 있게하는마법진.
평범한 인간이라면 소통만으로도 정신을 잃으며 피틀 토하고 죽겠지만, 그는 평범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어떤 연유인지 상대가 누군지도 알고 있었다.
차토구아.
이계의신. 위대한 옛것, 이른바그레이트올드원 중 하나.은카이의수면자.
인신 공양만한다면그레이트올드원 중에서 특이하게도 너그럽게 신자들을 도와주는 존재.
그리고키라누는당연히 제물로 바칠 사람들이충분히 많았다.
그를 노리는 세 마리의벌레 새끼들. 감히 그녀와 쌍둥이를 건드리고 저택을 날려버린 쓰레기들.
반쯤은무의식 상태로,반쯤은이성을 가진애매모호한상태에서 자연스럽게 그와 계약을 맺었고, 최초의 제물로 화살을 날린 시건방진 놈을 바쳤다.
무려이계와연결되어버린마법진은끈적하고 불길한 마력을 뿜어내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울컥거리며 무언가를 쏟아내기 시작하였다.
그를 지켜주었던 슬라임과 같은 것처럼 보이는 슬라임들이 서서히기어 나오기시작하였다.
형태가 없는 자손(Formless Spawn).
차토구아를섬기는 권속들을 소환하는 데 성공한 그는 그들을 조종하려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당황스러운 마음에이계와소통을 시도하였고, 반대쪽에서마법진을연결한이계의마법사가 대답을 해주었다.
그들이 섬기는 것은차토구아뿐. 스스로 먹잇감과 제물을 찾아 바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인간을 개미처럼 하찮게 여기는 그들이라면 어떤 차이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분명 그녀와 쌍둥이도 건드릴 것이다.
그녀를 찾기 위해서 제물의 영혼만은 그가사령술에활용하기 위해 남겨두려 했는데, 그녀가 죽는다면 계획이 시작부터 어그러지는 것이었다.
그렇게 당황하고 있던 도중, 그의 내부에 있던 슬라임은 다시금키라누를구원해주었다.
무언가 다른 점이 있었을까, 튀어나온 슬라임은마법진에서튀어나오는 슬라임들을 통제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그들과 함께 통로 저편으로 사라졌다.
불안할 수도 있었지만, 슬라임은 무려 그에게의념을통해 의사를 전달해왔다.
그분을충실하게 섬기는 행동이 기특하니 마음에 들었다며 소원을 이루어주겠다고.
언어가 아닌 불분명한정신세계의감정과 이미지로 전달되었지만 문 너머의 세계에 반쯤 발을 걸친 현재의 상태에서는 그 내용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도주한 놈들과 다른 인간들의 추적을 맡긴키라누는그녀를 찾기 위한사령술에집중할 수 있었다. 아주 큰 문제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굳이 사령술을 사용해야 하는 이유가 분명하게 있었다.
온갖 사건이 일어나기 전, 그녀와 손을 붙잡았을 때 키라누는 그녀의 내부에 어떤 마나도 흐르지 않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마법사로서의 경지가 자신보다 높다는 것도.
높은 경지에 당황하며 마나를 숨긴 것일까 생각했다. 처음에는.
하지만 집중하여 탐지를 시도하자 느껴지는 것은 마나를 숨기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감각이었다.
대마법사가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마나가 존재하지 않았다. 생명을 유지하는 것에 필요한 마나까지.
두 사실은 그녀의 정체를 바로알 수밖에 없게해주었다.
리치.
살아있는 생명체라면 대부분 혐오하는 존재.
그렇지만 사람의 모습을 하고 이성과 감정을 지니며 따뜻한 손으로 그를 붙잡은 그녀가 과연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그가 그녀에게 사랑을 빠졌던 이유는 쌍둥이에게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친절하게 대하는 태도 때문이었다.
그래,키라누는그 감정을 부정할 수 없었다.그분을섬기는 것을 제외한다면 그를 차지하게 된 가장 큰 감정.
라일 새끼도 이런 감정을 느꼈던 것일까.
그녀가 리치인 것을 안 이상, 그녀의 위치를 찾아내는 것은 간단했다. 그가사령술에대한 지식이 깊었다면. 그리고 이것이 그가 가진 가장 큰 문제였다.
그러나 그는최근 들어서야마탑에입문한 마법사였고,사령술에대한 지식을 쌓기에는 시간이 너무나도 부족했다.
부족한 능력을 인지하고 있던 키라누는 영혼만 붙잡아둔 채 문 너머의 지식을 탐구하며 사령술에 대해 찾아보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이계의마법사로부터 연락이 들어왔다.
심장을 제공해준다면사령술에관한 지식을 알려주겠다고.
인신 공양을받을 수 있는 것은 신뿐만이 아니었다.이계의마법사는 마법사임과 동시에 차토구아를 섬기는 사도였고, 그와 동일하게 대가만 충분하다면 지식을 내려주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키라누의 심장이었다.
