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했더니 촉수괴물-28화 (28/74)

〈 28화 〉 6. 새로운 만남 (4)

* * *

27.

넓은 흰색 방에 있는 두 존재.

검은 신사의 모습을 한 사마귀괴물과 촉수괴물의 모습을 한 인간.

겉과 속이 다른 두 인물은의외로즐거운 시간을 보내고있었다.

"호오. 점액이 종류가 다양하군요? 점성부터 담아내는기운까지 조절할 수 있다니. 놀랍군요."

"이런특성을 지닌식물을 이렇게 통제할 생각을 하다니, 놀랍군."

칭찬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대화를 나누는 그들은 오랜 친구의 모임처럼 보였다.

"그래서, 점액을 어떻게 가져갈 생각인가?"

점액은 언제든지 뿜어낼 수 있다. 양이나용도도 통제할 수 있고. 다만, 연구하려면 꽤 많은 양이필요할 텐데, 어떻게회수해갈지가궁금하다.

"사실 점액을 이렇게 다루실 수 있을 줄 몰랐습니다. 바닥에 흐르고 있어서 어쩌면통제를 못 하는것일 수도있다는 생각 또한했지요.실례일까 봐물어보지는 못했지만."

많은 차원을 돌아보았으니, 분비물을 질질 흘리고 다니는생물로착각했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의 관점을 바꿔보니 조금쪽팔리기도하다.

사람으로 치면아래….

생각하지 말자.

"조금 까다로운 상황이 되었네요. 이렇게 기운이나 농도까지 변형시키실 수 있다면, 성질도 바꿀 수 있다는 것인데. 역시, 저희 차원으로 넘어오시는 것은 무리겠지요?"

사실, 대화를나누다 보니조금 혹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거지 같은시설에서 나올 수도 있고,개 같은 년이없는 차원이기도 하고. 자유를 통제당하지 않는 것도 크고. 다만.

"역시, 레이나가 같이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닌 이상 갈 수는 없을 것 같네."

"아쉽군요.레이나 님이초월자의 반열에 오르시면 가능하시겠지만, 아무래도 근시일 내로는 불가능하겠지요."

그와 이야기하며 알게 된 내용.

수없이 많은 차원이 존재하는데, 그 차원들이 지닌 `격` 이란 것이 존재한다.

고차원에서 저차원으로내려가기는 쉽지만, 반대로 저차원에서 고차원으로 넘어가는 것은 매우 힘들다는 점.

그저 `벽`을 넘어가는 행위만으로도 힘들고,그곳에서전과같이 생활하는 수준을 유지하는 경우는 불가능할 정도.

다만, 초월자가 되어서 기존 차원을 뛰어넘는 격을 갖춘다면 가능하다고 하였는데.

들어보면 사실상 불가능한 얘기나 마찬가지였다.

뭐라 할까.

지구를 기준으로 하면, 우리가 책을 읽거나 게임을 한다면 그 내부의 세계관이 존재한다.

그 세계관의 인물들이 우리 차원보다 하위차원이고, 우리는 그들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존재다.

캐릭터의 외형을 바꾸면, 생김새가 바뀐다.스탯을찍으면, 강해진다. 삭제하면, 죽는다.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그런데도완벽한 신은 아니다. 게임에는 게임만의 규칙이 있고, 우리는 그 규칙을 벗어나지 못한다.

한 게임의 캐릭터를 다른 게임으로 옮길 수도 없고, 하드코어모드가싫다고부활 포인트를설정할 수도 없다.

물론, 예외도 있다.

책을 쓴 작가가 다른 작가와콜라보를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설정을바꾼다든가.

서버를해킹하여 조작한다거나.

그러니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이다.

게임 속의 캐릭터가 삭제를 거부한다면 경악을 할만한 버그다.

컴퓨터의 회로를 녹여버려고장 낸다면놀라운 사건이다.

자신이 살아있는 존재라며 우리와 이성적인 대화를 나눈다면 세계를 경악시킬 뉴스다.

