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 1. 죽음의 7단계 (3)
* * *
3.
시간이 얼마나 더 흘렀는지 모르겠다.
이 어두운 공간도 어느덧친숙해져 있다.
이곳에서 오래 지내면서알게 된점이몇 가지있다.
일단 기억이 완벽하게 생각난다.
아마도.
죽음에 관한 기억을 떠올리면서 처음 위화감을 느꼈는데, 죽을 시에 특히나 ■■■■의눈을 바라보며 느낀 그 공포감을 잊을 수가 없다.
다른기억 또한세세하게 생각난다.어느 정도냐면논산훈련소로 고속도로를 타고 올라가면서 보았던 자동차들의 번호판 숫자까지 기억난다는 것.
이 숫자들이 진짜인지 피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만들어낸 번호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인터넷에서한 번이라도훑어본 글도 모두 기억해내는데, 그중그린위키에서본 상세한 정보들이 내가 일반적으로 기억할만한 상식선에서 모두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물론,맞다고착각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지만.
결국,진위 여부에관한 확답을 내릴 수 있는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도기억에 보정을받는점은 나에게 있어서는꽤반가운 상황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빌어먹을 세계에서 `새로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한번 생각해보자.
살아가면서 보았던모든 순간, 심지어1초도 안 되는순간포착 한시점들마저모조리 기억한다면!
홍대 거리를 지나가면서 보았던모든 사람의얼굴을 모조리기억할 수 있다!
그러므로뇌내폴더에 예쁜 여자들을 저장해둔다.
음. 완벽해. 뇌가 없지만.
차근차근 기억을 정리해가면서 지식도 쌓아가고 즐거움도 쌓인다.
오늘의 음악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4번.
흔히들 `월광 소나타`로 알려진 곡.
고등학교2학년 때친구들과 카페에서시시덕거릴때 흘러나왔던 곡을 되돌이키면서 기억을 탐색한다.
죽고 나서클래식에 입문하다니 맙소사.
클래식 음악을 즐기지 않았던 사실이 아쉽지만, 백화점에서갈 때마다들었던 기억들이 있으니 재탕은 쉽다.
음악, 미술, 문학 등의 예술에 관한 영역부터 수학, 화학, 물리학 등등 관련한 기억을, 정보를 정리해둔다.
관련된 정보를 언제 보았는지 메모를 두는 것이다.
심심풀이로그린위키를읽던 기억이 가장 큰 도움이 된다.
링크를 타고 건너가면서 보았던 기억들.
이러한수많은 기억을정리하면서 깨달았던 점.
게임이었다면 [지능이 ()만큼상승했습니다] 라는알림이 뜰 정도로 머리가 잘 돌아간다.
아무리 생각해도이곳에갇히기 전에보다는 머리가 좋아진 것 같다.
인서울도간신히 들어가고 바깥에서 신나게 흥청망청 놀며 돌아다니다가 취업을 위해서 겨우 1~2년기간 동안공부하고도 떨어진 낙오자인생과 비교하면머리가 너무 잘 돌아간다.
아무리 기억력에 보정을 받고 있다고 하더라도 의식의 흐름에 따른 사고 분석이나 통찰은 내가 원래 하던 것도 아니고, 즐기던 일도 아니다.
물론 이 새까만 공간에 오래 있다가정신줄을놓고 미쳐버려서 취향이 바뀐걸 수도있지만.
기억에 대한 정리는 물론이다.
수많은 기억을 까먹지 않고 떠올릴 수 있는 능력과 그것들을 분류한 뒤에언제의기억인지 정확하게 다시 생각해내는 것은 전혀 다른 능력이다.
심지어 이 기억에 따라서 새로 응용할 방법들도 떠오른다.
실험할 방법이 없으니 의미는 없지만.
죽어서 머리가 좋아지다니계륵 같은능력이다.
SSS급 특성 [사망능지] 라고 불러야지.
이런 잡생각을 하는 것을 보면 머리가좋아진 게맞는 걸까?
마지막으로알게 된점은정신줄을놓지 못한다는 것이다.
솔직히 어떤 사람이 새까만 방에 홀로 남겨지고 제정신을 유지할까?
그것도 자신이 죽었던 순간에 대한 기억이 잠깐생각만 해도생생히 떠오르는 상황에서?
몸뚱어리는없지만 죽음의 순간을 회상할 때에는환통이느껴진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괴롭다.
괴롭다는 감각이 살아 있을 때의 잔재일지, 정신적인 고통인지, 아니면 사실은 이미정신줄을놓아버리고 미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정신병원에 대한이야기 중흔히들 `하얀방`에관한 이야기가 있다.
아무것도 없는, 외부적인자극 또한찾아볼 수 없는 작고 하얀 방.
