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화 〉 17. 개과천성[????](3)
* * *
평소 화연은 학교 선생님답지 않게 집돌이 스타일의 성격이다.
왜, 끼리끼리 논다고들 하지 않는가.
원래 세계에서 아싸나 다름없던 현수와 가장 자주 어울리는 화연이라 그런가, 그녀도 현수와 마찬가지로 집 밖을 돌아다니는 걸 그다지 선호하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의 현수는 평소 그녀가 알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야, 봐봐. 이거 너한테 잘 어울릴 거 같은데?”
“미쳤어?!”
노출도가 심한 옷을 흔들며 말하는 현수의 모습에 화연이 놀라 빽 소리쳤다.
“그런 천 쪼가리를 어떻게 입어!”
“뭘 이런 걸 가지고. 코스프레는 잘만 해 주잖아.”
“아니, 그거야 네가 하도 해 달라고 하니까……! 그런데 바보야, 점원 다 듣잖아아……!”
저 멀리서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는 점원의 모습에 화연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런 화연의 모습이 재밌다는 듯 현수가 킥킥 웃었다.
민망한 기분에 화연이 괜히 걸린 옷들을 뒤적이며 시선을 회피했다.
‘얘는 왜 갑자기 하지도 않는 쇼핑을 한다고 해서는…….’
평소 인터넷으로 적당히 사이즈만 골라서 편한 옷만 입기 마련이었던 화연이다.
이렇게 직접, 그것도 남자와 같이 쇼핑몰을 돌아다니는 건 화연으로서는 처음 겪는 경험이었다.
“그래도 현수 너도 남자는 남자네.”
옷들을 뒤적이며 중얼거리는 화연의 말에 현수가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뭔 소리야?”
“보통 남자애들은 쇼핑 좋아한다고 하잖아.”
“아…….”
“이런 거 보면 현수 너도 쇼핑 좋아했구나. 전혀 몰랐어. 하도 털털하다 보니 귀찮아하는 줄만 알았는데.”
“뭐, 딱히 틀린 말은 아닌데. 굳이 시간 내 가면서 쇼핑 즐기거나 하진 않아.”
“어? 그럼 왜 쇼핑 하자고 한 건데?”
“말했잖아. 너 후줄근하게 입고 다니는 거 마음에 걸렸다고.”
“내가 그렇게 옷 대충 입고 다녔었나……?”
현수의 말에 화연이 곰곰이 자신의 차림을 반성하는 사이.
“그리고 한 번 정도는 여친이랑 이런 거 해 보고 싶었거든.”
이어지는 현수의 말에 겨우 진정을 되찾아 가던 화연의 얼굴이 다시금 확 붉어졌다.
‘여, 여친이라니.’
처음 볼 때는 섹파니 뭐니 하던 주제에.
이제와서 여친이라니 너무하잖아!
속으로 비아냥거리는 화연이었지만 그 입꼬리는 한층 올라간 상태.
허나 장난스레 웃고 있을 현수의 얼굴을 마주볼 용기는 없기에 별 관심도 없는 옷만 뒤적일 따름이었다.
그렇게 결국 몇 분간 더 실랑이를 벌인 끝에야 두 사람은 극적인 타협을 볼 수 있었다.
선택한 것은 무난하게 화사한 원피스.
“기왕 사준 거 잘 입고 다녀라.”
현수에게 종이가방에 든 옷을 받은 화연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 고마워.”
“됐어. 이런 걸 가지고 뭘.”
씩 웃는 현수의 미소를 보는 순간 화연의 속이 소녀마냥 쿵쾅쿵쾅 뛰었다.
이렇게 스윗한 현수의 모습에 별 내성이 없던 탓이었다.
여태까지의 현수가 싫다던가, 그런 건 아니다.
밤자리에서만 특히 다정해지고 열정적이게 되긴 하지만, 그런 현수의 모습도 화연은 충분히 만족스럽게 느껴졌었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 자기가 데이트 제안을 하고, 영화 예매까지 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선물은 꿈도 꾼 적 없고.