생명을창조했다니, 가상의인격에인권이 있나 등등 전 세계에서 다루는 뜨거운 감자가 되겠지.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캐릭터가 화면 밖으로 튀어나와 우리처럼, 우리와 동등하게 생활하는 것과는 말 그대로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새삼, 이런 쉬운 비유를 해준데일에게감탄한다. 그는 내가 게임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것에 감탄했지만.

아무래도, 이 세계에서 게임은 일반적인 오락거리가 아닌 것 같다. 시설에서는 즐길 수 있다던데,이세계의게임은 어떨지 궁금해진다.

데일이온 차원,리스티나는지금의 내가 있고, 레이나가살고 있는`크니아`보다 몇 단계가 높은 차원이다.

벽을 한 개 넘는것만으로도기적적인 일인데, 그것을 거듭해야 하니 나로서는포기할 수밖에 없는것이다.

물론, 게임은 그저 비유이기 때문에, 실제로 더 상위의 격을 지닌 존재들과 살아가고, 다른 고차원에서 넘어온 것들을 통제하는 시설의 능력을 본다면 불가능한 일인 것만은 아니다.

언젠가 가능해진다면 그녀를 데리고 그의 차원에 여행처럼 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의 본모습도 한번 정도는보고 싶기도 하고.

솔직히, 내 모습도 필터를 거쳐서 보고있는 처지니나도 그에게 외모적인 면에서 할 말은 없다.

고차원의 존재 또한 낮은 차원으로 넘어가면여러 가지제약과 문제들이생기는데…. 그건다음 기회에. 허공에서 기괴한 플라스크를 꺼내는 것을 보니, 슬슬 일할 시간인 것 같다.

"다른 의뢰를 처리하는 겸에 온 것이라 남은 보관 용기가 이플라스크밖에 없습니다. 내부에 다른 차원을 생성하여 물질을 온전하게유지해주는기능을 지니고 있죠. 시설의 도움을 받는다면 얘기가달라지겠지만…. 굳이촉수 씨가탐탁지않게 여기는 곳의 도움을 받고 싶지는 않습니다."

역시 착한 녀석이다. 친근감이 느껴지는 성격이고. 온라인이 아닌, 오프라인에서 이런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에 새삼 달라진 세상을 느낀다.

아니,그때도노력했더라면 이런 관계를 맺을 수 있었겠지.

그래도 발전한 나의 소통능력에 뿌듯함을 느낀다.

꽤 즐거운 기분이 되었다. 이런 기분이 된 김에 무언가 해주고 싶은데. 뭐가 있을까.

"그런 말을 해주니 기분이 좋군. 플라스크에는 점액이 얼마나 들어가지?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닐 것 같지만."

"20배 정도는들어갈 겁니다. 더 넣을 수도 있지만, 내용물이 영향받을 수도있어서…. 18~19배 정도의 양을 넣는 것이 안전할 것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역시 연구자인가. 나였다면 아쉬워서 조금이라도 더 넣어가려했을 텐데. 절제심이 뛰어나네.

그래, 이게 좋겠어.

"데일, 내 제안을 들어보겠나?"

"어떤 것이죠?"

오, 이름을 불렀는데 자연스럽게 넘어갔네. 그 정도 호감은있는 건가. 아마 매우 반길만한 제안이될 거야.

"점액을 다양하게 변형시킬 수도 있는데, 역시 한 종류의샘플만으로는부족하지 않는가? 특히 연구용이라면 양도 부족할 수도 있고."

"그렇습니다. 점액의 농도라던가 담겨있는 기운, 또촉수 씨께서점액에 대하여 모르는 부분이 나올 수도 있고요."

플라스크에 점액을 흘려보내며 운을 띄워본다. 역시나 아쉬워하는 모습이 보인다.그럼 그럼. 연구자들이 얼마나샘플을좋아하는데.

매드사이언티스트라는단어가 괜히 생긴 것이 아니다.

시간과 예산만 충분하다면, 공돌이들은 어떤 일이든 해낼 수 있지.

근데 농부도 공돌이인가? 아니지, 농부라고소개했지만, 사실상식물학자라고 할 수 있겠지. 식물학의 권위자.