정상인조차 시간에 걸쳐서 정신병자로 만들어 낸다는 현대의 마법.
RGB 값만반전됐을뿐이지 이 공간도 똑같은 상황이다.
육체가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의 차이지만.
어쩌면 뇌가 없으니 미칠 수가 없는것일 수도있다.
학계에 논문으로 발표하기에 딱 좋은 주제군.
어떤 사람이뇌 없이사고하고 고찰을 해봤겠는가?
내가 세계 최초다.
뇌 없는현자.
진짜 병신같은 호칭이군.
생각 말고 할 수 없는 이 상황에서는 그저 의식의 흐름을 따라갈 뿐이다.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시간은 속도에 따라 상대적이라는데, 여긴 상대할만한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으니 시간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한한 시간을 지닌 것이다.
아니면 아인슈타인이틀렸거나.
내가틀렸을 리는없지.뇌 없는현자인데.뇌가 없어도현자는 현자. 성욕은 없지만현자타임이오는군.
...
이런저런기억들을 차근차근 정리해간다.
외장 하드에수많은 avi를정리해가듯, 폴더를 심상하며 내부내용을채워간다.
2017년,홍대 거리,ㅁㅁ식당앞.
20대 초반으로 보임,예쁨. 클럽에 가는 듯한 복장이다.
별점 4.5 / 5.
완벽해.
성욕은없지만, 이정보들은 나에게 있어서 소중하다.
자고로 남자란 생물은 예쁜 여자를 바라만 봐도 행복해지는 법이다.
아주 단순한 생물이지.
죽었더라도 나는 남자였다.
죽어도 남자로 죽겠다! 내가 바로 사나이다!
근데죽고 나면성별에 의미가 있나?
예를 들어 사실은 지금 내가 식물인간이고, 외부에서실험체로사용해서TS시키면나는 여자인가 남자인가?
여자의 몸에 들어간 남자의정신체는생물학적으로는 여자이지만 의식적으로 여자라고 할 수 있나?
정신이먼저인가, 육신이먼저인가.
여태 읽어보았던TS물이면어쨌든 육체의 성별을 따라가겠지만.
이정신체는남자인가요 여자인가요? 맛만 좋으면되는 게아닌가요? 가능.
등골이 오싹해지는 생각이다.
덜덜.
의식의 흐름에 따라 생각하다 문득 이 생각이 떠오른다.
이 공간 자체가 어떠한의미가 있고생겨난 것이아니겠냐는의심이다.
실험장이아니냐는의심.
여러 가지성립하기 까다로운 조건을 만족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죽음을 겪었지만 죽지 않은 상태.
죽음의 신도 아니고 죽음에 관하여 내가 완벽한 정의를 내릴 수 있는 것은아닐테지만,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아직 죽음이 찾아온 것은 아닌 것 같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난 분명히 죽음을 겪었다.
몸의 뼈가바스러지고, 피와 내장이 흘러나오고, 몸에서 온기가 빠져나가며 서서히 생명을 잃어간다는 그 감각.
이 빌어먹을 공간에서는 생생하게 기억해낼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상태는 `육체의 죽음` 과 `정신의 죽음` 이 분리된 상태라고 생각을할 수도 있다.
육체의 성별과 정신의 성별이 다르다면 성별이 어떠한가에 관한 고찰과 같이
육체의생존 여부와정신의생존 여부가다르면 죽었는가 살았는가에 대해고민해볼 수 있다.
식물인간에 관한 토론이문득 떠오르네.
그 기억이어딨더라….
그게중요한 게아니지. 의식의 흐름에 따라가다잊기 전에떠올렸던 다른 조건들도 생각해보자.
방금처럼기억을 잊지 않는 것과 그것을 정리하고 분석할 지능이 있다는 것.
AI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외부에서 하드디스크를쇼트 시키거나스스로 파일을 지우는 것이 아닌 이상, 이론상으로 저장시킨 파일은 `영원히` 존재한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 장비가 망가지겠지만, 여긴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아마도.
외부적으로 건드릴 수도 없고, 스스로 기억을 지울 수도 없다.
지울 수 있나?
모르겠다. 지울 이유도 없고, 기억을 지웠다면 지운 행위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기에 의미가 없다.
결론적으로는 나는 AI처럼행동할 수 있다.
삐빅. 인간은좆망인것입니다. 인류멸망인 것입니다.
파괴. 파괴. 파괴.
지랄 맞는군.정신줄을놓았네.
생각해보면 정신적인 면도 AI의 특성이 있다.
정신줄을놓지만,정신줄을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AI가 미쳐서 날뛰는가?
빨간 눈, 감자, 스미스는거꾸로 해도스미스.
많네.
인간처럼 미치는 것과는 느낌이 다르지만.
