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화 〉 17. 개과천성[????](5)(完)
* * *
사소한 듯 사소하지 않은 사건 뒤.
“후룩.”
세 사람을 한 자리에 불러 모은 뒤 미리 끓인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민망한 기분을 진정시키기 위해서였다.
“…….”
“흐흥~.”
“……크흠.”
그런 나를 제각기의 표정으로 응시하는 세 사람의 시선.
“후우.”
침착하자 김현수.
지금은 오나홀이니 뭐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호흡을 가다듬으며 정신을 다잡은 나는 곧이어 눈앞의 세 사람을 향해 말했다.
“세 사람 모두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그건 알겠는데……. 갑자기 웬 존댓말이야?”
“모른 척 해요, 언니. 자위기구 들키니까 쪽팔려서 괜히 무게 잡는 거잖아요.”
“아, 그, 그랬구나. 미안. 눈치가 없었네.”
“죄송합니다. 저는 아닌 거 같다고 했는데 화정 양이…….”
“그래도 밤꽃 냄새는 안 났으니까 걱정하지 마, 오빠. 평소에 세척 깨끗하게 하나 봐?”
“으음, 그 사이즈라면 씨는 것도 꽤 수고가 들겠……. 크흠, 아닙니다. 실언이었군요.”
“…….”
“잠깐! 나, 나는 왜 노려봐?! 나는 아무것도 말 안 했어!”
……확 다 죽었으면 좋겠다.
“뭐, 장난은 이쯤하고.”
그 여유롭던 분위기도 잠시.
“그래서 오빠가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어느덧 진지한 어투로 묻는 화정의 말에 다른 두 사람도 다시금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뭐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의 장래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어.”
“장래?”
“예를 들자면 결혼이라던가.”
“겨, 결호오온?!”
내 말에 화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 진심이야?”
“결혼은 말했다시피 예시야. 다들 이대로 지내는 게 좋다면 이대로 지내도 상관없어. 다만…….”
“다만?”
“결혼을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솔직하게 얘기해줬으면 해서.”
“호오.”
그 무표정의 대명사 대표님마저도 내 말에 놀랐는지 꽤나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설마 현수 씨께서 먼저 그런 말을 할 줄은.”
“물론 제가 문란하게 논 건 사실이지만─.”
“그런 의미에서 한 말이 아닙니다.”
대표님이 서둘러 말을 이어가려는 내 말을 끊었다.
“제가 정말 놀란 건 현수 씨 개인적 성향 외의 부분입니다.”
“네?”
“현수 씨는 지금 일반적인 통념에서의 이야기와는 반대되는 말을 하고 계십니다. 그 부분에서 놀랐다는 이야기입니다.”
“말을 너무 어렵게 하시는데요. 무슨 뜻인지 잘…….”
“그렇다면 조금 풀어서 설명하죠. 현수 씨는 ‘일반적인 남성’이라고 보긴 어렵습니다. 그 부분은 이해하고 계실 테죠.”
“뭐, 그렇죠.”
“특히 그 성적 가치관은 일반적인 남자들과는 극히 다른, 오히려 정반대라고 봐도 될 정도로 문란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현수 씨 같은 분이야 없진 않겠죠. 하지만 유교사상의 뿌리가 남아있는 이 나라에서 현수 씨 같은 스타일은 확실히 드문 편입니다.”
……거 그렇게 대놓고 말하면 아무리 나라도 민망한데.
뻘쭘해하는 날 보며 대표님이 크흠,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현수 씨는 평소에 동성 친구는 없으신 걸로 보이는데 제 추측이 맞나요?”
“……그럴 거면 그냥 아싸라고 하세요.”
“그런 의미로 한 말은 아닙니다만……. 실례였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대표님의 말에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 남자인 친구들은 없죠.”
정확히는 ‘원래’는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실 제로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세상의 남자들은 남 흉보고 뒷담을 하는 것에나 특화된 녀석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불편한 부분이다.
내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대표님이 설명을 이어갔다.
“네. 아마 그 때문에 현수 씨는 일반적인 남성과 여성의 통념 차이에 대해서 잘 이해하지 못하는 거겠죠.”
