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했더니 촉수괴물-26화 (26/74)

〈 26화 〉 6. 새로운 만남 (2)

* * *

25.

혼란스러운 마음을읽었는지, 눈물을 닦아낸 그녀가 촉수 끝자락에걸터앉는다.

"저는, 다른 세계에서 태어났어요."

그녀가 조용히 이야기를 시작한다. 놀란 감정을 누르고,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한다.

"쓰...동포들과함께 살던 그곳은,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울창한 숲과 뛰어노는 동물들. 모든 계절 꽃이 만개하였고,저희는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대자연과 벗으로 살아갔죠."

"그리고그곳에는, 어머니께서 저희를 지켜주시고 돌봐주셨죠."

과거의 이야기를 꺼내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사무치는 그리움과 애정이 담겨 있었다.

세계수에대한 이야기겠지.

이어지는 그녀의 이야기는 마치 동화책에서나 나올 듯한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평화로운 세계. 번영하는 문화. 신과 인간이 더불어 살아가는 유토피아.

다음에 올 이야기가 예상이 간다.

영원한 평화는 존재하지 않고, 유토피아는 무너지기 마련.

"...차원밖으로부터괴물들이 쏟아져 내려왔어요. 당신처럼 이형의 기운을 흘리며 촉수를 휘두르는."

호칭이 바뀌었네. 그리고. 내 정체에 대한 정보. 세균 같은 것이 아니었다. 더욱, 끔찍한 무언가.

멸망의 이야기를 노래하듯 흘려보내는 그녀. 어느새 눈물이 줄줄 흐르며 애써 울음소리를 참아내는 그녀를 보며 눈물을 닦고, 어깨를 토닥여주려 해다.

흠칫.

내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

그녀의 어깨를 향하여 촉수를뻗어내다. 멈추고슬그머니 내린다.

그녀는 눈치채지 못한 듯,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멸망에 치닫는 고향. 마지막이 다가오고, 세계수의 힘을 통해 그들은 차원을 넘어 지금의 세계로 도달하였다. 돌이킬 수 없는 상처와 함께.

"저는어린아이였죠.아무것도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죠. 그래서 다짐했습니다. 강해지겠다고. 고향을 되찾겠다고. 혹시라도 다시 찾아온다면,복수하겠다고."

"어른들이 미웠습니다. 멸망을 지켜보기만 했던 그들이 너무도 미웠습니다. 나처럼 약한어린아이가아닌데. 왜 아무것도 하지 않지."

이어지는 처절한 이야기.동화 같은이야기는 질척질척하게 물들어간다.

끊임없이노력하며 강해지고, 그녀의 동족을 계몽하려 시도하며 변화를 추구하였다.

변화는 없었고, 그녀는 외면받고 추방당했다.

그런데도나아갔다.

떠돌이 시절.

시설에 들어가게 된 날.

요원으로 활동하는 나날들.

릴리를알게 된 날.

그리고 마침내, 나를 만난 날.

그녀의 이야기는 처절한 실패로 점철되어있으며, 동시에 아름답고 숭고한 노력을 담고 있었다.

그렇구나.

그때.

이상하게 느낀 감정은.

"... 모든 것을 포기한 순간이었죠. 그런데. 당신이."

"..."

어떻게 이런 인생을 버텨 왔는가.

나는 고작20여 년도버티기 힘들었는데.

수천 년을단 하나의 집념으로 우직하게 노력을. 옳은 일을함에도모두에게 외면받으면서 무너지지 않고. 끊임없이 나아가며.

허망한 목표. 의미 없는 복수심.

그런데도단 한 마디의 위로 없이 버틴 그녀의 정신에 경외를 바친다.

"... 절 구원해주셨어요."

눈물 어린얼굴에 한 줄기의 미소가 맺히며 이야기의 막이 내렸다.

참혹하다.

뭐라 위로를 해야 할까. 쓰레기 같은 삶을 살아왔던 나의 인생의수백 배는되는 시간을 정신력 하나로 버텨간 그녀에게. 내가 자격은 있는 걸까.

