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화 〉 17. 개과천성[????](4)
* * *
나는 그 자리에서 화연에게 요 며칠 동안 홀로 끙끙대며 내온 결론을 얘기해 주었다.
나와 화연, 그리고 다른 여자들과의 관계.
그리고 앞으로의 장래까지.
“알았어. 그게 현수 네 생각이라면.”
그리고 내 설명을 들은 화연은 그것을 곧바로 납득했다.
오히려 말한 나조차 당황할 정도로 정말 시원하게.
“그럼 자세한 건 다 같이 모여서 다시 얘기해야겠네.”
‘다 같이’란 건, 화연을 포함한 다른 섹파.
놀라운 건 이 말이 내가 아닌 화연의 입에서 나왔다는 거다.
내 속을 다 꿰고 있다는 듯한 그 말투에 나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래주면 고맙지.”
“응. 그럼 날 잡고 다시 한 번 얘기하자. 다 같이 모여서.”
“어, 어어.”
“그럼 오늘은 헤어질까?”
만나기 전만 해도 모텔이니 뭐니 하던 녀석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시원스런 이별.
그런 화연의 말에 나는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내 반응이 재밌다는 듯 화연이 작게 웃었다.
“킥킥, 그 표정은 뭐야. 내 반응이 그렇게 신기해?”
“아니, 너 지금 평소 이상으로 침착하거든……. 설마 화난 건 아니지?”
“그런 거 아니야. 현수 네가 고민하는 동안 나도 멍하니 시간만 때운 건 아니니까. 나도 내 안에서 나름대로 마무리 지은 바가 있어서 그래.”
“…….”
말문이 없어진 날 보며 돌연 읏차차, 기지개를 킨 화연이 말을 이었다.
“으음, 사실 이렇게 될 거 같은 예감이 들긴 했어.”
“내가 이런 말 할 걸 예상했다고?”
“그런 건 아니고……. 으음, 설명하기가 어렵네. 그냥 왠지 모르게, 라고 해야 되나? 어쩌면 나도 모른 새 마음의 준비가 끝난 걸지도 모르겠네. 그래서 이렇게 무덤덤한 걸지도. 알게 모르게 우리도 1년 넘게 얼굴 맞댄 사이니까.”
“벌써 1년이나 됐나?”
“시간 참 빨라. 그치?”
거기까지 말한 화연이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럼 빠른 시일 내로 연락 줘. 갈게.”
“이렇게 간다고? 언젠 모텔에서 뒹굴자던 녀석이?”
“그런 소릴 듣고 뒹굴 만큼 나도 얼굴 그렇게 두껍진 않거든? 됐어. 오늘은 그냥 갈게.”
“그래, 뭐…….”
“연락 기다리고 있을게.”
그 말과 함께 화연은 정말로 미련 없이 떠났다.
말을 꺼낸 나조차도 믿기지 않을 만큼 깔끔하게.
그렇게 약간은 허무한 이별 이후 나는 다시금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보내야 했다.
다른 섹파들과의 시간을 조율하기 위해서였다.
주화연, 최수민, 윤화정.
다른 섹파들은 이미 이전에 모두 정리를 마쳤다.
지금 내게 남은 사람은 저 세 명 뿐.
그리고 오늘.
오늘 이후로, 나는 그녀들과도 확실하게 매듭을 짓게 될 것이다.
***
4자대면이 약속된 오늘.
“후우.”
긴장해서일까, 숨을 고르는 내 한숨 소리가 작게 떨리는 게 느껴진다.
나는 자취방 한 구석에서 마음을 추스르며 오늘 대화를 할 이들의 면면을 떠올렸다.
먼저 대표님의 경우.
“괜찮겠죠. 이제 급한 불은 끈 상태고.”
최수민 대표님의 피버 에이전트 임시 대표는 내 예상대로 계속 이어졌다.
애초에 대표님 이외의 적합한 인사가 그리 많지는 않았으니까.
