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 6. 새로운 만남
* * *
24.
당황스럽다.
감각이 느껴지더라도 내 몸을고정하는봉인구같은 느낌인 줄 알았는데, 정말 내 몸의 일부가맞았나 보다.
커다란 구체의 오른쪽 위로 자그맣게 구체가 하나 더 생겼다. 이제 반대쪽에 하나 더 만들어내면 저작권으로 조져지겠지.
새로 솟아오른 핵을 만져보려 한다.
쑤욱.
아무 저항감 없이 촉수가 들어간다. 역시, 성질은 똑같은가.
마나와신성력이흐르며 빛이 나는 것도 똑같고, 촉수의 출납이 가능한 점도동일하다. 내부에 가둬둔리리스년의신성력을움직이자 역시 그것도 담아둘 수 있다.
신기하네.
그러면 바이러스는 아니고, 박테리아 같은 느낌인가?
대충 핵으로 칭한 것인데, 진짜 세포의 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거대한 핵과 촉수를 달고 있는 생명체가 완전히 자란다면 어떨까.
여러 가지괴악한형태가 떠오르며 몸을 부르르 떤다.
최대한 덜 괴물답게 자라야지.
분열한 핵이 맥동하며 조금씩커지는것이 느껴진다. 빨리 늘어나라고 의지를 전해도 변함없다.오토모드인가보다.
각성 이후 빛도 나고, 핵도 새로 생겼다. 외형의 변화는 충분히 느꼈으니, 이제 능력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확인해야겠다.
집중하면 주변이 보이지 않으니,레이나의상태를 다시 확인해본다.
격렬한 전투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는 아무런 영향이 가지 않은 것 같다. 그래도리리스그년이 제대로 일은했나 보네.으득. 꼴도 보기 싫다.
스읍,후우.
깊게 숨을 마시고 내뱉는 심상을 떠올린다. 이 몸을 얻은 뒤에 충동적으로 움직인 적이한두 번이아니다. 조금전까지만 해도분노가 또 차올랐고, 레이나가없어졌을 때는정신을 놓을 정도로 감정이 폭발했다.
기억을 떠올리자 가라앉으려는 분노가 다시 부상한다. 역시, 이대로는 안 되겠다. 변화하려고 다짐하였는데, 언제까지나 가벼운 마음으로 있을 수는 없지.
지금껏 육체의 능력에 너무 의지해왔다.어린애처럼응석을 부렸다. 남을돕고싶다면, 나부터 바뀌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뚜렷한 목표를 정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생각이 든다.
목표를 정하고, 구체적인 방법을 고민한다. 이후 계획에 따라 실천. 계획을세우기는 쉽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어렵다. 그게 쉽다면 세상에 다이어트 실패라는 경우가 존재하지 않겠지. 이 몸은 다이어트를 하지 않아도돼서좋다. 나중에 마음껏이세계의음식을 먹도록 하자.
그래.목표뿐만아니라 보상 또한 필요하다. 내가 해야할 일뿐만아니라 하고 싶은 일들 또한 정리해보자.
말 나온 김에 생각을 정리하자. 무엇을 하고 싶지?
방금생각한 대로이세계음식을 먹는다. 맛집 탐방.
저번에 그림을 그리며 떠올린, 작품 만들기. 이제신성력도있으니, 성가라고도 할 수있는 건가? 음악 작곡.
지구때부터하고 싶었던 것. 몇 단계뛰어넘었지만, 역시 정석적인 연애를 하고 싶다. 여자친구를 사귀고, 데이트도 하고, 정상적이며 달콤한 연애를 하고 싶다. 조금 늦은 것 같지만. 연애.
마지막은 역시 지구로 돌아가는 것. 언젠가는 돌아가서 꼭 전하지 못했던 말을, 마음을 전하고 싶다. 설령 괴물이라 배척받더라도. 도의적으로도,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꼭해야 한다.
방금 생각한네 가지의욕망을 기억에 저장해둔다. 내가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해낸다고 생각할 때,스스로의대견함을 칭찬하며 보상으로 꺼내어 쓰도록 하자.
