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45화 〉 16. 이미 끝난 싸움(7) (145/152)

〈 145화 〉 16. 이미 끝난 싸움(7)

* * *

피버 에이전트의 비리가 밝혀지고 난 그 다음 날.

열 평 남짓한 자취방 안.

거기에는 한 여자가 나갈 채비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

옷을 갈아입는 그녀, 최다슬은 무심하게 자신의 방 안을 흘겨보았다.

‘……어쩔 수 없는 거겠지.’

평소 잔망스럽게 만지작대던 스마트폰조차 내버려둔 채, 싸늘한 겨울 방 안에서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숨죽여 시간을 보내길 얼마.

물론 언제까지고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 결과 그녀는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린 상황이었다.

‘언제까지고 이럴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나갈 채비를 하는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남자, 김현수.

그를 생각하는 다슬의 입가로 쓴웃음이 번져나갔다.

‘알바 한 명 온다고 할 때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는데.’

어느덧 그녀의 머릿속으로는 그와의 만남들이 파노라마처럼 재생되고 있었다.

‘은근히 맹한 구석이 있었던 사람이었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당연히 오빠를 처음 본 날.

그 날의 기억은 지금도 다슬의 기억에 선명하게 인상에 남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수라는 사내는 자신이 본 그 어떤 남자와도 비교할 수 없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슬이 희미하게나마 이어오던 남자 아이돌 덕질마저 단번에 끊어버릴 정도로.

‘그 때는 이 남자 한 번 따먹어 보면 소원이 없겠다 싶었는데. 후후.’

그 날의 일을 떠올리며 점차 미소가 짙어지는 다슬.

허나 그것도 찰나일 뿐이었다.

곧바로 현실을 자각한 다슬의 얼굴이 석고상처럼 팍 굳었다.

‘……뭐, 하긴 따먹긴 따먹었나.’

그래, 그 때는 정말 그렇게 가벼운 마음이었다.

딱히 진지한 마음 따위는 없었다.

애초에 스스로도 꽤 괜찮은 외모와 몸매를 가지고 있다는 건 자각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대학생 시절부터 나름 적지 않은 남자들을 만났던 그녀였으니.

그러니 이 남자도 조금만 꼬시면 적당히 넘어올 테지, 라고 당시에는 생각했다.

하지만.

‘오히려 내가 넘어간 게 되어 버렸네.’

어느 순간부터 다슬은 깨달았다.

매달리는 쪽은 바로 오빠가 아닌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알바 도중에도 일부로 몇 번씩이나 친근하게 굴고, 돌연 알바를 그만둔 뒤에도 연락 달라고 몇 번이나 보챘다.

하지만 항상 곤란한 미소를 지으며 ‘나중에’ 같은 소리만 하기 일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오히려 그 보이지 않는 철벽에 오기를 느꼈던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회는 기다리는 자에게 온다고 하던가.

결국 마침내 오빠와 술을 마시게 된 다슬은 그 날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은근히 취한 척 하면서 그와 하룻밤이 사실상 결정됐던 그 날, 모텔 침대에서 자는 척 하면서 다슬은 몰래 곤란해 하는 오빠의 모습에 내심 환호성을 질렀었다.

하지만 그런 여유로움도 그 날이 마지막이었다.

‘얼굴은 맹한 주제에…….’

다슬도 나름대로 남자 경험이 있는 다슬이다.

그러니 스스로도 좀 잘난 남자 안는 정도로 허둥거릴 만큼 처녀 마인드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다슬조차도 그와의 첫 날 밤은 강렬한 인상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현수의 모습은 지금껏 만났던 남자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오히려 이제껏 만나온 남자들이 남자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차라리 얼굴이 평범하길 바란 건 또 처음이네.’

단순히 잘생겨서?

분명 처음에는 그랬다.

지금도 그 외모에는 가끔 넋을 잃을 때가 있을 정도다.

하지만 현수라는 사내의 진정한 장점은 그 빛나는 외모만이 아니었다.

여자라는 생물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여자가 어떻게 하면 기뻐할지를 잘 아는 듯한 반응과 태도를 보여주었다.

마치 원래 여자였던 것은 아닐까 생각이 될 정도로.

그리고 무엇보다…….

여자마저 혀를 휘두를 정도의 그 절륜함!

‘좋았지. 정말로.’

그렇게 다슬은 그의 행동 하나 하나, 교태 하나 하나에 빠져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 정도로 그가 보이는 강렬한 쾌락은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황홀함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우우우웅.

핸드폰 진동이 상념에 빠져 있던 다슬의 정신을 일깨웠다.

액정에 표시된 발신자를 보며 다슬의 입가에 쓴웃음이 지어졌다.

작게 심호흡을 한 다슬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응, 오빠.”