그런데 오늘 갑자기 여친이랍시고 이렇게 챙겨주기까지 하다니.
‘으으……. 오늘따라 완전 다른 사람 같아.’
연이어 자신을 챙겨주는 모습에 화연은 쉽사리 표정 관리를 하기가 힘들었다.
물론 지금의 상황이 싫다는 건 절대로 아니다.
그저 익숙하지 않을 뿐.
“이제 영화 보러 가자. 슬슬 시작하겠다.”
“아, 응.”
선물도 받았는데 팝콘 정도는 내가 사야겠지.
그리 생각한 화연이 영화관으로 가기 무섭게 곧장 팝콘 판매대로 향했다.
“앉아서 기다리고 있어. 내가 받아올게.”
“……어, 어어.”
“왜 그래?”
“아니, 사실 네 동생이랑 여기서 영화 봤던 게 생각……. 켁!”
순간적으로 울컥해 화연이 자신도 모르게 현수의 등짝을 짝 때렸다.
“거기서 화린이 얘기는 왜 하는데.”
아차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입으로는 전혀 다른 말이 툭 새어나온다.
냉담하기 그지없는 태도에 현수가 머쓱하게 뒷통수를 긁적였다.
“아니, 무심코 그만.”
“화린이 걔한테 너무 잘 대해주지 마. 너 좋아하는 거 알잖아.”
“크흠…….”
“대답.”
재차 물었음에도 그저 말 없이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회피하는 현수.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화연으로서는 영 석연찮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직접 본 것도 아닌 이상 그녀도 이 이상 뭐라 태클을 걸기가 뭐했다.
‘애초에 친동생한테 질투하는 모양새라 말하는 것도 추해 보이기도 하고…….’
그렇게 갑작스레 어색해진 분위기 속.
“미안.”
결국 먼저 말문을 연 것은 현수 쪽이었다.
“화린이 얘기로 이렇게 불편해할 줄은 몰랐네. 앞으로 주의할게.”
“됐거든…….”
방금 전까지 그렇게 들떴는데.
고작 친동생 얘기 좀 나왔다고 질투하는 꼴이라니.
‘한심해 진짜.’
스스로도 참 유치하다 생각하면서도, 화연은 그런 기분을 좀처럼 절제할 수가 없었다.
허나 굳이 데이트 자리에서 계속 불편하게 있을 수는 없는 상황.
“기다리고 있어. 팝콘 사 올게.”
괜한 생각을 털어버린 화연이 곧이어 팝콘과 콜라를 사 들고 왔다.
콜라 두 개와 팝콘을 낑깅대며 가지고 오는 사이, 어느덧 자리에서 일어난 현수가 얄밉게 손을 내밀어 팝콘을 하나 쏙 가져갔다.
“야, 너……!”
그 모습을 보며 부아가 치밀어 오르려는 찰나.
“자.”
“힉?!”
자신의 입 앞으로 팝콘을 내미는 현수의 손길에 다시금 화연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자, 뭐 하는데?!”
“뭐 하긴. 입 벌려.”
“하, 하지 마!”
“왜?”
“으으, 갑자기 왜 이래, 안 어울리게…….”
“싫어?”
“싫은 게 아니라…….”
“뭐 어때. 데이트라고 했잖아. 기왕 하는 데이트인데 이런 것 좀 해 보는 거지 뭘.”
“하, 하지만 사람들 다 쳐다보는데…….”
“그렇게 싫어?”
섭섭한 듯 눈썹이 축 처지는 현수.
그 모습을 보는 순간 화연의 싸늘했던 가슴이 눈 녹듯 사르르 녹아내렸다.
으으, 거기서 그런 표정 짓는 건 반칙이잖아.
“으, 으윽…….”
결국 강아지 마냥 바라보는 현수의 모습에 화연도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자그맣게 입을 벌리는 화연의 모습에 현수가 재빨리 들고 있던 팝콘을 쏙 집어넣었다.
“맛있어?”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묻는 현수를 보며 화연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맛있네.”