물론, 해야 할 일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흘러간다면 억지로 거부하지는 않겠지만. 특히, 연애는 더욱.
자, 그럼 가장 중요한해야 할일을 생각해보자.
최우선 목표는 당연히 타인을 위하는 삶을 살아가기.
이기적인 삶을 버리자.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목표들이 필요하다. 성격을 바꾸고, 태도를 바꾸고, 습관을고치고….두루뭉술하네.
일단 상념을 멈춰두고 다른 것들을 생각해보자.
일신의 강함 추구. 레이나 때와화신체때에도 육체가 버텨주지 못했다면 위험했다. 즉각적인 적응 능력으로 버틴 것이지, 내가 직접 대응을 잘해서 이긴 것이 아니다.
분명, 지금 몸의스펙은어마어마하다. 육체적인 면에서도 그렇고, 정신 공격에마나와신성력까지다룰 수 있다. 숨겨져 있는 능력이 더 있을 수도 있고. 조금 전의 싸움에서 무언가를 각성했었던 기억이 있었으니, 분명하다. 조금 있다 확인해보자.
가장 핵심은 신체의 완벽한 통제. 이제수십 개의촉수를 조종할 수 있긴 하지만, 상시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감정에 몸을 맡기더라도 놀게 되는 촉수들이 존재한다. 이것을 노력해보도록 하자.
정신 공격에 대한 것도 다루기는 해야겠지. 연습 상대가 없으니스스로해야 할까.그때겪었던 광증을 버틸 수 있을까? 게임 캐릭터로 전생해서 화염 내성 키운다고 자기 몸을 지지는 사람도 있는데, 광증도 내성이 생기겠지. 이건 외부 접촉이 없을 때 하도록 하자.미친 듯이날뛸 거다.
마나와신성력은보류. 이두 개는내가 본 것을따라 하는것이 전부다. 응용해서 쓰고 싶어도, 기초지식조차 없다. 계산기로 삼각함수 버튼을 눌러서 쓸 수 있지만, 덧셈 뺄셈을 모르는상태 같은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다음 목표가 생긴다.
정보 얻기.
지금 아는 것은 레이나,릴리,화신체,릴리트,리리스. 아, 그리고 건너오면서 본정체를 모를신격. 이 6명에게 직, 간접적으로 들은 정보와 그것을 통해 유추해내거나 예상한 정보가 전부다.
나를 가둬놓은 시설,이세계에대한 정보,마나나신성력,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나의 몸에 대한 정보와 내가 이곳에 어떻게 오게됐는지에대한 정보까지.
아직 스스로 움직이지도 못하니, 다른 사람들과 접촉해서 정보를 구해야 한다.레이나와릴리,릴리트에게 질문을많이 하도록 하자.
아쉽게도 잘라낸 촉수와의 연결이 끊겼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저 멀리 내 몸이 살아있는 것은 느껴지지만, 그게 전부다. 의식을 옮긴다거나 감각을 느끼는 것은 없다. 그래도 촉수의 정확한 위치를 특정하면이곳에서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힘과 지식. 이두 개만잘갖춘다면위험을 대비하기는 충분하다.그다음은나 자신을 가꾸기.
곰곰이 생각해봐도 역시 이건 계속 살아가면서 노력해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솔직히 그냥정신줄 놓고아무렇게나 살고 싶다. 지금갖춘 능력만으로도충분하다. 그래도 그러면 안 되겠지. 내가 전생한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만약 이유가 없다면, 스스로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이 새로운 삶을 가치 있게 만들 것이다.
굳게 다짐한다.
작은 것부터, 변화를.
***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레이나가 깨어났다. 몸의 통제권을 늘리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던 도중, 그녀가 누워있는 촉수로부터 움직임이 느껴졌다.
부스스, 눈을 비비며 일어난 그녀가 멍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다.
"일어났나?"
음. 존댓말을해야 할지, 반말을해야 할지급 어색하다. 솔직히릴리트때도 꽤 감정이 격양된 상태라 반말할 수있던 거지, 여자와 제대로 대화조차 나누지 못한숙맥으로서는대화 그 자체가 어설프다.