겨우 자신의 마음이 편해지기 위한, 잘못을 덮고 배려해주었다 양심을 속이며 자위하는 내가?

목 놓아 울고 싶었다.

나는, 이토록 한심하구나. 내 인생은,보잘것없었구나.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녀가 말하였다. 나의 작은 배려심으로 인해서 구원받았다고.

그렇다면,내가 나 자신을깎아내리고 있을 수가 없다.스스로가치를폄하하며손가락질할수 없었다.

그것은 내가 아닌, 그녀를 물어뜯는 행위기 때문에.

한심한 인간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면, 그 구원을 평생토록 필요로 했던 그녀의인생 또한한심해지므로.

범죄자로부터 희망을 찾았다면, 범죄자 따위에게 희망을 찾은 것이 되기 때문에.

나의 배려심에서 상냥함을 느끼고, 평생 찾던 가치를 찾은 그녀를 위해서라도.

자책할수록, 나를 깎아내릴수록, 내가 구제할 수 없는 쓰레기라고 생각한다면.

그런나로부터가치를 발견한 그녀의 마음은 무엇이 되는가. 믿음은 어떻게 되는가.

인간말종쓰레기에게 구원을 받았다면. 그녀의 인생이.수천 년간의삶의 가치가. 얼마나 비참해지는가.

그러니 다짐한다.

털이 난양심이 창에 찔리더라도,찌질한마음에 비수가 박히더라도. 그녀가 내게 구원받았다고 말을 했다면.

나는,구원자로서의 책임을져야만 한다. 그녀가 나에게 발견한 희망을존중해야 한다.

변화해야 한다.

비록 내가 그녀가 상상한 인물이 아닐지라도, 나의 배려심이 그저자기 위로에불가했더라도.

그녀가마음속으로생각하는 대로. 그녀가 믿고 있는 영웅다운 모습으로.

얼마나 힘들어도. 아무리 괴로워도. 불가능을 이루라고 하더라도.

언제나 당당하게 그녀를 구원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아니, 그런 인물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니까 결심하자. 말하자.

"너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어. 너의 인생은 틀리지 않았어. 그 누구도폄하할수 없는, 존경하고 경외할만한 삶을,훌륭하게살아왔어."

노력 위의 노력을. 인생 위의 인생을.

그녀가 행한 모든 것을. 그 이상으로.

그녀가 믿는 모습의 신이 된다면.

"내가 그렇다고선언했으니까."

나의 말은 진실이 될 것이다.

"레이나. 나를 믿어줘.네가이루고 싶은 것을."

그녀의 희망을. 그녀의 욕망을. 그녀의 인생의 모든 것을.

"내가 이루어줄게."

책임진다.

목을 놓아 우는 그녀를 감싸고 껴안는다. 그녀의 통곡을 듣고, 눈물을 받아마시며 가슴 깊이, 심장의 중심에 담아낸다.

이날, 새로운 별이 하늘로 떠오르고.

성좌의 배치가 뒤바뀌며.

르뤼에에잠든 자가 격을 되찾았다.

그리고.

문이.

미세하고, 또 미세하게. 그 어떤 존재라도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아주미세한틈이 벌어지며.

열렸다.

멸망의 시계가 똑딱거리며 운행을 시작하였다.

***

레이나와릴리가돌아갔다.

관리자와 이야기를 마치고 곧바로 돌아오겠다는 말과 함께 그녀는 저 멀리 차원의 벽 너머로 사라졌다.

그 날.

그녀는 나의 사도가 되었다.

나의 뜻을 전하고, 나를 위한 삶을 살아가는 인생.

그리고 나는 그녀의 신이 되었다.

그녀의 인생을 책임지고, 그녀가 뜻하고자 하는 것을 이루어 주는 존재.

릴리트가이룬 신앙의 형태와는 또 다른 형태의 연결이 생겼다.

신과 사도의 관계지만, 수직적이지도 않고 수평적이지도 않은. 불완전한 신과 순수하지 않은 신앙을 바치는 사도.