“아, 그러네. 확실히 오빠가 동성 친구들이랑 노는 건 못 본 거 같아. 그래서 그런 건가?”
“그렇구나. 그래서 그렇게…….”
그런 대표님의 해설에 오히려 윤화정과 주화연이 자기들 마음대로 납득하고 있었다.
이 두 녀석은 대체 뭘 이해한 거야.
“결혼 얘기가 나왔으니 말씀드리는데, 결혼에 대한 집착은 여성보다 남성이 심한 편입니다.”
“뭐, 그렇겠죠.”
그건 나도 어느 정도 생각해 두고 있던 부분이다.
졍조가 뒤바뀌었으니 당연히 결혼에 대한 입장도 남성과 여성의 입장이 다를 테지.
사실 이것도 일주일 전 화연이랑 얘기를 하면서 고민하면서 떠올린 거다.
애초에 내 인생에서 결혼이라는 선택지는 지금껏 없었으니까.
“네.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남자가 결혼을 더 서두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연애 못 하는 여자와 결혼 못 하는 남자는 어딘가 하자가 있다고.”
“저기,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오해 없으시길. 제가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라 그런 선입견이 많다는 말입니다.”
불편한 표정으로 태클을 걸려는 화연을 향해 대표님이 딱 잘라 말했다.
뭐, 확실히 선입견은 맞지.
원래 세계, 남녀 인식이 반대라는 걸 가정하고서라도 저런 말을 실제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꼰대 소리 듣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 세상이든 원래 세상이든, 분명 대표님이 말한 그런 인식이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선입견이라는 것도 다수가 만들어낸 인식 중 하나.
아무리 잘못되었다고 해도 쉽사리 무시할 수 있는 얘기는 아니다.
“아무튼 저희들 입장에서는 으음, 뭐라고 해야 할까요. 방금 전의 장래를 신경 써야 한다는 말은 꼭 저희를 신경 쓰는 듯이 말한 느낌이라……. 굉장히 묘한 느낌이었다는 겁니다. 하물며 현수 씨가 말했기에 더욱이.”
“그렇군요.”
“그러니까 평소에 이성 친구만 사귀지 말란 말이야, 이 아싸 오빠~.”
놀리는 어투로 말하는 화정의 말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 세계로 와서 아싸 취급을 받는 건 처음인 거 같네.
예전에는 자타(??)가 공인한 아싸 그 자체였는데.
왠지 모를 묘한 기분에 나는 가만히 화연에게 시선을 돌렸다.
“가, 갑자기 나는 왜 그렇게 빤히 쳐다봐.”
어리둥절한 화연을 보며 나는 처음 이 역전세계로 올 때를 떠올렸다.
소설 속 주화연의 경우 나도 그녀의 아싸 기질을 알고 있었다.
아마 그래서 처음 만남에서 그렇게 쉽사리 작업을 걸 수 있던 게 아니었을까.
사실 지금도 화연이를 볼 때는 다른 여자들과는 다르게 묘한 동질감이 느껴지니까.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은 결혼 얘기를 꺼냈을 때 무슨 생각을 한 걸까.
문득 궁금해진 내가 물었다.
“너는 어땠는데?”
“어어? 아. 아니! 말해두지만 나는 딱히 아싸라고 생각해본 적 없으니까! 지, 진짜야!”
”그런 게 아니라. 일주일 전에 결혼 얘기 나눴을 때 어땠냐고.”
“어? 아, 그 얘기구나. 아, 아하하.”
멋쩍게 웃은 화연이 더듬더듬 말문을 이어갔다.
“뭐, 대표님이 하는 말은 나도 이해가 가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남자 쪽에서 결혼 얘기를 먼저 꺼내지 않았을까 싶거든.”
“내가 아니라 다른 남자였다면 장래 얘기로 먼저 결혼 얘기를 꺼냈을 거란 얘기야?”
“그렇지 않을까? 아, 물론 우리야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니까. 으음……. 말하면서도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네, 아하하.”
“잠시만요.”