한 손으로는 핸드폰으로 통화를 이으며, 남은 한 손으로는 연갈색 트렌치코트를 걸친다.

평소 가벼운 옷차림을 추구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지금 나가려고. 응. 위치는 알지? 알았어. 거기서 보자.”

어느덧 그녀의 얼굴에서 방금까지의 그늘은 사라져 있었다.

어차피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거라면…….

기분 좋게 보내야겠지.

거기까지 생각하자 마지막 남은 고뇌도 말끔하게 털어낼 수 있었다.

현관문을 나서는 다슬의 발걸음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

피버 에이전트에서 한바탕 소란을 겪은 그 뒤.

다음 날 나는 여태 데면데면했던 다슬과 연락을 취했다.

그런 내 기대에 부응하듯 다슬도 내 만남에 응하기로 했다.

“이번엔 제가 한 번 제대로 쏠게요.”

평소에는 얻어먹기만 하는 게 미안하다면서, 다슬이 제대로 한 끼 대접한다고 만들어진 약속.

그렇게 만나기로 한 장소는 평소 거들떠보지도 않던 최고급 레스토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닌가.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쭈뼛거리며 입구에 가자 접객원이 눈치 빠르게 말을 건넸다.

아니, 그런데 뭔 접객원이 양복을 다 입고 있냐.

나름 차려입었는데도 불구하고 내 복장이 후줄근하게 느껴질 정도네.

“어……. 김현수입니다.”

“네. 확인했습니다. 따라오시죠.”

직원의 기품 있는 발걸음에 따라 나는 예약한 장소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천장에는 할로겐 등의 고급스러운 조명.

우아한 발걸음으로 서빙을 하는 종업원들 및 손님들.

둥그런 테이블 위에 세팅된 칼과 포크만 해도 한 손가락을 넘어서는 숫자였다.

이런 데서 밥 한 끼면 국밥이 몇 그릇인지가 먼저 떠오르는 걸 보아하니 부자 되긴 글렀나 보네.

“후우…….”

도리어 차분해지지 않는 기분에 홀로 앉아 크게 심호흡을 했다.

내색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나로서는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그 가벼운 최다슬이 오랜만에 이런 장소에서 만나자고 한 거니까.

평소라면 가벼운 대화로 잡담이나 하며 김밥천국에서 때워도 만족하는, 그 천하의 최다슬이 말이지.

이쯤 되니 둔한 나라도 어떤 예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각오를 해야겠지.’

무슨 말을 할지는 몰라도, 무슨 말을 들을지는 알 것 같다.

그게 좋은 말이 아니라는 것은 더더욱.

“오빠.”

내심 심란한 기분으로 있는 사이 들리는 가벼운 말투.

등 뒤를 돌아보니 다슬이 씩 웃으며 서 있는 게 보였다.

“오랜만이네요.”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최다슬의 모습은 내 예상과는 다르게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평소 나를 만날 때와 같은 밝고 명랑한 느낌.

“…….”

하지만 나는 그런 다슬을 보며 잠시 멍 때릴 수밖에 없었다.

멍하니 있는 나를 보며 다슬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요? 내 얼굴에 뭐 묻었나?”

“아니, 너 그렇게 입은 건 처음 봐서……. 좀 놀랐네.”

지금껏 나와 반년이 넘게 지내오는 동안에도 다슬의 옷차림은 심플하기 그지없었다.

츄리닝에 삼선 슬리퍼만 신고 술자리를 한 적도 있었으니까.

그나마 전에 클럽에서 놀 때 조금 꾸몄다곤 해도, 막상 그 때의 복장도 나름 일상복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다슬은 지금껏 고정관념에 박혔던 다슬의 이미지를 완전히 날려버리고 있었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연갈색의 트렌치코트와 착 달라붙는 슬렌더한 검은색 레깅스, 거기에 고급진 느낌이 물씬 풍기는 적당한 높이의 하이힐까지.

지금껏 봐온 가벼운 이미지에서 탈피한 그녀의 모습은 오랫동안 봐온 나조차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후후. 오빠한테는 자극이 너무 강했나?”

멍하니 보는 내 표정이 만족스러운지 씩 웃는 다슬.

세련된 모습과는 별개로 그녀의 쾌활한 분위기는 이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읏차.”

자리에 털썩 앉은 다슬이 메뉴판을 가져가며 말했다.

“주문하는 김에 와인이라도 좀 시킬까요? 간만에 기분 좀 내고 싶은데.”

“어차피 네가 밥 산다면서. 마실 거면 알아서 시키면 되지.”

“눈치 하고는. 같이 마시자는 얘기잖아요.”

“그럼 그렇게 말하던가.”

“어휴. 평소에는 여자한테 그렇게 잘 맞추는 사람이.”

“누가 들으면 내가 무슨……. 흠, 아니다.”