서로가 서로의부족한 점을 깨닫고, 이해하며 존중해주는 관계.

절대성을 잃은 신은 보다 인간에 가까워지며,그런데도신앙을 바치는 사도 또한 인간보다 신에 가까워진다.

서로의 감정을 완전하게 공유하는 관계. 수평과 수직이 공존하는 관계는 차원을 찢고 사건의 지평선을 넘어 그 거대한 혼돈의 문을 담은 세계가 떠오른다.

존재가 흔들리며 문이 움직인 날.

나의 근원에 대하여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형의 신격.

알 수 없는 방법으로 봉인되어 있다는사실과 잠겨있는문, 그리고 그것을 열 수 있는 열쇠가 모두 나에게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직 열 수 없고, 열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도.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더욱 많은 질문이 생겼다.

물론, 그 모든 것은 다음 사실 앞에서빛이 바랜다.

레이나와의관계는 그저 신과 사도로 끝이 나지 않는다.

그녀의 고해와 나의 선언 이후.

우리는 괴로워했다.

나는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오글거리는 말을 뱉은 걸까. 촉수가 빌빌 꼬여가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큰 충격이 다가오며 나는 자괴감에 빠졌다.

그녀 또한 나를 믿는다고 외치며 신앙심을 고백했지만, 정작 그 상대가 꿈틀거리는 촉수 괴물이라는 사실과 그녀가 뱉은 말들을 떠올리며 역시 자괴감에 빠졌다.

그녀가 내게 품은 감정은 여전히 상반된다.

수천 년이라는긴시간 동안품어온 복수심은 비록 잘못되어 있더라도 이미 무시할 수 없는, 그녀의 일부분이 되어버렸다.

나 역시 그 복수심조차 감당하며, 동시에 내가 다짐한 선언과 맞지 않는 현재의 격 사이의 어긋남을 체감하였다.

온전한 신앙이 아닌, 애증을 함께 품은 그녀.

불완전한 상태로, 완벽을 선언한 나.

우습게도, 서로의 미숙함이 오히려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되었다.

그녀가 나에게 그녀의 인생을 말해주었듯, 나도 그녀에게 나에 대해서 말하였다.

지구 출신이라던가, 나의 옛인생에 관하여 얘기하지는않았다.

대신 내가 진짜 신격이 아닌, 그저 신격을 지닌 몸에서 어떻게든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과 일부 내용을 숨기고 검은 공간으로부터 지금까지의 인생, 아니촉생을공유했다.

위대한 존재가 아니라꺼릴까 봐조금 걱정했지만, 그녀는 내가 불완전한, 인간 같은 존재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노래 부르는 걸 봤다며 즐겁게 얘기하는 그녀의 말에 머리 박고죽고 싶었다.

위대한 존재도 흑역사는 무섭다.

끊임없이이야기를 나누었던 우리는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며 시간을 보냈고.

마침내.

신과인간 사이의금단의썸이시작된 것이다. 스승과제자 같은배덕감!

흐흐.

20여 년간기나긴 인생이었다.

나에게도 봄은 찾아오는구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가며 웃음이끊임없이나온다.

영웅이 되는 각오니 바뀌겠다니어디 갔느냐고?

그렇지만 커플은 영웅보다 더 높은 가치를지닌걸. 물론, 노력은 꾸준히 하고 있다. 만일 그녀와 연인이 된다면, 나의 격이 떨어진다면 그런 나와 사귀는 그녀의 격도 떨어지는 것이다.

그녀가 바라는 영웅의 모습이 되는 것과일맥상통한다는것.

이렇게 혼자 지내는 시간만이라도 잠시 가면과 긴장감을 내려두고,올곧이휴식을취할 수 있다.

촉수를 흥얼거리며 상념을 흘려보낸다.

[한심한 꼴이네요.]

닥쳐리리스.

릴리트와의연락도 순조로웠다. 레이나에 대한조처를 한그녀는 그녀가거주하던썅년의신전으로 무사히 돌아갔다고 전해주었다. 그 이후로 바쁜지 연락을 못 받았지만.