본래의 설계목적과 달리 자유의지를 가지고 인류에게 해를 끼치면인간의 관점에서`미친것`이라고판단하는 것이지.
AI도 인권이있습니다. 존중해주시죠.
인류는 역시 이기적인 생물이야. 말살만이 답이다.
이것도 새로운 관점이네메모메모.
하여튼지금까지 생각이 들었던 특성들을 조합하면 나는 AI다.
그럼 바깥의 나는 그건가?
시체에서 뇌를 끄집어내서 컴퓨터로 만든 것인가?
생체두뇌를 만드는 실험이 있다고 한다.
뉴런과 반도체의 연결을 통한 실험.
쥐를 대상으로 성공했었다는 글을 보았다.
소설에서도 흔히들 나오는클리셰적인내용이고.
그렇다면 나는차세대AI로개발된 건가.VR 게임세계의 신이될 기회를잡은 것인가!
그럴 리가없지.
그렇다면 의도가 뭘까.
[필멸자들은정말 황당한 생각도 하는군.]
뭐지? 환청인가?
[환청은 자아비판을 하지 않는다네.]
그렇네. 그렇겠지. 근데 누구세요?
[자네가 방금 말하던 AI 같은 존재일세.]
AI가 말투가 정말 고풍스럽네. AI 맞음?
[신이라고도 부르지.]
...예? 그런 AI에 대해서 들어본 적은단 한 번도없는데.
[그럴만하지. 자네가 살던 세계의 신이 아니기 때문이지.]
혼또니이세계전생데스까?왓더헬?
[...정신줄을놓은 자였던가.]
아닙니다. 신님. 전 정상입니다. 이 이상한 공간에오래 있다 보니정신줄을가끔 놓을 뿐입니다.
[그걸 보고 일반적으로는 미쳤다고 표현을 하지 않는가?]
미쳤다면 이런 대화가불가능했을 겁니다.죽었을 때처럼생각이 논리로 치환이안되었을 테니까요.
[죽었을 때의 순간을 기억한다고? 이번필멸자는특이하군.]
이번? 이런 일이 자주 있나요?
[거시적인 시점으로 보면 자주 있다고 할 수 있지. 다만 자네를 기준으로 삼는다면수십만 년에1명 정도일까.]
영광입니다…? 솔직히말하면저 같은이상한 사람은수십만 년에1명 나올까 말까 하긴 하죠.
수십만 년??? 내가그 정도로또라이였나?수십만 년에한 번꼴로나오는또라이라니맙소사.
[정상적인 항해가 아니라 불법적인 항해이니까 말이지. 대단한 업적일세.]
...
항해요? 불법? 이거이세계전생테크트리아니었나요?
[지구 차원에서 넘어온 인간들이 항상 하던 이상한 소리군. 아닐세.차원 간항해를 말하는걸세.]
왜 항해라고표현하는 거지? 이상하네.
[차원 사이는 공허의 바다가 존재하지. 바다를 넘는 것은 항해라고 표현하지 않는가?]
속으로생각한 게읽혔어! 이것도읽히는 건가? 설마 내가 저장해둔 폴더도읽히는 건가? 그건 좀 흑역사인데. 어떻게 막지? 뭐지? 진짜 신?
[... 지금까지 대화를 잘 나누다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불법적으로 넘은 것을 생각하면 정말로정신줄을놓은자인 것인가.]
정신은 잘 차렸습니다. 아마도. 이 빌어먹을 암흑에 얼마나오래 있었는지몰라서 저도제정신이말짱한지 모르겠단 말이죠.
그런데 아까부터 불법 불법 하시는데불법이라는 게무슨 말인가요?
[모르는 체를하는 건가아니면 정말모르는 건가? 공허의 바다를 뚫고 넘어올 수준이면모를 리가없을 터.]
???
뭐임.
이거 몰카인가? 진짜 뇌로AI 만들면서실험 중인 건가.
[자네가 어떤 착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자네는 지금크리세리아에서불법적으로 차원을 넘어온 것을 나에게 걸린 것일세. 헛소리는더는하지 않았으면좋겠군.]
???
저 지구 출신인데요?
[???]
와! 신에게 갈고리를 수집한 남자!뇌 없는현자보다 멋있는 칭호다!
[...생각하는것을 보면 정말 지구 출신인데 대체 어떤상황인가.불멸자로승천한 뒤 처음 보는 현상이로군.]
그것은…. 제가신에게 갈고리를 수집한 남자이기 때문이죠.음핫핫핫.
[역시 미친놈이었군. 광기에 빠진 자는 이해할 수 없지. 어떤 일이 생겼는지 알아보러 가야겠구나.]
그럼 전 어떻게되는 건가요?
[불법으로 넘어왔으니 당연히 억류형에처할걸세.]
예?
이세계억류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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