허튼소리를 하는 것 같아도 키라누는 의심을 할 수가 없었다.
상대는 그의 몸에기어 다니는문자와 잃어버린 마도서. 그것의 원천을 적어낸 마법사였기에.
게다가 신의 이름 앞에서 맹세까지 한 이상 거짓으로 그를 속이려는 것 또한 아니었다.
정말로 심장을 대가로 지식을 주려고 하였고, 분명 그 지식을 받는다면 성공은 할 수 있겠지. 성공은.
하지만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심장을 바친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으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심장을 원하는 장본인은'이계의마법사'가 사용하는'마나'와심장에 마나를 쌓게 해주는 고리들이 궁금해서 필요하다고하는데, 심장을 바치면 사람은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싶었다.
이계의 인간이 전혀 다른 신체 구조를 하고 있지 않은 이상, 심장을 뽑히면 사람은 죽었다.
당연한 의문을 표하자 살아있는 것이가능하다는얘기를역으로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그로부터 방법을 듣기전까지는.
이계라서정확한 방식은 조금 다르기는 하겠지만, 결과적으로는 마나를 이용하여 인공적인 심장을 만들어내어 유지하면 된다는 내용이었다.
심장이 하는 모든 일을 똑같이 해낼 수 있는 장기를 순수한마나로이루어내는 것이다.
반쯤물질화에 성공할수 있는 그의 경지로 이론상으로는 가능한 방법.
심장을 빼앗기면 마나를 잃는다고 설명하자마나는잃지 않고 계속 유지할 수 있게 연결을유지하게 시킨다고하였는데 도대체 어떤 마법으로 차원너머까지 간섭할수 있는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차토구아가무려 신뢰한다는인간. 아마 압도적인 능력을 지닌 자겠지.
전달된 지식을 암기하고, 이론상으로 완성해본다. 몇 번이나 반복하여 시행하고, 허공에 실체화를 시도해본다.
성공한 마법을 유심히 살펴본다.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에서 홀로 뛰고 있는 마력으로 이루어진 검은 심장.
그가 소환한 검은 안개처럼 실체를 가지고 있는 심장은 분명 뛰고 있었다.
이론을 증명한 이상, 남은 것은 실전뿐이다. 허공의 심장을 지우고 집중력을 가다듬는다.
쿵.쿵.쿵.쿵.
심장이 뛰는 주기를 외우고.
쿵.
심장이 뛴 순간, 그는 심장을 제물로 바쳤다. 찰나의 순간 마나가 사라지며 압도적인 탈력감을느꼈지만, 곧바로충만하게 차오르는 마력을 느끼며 없어진 자리를마나로메웠다.
쿵.
그렇게 다음 심장 박동이 뛰는 순간에 맞추어 마력으로 이루어진 심장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실패하였다면 심장을 잃은 채 죽음을 맞이했겠지.
하지만 모든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마력의 심장을 유지하는 것에는 압도적인 집중력이 필요하였다.
사람의 심장이 작동하는 구조를 아는가?
그 형태는 물론이고 연결된 혈관과고정하는작업부터 시작하여 탄성이라던가 압력을 견디는 힘이라던가 온갖 것들을 계산하여마나로이루어야 했다.
그뿐만일까? 심장이 가진 핵심적인 기능인 피를 순환시키는 행위 또한 그가 의식적으로 행해야 했다.
온몸으로피를뻗어 나가게하기 위한 펌프질에 들어가는 힘 또한매 박동마다계산해야 하였고.
없어진 것은 심장인데, 오히려 뇌가 타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온 정신을 심장을 유지하는 것에신경을 써야했다.
이계의지식? 그런 것을 받을여유 같은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넓은 광장은 오로지키라누의정신과 인공적인 심장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을까.
키라누는서서히 계산이 익숙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집중의 끈을 놓을 수는 없었지만. 그저 조금편해졌을뿐이지 결국 온 신경은 심장에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쩌면 평생 이럴 수도 있겠지. 무언가 새로운 지식을 얻거나 무의식적으로 계산을 돌릴 수 있는 경지까지 발전하지 않는 이상, 언제나 심장에 신경을 써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문득 사랑을 위해서 심장을 바친다는 말이 떠올라 웃음을 내뱉었다.
웃자마자 몸이 떨리고 호흡이 가빠지는 등 몸의 상태가 변했기에 기겁하며계산식을수정하게됐지만.
뭐, 실제로 심장을 바친 셈이 되었기에옛말은 틀린 적이 없다는 생각을 하며 최대한계산식에집중하던 도중 이변이 발생했다.
통로 저편으로부터 실루엣 두 개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피에물들은검붉은 제복. 익숙한 얼굴.
그를 노렸던 벌레들이 돌아왔다. 그것도 최악의 순간에.
