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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3화 〉 16. 이미 끝난 싸움(5) (143/152)

〈 143화 〉 16. 이미 끝난 싸움(5)

* * *

화정이와 수민 대표님이 회사로 들어가 있는 그 시각.

나는 회사 입구 앞에서 초조한 심정으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후우…….”

내뱉는 숨결에서 하얀 입김이 풀풀 새어나오는 게 보인다.

두 사람이 회사로 들어간 지 벌써 3시간 째.

정오가 지난 2월 말의 날씨는 두껍게 입은 차림과는 상관없이 체온을 천천히 앗아가고 있었다.

그 덕분에 이미 손발은 꽁꽁 언 상태.

하지만 나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대표님이 빠르게 대처해 줘서 다행이야.’

두 사람을 기다리며 나는 이틀 전 일을 떠올렸다.

[언젠가 터질 줄은 알았습니다만……. 결국 그렇게 됐군요.]

당시 상황을 설명하자 대표님은 별다른 말도 없이 그렇게 대꾸했다.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기라도 한 듯이.

당황해서 이런저런 부가설명을 곁들여야 했던 화정과 달리, 대표님은 본사 대표의 실각이라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음에도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역시 별로 안 놀랐었지.’

그리고 나도 이러한 수민 대표님의 반응을 어느 정도 예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수민 대표님의 존재 자체가 역전세계로 오기 전 작가가 보내준 설정집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원작에서는 자회사 정도로만 나오고 거의 등장은 안 했었지만……. 의외로 꽤 얽혀있는 부분들이 있었으니까.’

원작의 주인공 정기발은 오로지 자신의 정력과 자신감 하나만으로 본사를 뒤집어 놓았다.

거기에는 자회사에 대한 설정이 등장할 틈 자체가 없었고, 그 덕에 나도 처음에는 피버샵이 원작과는 큰 상관이 없는 회사일 거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는 원작의 주인공인 정기발이 존재하지 않고, 그 대신 내가 있다.

‘그 덕분에 나도 이런 쪽으로 얽히게 만들기가 수월했고.’

그것을 깨달은 나는 피버 에이전트에 들어갈 초창기부터 움직임을 계획했다.

원작에는 등장할 필요가 없었던 최수민 대표님의 설정을 이용할 수 있는 측면이 있으리라 여긴 것이다.

설정 상 최수민 대표님은 본사에서 아이돌 데뷔 직전까지 활동한 경력도 있고, 아이돌을 그만둔 이후로도 한동안 본사에서 각종 행정 절차를 맡았다.

이후 회사 내 알력싸움으로 인해 본사를 떠나 자회사인 피버샵을 차리게 되었고.

본사를 떠난 이유 중에는 아마도 이제는 범죄자가 된 이전 본사 대표, 김옥희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원작에서는 설정 상으로만 나오고 자연스레 잊혀질 피버샵이었지만…….

‘내가 오면서 상황이 달라졌지.’

이번에 내가 알바로 들어가게 되면서 피버샵에서 올린 수익은 이전의 수 배에 달한다.

이러한 폭풍 성장 덕분에, 한직으로 밀려났던 전 직원이었던 최수민 대표님은 나름 본사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이 생기게 되었다.

더불어 과거의 경력과 내가 만든 나비효과의 결과로, 이제는 이사진들 사이에서 임시로나마 대표직을 주장할 수 있는 자리에까지 선 것이다.

‘비서장도 원작에서는 본 적이 없던 인물이고.’

그리고 김옥희의 비서장이자 최측근인 이우진.

그는 원작은커녕 설정에서조차 등장한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원작에서야 정기발이 이우진을 대신해 뒷돈을 다 빨아 먹고 김옥희 및 이사진 몇 명을 자신의 성욕 하나만으로 좌지우지했으니까.

그렇기에 정기발의 하위호환인 이우진이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이겠지.

아무튼 이걸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현재 변호사 소진과 내 공작으로 인해, 본사 대표인 김옥희와 그 비서의 비리는 만천하에 드러나 실각하게 된 상황.

여기에 대표직을 수행할 수 있는 이, 바로 수민에게 살짝 등을 떠밀어 준다면?

‘그럼 여기서 게임 셋이다 이거지.’

물론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니다.