이제는 임시라고 하기도 뭐할 정도다.
그렇게 대표님이 급한 사안들을 정리하는 데에는 고작 일주일이면 충분했고, 내 제안에 맞춰 대표님도 시간을 내는 데에 동의했다.
“그보다 현수 씨도 참 대단하시군요. 여러 가지 의미로 거물이라고 해야 할까. 설마 바람 상대끼리 맞대면을 시킬 줄은.”
“바람이라고 하자니 좀 이상한데요……. 말했다시피 다른 여자들도 저 이런 거 아는데.”
“변명이 꽤 어설프십니다.”
“변명이 아니라 팩트죠.”
“후후, 뭐 좋습니다. 그 뻔뻔한 게 현수 씨의 장점이니까. 사실 저도 흥미가 있었고.”
“흥미요? 그게 대체 무슨……?”
“그건 그 날의 즐거움으로 남겨두시죠.”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흐음, 글쎄요?”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통화를 끊은 대표님의 목소리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보다 재밌다니, 대표님은 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올 생각인 걸까.
괜히 아수라장이 되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리고 윤화정의 경우.
“어, 으음……. 내가 껴도 괜찮을까?”
윤화정의 경우에도 사실상 계약을 맺은 회사가 내부적으로 산산조각이 난 만큼, 전반적인 스케줄은 취소되었기에 시간을 조율하는 데에는 그리 어려울 것이 없었다.
막상 당사자가 불편해하는 기색이긴 했지만.
“너는 고백까지 한 녀석이 뭔 소리야.”
“뭐래. 오빠도 딱히 받아준 거 아니잖아.”
“됐으니까 너도 와. 중요한 얘기니까.”
“오빠…….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나 연예인이야. 그것도 꽤 잘 나간다고?”
“갑자기 왠 자기 자랑이야.”
“자랑이 아니라! 나도 나름대로 스케줄이…….”
“웃기시네. 스케줄은 무슨. 대표님한테 들었다. 어차피 회사 내부에서 진행하던 프로젝트 다 중지됐다고.”
“윽.”
“아, 말이 나와서 말인데. 화연이 외에도 대표님까지 오실 거야.”
“에엑?!”
“뭔데? 그렇게 싫어? 너 나랑 대표님이랑 그렇고 그런 관계인 거 알고 있었잖아.”
“그거야 예상만 했던 거고……. 시, 실제로 그랬구나.”
“그래서 올 거야 말 거야?”
“아, 아니. 으으, 하지만 대표님 같이 일해 보니까 엄청 깐깐하던데. 괜히 오빠랑 그런 사이라고 막 회사에서 괴롭히는 거 아니야……?”
“무슨 말도 안 돼는 소릴. 같이 일해 봤으면 대표님이 그럴 사람 아닌 거 알 거 아냐.”
“으윽…….”
“말 돌리지 말고 대답.”
“……씨이. 가면 되잖아, 가면!”
그렇게 두 사람의 스케줄 조율도 끝.
당연히 여기에는 주화연도 포함되어 있다.
화연의 경우에는 미리 얘기해둔 게 있어서 길게 얘기할 것도 없었지만.
딩동.
초조하게 기다리는 사이 들리는 벨소리.
서둘러 현관문을 열자 거기에는 화연이 어색하게 서 있었다.
“나, 나 왔어.”
내 안색을 한 번 살핀 화연이 안으로 곧장 들어오지 않고 쭈뼛거리며 내 방 안쪽을 살폈다.
“푸훗.”
대담한지 소심한지 모를 화연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 날 이별할 때는 아주 시원스런 모습이더니 이제 와서 이런 모습인 건가.
소심한 건지 대담한 건지.
“뭐, 뭔데. 갑자기 왜 웃어.”
“아냐. 그냥.”
“치, 싱겁기는. 그보다 다른 사람들은……?”
“아직 안 왔어.”
“아, 응. 그럼 들어갈게?”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과 함께 조심스레 방 안으로 들어오는 화연.