"바로그 걸세. 연구를 통해서 내가 모르는 부분이 나온다면, 나 또한 그것으로 얻을 수 있는 지식이 있을 터. 그러니 서로 상부상조할 수 있지."

"대충 어떤 제안을 하실지 예상이 갑니다만?"

씨익미소를 지으며가득 찬플라스크를 받는 데일. 자리에서 일어나며 허공으로 던지자 플라스크가 사라진다.

저거도 신기한 능력이네.

"거래가 한 번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조항은 없었지. 앞으로도 이런 관계를 유지해나가면 좋을 것 같다만."

촉수를 그의 손 앞으로뻗어 가며말한다.

데일은환한 미소를 지으며 촉수를 잡고 악수를 받는다.

"물론이죠. 다만, 제가 받는 것이 더많아 보이니양심상 거래에대가를추가해야겠군요. 어떤 것을 바라시지요?"

음. 매우 고민이 된다. 솔직히 바라는 것은 많다.

그의 힘과 자격을 이용한다면 이 시설에서 나가는 것도 가능해질 것이고, 이 세계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데일이쌓아온 용병으로서의 명성과 신뢰는 정말 어마어마한 것들이었다. 살짝만 들었던 그의삶에 관한 이야기가더 궁금하기도 하다.

하지만 역시가장 큰 것은 정보겠지.

정보.

내가 살아오던 시대는 정보의 가치가 가장 중요한 세상으로 발전해나가던 도중이었다.

정보가 곧 돈이고, 돈이 곧 힘이며 권력.

기업들은 한 줄의 정보를 구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붓고, 사람을 고용하며, 다른 기업을 견제한다.

이곳에넘어온 나 또한 정보가 최우선적인 사항이다.

힘은어느 정도있었다. 타고난 부분도, 단련한 부분도 있다. 하지만 지금상태로 정보를 얻을 방법은전무하다.

데일을통해서라면 분명차고 넘치는양의 정보를 얻을 수 있겠지.

그런데도선뜻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이성은 어서 말하라고 재촉하지만, 감성적인 부분에서 막아낸다.

이곳에와서 처음으로 대등한 관계로 대화를 나누었다.

내가 더 높지도, 낮지도 않은 그런 평등한 관계. 나를 존중해주며 이야기를 하였고, 나 또한 의심을 넘어 그를 존중해주었다.

거래를 나눈다는 합리적인 이유로 시작하였지만, 잠깐이나마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었을 때는 즐거운 감정을 느꼈다.

그래, 거래만으로 끝나고 싶지 않다.

친구…. 가될 수 있다면 좋겠지. 그가 어떻게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가려는그때.

몸 내부로부터 강렬한 욕망이 끓어오른다.

지식. 모르는 지식을 수집해야 해. 알아야만 해.

모든 지식을 알고있어야 한다. 새로운 지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저 지식도 내가 아는 것. 그러나 잊은것.

아는것과모르는것.

차원을넘으며연구한식물들.

겨우100종류의지식으로는터무니없이모자르다지식을탐구해라지식을추구해라.

정보와지식은모두나의것나로부터나와나에게로돌아오는.

차원을넘나드는그의가치는하찮은미물이전부가아니니.

머리를부스고두개골을갈라뇌를꺼내어탐식하라

피와뇌수가곧지식의살점이되리라

들린다들려온다저문을넘어오만한자들의죽음이들려온다

갈구하는자들의욕망이들리는구나

Y`ai`ng`ngah,Yog­Sothothh`ee­l`gebf`aithrodoguaaah.

...

<일어나!/>

...

크으으윽. 순간적으로 강력한 무언가가 내부로부터 솟아 나를 붙잡았다.

간신히, 정말 간신히 떨쳐내는 것에 성공하였다.

품속의로자리오가타오르듯이 뜨겁다.

아,개 같은년. 바라지도 않은 도움을 또 주는구나. 기분이 정말 더럽다. 고양된 기분이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저 어두운 심해 밑바닥으로.

후.