오늘 이사진들 사이에서 두 사람이 벌여준 소란은 설정을 이용해 내가 끼워맞추기 식으로 진행한 측면이 컸다.

하물며 김옥희의 실각 소식을 너무 늦게 접하고 움직인 면도 있었고.

그저 지금은…….

두 사람이 무사히 일을 해결해주기를 바랄 따름이다.

뚜루루루─!

그 순간 울리는 전화벨.

서둘러 확인한 핸드폰 액정의 착신자 표시에는 ‘최수민 대표’라는 문자가 띄워져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나는 불안함 반 기대감 반으로 전화를 받았다.

“후우……. 네. 여보세요. 대표님?”

“…….”

“어, 어땠습니까? 결과는요?”

“현수 씨.”

평소와 같은, 목소리 고저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무덤덤한 말투.

전화기 너머로는 미묘한 표정변화조차 알 수 없는지라 나로서는 더욱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나는 대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다 끝났습니다.”

“네?”

“이걸로 피버 에이전트도 끝이군요.”

대표님의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말은……. 설마?”

“죄송합니다.”

설마 내 계획대로 되지 않은 건가?

이럴 수가.

“미리 사과를 드려야겠군요.”

허나 그것도 잠시.

“이제 패션몰 운영은 진아가 해야 될 테니까요.”

장난기 어린 대표님의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맥이 탁 풀려버리고 말았다.

“……네?”

“밑에서 일하면 고생 좀 하실 겁니다. 한동안 제가 거기 신경 쓸 틈은 없을 듯하니.”

“어, 그, 그 말은……?”

“네. 오늘부로 제가 임시로 본사의 대표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아, 아아…….”

아니, 누군 잘못된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데!

이런 걸로 사람을 놀리다니!

“후훗.”

안도의 한숨을 쉬는 사이 전화기 너머 대표님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역시 현수 씨는 놀리는 맛이 있는 사람입니다.”

“간 떨어지는 줄 알았잖습니까……. 평소에는 농담도 잘 안 하시는 분이.”

“이상하게 현수 씨한테는 계속 장난을 걸고 싶어지는군요.”

“하, 진짜……. 저 진짜 잘못됐나 싶어서 조마조마했다고요.”

“후후, 그렇습니까?”

“잠깐! 나도 바꿔줘요!”

그 순간 들리는 또 다른 익숙한 목소리.

아마도 화정이겠지.

“오빠!”

전화기 너머로 느껴지는 약간의 소란 뒤, 곧이어 화정이 전화를 받았다.

설마 대표님 핸드폰을 강제로 뺏어간 건 아니겠지.

“어, 화정아.”

“뭐야, 정말! 나도 고생했는데! 내 안부는 물어보지도 않고!”

“화정이 너야 똑 부러졌으니까 잘 할 거라 생각한 거지.”

“쳇, 항상 말은 그렇게 한다니까. 나 지금 너무 혼란스럽다고.”

“곧 설명해 줄게.”

“당연하지!”

빽 소리친 화정이 흥, 하고 콧방귀를 끼더니 말을 이었다.

“아무튼 추울 텐데 회사로 올라와. 이사진 분들도 다 나갔어. 지금 회사에 나랑 임시 대표…님? 아무튼 우리 둘 밖에 없으니까.”

“그래, 알았어.”

보아하니 상황도 어느 정도 나쁘지 않게 흘러간 거 같고.

그럼 이제 정리할 것만 남았군.

화정과의 통화를 끊은 나는 곧바로 회사로 향했다.

***

텅 빈 회사 입구를 지나 회의실로 들어간 나는 두 사람의 집중포화를 맞아야 했다.

“뭐야, 정말! 빨리 설명해 줘! 어떻게 된 건지!”

“…….”

황당한 표정으로 소리치는 화정과 말없이 나를 응시하는 수민.

물론 이런 두 사람의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흥분해서 날뛰는 화정을 진정시킨 나는 곧바로 앞서 계획했던 부분에 대해 설명했다.

“뭐, 어떻게 된 거냐면 말이지…….”

이후로 나는 소진과 앞서 계획했던 부분에 대해 두 사람에게 고백했다.

당시 화정과 있었던 스캔들 건 이후로 김옥희 대표의 안하무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것.