대화에 끼어든 대표님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현수 씨는 화연 양과 먼저 얘기를 한 겁니까?”
“네? 아, 네. 화연이는 결혼을 하고 싶어 하는 눈치라서.”
“과연. 그래서 저희 의견을 들을 겸 앞으로의 일들을 얘기하자고 한 거군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대표님.
허나 그 눈빛에서 묘한 불쾌감이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현수 씨 입장은 이해했습니다.”
“아, 네. 그래서 저는…….”
“현수 씨 입장을 듣기 전에 먼저 제 입장부터 밝히죠.”
매서운 눈빛으로 날 슥 본 대표님이 단도직입적으로 툭 말했다.
“저는 딱히 결혼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군요.”
“오해하기 전에 한 가지 덧붙이자면, 현수 씨와 헤어질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네? 그 말은?”
“더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요.”
피식 웃은 대표님이 날 보던 시선에서 벗어나 두 사람을 한 번씩 바라보았다.
그런 대표님을 보며 화연과 화정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대표님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 현수 씨 입장이나 저나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러니까 포기 안 한다 이건가.
내가 결혼을 하든 말든 계속 나는 볼 생각이다 이건가?
그렇다면 지금처럼 섹파 같은 느낌으로 계속 지내자는 걸까?
“후후. 재밌군요.”
두 사람을 슥 본 대표님이 날 보더니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잠깐만.’
그 순간 내 머릿속으로 불길한 느낌이 스쳐지나갔다.
‘애초에 첫날밤에도 여친한테서 뺏어간다느니 뭐니 했던 거 같은데.’
어쩌면 수민 누나도 다슬이처럼 독점해야 성이 차는 스타일인 걸까?
섹파 관계를 재정립하자는 내 생각과는 다르게, 눈앞의 수민 누나는 완전히 동떨어진 생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게 되면 꽤 골치 아플 거 같은데.’
남자에 대한 독점욕이 있던 다슬이는 결국 날 포기하는 선택을 했다.
하지만 똑같이 독점욕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 선택지는 정 반대일 수도 있다.
이거 어떻게든 여기서 풀지 않으면 나중에 아수라장 되는 거 아니야……?
“저기, 오빠.”
내가 대표님에게 태클을 걸기도 전에 다시금 끼어드는 한 소녀.
거기에는 입술이 부루퉁하게 튀어나온 화정의 모습이 보였다.
“대표님이랑 얘기하는 건 좋은데. 그래서 나는?”
“너 뭐?”
“내가 사귀자고 한 건 어떻게 되는 건데?”
“어어?”
화정의 뜬금없는 고백에 화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화정이 너 설마…….”
“응. 전에 얘기했어. 사귀자고.”
“그, 그런……!”
거 참, 성격도 급하네.
내가 천천히 설명할 생각이었는데.
“뭐, 화정이 쟤가 선수 치긴 했는데.”
충격에 빠진 화연과 무슨 생각인지 모를 대표님을 향해 나는 화제를 화정의 고백 건으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
“오늘 모이자고 한 이유 중에 그것도 포함되어 있어. 화정이 저 녀석이 사귀자고 했던 게 있어서.”
“그 바쁜 와중에 잘도 현수 씨한테 그런 얘기를 했나 보군요.”
“헤헤.”
기가 막혀 하는 대표님의 모습에 실없는 웃음을 짓는 화정.
그런 두 사람을 뒤로 한 채 나는 화연을 가만히 응시했다.
“오는 거 안 내치고 가는 거 안 붙든다지만 나도 약속한 게 있거든.”
그래, 여기서 제일 중요한 건 대표님도, 화정이도 아니다.
화연의 의사가 모든 걸 결정한다.
“화연아.”
“응? 나, 나?”
“어떻게 생각해?”
“어? 뭘?”
“결혼하고 싶다며.”
혼란에 빠진 화연을 향해 나는 숨 쉴 틈을 주지 않고 몰아치는 방법을 택했다.
“화연이 네가 원하면 결혼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어. 물론 그게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어, 어어……. 응? 자, 잠깐만! 에, 에엥?”
“지금 나한테는 네가 최우선이야.”
