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화 〉 17. 개과천성[????](1)
* * *
피버 에이전트 대표와 비서의 경질.
자회사 패션몰 대표인 최수민 대표의 파격적인 승진.
최다슬과의 이별.
그리고 나조차 미처 예상하지 못한, 탑스타 윤화정의 깜짝 고백.
이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이라는 게 지금도 믿기지가 않는다.
하루 만에 연이어 엄청난 사건들을 겪은 만큼 멘탈이 회복될 시간이 필요했다.
딱히 인싸다운 성격도 아닌 내가 그렇게 많은 일들을 한 번에 감당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이 세계로 온 뒤로 인싸니 뭐니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 되어버리긴 했다만.
아무튼 폭풍의 그 날 이후 누구의 연락도 받지 않은 채 가만히 은둔했다.
그리고 약 3일이 지난 지금.
“끄으으응!”
자취방 침대에서 일어난 내가 쭉 기지개를 켰다.
후우, 이틀 동안 혼자 끙끙대다가 오랜만에 푹 자고 일어나서 그런가.
어제랑 다르게 상쾌하네.
뭐, 그렇다고 해서 바뀐 건 하나도 없지만.
“하아암…….”
까치집이 된 머리를 벅벅 긁으며 커튼을 치고 창문을 열었다.
짹짹─
커튼을 치자마자 내리쬐는 강렬한 햇살.
눈살을 찌푸리는 사이 귓속으로 박혀드는 새들의 노랫소리와 함께 희미하게 꽃내음이 느껴졌다.
슬슬 꽃샘추위도 다 끝이 난 모양이지.
“벌써 4월인가…….”
오늘부로 4월 1일.
그리고 내가 이 세계로 온 지 딱 1년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그 사실을 자각한 순간 머릿속으로 이 세계에서 겪은 여러 여자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물론 기억 속의 여자들 중 대부분의 여자는 이미 정리를 마친 상태다.
굳이 연락할 필요도 없는 여자들 몇 명을 제외하고는, 이틀 간 생각을 정리하면서 애매했던 섹파 관계도 완전히 끊어냈으니까.
물론 이 정도로 앞으로의 일이 순탄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지금껏 참 안일하게 살아오긴 했지.’
최다슬과의 이별, 거기에 생각지도 못한 윤화정의 고백.
그 두 사건을 계기로 나도 이 이틀 동안 이 세계로 넘어온 뒤의 일들에 대해 고민했다.
정말로 진지하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지 않으면 앞으로의 인생이 여러모로 피곤해질 것 같았으니까.
뭐, 이것도 다 내 업보긴 하지만.
‘일단은…….’
어차피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
일단은 내가 지금껏 쌓은 업보부터 어떻게 청산할 필요가 있다.
소를 잃었다고 외양간이 망가진 채로 둘 수는 없는 노릇.
결심을 마친 나는 생각해둔 인물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현수야.”
짧게 신호가 울린 뒤 익숙한 목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들렸다.
복잡한 내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대방의 어조는 느긋하기 그지없었다.
“웬일이야? 먼저 전화를 다 하고.”
언뜻 졸린 것 같기도 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주화연.
어째서 얘 목소리만 들으면 이렇게 긴장이 확 풀리는 걸까.
“웬일은 무슨.”
무덤덤한 태도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그보다 나는 뭐 전화도 하면 안 되냐.”
“아니, 그게 아니라……. 딱히 먼저 연락 잘 안 하니까, 너는.”
내가 연락을 잘 안 한다고?
음, 생각해보니 확실히 먼저 연락은 잘 안 한 거 같기도 하고…….
갑자기 좀 미안해지네.
“…….”
“뭐야, 왜 갑자기 말이 없어져.”
“아니, 사실 아니라고 하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그런 거 같기도 하네.”
“같기도 하네는 무슨?! 거의 맨날 내가 먼저 보자고 하는데!”
“어……. 미안.”
“됐어. 그런 소리 들으려고 말한 거 아니니까. 그냥 어쩌다보니 나도 모르게.”
“기왕 말한 김에 섭섭한 거 있으면 제대로 얘기해 봐. 들어줄 테니까.”
“응? 아니, 뭐…….”
머뭇거리는 것인지 짧은 침묵이 이어진 뒤.
곧이어 화연의 조심스러운 말투로 말문을 이어갔다.
