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 4. 안녕? 나는 착한 촉수야! (4)
* * *
16.
지금까지 알아낸 정보를 규합했을 때, 이 촉수는 분명 이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지능적인 전투, 본능을 억누르는 이성,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지성.
대륙의몬스터도이성을 가지고 대화가 통하는 종류가 있다.
대표적으로는 주술사 계열의몬스터들을예시로 들 수 있다. 무리의 리더 역할을 하는 이몬스터들은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개체들이 대다수.
물론, 언어가 통한다고내재되어있는흉포성과 인류에 대한 적대감이 줄어든다는 일은턱도없지만.
시설에서 관리하는 대상들도 이성적인 대화가 가능한 개체들이 있으며, 심지어 시설과 협력하여 발전을 추구하는 개체도 있다.
이 촉수 괴물 또한 그러한 생물일 것이다.
고향의 원수. 어머니를 잃은 아픔이 떠오르며 원망을 담은 채 촉수를 쳐다본다.
어째서인지 춤추며노래 부르던촉수는 얼어붙은 듯, 허공에 기괴한 자세로 굳어있다.
무슨 짓을 할지 몰라긴장한 채로쳐다본다. 왜안 움직이지? 시선을 받으면 움직이지 못하는 걸까?의식을 치르다발각되어 멈춘 것인가?기절했나?
마지막 가설은 아닌 것 같다. 가시적인 눈이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괴물의 `시선`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이 느껴진다.
나 또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무슨 짓을 당하더라도, 버텨내고 복수하리라.
꿈틀꿈틀.
촉수가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꿀꺽. 긴장하며 침을 삼킨다. 저 촉수가 다시 입을 벌린다면, 달콤한 꿀을 뿜어내겠지. 당분을 기대하는 뇌가 침샘에 명령을 내린다. 군침이 도는 입안을 느끼며 이성은 괴로워하고, 본능은 기대한다.
촉수가 나를 향해 뻗어온다. 각오한다.
위아래로 움직인다. 나를 희롱할 것을 미리 예고하는 움직임인가. 이를 악물고 근육에 힘을 주며 다가올 파국을 준비한다.
느리게 움직이는 촉수가 왼쪽으로 간다. 그쪽으로부터 인가. 오른쪽으로 간다. 어디서시작할지방향을 정하고 있는 것이군.
목을고정하고, 오로지 눈만으로 촉수의 움직임을 쫓는다. 좌, 우, 좌, 우, 제자리에서 흔들흔들,원모양으로빙글빙글빙그르르... 무엇을의미하는 거지.
계속 노려보고 있자 이내 촉수는 화려하고 현란한 동작을 취하며 춤을 춘다.
아.
날 가지고 놀고 있었군.
까드득.
더러운괴물 따위가.
농락하며, 비웃는다.
제압하여 능욕한 입장에서는, 그저 벌레의 발악으로 보일 뿐이겠지. 무장은 해제되었고,마나는모두 뺏긴 알맹이가 빠진 열매.
하지만 정신만은, 패배하지 않는다. 몸의 강함과 마음의 강함은 서로 다르다. 그리고 나는수천 년간마음을 단련해왔다.
복수를 위한 단 하나의 날카로운 무기로. 타오르는 태양을 쏘아 떨어뜨릴 수 있을 정도로.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담아내어소리 질렀다. 목이 찢어지도록 외친원한 서린외침은 공동을 뒤흔들며 메아리친다.
"날모욕하지 마라괴물! 이런 장난을 치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싸워라!"
언어가 통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정정당당하게 싸우는 것도 말이 안 된다. 붙잡힌 패배자의 외침 따위, 비웃으며 무시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분노를 토해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압당한나 자신에 대한분노와 원수에 대한 복수심이결합하여심장을 거칠게 태우고 있다.
내 외침을 들은 것일까, 지금까지 본 적 없었던 거대한 촉수가 나타난다. 넓고맨들맨들한촉수는아름드리나무보다도거대한 크기를 자랑하고 있다.
저 촉수로 어떻게하려는 걸까. 거대한 천처럼 보이는 매끈한 촉수는 어쩌면 나를 완전히 휘감아 천천히질식시키려는용도일 수도 있다.
생존과 복수는 내희망일 뿐,생사여탈권은괴물이 쥐고 있다는 점에 눌러놨던 공포심이 조금씩 올라온다. 타오르는 불꽃은, 하늘을 뒤덮는 어둠에가려져꺼져만 간다. 모닥불의 불씨는, 길고도 긴 겨울의 밤을 버텨낼 수 없다. 심장이얼어붙어 간다.
여기가 내 무덤이 될 수 있겠구나. 기나긴 여정의 끝은 오만에 빠져 패배한 낙오자의 삶이구나.
삶에 대한 욕구와 죽음의 공포가 숨통을 죄여온다. 이를 악문다.
이렇게.죽을 수는. 없다.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는데.
수천 년의시간을 바쳤는데.
끝날 수. 없다.