으득.

그리고 그 사실을 알린 것이 이 망할리리스년이다.

릴리트는그나마사과도 하고솔직하게 대화를 나누어서 부정적인 감정이 덜어졌지만, 이썅년은아직도 사과하지 않았다. 신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다는 범주를 떠나서 그냥 원래 성격부터가 개판이다.

[어머, 말이 너무 심하시네요. 제가 얼마나 자애로운 여신으로 유명한데요.]

그리고 내숭을 떠는 능력도어마어마하다는사실.

자신의 욕망을 숨기지 않고, 그 욕망을 추구할 때에는타인이 그사이에존재하더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욕망을 이루려 한다.

나를 범했을 때도, 그저 자신의 성욕을 채울가능성이있어서 했다고 하였다. 사과는 없었다.

[흥, 당신도 즐기셨으면서. 심지어 절 그토록 비참하게 찍어 누르셨잖아요.하아,하아. 아직도 그 순간이 떠오른답니다. 눈물을 줄줄흘리면서….]

제발 아가리 묵념해.

릴리트는그녀의 어머니를 이기지 못하였다.로자리오의사용을 허가해준 날은 조용했지만, 그 이후에릴리트와연락을 시도할 때마다 이렇게 나의 성질을 긁어댄다.

평소에도 이랬다면, 노이로제와 스트레스로 죽고 말았을 것이다.

[정말 저에 대한 평가가 박하시군요.]

말을 말자.오늘도 연락되지않는 것 같으니로자리오에공급하던신성력을해제한다.더 이상그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확실히 낫군.

문제는 저변태년이이렇게끼어듦에도불구하고 크게 거절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릴리트는분명 설득을 하였고,썅년이받아들였다고 말해주었다.

문제는, 그썅년이조건을 걸었다는 것이다.

내가 대화를 원하고,릴리트와의대화에 방해되지않으면 끼어들 수 있도록.

당연히 나는 이 딴 쓰레기와하하호호이야기를 나눌 이유가 없었으니 사실상 가능성이 없는 조건.

이라고 생각했지.

그녀가 말하기 전까지.

`저는 당신의 기원을 알고 있답니다.`

씨발년.

격을 이루는 일, 각성을 겪으며 보았던 것. 폭주하는 나를 제압한 것과 가장 결정적인, 문을 바라보던 나를 구해준 것.

아무리 그녀가좆같아도그 날, 내가 그 공간에 계속 있었다면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지금도 그 풍경을 떠올리면 정신이 부서질 것 같은 통증을 느낀다. 문이열린 날을제외한다면 언제나 같은 현상.

덕분에 기억을 회상하는것만으로광증에 대한 내성을 쌓는 연습을 할 수 있었다. 결코, 쉬운일은 아니지만.

무엇보다도, 그 날 문에서 무언가 움직였던 기억이 있다. 중요하다고 정신에 메모를 해두었는데, 아직 그 장면까지 버틸 수가 없다.

생각해보니 거기 가게 된 것도 그 년때문이네.씨이발.

후우.

레이나가보고 싶다.

서류적으로나관계적으로나 여러 난관을헤쳐나가야 할그녀이기에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사건을 일으키지 않고 얌전히 기다리는것뿐이다.

나라는 이질적인 존재와 접촉한 것을 넘어 그 사도가 되었으니, 시설 입장에선 신경이쓰일 수밖에 없을것이다.

힘으로 누르고 싶어도 안으로는 나, 밖으로는 3대 교단의 비호를 받으니 언제나갑의 처지에 있던그들이 을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날 가둬놓은 놈들이니 통쾌하게 여긴다.그들의 상황도 이해가안가는 건아니지만, 공감은 못 한다.

오늘도 하염없이 차원의 벽을 쳐다본다.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다짐했던 목표들을 위해 다양한 연습과 수련을 하던 어느 날.

일상에 변화가 일어났다.

"당신이 그 유명한촉수 씨입니까?"

중절모를 쓴 신사한 명이나타났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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