“그래. 그럼 들어가자. 콜라는 내가 들게.”
“아, 응…….”
여우마냥 쏙 들고 있던 콜라를 가져간 현수가 슬그머니 허리를 슥 매만졌다.
그 거리낌 없는 손놀림에 깜짝 놀란 화연이 허리를 확 곧추세웠다.
“히익!”
“큭큭.”
“너, 너 진짜아……. 여기 공공장소라고……!”
“이 정도야 뭐 어때.”
씩 웃은 현수가 자연스레 화연의 허리를 끌어안고 영화관 내부로 향했다.
그런 현수의 행동에 화연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끌려다닐 따름이었다.
‘진짜 선수라니까…….’
마치 가슴 안쪽이 간질거리는 듯한, 혹은 심장이 말랑거리는 듯한 느낌.
이건 처음으로 겪는 데이트라서일까.
아니면 상대방이 첫사랑인 현수이기 때문일까.
분명 생소한 느낌이지만, 전혀 싫지 않다.
그것이 오히려 곤란한 기분이 드는 화연이었다.
***
장장 두 시간이 넘는 블록버스터 영화는 내 가슴을 뛰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최근 허망한 기분마저도 잠깐 잊어버릴 정도로.
“와, 스토리 진짜 대박이더라.”
영화를 관람한 우리는 곧바로 근처 카페에서 수다를 떨어댔다.
“캬, 역시 영화는 할리우드에서 만든 게 짱이라니까. 주인공 마지막에 손가락 튕기는 거 기억나? 미쳤다 진짜.”
“아, 으응. 재밌더라.”
“진짜 주인공이 입은 슈트 개 멋있는 듯. 우리 살아생전에 그런 슈트가 개발될 날이 오긴 하려나? 돈만 많으면 무조건 살 텐데.”
“……이럴 때 보면 또 현수답긴 한데.”
“응? 뭐라고 했어?”
“아니야. 그냥 혼잣말.”
뭐, 나와 다르게 막상 눈앞에 있는 화연은 마음이 딴 데 가 있는 거 같긴 했지만.
하긴 오늘 나름대로 진지한 얘기를 하자고 부른 거기도 하니 이해는 간다만…….
그래도 기왕 제대로 데이트를 하러 나온 만큼 오늘만큼은 순수하게 즐겨줬으면 싶은데 말이지.
아니면 너무 즐겨서 약간 멍 때리는 건가? 그런 거라면 좋을 텐데.
“…….”
어느 순간 내 물음에도 단답으로만 대답하며 창밖을 바라보는 화연.
생각에 빠진 그녀의 모습에 나도 오늘의 주목적을 상기할 수밖에 없었다.
‘얘는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첫 만남 당시, 나는 화연에게 정확하게 말했던 바가 있다.
바로 우리 관계는 그저 섹파일 뿐.
그 이상으로 파고들 시에는 가차 없이 헤어질 것이라고.
하지만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그런 내 기준도 희박해졌다.
주화연과 최다슬, 윤화정, 최수민 대표님.
그 외에도 몸을 섞은 수많은 여성들.
애초부터 섹파라는 것에 못을 박은 이상, 그녀들과의 관계는 서로 즐기는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상처를 받은 관계도 분명히 존재했다.
그 결과 최다슬은 참지 못하고 내 곁을 떠나갔고, 주화연은 여전히 내 곁에 남아 있으며, 그럼에도 내게 고백 비스무리한 것을 한 윤화정이 있었다.
대표님의 경우에는 뭐, 아직 제대로 결정된 것이 없긴 하지만.
그리고 며칠간 고민을 한 결과, 나는 이러한 관계를 다시금 재정립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일단은 내 솔직한 심정을 먼저 화연이한테 털어놓자.’
그리고 그 시발점을 눈앞의 여성, 주화연으로 한 것에는 나로서도 큰 의미가 있었다.
애초에 그녀는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이성 관계를 구축하기로 결심한 여자였으니까.