그러나 그녀가 앉기도 전에 곧이어 손님이 당도했다.
딩동.
“헉.”
소파에 앉으려던 자세 그대로 멈춘 화연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어났다.
그 허둥지둥하는 모습에 다시금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참으며 다시 현관문을 열었다.
문을 연 눈앞에는 활기찬 표정의 윤화정과 차분하게 고개를 숙이는 최수민 대표님의 모습이 있었다.
“안녕, 오빠!”
“안녕하십니까.”
“뭐야, 같이 왔네?”
“퇴근 시간이 같으니 말이죠. 한동안은 같이 내부에서 똥 치우고 있는 상태이니.”
“맞아 맞아. 누구 씨가 대차게 회사 뒤집은 덕분에 말이야.”
에휴, 하고 한숨을 쉰 화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덕분에 연예인이 아니라 무슨 회사 전담 매니저라도 된 거 같다고.”
“그게 내 탓은 아니잖아.”
“오빠 탓이지 뭔 소리야! 으으,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운영 쪽은 체질이 아니야. 내가 원하는 건 무대에 서서 팬들의 환한 미소를 보는 거라고.”
“그렇게 말하시는 것 치고는 꽤 꼼꼼하게 임하시던데 말입니다.”
“그거야 뭐…….”
대표님의 말에 화정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더니 대답했다.
“옆에서 눈대중으로 본 게 있으니까요. 그냥 흉내만 내는 거예요.”
“흉내라고 말하는 것 치고는 셈에도 꽤 능숙하셨죠. 연예계 활동을 재개하게 되면 저로서는 참 아쉬울 것 같습니다.”
“…….”
“아니면 어떻습니까? 이참에 은퇴하고 저랑 같이 회사 운영에 손을 맞추는 건.”
“네에?!”
“농담입니다.”
이 사람은 그런 표정으로 말하면 전혀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 걸 알기는 할까.
옆에서 듣는 내가 몸이 움찔 덜릴 지경인데.
“끔찍한 말씀 마세요, 대표님!”
화정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안색이 새파래져서 소리쳤다.
“지금 회사에서 제일 잘 나가는 인재가 누군데 그렇게 말을 하세요! 아무리 농담이라도 그렇지!”
“뭐, 실은 꼭 농담인 것만은 아니죠. 화정 씨도 언제까지고 활동하진 않을 테고.”
“와, 대표님이 회사 소속 연예인한테 어떻게 이런 악담을!”
“더 멀리 보자는 얘기였습니다만.”
“됐거든요! 봐요! 대표님 밑에서 일하고 있으니까 없던 다크써클도 생긴 거! 얼굴 피부도 다 늘어졌단 말이에요!”
“딱히 그리 보이진 않습니다만. 그리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 대표님……! 에휴, 아니다. 하긴 그게 대표님 잘못도 아니고. 따지고 보면 이 오빠 잘못이죠.”
척,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는 화정의 모습에 괜히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그러니까 난 자꾸 왜 태클 거는데.
다 잘되자고 벌인 일이구만.
“으으, 대체 난 언제쯤 무대에 서는 건지…….”
“너무 실망하지 마시죠. 이제 상황도 거의 마무리 단계니 금방 정상화 될 겁니다.”
틱틱거리며 울상을 짓는 화정과 그런 화정을 무심한 듯 달래는 수민 대표님.
보아하니 같이 일하면서 나름대로 꽤 친분이 쌓인 모양이다.
그렇게 짧은 실랑이가 끝난 뒤.
“아, 언니!”
흥미진진한 얼굴로 우리 집에 들어온 화정이 화연을 발견하고는 밝게 인사했다.
“먼저 와 있었구나.”
“아, 응. 잘 지냈어, 화정아?”
“잘 지내기는 무슨. 저 오빠 때문에 힘들어 죽겠어.”
“그러게. 현수 때문에 서로 고생이네.”