분명 그의 몸 내부에 있던슬라임에게그들을 맡겼을 텐데, 멀리서 보이는 두 인영은 분명 도주하듯 떠난 두 명의 요원이 맞았다.
키라누는이계의마법사에게 연락을 넣어보려 시도하였지만, 심장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통신 마법까지 사용하는 것은 도저히 이루어낼 수가 없었다.
현재 그가 할 수 있는 행동조차 제약이 심하였다.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못하였고, 고개를 까딱거리고 대화를 시도할 수 있는 정도.
운명의 신을 저주하며 그는 위대하신 분을 향한 마지막 기도를 올렸다.
죄송합니다. 감정에 휩싸여 방심하고 말았습니다, 위대하신 분이시여.실망하게 해죄송합니다….
사랑이 사람을 망친다고들 하던데, 그가 그 말의 장본인이 될 줄은 꿈에도 그리지 못한 것이었다.
키라누와 사랑이라니. 드래곤과 슬라임이나 다름 없는 단어의 격차.
한순간의잘못된 선택으로 모든 것을 잃게 된 신세.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 하다둘 다놓치게되었음에도키라누는절망하지 않았다.
절망에 빠지기에는 이미 늦었다. 냉철한 이성으로 합리적인 판단을 내린다. 이미 지근방까지 온 상대는 자신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심장을 유지하며 그들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 움직이기도 힘든 상태에서 마법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심장을 포기한다면 어떨까?
갈 때 가더라도 둘을 데리고 가는 정도는 충분히 해낼 수 있다.
결론을 내린 키라누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어차피 이계의 신에바칠 제물들이 제발로 걸어온 것이다. 거기에 내가 포함되면 어떤가. 어쩌면 본인을 제물로 바치고 그 대가를 통해 마지막으로그분을위한 부탁을 남길 수도 있으니괜찮은 최후라고 할 수도 있겠지.
아쉬운 점이라면 그녀나 쌍둥이를 보지 못하게 된다는것일까…. 슬라임이의도를 알았으니 해결해주겠지. 이 둘을 놓쳐서 죽게 생겼으니 미안해서라도 더욱 노력할 것이고.
라일놈도한 번쯤꼬라지를봤으면 좋겠는데. 아니다, 죽을 때꼬추새끼얼굴 봐서 뭐하냐.이쁜여자라면 모를까.
조금 전이라면 분명 현재 상황에 긴장하여 심장이 거칠게 뛰었겠지만, 그가 유지하고 있는 마력의 심장은 처음 정해진 박자대로 규칙적으로 뛰고 있었다.
어느덧 더욱 가까워진 두 요원의 모습을 쳐다본다.
기쁜 듯이 미소를 짓고 있는 피에 젖은 요원. 두려움에 떨고 있는 다른요원…?
한 명의 표정이 이상하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복수심에 기뻐하는 새끼와 무서워하는 새끼. 두려워하는 표정을 지은 새끼는 마법의 제어권을 빼앗겼던 새끼니그럴 만하지.
마지막이 다가오자트랜스 상태가풀리며 서서히 냉철한 이성이 감각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계산력이 줄어들고, 그에 따라 심장이 조금씩 느리게 뛰기 시작하더니 이내 불안정한 모습으로 마지막 호흡들을 내뱉는다.
어떤 마법이 가장 어울릴까. 그래, 이두 놈의동료도 마지막에 자폭했었지. 그게 좋겠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한 의식 가운데 알파2였나 미하일이었나 하는 놈을 놀리던 기억이 떠오른다. 놀려먹던 새끼랑 같은 꼴이 될 줄이야.
심장을 유지하는 마법과 더불어 의식의 저편, 아주 미세한 부분으로 천천히 마법술식을병행하여 계산한다. 점점 다가오는 요원들의 모습에 몸이 서서히 긴장감에 굳어가기 시작한다. 긴장감 때문인지 피가 부족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집중에 집중을 거듭하며 다른 모든 감각을 지워낸다.
시각.청각.촉각.후각.미각.
심장. 뛴다. 규칙적. 박동. 자폭. 계산. 준비. 완료.
계산을 끝낸 순간, 눈을 뜨고 상대의 위치를 확인한다. 심장을 유지하는 마력과 집중력을 포기하고 모조리 자폭 마법에 쏟아붓는다.
그래, 함께 가자. 마지막은 폭발로장식하는 거다. 위대하신 분을 위하여.
각오를 다지고 마법을 펼치려는 순간, 뇌리에의념이울리며 그의 정신을 장악해간다.
`미친놈. 하지만 마음에들어.`
어느새 코앞에까지 다가온 피투성이 요원의 모습이 보이고.
그 형태가 무너지기 시작하며 검게 물드는 것을 보며.
어느새 끈적한 액체처럼 변한 신체가 그의 시야를 완전히 덮는 것을 확인하며키라누는의식을 잃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