“뭐, 여타 남자들은 다 구박하고 구속하려는 거 보면 현수 네 태도가 편하고 좋긴 하지만……. 그래도 너무 무심해 보여서 가끔 섭섭하게 느껴질 때도 있긴 해…….”
혹시나 했는데 진짜 섭섭했던 거였나.
“그건 미안하게 됐어. 앞으로 신경 쓸게.”
“아, 아니야! 너무 신경 쓰지 마! 억지로! 니가 억지로 꺼내라고 해서 말한 것뿐이니까!”
서둘러 내 눈치를 살피는 화연의 말투.
그런 그녀의 태도에 지금껏 나는 얼마나 무심한 태도로 여자들을 대했는지 깨달았다.
어쩌면 그 놈의 정조역전세계니 뭐니 하면서 남들 호의에 너무 기대면서 살아왔던 건 아닐까.
다슬이가 나가떨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닐지도.
“그래. 그럼 조만간 얼굴 한 번 보자.”
우울해지려는 걸 피하고자 말문을 잇자 전화기 너머로 히힛, 하고 화연이 천진난만하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좋아! 슬슬 한 번 할 때 됐지?”
“너는 머릿속에 그 생각밖에 없냐?”
“뭐 어때서? 너도 좋으면서.”
“그야 싫진 않다만…….”
“거 봐, 좋으면서 튕기기는. 아무튼 나 주말에 시간 비긴 하는데 주말에 괜찮은 모텔 예약해 둘까? 저번처럼 아예 날 잡고 하루 종일 뒹구는 것도 괜찮은데.”
“……그러고 싶으면 그러던가.”
“하으, 미치겠네. 너한테 박힐 거 생각하니까 또 설렌다. 으히히히.”
“다 좋은데……. 그 놈의 엉큼한 아저씨 마냥 웃는 건 어떻게 안 될까?”
“내가 웃는 게 뭐 어때서!”
어째 얘랑 대화를 하고 있으면 딱히 감상적인 기분에 빠질 수가 없단 말이야.
그게 화연의 매력이기도 하지만.
하지만 지금은 단순히 웃으면서 얘기할 거리만 있는 건 아니다.
“그래. 그건 상관없는데.”
나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다시금 억지로 다잡으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지금 그거 때문에 전화한 건 아니야.”
“그러면?”
“슬슬 진지한 얘기도 필요하다고 생각했거든.”
“……아, 응. 다슬이 말이지?”
그 말에 화연도 분위기를 눈치채고는 목소리 톤이 한층 낮아졌다.
“하긴 그 얘기도 해야지, 응. 사실 언제쯤 얘기 꺼내나 싶긴 했어.”
“나도 여러모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서.”
“응, 알아. 그래서 나도 굳이 캐묻진 않은 거고.”
“아, 그렇다고 막 심각하게 얘기하자는 건 아니야. 평소 볼 때처럼 평범하게 얼굴 좀 보면서 얘기나 하자는 거니까. 괜찮지?”
“응. 그러자.”
“그럼 주말에 보자.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해서 서로 얘기 좀 하고 싶으니까.”
“앞으로라니?”
“그건 만나서 차분히 얘기하자.”
“응. 알았어.”
“그리고 또…….”
거기까지 말한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
문득 유독 화연이와는 둘이서 제대로 꽁냥거린 기억이 많이 없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얘랑은 제대로 된 데이트 한 번 못 해봤네.’
뭐, 여기 여자들은 다 털털한 편이고, 정조가 뒤바뀌었으니 섹스하고 그런 거야 다들 좋아해서 별 신경은 안 썼다만…….
그렇다 해도 화연이 얘랑은 보면 거의 밥 먹고 섹스, 섹스, 섹스 삼매경이니 정도가 심한 편이긴 했다.
그에 맞춰 장소도 거의 우리집 자취방, 아니면 모텔이 대부분.
방금 화연이 섭섭하다고 한 얘기 때문일까.
자꾸 신경이 쓰이네.
“뭔데? 갑자기 왜 뜸을 들여?”
“아니, 뭐……. 모텔 가긴 갈 거지?”
“왜? 싫어?”
“싫은 건 아니고……. 그냥 낮에 날씨도 좋고 한데 모텔에만 있는 것도 아깝지 않나 해서.”
“?”