이후 회사 내부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지켜보며 대표를 실각시키고자 호시탐탐 틈을 노렸다는 것.

실각 이후로 수민 대표에게 부탁해서 회사를 안정화시킬 계획까지 등등.

물론 내가 설정상 알고 있는 부분은 적당히 소진의 이름을 팔아서 얼버무렸다.

다행히 두 사람 다 그런 부분까지 파고들 여유는 없는 모양이었다.

“오빠는 참……. 간도 크네.”

내 설명을 모두 들은 화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난 아직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 오빠 설명을 들어도 여전히 혼란스럽다고.”

“그렇겠지. 이해해.”

“이해는 개뿔!”

나는 다시금 노발대발하는 화정에게 애써 시선을 돌렸다.

솔직히 이 이상 더 잘 설명할 자신이 없었으니까.

“대표님.”

나는 이제껏 한 마디 말없이 경청하던 대표님에게 시선을 보냈다.

“먼저 대표님한테 여쭙고 싶은 게 있는데요.”

“말씀하시죠.”

“대표님은 본사 대표로 일하는 것에 대한 욕심은 없으신가요?”

“……글쎄요.”

내 말에 대표님이 잠시 고민에 빠졌다.

“물론 주주총회에서 제대로 된 대표를 뽑을 때까지긴 합니다만……. 아직은 확신이 안 서는군요.”

“흐음.”

“물론 저보다 더 잘 할 수 있는 이가 있다면 넘겨줄 생각입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나오지 않는다면요?”

“그렇다면 제가 계속하는 수밖에 없겠죠.”

그 말에 숨겨진 속내를 읽어낸 나는 속으로 작게 웃었다.

‘역시 하고 싶은 마음은 있다 이거네.’

내가 겪어본 바로 수민은 나름대로 야망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정치싸움에 밀려 아무것도 없는 패션몰을 굳이 자회사 형태로 차리지는 않았을 테니까.

애초에 정말 회사에 미련이 없었더라면 아예 연을 끊고 새로 시작하는 게 나았을 수도 있다.

수민은 그 정도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좋아요.”

나름 확신에 가까운 추측을 한 내가 자신있게 말했다.

“그러면 대표님도 계속 본사에서 일할 용의는 있다고 받아들이면 되는 거죠?”

“그야 그렇습니다만……. 그게 제가 할 수 있다고 하는 게 아니니까요.”

“그건 두고 보면 알겠죠.”

그 말에 대표님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이 녀석이 또 무슨 일을 꾸미는 걸까, 같은 얼굴이다.

“아아, 진짜아! 머리 터질 거 같애!”

안절부절 못하며 다리를 떨던 화정이 결국 다시금 소리를 질렀다.

그래, 왜 이렇게 조용하나 했다.

“됐으니까 일단 밥이나 먹자! 아까 너무 긴장해서 당 떨어지는 기분이야.”

“뭔 늙은이 같은 소리를…….”

“대표님도 같이 먹어요! 저희 할 말도 있지 않아요?”

“……그렇군요.”

갑자기 자신이 표적이 되자 당황한 표정을 짓던 것도 잠시.

곧이어 대표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어느 정도 정리는 된 것 같으니 그렇게 하시죠. 임시지만 저도 본사에서 대표로 일하게 된 이상 한동안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것 같군요. 오늘이 아니면 이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을 겁니다.”

“뭐, 저한테 물어볼 거 없으세요?”

“글쎄요. 현수 씨 반응을 보아하니 딱히 말해주실 것 같지는 않군요.”

“…….”

“자! 그럼 밥 먹으러 갑시다, 밥!”

못 참겠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화정이 곧바로 내 팔뚝을 확 낚아챘다.

얘 아까부터 텐션이 이상하리만치 높은데?

긴장이 갑자기 확 풀려서 이러나?

“…….”

이상하리만치 안하무인이 되어 내게 달라붙는 윤화정.

그런 우리 둘을 가자미 눈으로 쳐다보며 일어나는 최수민 대표님.

그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결국 두 사람과 함께 회사 내 식당으로 향했다.

‘분명 잘 풀린 거 같긴 한데…….’

어째 이후의 일이 순탄치 않다는 예감이 드는 건 어째서일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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