"..."
아무런대답 없이여전히 조용히 나를 쳐다본다.으으윽. 역시,그때는정말로 술에 취해서 그렇게된 건가? 점액이미약 효과가있는 건가?리리스년때를생각해봐도 그런 것 같은데.
어쩌지.
뭐라고해야 되지? 미안하다? 죄송합니다?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아까만 해도 침착하게 사고가 되었는데, 전부 엉켜버린 느낌이다.
계속 침묵을이어나가면 안 될것같은데….사과한다면빨리해야 될것같은데….
으음.으으.
"푸흡."
갑자기 그녀의 입에서 웃음소리가새어 나온다. 왜지?
"제 감정도 혼란스럽지만,주…. 촉수님의감정도 엉망진창이네요."
아.
맞다.
감정이 읽혔었지? 아 그럼 지금 내가 고민하던 것이 다 전달이된 건가? 내 생각이읽히는 건가? 아니, 감정만그런 거라했지.정신 차려. 근데 거짓말일 수도있잖아. 다들릴 수도 있잖아.
혼란. 혼돈. 나에게 있어서 여자와의 대화는 전투보다 힘든 것이다.
"저처럼혼란스러워하시네요. 죄책감, 걱정, 두려움, 미안함. 제가 생각했었던 것과는 다르네요."
옥구슬처럼 아름다운 목소리다. 하지만 감상을 할 수가 없다. 저 말에 담겨있는 의미가 무엇일까.
다르다.
내 생각만큼 위대하지 않다는 실망감? 나를 건드리지않겠구나에대한 안도감? 뭐지, 뭘까. 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좋겠다.
읽는다. 나도, 감정을 읽는다.
그녀에게 흘러나오는 감정선에 집중한다.
압도적인 고마움. 걱정. 의문. 배신감. 슬픔. 자괴감. 기대감. 복수심.
다양하고 상반된 감정에 오히려 마음이 더 혼란스러워졌다. 말을 아끼면 반절은 간다는 데, 그냥 조용히 있어야겠다.
"..."
"제게 하실 말씀은없으신 건가요?"
으윽. 현실을 외면하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다. 돌직구는 피할 수가 없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너는 어떤 말을 듣기를 원하지?"
질렀다!
질러버렸다!!!
목소리를 깊게 깔고 얘기를 하려 하다가 육성이 아닌, 사념으로 전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신이 팔려서 말을 이상하게건냈다! 망했다, 망했어.
변하려고 하였는데, 전혀 경험하지 못한 부분은 어떻게해야 하나요? 연애 고수의 조언이 필요하다.
그래,로자리오에말을 걸자.씨발년이긴하지만 색욕의 여신이라면 조언을 줄 수있겠지. 사랑을 추구한다고 하니까.
다급하게로자리오를꺼내 들어기도한다.
씨바…. 아니,리리스샊, 아니,어쨌든지금 상황에 조언 좀 줘봐, 아니줘보십쇼. 아니면 허가 주세요.릴리트에게물어보게.
자괴감이 찾아온다. 물어볼 상대가 있지, 내가 무슨 짓을한 거지?씨발.
스읍,후우.스읍,후우.
진정하자. 바뀐다고 다짐해놓고 작심삼일도 아닌,작심 세 시간도못 지키는 것은 다른 것을 다 떠나서 자존심 문제다. 남아일언 중천금. 감정을 배제하고,논리적으로 생각하자.
"어떤말이라…. 저도모르겠네요. 왜? 왜 도와주셨죠? 왜미친 듯이범하셨죠? 왜 고향을 멸망시키셨죠? 왜 동포가 아닌, 그토록 원망스러운 복수 대상인 당신이 저를 구원하신 걸까요?"
순식간에 질문을 쏟아붓는 그녀. 질문을 듣자 새삼 깨닫는다. 나는 그녀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것이 없었구나.
릴리에게약간 들은 것을 제외한다면 약간의 감정과 육체적인 관계가 전부.