“……허. 뭔 생각 하는지 안 들어도 알겠네?”

“크흠. 뭔 소리야. 그런 거 아니야.”

“어휴, 됐거든요. 오빠 그거 알아요? 오빠 거짓말 할 때는 화연이 언니보다도 멍청해 보이는 거.”

“어떻게 그렇게 심한 소릴……. 지금 말한 거 나중에 다 이를 거다!”

“킥킥. 방금 비교 당했다고 어이없어 한 주제에. 그럼 나도 다 일러야지~.”

장난스럽게 혀를 살짝 내밀며 말하는 다슬.

이렇게 티격태격 하는 상황이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거 같아 기분이 묘해졌다.

“됐고, 일단 뭐라도 좀 시켜요. 배고파 죽겠네.”

“그래.”

그렇게 우리는 종업원을 불러 적당히 주문을 마쳤다.

식사 한 끼에 십만 원이 넘는 걸 보고 내심 경악했지만 그거 가지고 놀릴까 싶어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이렇게 비싼 밥을 얻어먹어도 괜찮은가 모르겠네.

“저 안 만나는 동안 뭐 하고 지냈어요?”

“이야기하자면 좀 길어.”

“뭐, 오빠야 항상 쓸데없는 일로 바쁘게 사는 사람이니까요. 바쁘기야 바빴겠죠.”

“오랜만에 만났다고 말에 가시가 너무 많은 거 아니냐……?”

“그보다 저는요? 저는 안 보고 싶었어요?”

평소답지 않게 떠보는 듯한 말투의 다슬.

나는 그 말에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레 답했다.

“당연히 보고 싶었지.”

“거짓말. 연락 한 번 안 했으면서.”

“네가 한동안 연락하지 말라며.”

“그렇다고 진짜 한 번을 안 할 줄은 몰랐거든요? 매정하기는.”

그러나 그 짧은 긴장감도 아주 찰나일 뿐.

곧바로 다슬은 이전과 다를 바 없는 명랑한 말투로 내게 이런 저런 잡담을 건넸다.

“하긴, 바쁘긴 엄청 바빴을 테니까 뭐, 이해해요.”

“내가 꼭 바빴다는 거 알고 있다는 말투네? 어떻게 지냈는지는 어떻게 알고?”

“꼭 오빠한테 들어서만 알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단톡에서 화정이가 그렇게 얘기를 하던데.”

“무슨 얘기?”

“소속사에서 한 건 제대로 터뜨렸다고요.”

“아……. 알고 있었구나.”

설마 벌써 다슬이 귀에도 소식이 들어간 건가.

“후후. 아무튼 잘 풀려서 다행이에요.”

살짝 놀라는 날 보며 다슬이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화정이 걔 회사 대표도 맡았다던데. 그럼 오빠도 밑에서 승승장구할 일만 남았나?”

“어차피 임시 대표인데 뭘. 그리고 나도 그냥 알바인데 내가 승승장구할 게 있나.”

“그거야 또 모르죠. 그리고 화정이 걔도…….”

그러더니 다시금 내 눈치를 살피는 다슬.

이번에는 무슨 말을 할까 기다렸지만 다슬은 두리뭉실하게 넘어갈 뿐이었다.

“아니에요.”

평소 솔직하고 직설적인 다슬은 어디로 간 것일까.

적어도 이렇게 말을 하다 마는 건 내가 아는 평소 다슬의 모습은 아니었다.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그런 다슬의 태도를 돕기라도 하는 것 마냥 때마침 주문했던 음식이 나왔다.

직원이 음식을 세팅하는 사이 다슬이 어색하게 웃었다.

“일단 밥부터 먹을까요?”

“……그래.”

이쯤 되면 조금이라도 눈치가 있는 사람은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슬이 무슨 얘기를 하러 온 것인지.

그리고, 그 말을 어떤 식으로 꺼내야 할지 몰라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

“…….”

그렇게 우리는 묘한 분위기 속에서 식기를 들었다.

달그락, 달그락.

그저 식기가 가볍게 부딪히는 소리만이 이따금 이어질 뿐.

나와 다슬은 앞서 분위기와는 상반된 상황에서 묵묵히 음식만 먹었다.

어마어마한 가격의 식사인데도 맛이 느껴지지 않는 건…….

나도 이후의 일들이 예상이 되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렇게 말없이 밥만 먹을 수도 없는 노릇.

“이제 슬슬 진지한 얘기도 하긴 해야겠죠? 아아, 하기 싫은데에.”

결국 먼저 말문을 연 것은 다슬 쪽이었다.

외면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말을 꺼내는 다슬의 용기를 알기에 쉽사리 그럴 수도 없었다.

결국 나는 말없이 다슬을 바라보았다.

“현수 오빠.”