정신을 차리고 보니,데일은사라져 있었다. 또 폭주한 건가. 기억을 돌이켜보니 다행히도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정보. 지식. 차원을 넘어다닌 너의 경험이 필요하다. 그 대가로 점액을 제공하도록 하지."

감정도, 억양도 존재하지 않는기계 같은목소리.데일은의아해하며 눈썹을 잠시 세우지만, 그 외로는 다른 변화 없이 대답한다.

"아주 좋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정보를 부탁하겠다.시ㅅ...세계수와그에 대해 질문을 하도록하지."

분명, 시설에관해 물어보려고한 것을 내 의지로 세계수로 바꾸었다.

지금 저 말을하는것은 나일까, 나의내재하여있는광기일까.

나는 왜세계수에대해 알고 있었을까.

소설과게임 등으로접한세계수.

내가 보았던 나무.

엘프와 나무. 그래서세계수.

논리적인 비약이 너무 심하다. 어째서 나는, 그 나무를 보자마자세계수인것을 알고 있었을까.

지금 저 질문을 하는 나는 레이나를 위해서 질문을 하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일까.

대화는엘프 들이기원이 되는 차원의 잔해, 그리고 그 차원을 다스리던 거대한 나무에 대한 정보로 이어졌다.

"세계수가 그 나무의 이름인가요? 당신은 그것을 어떻게 알게됐지요?"

"모른다.레이나는어머니 나무라고 표현하였다. 그 나무로부터엘프 들이태어났다고 하는군."

"신기하군요. 식물에서 동물이나온 다라. 아니면 육신을 가진 신격이었을 수도 있겠네요.의지를 갖춘고등생물이거나. 흥미롭군요."

"그곳은침략으로 인해멸망했다고한다. 너의 차원과동일한적에 의해서."

"동일하다는것을 당신이 어떻게 아시나요?"

"그녀 역시 너처럼 나와 같은 기운이 느껴졌다고 하는군. 형태의 묘사 또한 비슷했다."

"그렇군요."

주거니 받거니 이어지는 대화. 대화는데일이세계수라는식물과 그것이 거주하는 차원에 대해서탐소문해보겠다는이야기로 마무리되었다.

자리에 일어선데일은어느새 손에 쥔 중절모를 쥐며 우아하게 인사하였고, 이내 눈이 가릴 정도로 깊게 내려쓰며 뒤돌아 나가기 시작하였다.

이내 차원의 벽에다다랐을때에 멈칫하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하지만 즐겁다는 듯이 말하였다.

"다음에 또 연락을 드리도록 하죠.그때는촉수 씨의이야기도 해주세요."

아.

저것은 분명.

`나`를 향해 건넨인사임이 분명하다.

가라앉은 배가 떠오르는 것을 느끼며, 잔잔한 기쁨을 느꼈다.

자 그럼, 탐구의 시간이다.

***

내 몸은 분명, 내 것이 아니다. 나는 이정체를 모를촉수 괴물의몸에 이른바 빙의라는 것을 하였고, 지금까지 생각해왔던것처럼전생한 것이 아니다.

이 몸에는 분명 의지가 존재한다.

방금 전에깨달은, 가장 큰 의지는 바로 지식에 대한 욕구이다.

아니, 정확히는 잃어버린 것을 복구하려는 의지라고 할까.완정성의추구?

`문`이라는 심상과도 무언가 연관이 있다. 문을열면 안 된다고본능적으로 느끼는 것은 원래의 존재가 그곳에봉인되어서 일까?

문이 열리면 내가 사라지고 그것이 의식을 차지하는 것일까?

분명 문은 움직였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 의지로 이루어진 것.

리리스년을상대하기 위해서 정신을 잃고 폭주했을 때에는 그저 그 문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뭐지. 알 수 없다. 생각할수록 더욱 깊숙한 미로로 빠져드는 기분이다.

다이달로스가 만든 크레타의 미궁에 빠지면 이런 느낌일까. 길을헤매며돌아다니는 나에게 실타래는 없다.

아니, 실타래가 존재하기는 한다.