‘적어도 내가 결정한다면 화연이나 다른 애들도 결심할 수 있을 테지.’
물론 화연이나 다른 사람들 마음도 중요하지만 내 생각도 중요하다.
애초에 나로부터 시작된 관계들이고.
그러니 이제는 다시금 그녀들에게 내 대답을 들려줄 시간이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생각을 정리한 나는 밖을 바라보는 화연을 향해 말했다.
이미 오후 다섯 시를 넘은 바깥은 슬슬 해가 슬그머니 넘어가기 시작한 상황.
조금씩 울긋불긋해지는 광경 속에서 벚꽃이 모두 진 나무가 푸르스름한 잎을 뽐내고 있었다.
“응…….”
시선을 주지도 않은 채 바깥을 보며 멍하니 대답하는 화연.
불그스름한 햇빛이 생각에 빠진 화연의 얼굴에 비추며 우수에 찬 모습을 자아냈다.
평소에 재잘재잘 말이 참 많은 녀석이라 그런가,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치 말도 없이 꼭 어딘가로 떠나가 버릴 것만 같은 인상을 받았다.
그 주화연도 분위기만 타면 그림이 된다는 게 참 신기한 기분이네.
역시 외모가 중요하긴 중요하구나.
“야, 궁상 그만 떨고.”
내가 툭 내뱉자 화연이 그제야 고개를 홱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씨, 궁상이라니…….”
“됐으니까. 바깥바람 쐬면서 산책이나 하자.”
“흥. 어쩐지 오늘따라 스윗하다 했어.”
내 말에 입을 쭉 내밀며 툴툴거리는 화연.
그러면서도 얌전히 나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참 귀엽기 그지없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서로 손에 든 채 우리는 근처 공원으로 나왔다.
말없이 걷고 있자니 남은 한 손으로 내 손을 깍지 끼듯 잡는 화연.
슬쩍 돌아본 화연이 고개를 홱 돌리는 모습이 보였다.
뭐, 이번에는 괜히 태클 걸지 말고 적당히 분위기에 어울려줄까.
“…….”
“…….”
그렇게 서로 손을 잡은 채 말 없이 산책하길 얼마.
“우리……. 슬슬 진지한 얘기도 좀 해야겠지?”
먼저 말문을 꺼내는 화연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나도 어떻게 말해야 하나 계속 고민 중이었으니까.
“혹시 다슬이한테 따로 연락 온 건 있어?”
훅 들어오는 직설화법에 움찔한 것도 잠시.
곧바로 정신을 차린 내가 최대한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아니, 딱히. 단톡도 나가고 그냥 연락 다 끊어버린 거 같더라.”
“그렇구나. 진짜로 끝낼 생각이었나 보네…….”
“화연이 너는 어떻게 생각해?”
“뭘?”
“내가 다슬이랑 헤어진 거.”
“나야 뭐……. 애초에 내가 말하고 말고 할 것도 없는데 뭘.”
“오히려 경쟁자가 없어서 좋은 거 아니야?”
“태풍의 근원이 그렇게 뻔뻔하게 말해도 돼?”
내 말에 피식 웃은 화연이 말문을 이었다.
“그야 뭐, 나도 그렇지 않을까 했는데……. 친해진 와중에 이렇게 훅 떠나니까 오히려 좋다기보다는 씁쓸하더라. 꼭 동거동락하던 전우가 사라진 기분?”
“으음.”
“너도 알겠지만 다슬이 걔, 현수 너 나 만큼이나 좋아했어.”
“…….”
“뭐라도 말해보시죠, 양아치 씨.”
이렇게 대놓고 갈구면 나도 할 말이 없는데.
“그래서 현수 너는 앞으로 어떡할 생각이야?”
“……글쎄.”
“글쎄라니. 생각 안 해본 거야?”
“반대야. 오히려 너무 많이 생각해서 머릿속이 터질 지경이거든?”
“그렇구나. 하긴 안 그러면 사람도 아니다.”
……그래, 내가 죄인이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화연이 너는?”