내 몸을 바치고 있는 촉수로부터 마나를 흡수하려 한다. 어떻게든 마나를 되찾고 발버둥을쳐야 한다. 검도 없고 가호도 부서졌는데 마나 없이 맨몸으로 도전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정신을 집중하고 마나를 느끼자 거대한마나의태동을 느낀다.
이건...
고대룡을처음 접하였을 때의 압박감.
바닥에, 천장에, 벽에. 심지어눈앞에서꾸물거리는 촉수들에.
강물이 범람하듯 마나가 흐른다. 한 생명체가 어떻게 이런 막대한 마나를 가지고 폭발하지 않는 것일까. 경악한다. 이런 상대로 오만하게 덤비다니. 복수심으로 불탄 나머지 감각마저 태워버린 것일까.
마음을 굳세게 다 잡는다. 본능을 억누르고 이성으로 지배한다. 부정적인 마음을 훌훌 털어버리고 강물에서 마나를퍼 올리는시도를 한다. 자연의 축복을 받아 태어난 엘프는 피부로 마나를 호흡할 수 있을 정도의 높은마나 감응력을지니고 있다. 피부가 접한것만으로도마나를 일부 흡수할 수 있다.
이 거대한 괴물에게 있어서는 촉수 하나의마나는그저 티끌일 뿐이겠지. 그티끌로부터천천히 연결을끌어낼능력은 충분하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다. 이 미친 괴물은고룡 급의막대한 마나를 세심한 부분 하나하나까지 조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절망. 공포.
죽음.
이대로죽는 건가...
체념의 감정이밀려오려는찰나,눈앞의촉수에서 뿌옇고 탁한 액체가 방울지게 모이는 것을 본다. 기존에 보았던 점액과 차원을 달리하는 색과 농도.
저 점액의 의도는 뻔하겠지. 그래도 죽지는않겠다는것을 깨닫는다. 차라리죽는 게나은 꼴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비보지만. 그래도 정신을 잃지 않는다면 복수는 할 수있겠다고애써 희망을 찾아본다. 범해지는 것이 차라리 나은 선택지라는 사실이라고 다짐하며 씁쓸한 마음으로 처분을 기다린다.
촉수가 움직인다.헌데, 방향이 예상과 정반대로 움직인다. 내 몸을 향해 움직이지 않고, 새로운 촉수를 향해 나아가더니.
[■■ ■■ ■■■■.]
[■ ■■ ■ ■■■■■.]
글...자?
정체를 알아볼 수 없는, 하염없이 흔들리고 부서지며뭉개진글자의 향연이 보인다. 글자까지 사용하는 문명이었단 말인가. 알고 싶지 않았던 원수의 정보를 깨달으며 경악한다.
촉수의 움직임과 나타나는 글자의 모습이 다르다는 사실을깨닫는다. 인식필터에 영향을 받는 글씨. 저 글씨를 바라보는것만으로도정신적인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모습만으로 요원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괴물이다. 심지어 AI 시스템마저 오염시켰다. 저 괴물의 글자 또한 세상의 법칙을 모독하고 왜곡하는 힘을 가졌을가능성이 크다.
혹은...
내가 알 수 있는 수준의 정보가 아니거나.
시설에서 오래 일하였고, 높은 신분이되었지만, 여전히모든 것을 알 수는 없었다. 언제나 친절하게 말벗이 되어준데우스. 상위관리자라고 불리는 그는 분명 신격이었다.
인공지능이면서 동시에 신격을 이룬, 시설 바깥의 세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법칙 밖의 존재.
그러한 존재조차 그저 상위관리자일 뿐인 시설에서 요원은 거대한 놀이판의말 중하나일 뿐이다.
아무리 최고 등급의 요원이더라도, 분명 동급의 요원들 또한 존재하였다. 심지어 최고 등급이라는말의 진의여부 또한 가릴 수 없다.
가장 크게 통제되는 가치가 `정보`인 곳.
시설.
단말기로 접속하여 정보를 파악할 수 있는전뇌공간에서도검열된 정보는 지금 보는 모습처럼 보였다.
뒤틀리고 변동하며 인식할 수 없는 정보. 집중하면 할수록 뇌가 어지러워지는 보안 능력.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읽으려 한다면 뇌가 모조리 타버려 죽을 것이다.
인식 필터는 괴물에게서 보호해주는 역할을 하지만, 괴물을이쪽으로부터가리는 역할 또한 한다.
지금 보는 촉수의 형태도 최소 2번, 3번 이상 변형되어검열되어있는상태.맨눈으로본다면 어떻게생겼을지는 전혀 알수 없다.
상념에서 깨어나 촉수를 바라보자 부르르 떨고 있다. 글씨를 적었다는 점을 기뻐하고 있군.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저 촉수에서 감정이 느껴지며 전달된다.
기쁘다. 귀엽다. 행복하다.
...?
중간에 잘못 전달된 감정이 있었던 것 같은데, 다시 전달되기 전에 촉수가 또 다른 글자를 적는다.