아니, 왜 자꾸 나를 못 볶아서 안달인데…….
뭐 솔직히 할 말 없긴 하다만.
“그럼 옆에 계신 분은…….”
화정과의 짧은 인사를 마친 화연의 시선이 슬그머니 옆에 있는 대표님에게로 향했다.
그런 화연의 시선을 마주하며 대표님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피버 에이전트 임시 대표직을 맡고 있는 최수민이라고 합니다.”
“아, 네. 저는…….”
“아, 소개 안 하셔도 됩니다. 화연 양 맞으시죠?”
“어? 절 아세요?”
“평소 현수에게 얘기 많이 들었으니 말이죠.”
“그, 현수가 평소 무슨 얘기를……?”
“애인 아닙니까?”
“네?! 아, 그, 트, 틀린 말은 아닌데……. 에헤헤…….”
“기왕 이런 자리이니만큼 서로 허심탄회하게 얘기했으면 합니다. 괜찮으실까요.”
“그, 그럼요! 저야 환영이죠!”
거칠 것 없는 기세와 달리 의외로 가식이 섞이지 않은 대표님의 태도에 화연도 한층 긴장을 벗은 표정이었다.
상성이 별로 안 좋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일단은 앉아서 얘기하도록 하죠.”
멀뚱히 서 있는 우리를 향해 거실을 가리키며 말하는 대표님.
이 사람은 꼭 자기가 이 집 주인인 것처럼 말하네.
“대표님 저희 집 처음 맞죠?”
그 자연스런 태도에 피식 웃으며 묻자 대표님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그렇습니다만……. 뭐 제가 잘못한 거라도?”
“그런 건 아니고 너무 자연스러워 보여서요.”
“아……. 크흠, 그렇죠. 현수 씨 집인데 제가 나댄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
나대다니……. 아무리 봐도 평소 대표님이 선택할 단어는 아니다.
다시 보니까 이 누나, 표정도 평소 이상으로 딱딱한 느낌이고.
의외로 꽤 긴장한 건가?
일단은 마실 거라도 가져와서 진정시킬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괜찮으니까 앉아 계세요, 대표님.”
“아……. 네.”
가볍게 어깨를 두드리는 내 손길에 대표님의 얼굴이 한층 풀어졌다.
이 누나를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거의 모를 만큼 미세한 변화이긴 했지만.
잔뜩 굳은 대표님에게 말한 나는 두 사람에게도 시선을 던졌다.
“너희 둘도 편하게 있어. 마실 거 좀 가져올게.”
“그보다 나 오빠 집 구경 좀 하고 싶은데. 저기 저 방 들어가 봐도 돼?”
“상관은 없는데 너무 뒤집진 마라.”
“오빠는 날 뭘로 보고!”
“그, 현수 씨. 저도 구경 좀 해도……?”
“네? 아, 네. 물론이죠. 대표님 집이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구경하세요.”
“헐, 나랑 온도 차이 뭔데.”
“가, 감사합니다. 그럼…….”
툴툴거리며 방으로 들어가는 윤화정과 내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레 그 뒤를 따르는 대표님.
그런 두 사람을 뒤로 한 채 나는 거실 한켠으로 시선을 던졌다.
“어쩐지 다시 시끌벅적해졌네.”
거기에는 거실 한가운데에 다소곳이 앉은 화연이 가만히 날 바라보고 있었다.
일주일 전 보여주었던 그 차분한 표정으로.
“다시?”
“다슬이랑 있을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으니까.”
다슬이라.
확실히 최다슬 그 녀석이 있었을 때에는 하루하루가 참 요란했다.
질투심 하나만큼은 대단했던 녀석이었으니까.
귀찮거나 피곤할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즐거웠었는데.
“말할 거야?”
문득 씁쓸한 기억을 곱씹는 사이 다시금 말문을 여는 화연.
무엇을 말할 거냐 묻는 건지는 바로 깨달았다.