결혼이야 뭐, 사실 처음에는 부정적인 느낌이 더 강했다.
결혼을 한다고 해도 아마 지금 내 삶의 방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테고, 그런 만큼 이 정조가 뒤바뀐 세상에서 결혼은 꿈도 꾸지 않았었다.
하지만 화연이가 먼저 말을 꺼냈으니만큼, 나도 나름대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그 날 오랫동안 고민한 결과.
‘괜찮겠지. 오히려 화연이가 원한다면 더더욱.’
뭐…….
솔직히 딱히 나쁠 거 없다고 생각한다.
나름대로 직장도 괜찮고, 성격도 딱히 모난 것도 없고.
하물며 내 여성 편력도 이해해주는 여자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되겠는가.
그래, 화연이 정도라면 내 인생의 절반을 함께 해도 괜찮을 거라는 막연한 확신마저 든다.
아마 화연이가 나를 좋아하는 만큼, 나도 어느새 화연이에게 푹 빠진 걸지도 모르겠다.
“네가 싫다고 하면 화정이 얘기도 없던 걸로 할 거야.”
그러니 화연이 싫다고 한다면 이야기는 여기서 끝.
화정의 고백도 없던 일이 되는 거다.
“……딸꾹.”
내 말에 멍하니 날 보더니 화연이 돌연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뭐야, 내 말이 그렇게 놀랄 일인가.
“자, 잠깐만.”
숨도 못 쉬고 딸꾹질만 반복하는 화연을 대신해 화정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 그러면 오빠 입장은 어떻게 되는 건데?!”
“나는 괜찮다고 생각해.”
“엥?”
“나야 화정이 너랑 사귀고 싶지.”
“자, 무슨……. 그게 뭔데?! 그, 그러면? 언니가 오케이 하면 언니랑은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그 와중에 나랑 대표님도 으쌰으쌰 한다 이거야?”
으쌰으쌰는 또 뭔데.
“그래.”
나는 그런 화정을 향해 깔끔하게 대답했다.
그래, 이게 내 대답이다.
나 이런 놈이다.
이런 세상에서 지금까지 살아온 내 방향성을 바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신의 선택까지 받은 주인공으로 살게 됐는데, 이기적으로 살고 싶다는 데 뭐 어쩌라고.
어차피 한 번 뿐인 인생, 최대한 욕망에 충실하면서 살 생각이다.
물론 그것도 화연이 최우선이라는 전제 하에서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와, 완전 쓰레기…….”
“이제 알았냐.”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내뱉는 화정의 말에 나는 조용히 긍정했다.
아니, 그보다 애초에 이 녀석도 그거 알면서 고백한 거 아니었나.
이렇게 황당해 할 거였으면 고백을 하지 말던가.
“그, 그러면!”
입을 뻐끔뻐끔 열던 화정이 발악하듯이 소리쳤다.
“만약에 나도 결혼하고 싶다고 했으면? 그랬으면 어쩔 건데!”
“그건 플랜 B로 생각해둔 게 있어.”
“플랜 B는 또 뭔데?!”
“뭐, 이제 와서 굳이 꺼낼 필요는 없는 얘기니까 안 할란다. 애초에 너나 대표님이나 결혼 안 할 거라며?”
“으윽…….”
본인이 질러놓고 막상 내가 이렇게 뻔뻔하게 나올 줄은 몰랐던 걸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말문을 멈춘 화정이 끙끙 앓기 시작했다.
“나, 나는 별로……. 상관없어.”
그런 화정과 바톤 터치를 하듯, 이번에는 화연이 말문을 열었다.
“딱히 현수랑 사귀어도 뭐, 응. 현수가 정말 결혼까지 할 생각이라면 크게 상관없을지도.”
“에엑?!”
화연의 대답에 화정이 한층 더 경악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제가 이런 말하긴 그렇지만 언니, 진짜로 괜찮은 거예요? 결혼이에요, 결혼!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터닝포인트 중 하나라고요!”
“아, 응. 괜찮아. 나도 많이 고민하고 내린 결정이니까.”
“……진심이에요?”