다시 한 번자괴감이 들려 하지만,꾸욱밀어 넣고그녀의 말과 감정에 집중한다.
왜도왔냐라. 처음에는 당연하게도 죄책감. 범한 것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감과 양심의 문제. 변명할 수 없는 부분. 범한 것은 그저 음습한 욕망의 발로. 먼저 공격했다니뭐니는핑계일 뿐.
두 번째에는 그녀의 호응으로 참을 수 없었지만,그것마저도 술이나미약의 효과 때문일 수도 있다.일말의 희망이있는 것은 저 말과 함께 느껴지는 감정에서 원망이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
고향의 멸망.
전혀 모르는 사실. 이 몸의 과거와관련돼있는건가? 그 부분은 내 책임이 아니지만, 전의 질문과는 달리 저 말을 하며 느껴지는 강렬한 분노와 이글거리는 복수심이 그녀가 얼마나 원망을하는지 깨달을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질문.
구원.
내가 그녀를 구원했다고? 무슨말도 안 되는소리지? 그녀의 원망을 들을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원망이라는 감정은생각지도못한 곳에서 나오고, 더욱 상상할 수도 없는 단어가 나왔다.
구원이라. 내가 그녀에게 해준 것이 있나?
편하게 자게 해준 것. 몸을 치유해준 것. 마나를 돌려준 것. 그녀가 정신을잃었을 때신성력을넣어준 것.
그런데 그것전부 다 내가저지른 잘못에 대한 속죄일 뿐이었다.
범해서 기절한 그녀를 편하게 해준 것이고, 몸을 치유한 것 역시 같은 이유다. 마나를 돌려준 것은 당연히 빼앗은 당사자가 나였고,신성력을불어넣은 것도 결국 그녀를 다시 범하는 일로 이어졌다.
그때는감정이 고양되어있어 내 행동이 정당하다고,잘하고있다고 느꼈지만이제 와서돌아보니 얼마나 쓰레기 같았는지 알 수 있다.
"글쎄…. 속죄가가장 큰이유이다 만은. 마나도빼앗고, 검과의 연결도 끊고. 너를 두 번이나 범하기도 했고."
진중하게 내뱉은 속마음. 그녀의 반응이어떨지두렵다.
아니나 다를까 굳은 얼굴로 있는 그녀. 죄책감에 없는 고개를 숙인다.
"... 속죄. 그게 전부인가요?"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질문에 조용히 대답한다.
"그렇다. 모든 시작은 나의 잘못. 사회적으로 지탄받고 용납할 수 없는 행위였지.네가나를용서해줄지 모르겠지만, 나는 애써 속죄를 하였지."
아니, 이런 말을해야 되는것이 아니다.
"아니, 이런 변명은 옳지 않다. 가장 먼저해야 할말이 있었다."
"죄송합니다."
"..."
침묵.
후우. 마음이 무겁다. 최대한 가볍게 표현하려 하지만, 결국 진실은 하나다. 나는 범죄를 저질렀다. 그것도, 성범죄.
내가 정신마저 괴물이었다면 모를까, 멀쩡한 인간의 정신을 지니고도 저지른 행위는 돌이킬 수 없다.
이세계의도덕이 어떨지언정, 지구의 기준으로서 이미아웃인 것이다.
그나마 남은 유일한 정당함이란 몸의 본능에 이끌린다는 것일까.
바닥을 내려다보는 그녀를 쳐다본다. 어깨가 조금씩 흔들린다.
그래. 차라리 분노로 응징을. 그것으로 조금이라도 마음이 풀리지 않을까.
두려움에 애써 차단하던 감정을 조심스럽게 느껴본다.
그런데.
왜.
"당신은…. 어떻게그럴 수가있죠."
역시. 나를 탓하는가. 이를 악물고 다음 말과 행동을 기다리는 그때.
그녀가 고개를 든다.
애처로운 표정을 짓는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방울방울 맺혀 흘러내리고 있었고. 느껴지는 감정은.
괴로움. 슬픔. 외로움.
그리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