아리아드네가 아닌, 그 미궁이 생기게 된 원인을 제공한 빌어먹을 여왕이라는 년이라는 것이 문제지만.

그렇다면미노타우르스는무엇을 의미할까.

나의 광기. 나의 공포. 나의 육신.

빌어먹을.

콰지직!철퍽!

답답한 마음에 촉수로 바닥을 내리찍는다.흩날리는물방울에 내 모습이비쳐 보인다. 꿈틀거리는 검은 촉수들. 정 중앙의 밝게 빛나는, 어느새 완전한 모습을 이룬 구체두 개.

물방울에 비쳐산산조각이 난, 그러면서 완전한 나의 모습을 지켜본다.

내가 이 몸을 가지게 된 목적이 뭘까. 잠들어 있는 의식은 무엇을 원하는가.

레이나와접촉하며 떠올린 세계수의 지식.

나에게는 공상의 산물이다. 기억 속에세계수라는나무의 생김새에 대한 정보는 없다.

하지만 그폼멜의세계수를본 순간,세계수라고알 수 있었다. 그냥 알았다.

지금도 그렇다.

나는 검은 방을 걸친 뒤로부터 모든 기억을 잊을 수 없었다. 떠올리려고 하면 생각해낼 수 있다. 하지만그곳에분명,세계수는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떠올릴 수 없던 것이 있다.

내 이름.

나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

지금껏 나를 부르는 호칭은 전부 간접적인 호칭이다.직접적으로나의 이름을 부른 자는 단한 명도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무언가 이름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것을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알 수 없다. 떠올리지 못한다. 기억에 공백이 있는 것이 아닌, 기억을 삭제하고 앞뒤를 자연스럽게 이어붙인 듯한 것이다.

어떻게, 왜.

기억을 되풀이한다.썩어가고, 지쳐가던그 방. 보았던 컴퓨터의 글. 편의점.

컴퓨터.

나는 분명, 그 운명의 날에 실없는 글을 보았다.

흰 바탕에 쓰여있던 검은 글씨.

`당신의 인생을 바꾸어 보고 싶습니까?`

무언가에 홀린 듯이 클릭하였지.

이상한 사이트로 넘어가서 설문도 하고.

마지막에사인까지하다가 불법 사기 사이트에 당했다 싶어서 창을 끄고 나갔지.

왜이것을기억하지 못했을까.

보이스피싱문자를 실수로 클릭한 것처럼, 이미 접속한 순간 늦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허겁지겁 밖으로 나섰지.

충전한 지 오래인 스마트폰은 꺼져있었고. 계좌를 확인할 방법이란.

가장 가까운 인출기가 있는 편의점으로.

달리고 달려, 건너편의 붉은 머리를 보고.

트럭에.

그래, 또 다른 기억의 미싱 링크.

비현실적인 미모의 붉은 머리의 여자.

얼굴을 보지 않았지만, 보자마자 미녀라고 생각하였다.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고, 얼굴이 궁금해지고.파란불에길을 건너고. 트럭에.

나는, 왜 트럭을못 봤지?

분명 길을 건너기 전, 양옆을 확인하고 건넜다. 교통사고를 당한 뒤로부터 언제나 강박증처럼 양옆을 확인한다.

그런데 왜 확인하지 못했지.

기억 속의 오차를 발견했다. 잘라내고 이어붙인 흔적을 찾았다. 아무리 자연스럽게 편집하더라도, 미세한 차이는 생긴다.

천천히 기억을 돌려 살펴본다.

빨간 불. 계좌확인을 위한 급한 마음. 건너편. 붉은 머리의 미녀.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공포. 압도적인 공포.

순간적으로 치솟는 어마어마한 공포감을 억누른다. 그래. 예전이었다면 공포에 먹혔을 것이다. 비틀린 차원의 건너편을 마주하며 문을 보기 전에는.

갑작스레 솟아오른 공포에, 빨간 불인지 초록 불인지 인식하지도 못한 체. 주변도 바라보지 못하고. 달려오던 트럭에.

그 빨간 머리가 원인이구나.

찾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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