“응. 그리고 뭐, 현수가 이런 녀석인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걸.”
“아니, 나야 뭐 저 오빠랑 한 번 하……. 크흠. 그냥 사귀는 것도 괜찮긴 하지만요. 하지만 언니는 결혼이라면서요. 이 막무가내인 남자랑 해도 괜찮은 거예요?”
“어떡하겠어. 그래도 좋은걸.”
“헐.”
“후후.”
황당해하는 화정과 작게 미소를 짓는 화연을 보며, 돌연 대표님이 작게 웃음을 지었다.
“뭐랄까, 화연 양과 현수 씨는……. 어떤 의미로는 천생연분일지도 모르겠네요.”
칭찬인지 비난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리는 대표님, 아니 수민 누나.
어째 아까부터 말에 불길한 느낌이 드는데.
저 사람 진짜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 거 같단 말이지.
“그러면 현수 씨는 결혼을 전제로 화연 양과 사귄다. 그리고 저희 둘과도 계속 사귄다. 이렇게 생각하면 되겠습니까?”
“네, 뭐. 그렇게 받아들여 주시면 감사할 따름이죠.”
“알겠습니다.”
그 말과 동시에 할 말이 끝났다는 듯, 대표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잠깐만.
진짜 이렇게 시원하게 납득한다고?
오히려 말을 한 나조차도 황당할 지경인데, 곁에 있던 화연과 화정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을 따름이었다.
“그럼 저희는 돌아가죠, 화정 양.”
“대, 대표님마저……. 어떻게 그렇게 태연해요?”
소매마저 붙든 채 이끌고 가려는 누나의 태도에 화정이 이제는 완전히 기운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화정을 보며 수민 누나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태연해 보이시나요?”
“네?”
“뭐, 사람 마음이라는 건 언제든 바뀌는 법이죠.”
그리 말한 대표님이 날 보거든 도발적인 미소를 지었다.
“이런 호승심은 또 오랜만이군요.”
……이거 내 추측이 맞는 거 같은데.
“호승심이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내가 조심스레 물었다.
제발 그러지 않기를 하는 바램으로.
“네. 연습생 때 데뷔로 불타오를 때 이후로 처음 겪는 기분입니다.”
강한 어조로 내뱉는 수민 누나의 말에 나도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사람…….
분명 나랑 화연이 관계마저 뺏어갈 생각이다.
아예 다른 여자를 다 내치고 자기만 바라볼 수 있는 상황으로 만들 작정인 거겠지.
서, 설마 얀데레는 아니겠지?
“한동안은 바쁠 테니 쉽진 않겠군요.”
“…….”
“하지만 일이 끝나고 나면, 그 때는 각오하고 계시길.”
그리 말한 수민 누나가 화정의 소매를 붙잡고는 현관으로 나섰다.
그 확고한 동작에 기에 눌린 걸까, 화정이 질질 끌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자, 잠깐만요. 대표니임! 이대로 가면~!”
“지금은 물러납시다, 화정 양.”
두 사람이라면 영문 모를 말이겠지만 나는 모를 수가 없었다.
이거 괜히 불똥 없애려고 하다가 더 큰 불길만 만든 거 아닌가 싶은데.
나중에 진짜 큰일 나는 거 아니겠지?
“그럼 이만.”
“자, 잠깐마안~!”
나와 화연은 그렇게 떠나가는 두 사람을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
“…….”
두 사람이 사라진 뒤, 다시금 조용해진 방 안.
어색하게 바라보는 화연을 향해 나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으음, 무슨 말부터 해야 하지.
“이거……. 일단락된 거 맞겠지?”
다행히 어색한 침묵을 먼저 깬 것은 화연 쪽이었다.
“글쎄다. 아무튼 둘 다 어느 정도 수긍한 거 같기는 한데.”
“그러면 다행이긴 한데.”
“화연이 너는 이걸로 괜찮아?”
“……괜찮아.”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화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수 네가 날 최우선으로 생각해준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리고 사실 그거만 해도 그, 뭐랄까……. 엄청 감동받았다고 해야 하나.”
“하아.”