애초에 오늘 이 자리도 일주일 전, 화연에게 했던 얘기를 다시금 두 사람에게도 들려주기 위함이었으니까.
“말해야지.”
“두 사람 다 엄청 놀랄 걸.”
“그렇더라도 말할 거야. 안 그러면 너한테 먼저 말한 의미가 없잖아.”
“또 헤어질지도 모르는데?”
“…….”
상처를 헤집는 그 말에 나도 모르게 화를 버럭 낼 뻔했다.
하지만 눈앞의 화연을 보는 순간 화를 내려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무덤덤한 얼굴과는 다르게, 날 바라보는 화연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으니까.
“그러는 너는 왜 안 헤어졌는데.”
그럼에도 역시 불쾌한 감정은 남아있는지라 나도 모르게 퉁명한 말을 툭 내뱉었다.
“어쩔 수 없잖아.”
허나 그런 내 말에 화연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리고 그 말을 하는 화연의 눈빛은, 방금 전과는 다르게 전혀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그 이상으로 좋아하게 되어 버렸는걸.”
……이 녀석은 어떻게 얼굴색 하나 안 변한 채 저런 말을 말할 수 있는 걸까.
듣는 내가 얼굴이 다 빨개지는 기분이다.
“현수 네가 결정한 거고 난 따라가기로 했으니까……. 난 괜찮아. 하지만 두 사람은 어떨지 모르는 거야. 그건 알고 있는 거지?”
“그 정도 결심도 없이 너한테 말했을 리가 없잖아.”
“응. 알고 있으면 됐어. 하지만 너무 무리하진 마. 다슬이 때처럼 너무 힘들어하는 모습 보고 싶진 않으니까.”
“……나름대로 표정관리 했던 거 같은데.”
“그게? 썩은 동태도 그 때 현수 너보단 눈빛 잘 숨겼을 거 같은데?”
가차 없이 말하는 화연의 말에 어이가 없어져 웃음이 픽 새어나왔다.
그런 날 보며 화연도 작게 미소 지었다.
“어떤 결정을 하든 난 현수 네 편이야. 알지?”
“그래……. 고맙다.”
“히히. 고마우면 한우 비싼 걸로 사 주는 거?”
“그건 생각해 볼게.”
“쳇.”
짠돌이, 라고 작게 중얼거리며 툴툴거리는 화연.
그런 화연을 뒤로 한 채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내 네 잔을 테이블 위에 담았다.
쫄쫄 다가온 화연이 식탁에 앉고는 날 향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답하듯 눈인사를 한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몇 발자국 안 되는 내 방문 앞.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방 안에서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키득키득 웃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후우.”
등 뒤에서 말없이 지켜보고 있을 화연의 시선이 느껴지는 기분.
그 무언의 응원을 뒤로 한 채 나는 마침내 문고리를 돌렸다.
“두 사람 다 이제 슬슬 얘기 좀…….”
그런 내 결심은 두 사람이 들고 있는 물품에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자, 화정 양. 아무리 그래도 이런 건……. 오, 오오? 진동이?!”
“여기 스위치 누르면 켜지는 방식이네요. 남성용은 이런 식으로 내부에 진동이 오는가 봐요.”
“남자들은 이런 걸로 욕구를 해결하는 거군요. 그런데 사이즈가…….”
“남자도 사람마다 크기가 다르니까요. 사이즈가 다양하게 있나 봐요.”
“확실히 현수 씨 정도라면 이 정도는…….”
“네?”
“크흠! 그, 그보다 이것도 따로 이름이 있습니까?”
“뭐였더라? 따로 이름이 있었는데. 오…….”
“으아악!”
장롱 구석에 숨겨둔 내 비밀의 컬렉션이!
내 분신의 분신을 조물딱거리는 화정을 보며 나는 절망적인 심정으로 소리쳤다.
“그거 놔 이 미친년아!”
그런데 이 기시감은 뭐지.
어쩐지 예전에 비슷한 경험을 해본 거 같은 기분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