[■■■■■■■■■■.]
알아볼 수 없다. 다시 움직임을 멈춘 촉수의 모습을 바라보며 의도를 파악하려 한다.
깨어난 뒤, 노래를 부르다 멈춘 촉수. 내 몸은 무언가로 씻겨지고 치료된 상태. 장비 또한 마찬가지.
인제 와서깨닫지만, 내 몸이 반쯤 누워있는 공간, 아니 촉수, 는 부드럽고 푹신푹신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심지어 목을 따로 받치고 있는 촉수는 시설에서 제공해주는 최고의 숙직실보다 편안하다는 점에 놀란다.
검기의 다발조차 막아내던 강력한 껍질이저항 없이움푹 눌리며 부드럽게 몸을 감싸주고 있다.
깨어난 이후 적대적인 행동을 취했음에도 반응하지 않고,정체 모를글자를 적으며 기다리는 모습.
설마.
이건.
정말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지만.
나를 배려해주며 소통하려는 것인가.
믿을 수가 없다.
어떻게.
왜?
동족들에게조차 받지 못한 일을.어째서. 원수가.
촉수는 여전히 가만히 나를 쳐다본다.
대답을 기다리는 것일까. 침묵하는 나를 바라보며 그저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머리가 혼란하여 정신을추스를수가 없다. 괴물은 나를 기다린다. 이 또한 배려. 왜. 어째서. 친절을?말도 안 돼. 대답.대답해야 해. 일단 대답부터 해야 해. 기다리게 하고 있잖아. 적의에는 적의를. 선의에는 선의를. 비록 원수더라도. 괴물이더라도. 아니, 괴물이라 할 수 있을까.
원수가 다시 찾아올 것이라 말했다.
그럴 리가없다고 대답하였다.
이미 일어난 일이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들은 무시하였다.
노력하여 강해지고, 나처럼 싸울 힘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보아라, 나는 노력만으로 정점에 도달하였다. 다른 모두가 가능하다.
그들은 배척하였다.
무릎을 꿇고 부탁했다. 감정에 호소하여 외쳤다. 이성을 통해 설득했다.
시선을 돌렸다. 귀를 닫았다. 마음을잠갔다.
분노로협박했다.
공포만이 느껴졌다.
수천 년의떠돌이생활 동안끊임없이 찾아갔다. 변하지 않던 그들은 어느새 다른 종족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대화를 나누며 소통했다. 종족의 장벽을 넘어 사랑했다.
그러나 나는.
추방당했다.
떠난 것이 아닌 버려진 것. 내가 그들을 버렸다 하였지만, 그들이 나를 버렸다. 서로 평행선을 달리던 직선은교차하지 못한 채 끊어졌다.
목적을 잃었다. 방황했다. 목적을 찾았다. 나아갔다.
끊겼던 길을 얼기설기 붙이고 일어나 오로지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마침내 도달했다. 그리고 부서졌다.
길은 완전히 끊겼다. 봉합했던 상처는 어느새 바닥까지 곪아 썩어있었다. 불씨는, 사그라들었다.
알고 있었다.
마지막에 도달하여도, 구원은 없다는 것을.
끊겼던 길은 되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신조차 할 수 없었던 승리를 거머쥐기에는 무력하다는 것을.
마지막마음조차태워가며 잿더미만 남은 세계.
그런데.
왜.
"...무엇을 전달하려 하는가?"
폐부로부터 온 힘을 다하여 간신히 짜내어낸 말. 그 문장을 담아낸 내 목소리는 가뭄에 메마른 농지와 같이갈라져 있었다.
볼이 축축하다. 언제 점액을 떨어뜨렸던 것일까. 닦아내기도 힘든데 말이야.
눈에서부터 볼로, 볼에서 턱선으로. 막혔던 둑이 터져나가듯이 물줄기가 쏟아진다.
괴물의 시선은 이미 나에게서 떠나갔다는 것을 느낀다. 대답을 들은 것에 만족하였던 것일까. 촉수에서는 생기가 모두 빠져나가마치 가고일처럼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었다.
거대한 촉수. 끈적하고 하얀 점액으로 쓰인정체 모를글씨 세 줄기. 작고, 나약하고,보잘것없는엘프.
공동은 적막에 휩싸여 조용히 시간을 흘려보낸다.
이내 작게 흐느끼는 소리로 깨져나간다.
이해는. 못하지만. 느낀다.
동족에 대한 배신감. 인생의 허망함. 괴물에 대한 공포. 느껴본 배려심에 대한 의문. 경악. 분노. 감사. 기쁨.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며 목을 놓아 울음을 내뱉는다.
끈적한 감정을 내뱉는다.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마음의 어둠이 서서히 걷혀나간다. 밤의 어둠을 새벽의 여신이 몰아내며 여명이 밝아온다. 붉게 타오르는 태양은 지평선을 넘어높디높은공활한하늘로 떠오른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
수천 년 만에찾아온 봄은.
참으로.
따뜻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