“아니, 그러니까, 얼굴 보면 맨날 모텔 안에서 배달로 끼니 떼우는 것도 좀 그렇지 않냐 이거지. 가끔은 기분전환이라고 해야 하나, 루틴도 바꾸고 그러는 것도 좋다는 생각도 들고…….”
“이상하네. 답지 않게 왜 그렇게 말을 돌려?”
음, 역시 티가 났나.
여전히 머뭇거리는 날 향해 의아하다는 듯 화연이 말했다.
“됐으니까 그냥 솔직하게 하고 싶은 말 해. 이제 와서 뭘 숨기고 그래? 우리 사이에.”
“아니 뭐, 낮에는 데이트나 할까 싶어서.”
“……어?”
잠깐 놀란 목소리와 함께 이어지는 침묵.
“어어어어어?! 자, 잠깐, 데데, 데이트?!!”
화연이 놀란 목소리를 내지른 것은 약 5초간의 정적이 있은 뒤였다.
에게 그 정도로 놀랄 일인가.
“아, 아, 어어어. 아, 응……. 데, 데이트, 응. 그렇구나…….”
“뭘 그렇게까지 놀라고 그래.”
“아, 아니……. 설마 데이트 하자는 말을 할 줄은 생각도 못 해서…….”
으음,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였나.
진짜 지금껏 내가 참 무심하긴 했구나…….
앞으로는 진짜 잘 대해줘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나는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어때? 혹시 귀찮으면 그냥 모텔로 가도…….”
“아, 아냐! 좋아! 완전 좋지! 사실 나도 하고 싶었어, 데이트!”
“그래? 다행이다.”
긍정적인 화연의 반응에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얘도 데이트 정도는 하고 싶었나 보네.’
아무리 변태인 화연이라고 해도 일반적인 데이트에 대한 갈망은 있었던 걸까.
평소 섹무새 마냥 노래를 부르기에 이번에도 또 내 고추를 혹사시키는 건 아닐까 걱정했건만, 마냥 그렇지도 않았나 보다.
생각해보면 이렇게 제대로 데이트 하자고 제안한 건 나로서도 처음이기도 하고.
‘……생각해보니 진짜 쓰레기네, 나.’
이번에는 진짜 제대로 대접 한 번 해줄 필요가 있을 듯싶다.
그래, 기왕 데이트하기로 한 거 좀 더 서비스를 해 볼까.
항상 나한테 저자세로 나오던 녀석이기도 하니.
“알았어. 그러면 주말에 너희 집으로 갈게.”
“어? 현수 네가 온다고? 딱히 내가 가도 상관없는데…….”
“너 항상 차 끌고 오는 거 좀 그렇긴 했어. 내일은 그냥 나 따라와. 간만에 나도 운전도 좀 하고 싶으니까.”
“하지만 현수 너 차 없잖아?”
“렌트하지 뭐.”
“그, 그렇게까지?”
“만나면 밥 먹고 영화도 볼까? 예약은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어? ……어, 응. 나야 좋긴 한데.”
“오케이, 그럼 넌 몸만 나와. 내가 알아서 다 할 테니까.”
“으, 으응…….”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화연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하긴 섹스를 제외하면 내가 평소에 이런 식으로 적극적으로 뭘 추진한 적은 별로 없었으니까.
갑자기 변한 태도를 보여주니 당황스러울 만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당황할 일 없이, 익숙해질 정도로 내가 자주 먼저 다가서야겠지.
“으으, 갑자기 왜 이러는데……. 사람 설레게…….”
“응? 뭐라고?”
“아, 아냐!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작게 중얼거리던 것도 잠시.
작게 심호흡을 하고는 겨우 대답하는 화연의 목소리에 나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후우……. 그, 그럼 주말에 봐.”
“그래. 데이트 기대하고 있을게.”
“아, 으응! 나도! 히힛!”
화연의 싱글거리는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전화가 끊겼다.
나는 통화가 끊겨 깜빡이는 액정을 잠시 가만히 바라보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내 곁을 떠나간 최다슬.
아직은 나와 함께 해 주는 주화연과 최수민 대표님.
그리고 최근에 불을 지핀 윤화정까지.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사람 노릇이라도 할 생각이라면, 이제는 확실하게 결정해야 할 때이다.
단순히 나를 위해서만이 아닌, 네 사람을 위해서라도.
“……후우.”
주화연의 이름이 반짝이는 액정을 보며 나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