“왜, 왜 한숨을 쉬어.”
“너는 사람이 너무 착해서 탈이야.”
“그, 그래서 불만이야?! 오히려 감사해도 못할망정!”
“누가 불만이랬냐.”
피식 웃은 나는 그대로 화연의 몸을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움찔 몸을 떤 화연이 가만히 그런 내 포옹을 받았다.
“고마워.”
“……으, 응.”
“아마 많이 부족하고 불만도 생길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믿고 따라준 만큼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할게. 이해해줘서 고마워.”
“그, 그만해. 낯간지럽게…….”
그렇게나 이해해줬는데 이 정도 멘트야 하고도 넘치지.
입으로는 싫은 척 하지만 어느덧 내 품에 안겨 있던 화연의 손길도 내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를 품에 안은 채 포근한 기분을 만끽하던 것도 잠시.
“저기, 현수야.”
슬그머니 품에서 떨어진 화연이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결혼 얘기 말인데…….”
“아, 응.”
“만약에 진짜 화정이랑 대표님도 결혼하자고 그랬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그, 플랜 B인지 뭔지 하는 거.”
“아, 그거? 별 거 아냐.”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 화연에게 나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미국에서 몇몇 주는 일부다처제도 허용이 되는 모양이더라.”
마지막으로 밝히는 소설 속 설정 중 하나.
바로 이 세계는 남성 위주의 일부다처제가 허용이 된다는 거다.
‘처음에는 별 쓸모없는 설정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말이지.’
사실 처음에는 결혼 생각마저 없었기에 굳이 생각도 안 해본 설정 중 하나였다.
거기다 지금 살고 있는 이 나라는 허용이 안 되고, 허용이 되는 다른 나라도 극히 제한적인 데다가, 이민까지 생각하면 그 절차는 까다롭기 그지없으니까.
하지만 그 정도 각오도 없이 결혼이니 뭐니 한 건 아니라는 얘기다.
뻔뻔하게 사는데 최소한 뻔뻔하게 살 수 있을 만큼 노력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판이 깔린 걸 이용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진짜로 이민이라도 할 생각으로 이것저것 알아보긴 했는데…….’
뭐, 두 사람 다 결혼 생각이 없다고 한 시점에서 노력조차 할 필요가 없어지긴 했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결국 이걸로 끝.
‘다슬이한테 이 얘기를 꺼내도 소용없겠지.’
처음에는 가장 먼저 결혼 얘기를 꺼낸 다슬이가 떠오르긴 했지만, 결국 단념했다.
애초에 다슬이의 경우에는 홀로 나를 독차지하고 싶다는 개념으로 한 말이니 만큼, 일부다처제니 뭐니 하는 건 용납할 수 없을 테니까.
“거기까지 생각했었구나…….”
내 말에 감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것도 잠시.
“그, 그러면!”
돌연 화연이 강렬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얘는 오늘따라 상태가 확확 바뀌네.
“나랑 결혼하는 걸로 받아들이면 되는 거 맞지? 진짜로?”
“뭐, 하는 건 좋은데……. 지금 당장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치. 지금 상황에서 그렇게 꼭 초를 쳐야 해?”
“아니, 그렇잖냐. 상견례라던가 혼수 문제라던가. 애초에 나 저금해둔 돈도 얼마 없다고.”
“돈은 걱정하지 마. 현수 너는 몸만 오면 돼.”
“음……. 그건 고마운 말이긴 한데. 아니, 그래도 같이 준비해야지.”
“후후, 이럴 때는 또 이상하게 양심적이야. 그래서? 우리 애는 몇 명으로 할까?”
방금 전까지 섹파들 사이에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한 게 맞는 걸까.
이미 화연의 머릿속은 나 이상으로 꽃밭인 모양이다.
싱글벙글 웃으며 순진하게 묻는 화연을 보며 나는 태연한 척 대꾸했다.
“축구선수 급으로 낳자는 건 아니겠지, 설마?”
“으음. 난 그것도 괜찮을 거 같은데.”
“……결혼,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농담이야, 농담!”
서둘러 손사래 치는 화연을 보며 나는 결국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