내 말에 화연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어떨 거 같은데?”
“그걸 알고 싶어서 물어보는 거야.”
“……후우.”
한숨을 푹 쉰 화연이 다소 어두워진 모습을 대답했다.
“실은 다슬이가 통화로 그런 애길 하더라.”
“무슨 얘기.”
“너한테 결혼할 거냐고 물어볼 거라고.”
“……아.”
설마 화정이나 화연이한테까지 털어놓았던 건가.
“물어봤지? 결혼.”
훅 들어오는 결혼 공격에 나는 마땅히 대꾸하지 못하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후후.”
그런 내 반응을 예상한 것일까, 화연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그런 표정 안 지어도.”
“…….”
“현수 네가 결혼할 생각은 없단 거 나도 잘 알아. 애초에 그렇게 산다는 건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 없었다는 거겠지. 그래서 다슬이도 아니다 싶어서 떠난 걸 테고.”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결혼? 글쎄.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말이야. 헤헤.”
작게 웃은 화연이 발걸음을 멈추고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현수 너는……. 알잖아.”
무덤덤한 말투.
약간은 자애로워 보이기까지 하는 표정.
마치 나를 이해한다는 듯한 그 모습에, 나는 일순 말문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누구보다 너 스스로가 잘 알 거 아니야.”
“…….”
“나도 알아. 우리가 벌써 만난 지 1년? 그 이상은 됐잖아. 그러니까 굳이 너한테 그런 얘기 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 하지만 굳이 내 생각을 묻는다면야 뭐……. 결혼에 대한 환상은 조금 있어. 할 수만 있다면 그야 당연히 하고 싶지.”
“그렇구나.”
화연의 말도 안 될 정도의 이해심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러니까 이 녀석은…….
나를 이해하니까, 결혼을 원해도 굳이 강요하지 않겠다 이건가.
그걸로도 정말 괜찮다는 건가.
멍하니 바라보는 화연을 보며 나는 지금껏 해온 결심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솔직히 그렇잖아, 애초에 정조역전세계인 걸.’
이런 세상에서 여자 한 명만 바라보고 사는 건 손해가 아닌가.
그냥 개새끼 소리 한 번 더 들으면 그만인 걸.
오늘을 비롯해 더 잘 대해주자, 더 진심으로 대하자.
그런 개소리만 들먹이며 스스로를 합리화하려고 했다.
더 이상 과오를 만들지 않겠다 뿐, 관계를 맺은 또 다른 여성들과도 관계를 이어가고 싶다는 게 지금까지의 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나를 이해해주는 화연의 앞에서, 그건 애초에 진심이 아니지 않은가.
그저 기만일 뿐.
“허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순애보도 이 정도면 소설이라고 욕먹을 텐데.
‘아니, 애초에 소설 속 등장인물이라 그런 걸지도.’
“후우우우…….”
“아, 하지만! 그렇다고 강요하는 건 아니니까!”
먹먹한 심정으로 다시금 한숨을 푹 내쉬는 날 보며, 화연이 서둘러 덧붙였다.
마치 이대로 내가 떠나가게 두면 안 된다는 듯이.
“난 딱히 지금 이대로도 괜찮고……!”
“바보야……. 그렇게 말하면 나도 진지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잖아.”
“……어어?”
순간적으로 멍청한 표정을 짓는 화연.
그런 그녀를 향해, 나는 조심스레, 하지만 단호하게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었다.
“진지하게 물을게. 너 진짜 결혼 하고 싶어?”
“자, 잠깐……. 에, 엥? 진심이야? 진짜로?”
“그 정도로 진심이라면 나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니까.”
“그, 그 말은…….”
“그래서 진짜 하고 싶어? 나랑? 결혼을?”
“…………그, 그렇긴 한데.”
“알았어. 그러면 제대로 결판을 내자.”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화연의 눈빛에 일말의 기대감이 엿보였다.
그런 그녀를 향해 나도 확실하게 대답했다.
“이번에는 진짜 제대로 얘기할 테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