살짝 처진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는 다슬.

쓴웃음을 지은 입가와 반대로, 마주보는 그녀의 눈빛은 식당을 비추는 할로겐 등 마냥 다소 처연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오빠는……. 지금도 저 좋아해요?”

“당연히 좋아해.”

“그렇구나.”

망설임 없는 답변에 다슬의 쓴웃음이 한층 더 짙어졌다.

“오빠는 앞으로도 그렇게 지낼 생각이에요?”

“그건……. 무슨 뜻이야?

“여자관계 말이에요. 오는 사람 안 내치고 가는 사람 안 붙잡는 주의인가 뭔가. 그건 아직도 여전히 유효해요?”

이건만큼은 얼굴 두꺼운 나라 해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물음.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답했다.

“말했잖아. 이성 관계에 관해서라면 아마 앞으로도 크게 달라지진 않을 거라고. 하지만 다슬이 너나 화연이가 싫어하는 한 여자관계를 늘릴 일은 없을 거야. 그건 확실하게 말할 수 있어.”

“푸훗.”

내 말에 다슬이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다시 봐도 참 애매한 양아치란 말이죠, 현수 오빠는.”

“신랄하네.”

“저 정도니까 이 정도로 끝내는 줄 알아요.”

“그래. 나도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정말요?”

“정말이야.”

재차 묻는 질문에 바라보는 눈빛을 피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러자 다슬의 눈빛이 한순간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도 찰나에 불과했다.

“있잖아요.”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기라도 하는 것 마냥, 다슬이 혼잣말 하듯 말을 이어갔다.

“사실 오빠랑 떨어져서 지내면서 저도 여러 가지로 생각해 봤어요.”

“응.”

“과연 나는 오빠와 이런 관계인 것에 만족하는 걸까, 다른 여자랑 잤다는 소리만 들어도 짜증이 치솟는데 과연 이 관계를 계속할 수 있을까, 뭐 그런 생각…….”

“…….”

“오빠를 좋아하지만, 아니, 오히려 좋아하니까 이런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더라고요. 물론 현수 오빠는 앞으로 다른 여자를 만들지 않는다고 말해 줬지만 글쎄요, 저는……. 그걸로 만족할 거 같지가 않아요. 오빠를 만나면 만날수록 더욱 독차지하고 싶어지는걸요. 좋아하는 사람은 오로지 나만이 차지하고 싶다는 거. 자연스러운 거잖아요?”

“……그렇지.”

“그렇게 미안한 표정 안 지어도 돼요. 합의했던 거잖아요?”

“…….”

“후후, 처음엔 그렇게 싸우면서 결국 오빠 말대로 한다고 했었는데.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간사하다니까요.”

겨우 웃음을 지으며 말을 하는 다슬.

하지만 그것이 억지웃음이라는 건 내가 아닌 다른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이런 말을 한다는 건, 아마도 이미 마음을 결정했다는 거겠지.

그런 그녀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저 묵묵히 그녀의 하소연을 가만히 들어줄 뿐.

“처음엔 그냥 이 남자 한 번 어떻게 해 보고 싶다, 대충 그런 생각만 했는데……. 어차피 섹파로 지내기로 한 거, 다른 여자는 최대한 신경 끌 생각이었는데……. 사람 마음이 그렇게 딱 잘라서 정해지지가 않네요.”

“응.”

“그거 알아요, 오빠? 저 지금까지 만나본 남자들 중에 오빠를 제일 좋아했던 거 같아요. 아니, 좋아했던 게 아니라……. 지금도 그래요.”

거기까지 말한 뒤 눈을 감고는 한 번 심호흡을 하는 다슬.

“후우우.”

곧이어 슬며시 눈을 뜬 다슬이 지긋이 나를 바라보았다.

“한 번 했던 질문이고 답도 받았지만, 한 번 더 물어볼게요.”

아마도 이게 마지막 질문.

하지만 이번 질문만큼은 나도 어찌할 수 없으리라는 불길하고도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이 상황이 바뀌는 건 없을 테지.

“오빠는 다른 여자들이랑 헤어지고 저 한 명만 사랑해줄 수 있어요?”

다슬의 말에 나는 한참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껏 망설임 없이 대답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아니.”

하지만 결국 정해진 수순대로, 나는 그녀가 바라지 않는 답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 어쩌면 원하던 답변이던 걸지도.

“네.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어요.”

내 대답에 다슬도 마지막 미련을 버린 듯 후련해진 표정이 되었다.

“그럼 제 대답도 이제 오빠한테 들려줘야겠네요.”

“다슬아…….”

“현수 오빠.”

대답하지 않기를 바라는 내 기대와는 별개로, 다슬은 깔끔하게 선언했다.

“저희 관계는 여기에서 끝내도록 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